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김탁환 작가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원고지 30페이지 분량의 글을 반드시 쓴다고 한다. 기계적인 습관에 자신을 얽매여 놓고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긴장감은 위태롭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처럼 자신과의 약속은 유혹에 무방비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님에도 쓰는 것에 집착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 어렵다. 빛보다 빠른 뭉쳐지지 않은 생각의 알갱이를 재빨리 낚아 채어 조합하고 끄적인다는 것은 난해하다. 물론 가십거리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없이 펼쳐 놓는 일이야 어렵겠냐만은 그것도 때로는 꽉 막혀 정체된 도로마냥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자꾸 지우고 쓰다보면 민망함도 잊고 계속 써 댄다는 사실이다. 생업이 따로 있는 관계로 시간을 내어 쓴다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식사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식사를 같이 해결하는 동료들과 지겹도록 닳아 반들반들해진 레파토리를 요깃거리 삼아 한 나절이 흘렀음에 공유하는 위안의 기쁨보다 이렇게 글을 남길 때, 평정을 찾는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써 대는 글, 거칠고 보잘것 없다. 다듬어지지 못한 원재료를 반가공한 상태, 상품으로서의 가치없는 글이 태반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스스로 삶의 위안을 얻는다. 행복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행복할까와 행복하겠지를 오고가지만 쓴다는 배출의 행위, 들어 오고 나가는 행위가 명징한 의미다.
폴 오스터는 미친듯이 쓰라고 했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p.48)
조지 오웰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아직 읽지 못한 신간이므로 개략적인 내용만 언급하기로 하고 알라딘에 소개된 책소개로 대신한다. 오웰은 과연 왜 썼을까? 그는 표제작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고 명확한 작가적 입장을 밝힌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고 고백한다.(책소개중에서)
두 명의 작가의 공통점은 목적의식이 반듯하다는 사실이다. 쓰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길이 나뉘고 없어지기를 온 몸으로 체득했고 뒹굴었다는 말이다. 결국 글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소망의 바람이다. 글에 담긴 생각이나 감성은 글을 쓰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장대한 생명력을 가진다. 사장되고 묻히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쓰는 행위, 즉 기록은 전염이 강하다. 쓰는 자의 쾌락은 공감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요즘은 말보다 글이 더 필요한 시절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말보다 글이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사적인 문자메세지에서부터 기획안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글쓰기에 매진하는지 모른다. 글이 반드시 메세지를 담거나 통찰을 필요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글은 매우 다양하게 흘러 넘친다.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홍사종의 이 책에도 현재의 글쓰기가 지니는 역량과 이야기의 힘을 흥미롭게 다룬다. 트위터를 넘나드는 실시간 글쓰기는 다채로운 문화를 확산하는 전령의 현대적 출발선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중심에 글쓰기, 즉 이야기가 있다는 감성코드에 글쓰기의 본령과 마주하게 된다.
생각을 갈무리하고 감각을 익히고 정경의 찰나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수단은 쓰기 외에는 달리 없다. 말하는 것은 휘발성이 강해 소멸되기 쉬우나 글은 롱런한다. 나는 부러 고통을 찾는 메조키스트인지 모른다. 쓰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p.s) 오늘자 AP통신에 의하면 고은 선생님이 유력한 노벨상 후보라고 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금번에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