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김탁환 작가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원고지 30페이지 분량의 글을 반드시 쓴다고 한다. 기계적인 습관에 자신을 얽매여 놓고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긴장감은 위태롭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처럼 자신과의 약속은 유혹에 무방비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님에도 쓰는 것에 집착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 어렵다. 빛보다 빠른 뭉쳐지지 않은 생각의 알갱이를 재빨리 낚아 채어 조합하고 끄적인다는 것은 난해하다. 물론 가십거리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없이 펼쳐 놓는 일이야 어렵겠냐만은 그것도 때로는 꽉 막혀 정체된 도로마냥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자꾸 지우고 쓰다보면 민망함도 잊고 계속 써 댄다는 사실이다. 생업이 따로 있는 관계로 시간을 내어 쓴다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식사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식사를 같이 해결하는 동료들과 지겹도록 닳아 반들반들해진 레파토리를 요깃거리 삼아 한 나절이 흘렀음에 공유하는 위안의 기쁨보다 이렇게 글을 남길 때, 평정을 찾는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써 대는 글, 거칠고 보잘것 없다. 다듬어지지 못한 원재료를 반가공한 상태, 상품으로서의 가치없는 글이 태반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스스로 삶의 위안을 얻는다. 행복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행복할까와 행복하겠지를 오고가지만 쓴다는 배출의 행위, 들어 오고 나가는 행위가 명징한 의미다.  

 

 폴 오스터는 미친듯이 쓰라고 했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p.48) 
 

조지 오웰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아직 읽지 못한 신간이므로 개략적인 내용만 언급하기로 하고 알라딘에 소개된 책소개로 대신한다. 오웰은 과연 왜 썼을까? 그는 표제작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고 명확한 작가적 입장을 밝힌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고 고백한다.(책소개중에서) 

두 명의 작가의 공통점은 목적의식이 반듯하다는 사실이다. 쓰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길이 나뉘고 없어지기를 온 몸으로 체득했고 뒹굴었다는 말이다. 결국 글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소망의 바람이다. 글에 담긴 생각이나 감성은 글을 쓰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장대한 생명력을 가진다. 사장되고 묻히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쓰는 행위, 즉 기록은 전염이 강하다. 쓰는 자의 쾌락은 공감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요즘은 말보다 글이 더 필요한 시절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말보다 글이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사적인 문자메세지에서부터 기획안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글쓰기에 매진하는지 모른다. 글이 반드시 메세지를 담거나 통찰을 필요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글은 매우 다양하게 흘러 넘친다.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홍사종의 이 책에도 현재의 글쓰기가 지니는 역량과 이야기의 힘을 흥미롭게 다룬다. 트위터를 넘나드는 실시간 글쓰기는 다채로운 문화를 확산하는 전령의 현대적 출발선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중심에 글쓰기, 즉 이야기가 있다는 감성코드에 글쓰기의 본령과 마주하게 된다. 
 

생각을 갈무리하고 감각을 익히고 정경의 찰나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수단은 쓰기 외에는 달리 없다. 말하는 것은 휘발성이 강해 소멸되기 쉬우나 글은 롱런한다. 나는 부러 고통을 찾는 메조키스트인지 모른다. 쓰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p.s) 오늘자 AP통신에 의하면 고은 선생님이 유력한 노벨상 후보라고 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금번에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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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시즌만 되면 두문불출 칩거하시는 고은님도 못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7 17:01   좋아요 0 | URL
고은님이 되실거예요...^^

마녀고양이 2010-10-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 님의 글 매력에 요즘 흠뻑 빠진 마녀고양이입니다. ㅎㅎ

저두 알라딘 서재하면서, 글쓰기를 첨 해봤는데.... 참 좋은 일인거 같아요. 어차피 저는 글 쓰는 감성이나 직관도 좀 모자르고, 표현력이나 어휘도 좀 약하고, 되씹는 느낌도 모자르지만... 글을 주업으로 하는 것도 아닌만큼 그 장점에 감사하는 중 입니다. 글쓰기는 머랄까, 저를 차분하게 만드는거 같아요. 빠르게 달리는 것을 한번씩 멈추고 숨을 쉬게 하고 여유를 찾게 만든다고 할까.

부가적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는 점과, 경청할 줄 모르는 제게 경청의 여유를 가르쳐주는 점도 좋아요. ^^

앞으로도 서재 종종 보러와서, 귀찮게 굴겠습니다. 아하하.

穀雨(곡우) 2010-10-08 11:19   좋아요 0 | URL
숨고르기의 여유, 좋은 말씀이네요...^^

stella.K 2010-10-0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습작으로 소설을 쓰는데 꼭 마지막 3분의 1을 남겨놓고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지요.
저 폴 오스터 말대로 그냥 아무데서나부터 미친 듯이 쓰면 될까요?ㅜ

穀雨(곡우) 2010-10-08 11:2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의 습작소설이 궁금한데요. 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많지만
플롯을 잡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 재주도 없거니와 꿈같은 일입니다.
그래도 미친 듯이 쓰다보면 실타레 풀리듯 이어가지 않을까요?

감은빛 2010-10-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글을 쓰는 걸까요?
뭔가를 끄적이는 습관은 어릴때부터 있었는데,
그 시작은 아무래도 만화나 동화따위를 읽은 뒤, 따라하기였던 것 같아요.
머리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놓는 것.

