가을이 깊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해지면 나이를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을이라는 특정 계절의 질감에 대해, 변화에 대해 시나브로 생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이 해가 바뀔수록 다르다. 그런데 요며칠 정신이 어디로 밀려 났었나보다. 지난 주말께 집안 대소사로 인해 바빴던 탓도 있었겠지만 건망증이 번졌다. 나는 아주 사소한 정경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곤 했다. 심지어 아침 출근길에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부딪히는 낯선이의 실루엣까지 저장해 놓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건만 지금은 방금 떠올리고 뱉은 생각조차 깜깜할 지경이다.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영향이겠지만 이번 일은 지독했다. 열감기를 앓은 후의 몽롱한 상태가 줄곧 이어진 느낌이랄까. 어쨋든 나는 휴대폰을 잃어 버렸다. 최신의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폰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손전화가 한순간 증발하는 순간이었다. 며칠을 뒤지고 또 뒤졌다. 행적을 뒤 쫓아 과거로 소멸한 시간을 추적했다. 추적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고 그때마다 건망증은 기승을 부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건망증의 시간이 보태어지는구나! 가을과 건망증이 어울릴까? 계절의 변화에 심리 상태가 기억의 전조를 잃고 방황하는 역학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학계에 보고된 내용을 뒤적여 본 적은 없건만 무관하지 않은 쪽으로 마음은 이내 기운다.
괜시리 건망증으로 인해 짜증은 사방으로 튀었다. 옆지기는 채근하듯 말을 썪어 오지만 눈치를 보기에 급하다. 덩달아 장모님까지 온 집안을 뒤지고 또 뒤진다. 감정의 변화는 기필코 생채기하듯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냉랭하거나 혹은 무겁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다. 도망칠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미 건망증이 유발한 소득없는 흔적찾기를 시작하였으므로 이제와서 무효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치를 못한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그것은 자존심과 밀접하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휴대폰처럼 나는 상실의 위기에 몰린 자존심을 거머쥐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위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눙치듯 흔적찾기를 종용하고 재촉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마치 머피의 법칙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망하게 끝난다. 그날 나는 가을 양복을 갈아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넣은 뒤 나서려는 것을 옆지기의 조언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재차 옷장으로 직행했던 모양이다. 분명 옷장 속, 옷 속까지 낱낱이 파헤쳤건만 당연 그 곳에는 없을 거라는 만용이 부린 단정은 건망증의 덫에 걸린 결과다.
한차례의 소동 끝에 나의 부서진 자존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헛헛한 기운만이 안겨왔다. 그것도 나이를 탓해가며 객적은 실소만을 날리며. 그렇게 시작된 해프닝은 득실을 논할수는 없지만 요즘 시류의 대세인 스마트폰으로 갈아 탈까하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애꿎은 옆지기만 숨 막히게 하였으니 나름의 보상기제가 발동하여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다. 아직 젊다 생각한 나이에 밀려난 성큼 다가 선 세월의 위력에 실은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건망증으로 시작한 해프닝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비정형한 연결고리에 나 또한 황망하지만 탐이 난다. 성능과 휴대성에 비해 고가의 비용과 유지비용이 적지않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시간 접근성과 편의성을 따진다면 만족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자기최면식 합리화로 치닫는다. 이미 마음의 8할을 빼앗겼다. 물론 아직까지 목하 고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