참 이상한 게, 평소에는 글을 쓸 짬이 안나서 쓰고 싶은 주제가 있어도 못 쓰는데,
막상 좀 여유가 생겨서 써보려고 하면 이게 또 갑자기 글이 안써진단 말이죠.

그나저나 매일 원고지 30페이지면 참 대단하네요.
어느 글쓰기 모임에선 아침 글쓰기를 과제로 내주더군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짬을 내서 글을 쓰는 겁니다.
출근시간에 쫓기는 바쁜 시간이니까 분량에 상관없이 무얼 끄적이던,
일단 끄적이고 보라는 얘길 하더라구요.
저도 한번 해볼까 생각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8 17:12   좋아요 0 | URL
쓴다는 행위의 계기가 전 피동적이고 강제적인 영향력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도교육과 문화적 토양이 우열을 가리는 잣대로만 인식하는 세대를
통과하여서인지 쓴다는 주체의 자의적 의사가 탈락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 서열화와는 무관한 글쓰기가 되어야 진정한 자신의
생각을 담는 글이 됨을 알지만 쉽사리 그 포위망을 벗어 던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해서 매일 조금씩 생각의 초점이 멈추는 곳에서 글을 쓰려 하는 이유 또한
목적을 추동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일환이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그러다보면 글이 훨훨....^^
 

의사표시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해서 확정한 관념의 표시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택에 대해 혼동하는 경우가 잦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착오에 기인하여 동기의 본질까지 오인하는 혼동으로 이어지며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러한 착오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화된 부류의 대상으로 한정하여 문제의 소지를 살펴보면 착오라기보다는 미필적 고의에 가까우며 사정은 더 심각해진다. 나는 이렇게 특정화되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목적의식이 상호간에 구속과 책임의 명분이 되므로 경우에 따라 반대급부가 명확하게 공존하는 실리의 관계다. 그러다보니 법률적 해석에 의한 실체적 관계를 감정적 판단보다 훨씬 더 신뢰하게 된다.

 

법률은 사회통념상의 개념적 범주에 속한다. 흔히 관습으로 익히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규정된 법률의 테두리는 최소한의 장치에 머문다. 하지만 법에 대한 인식과 구속력은 상당부분 태생의 이념을 무력화하고 절반으로 쪼개어 버린다. 주먹보다 법이 가깝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자력구제의 해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에 대한 인식의 가벼움 내지는 무지함에 어의상실이 되곤 한다.

 

법에는 정의와 자유, 책임, 공정, 평등, 행복, 권리의 다개념적인 가치들이 결합되어 기본적 인권을 내포하고 보장한다. 이는 헌법이 추구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보호하는 근간이다. 여기에 파생되는 법이념이나 철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와 사상이 어우러져 생성된 것임은 역사가 명확하게 증명해 준다. 이와 더불어 사적자치를 기반으로 거래 상대방과의 이익을 조율하고 충돌을 예방해주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이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경제사회에서 책임과 도의의 충돌문제는 법률이 보장하는 잣대의 양극단에 선 내면적 가치문제이다. 대개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갚는 것은 채무에 따른 책임의 문제다. 책임은 경제적 자유를 누린 대가에 상응하는 반대급부이기도 하다. 간단명료한 문제이지만 실제 경제사회에서는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화려한 광고선전에 감춰진 양면의 칼날은 위험하다. 책임에 대한 본질을 희석시키고 타자에게 전가하며 사회적 방임의 현장을 부추긴다. 결국 나약함에 빠진 개인은 헤어날 수 없는 부채의 늪에서 허우적댄다는 사실이다.

 

번만큼 쓰고 선택 가능한 범위내에서 운용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환경에만 노출될 수는 없다.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적 본능, 감성적인 판단, 우연한 기회에 발생하는 위험 등 산재된 문제는 취약한 위험에 놓인다. 그러므로 위험을 통제하는 것은 의지이며, 의지는 결국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실 책임의 문제는 사회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개인의 도의적 책임을 묻기 이전에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공정한 토양이 우선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극히 가변적인 영향력의 범주에 있다고 본다. 영향을 받는 구체적인 집단의 가치는 자극을 주는 매개체의 힘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가치이념적 개념을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인식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과 맥락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내가 장황하게 법의 이념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바로 책임과 도의의 문제다. 나는 책임의 문제가 불거지는 핵심은 통제가능한가라는 의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 통제는 욕망이나 소유의 개념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통제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적 영향은 사회적 책임의 범주로 편입된다. 사회적 책임에 속하는 예는 실정법상 통합도산법에 따른 회생, 워크아웃정도가 될 것 같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 책임의 분산 또는 감면은 개인이나 기업을 회생시키고 사회적 문제를 보다 긍정적으로 유도하며 발전가능하게 치유하는 공적부조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의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도의적 책임은 이행하기로 약속한 응당의 행위를 불가피하든 의도적이든 지연시킨 개별사정을 통칭한다. 나는 앞서의 책임의 문제보다 도의적 책임(모럴 해저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도의적 책임에 대한 판단항목을 삽입시키고 고려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소리, 개인의 가치영역이다. 외양과 내양이 다른 표리부동한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부정적으로 물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연대화된 부정의 동의 내지는 침묵, 이러한 문제는 며칠 전 노파와 어린 여학생의 지하철폭력 동영상이 적확하게 대변해주고 표현해 준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특정화된 사람- 돈을 갚지 않고도 당당한 사람 - 을 상대한다. 상대는 대개 거침없다. 지금의 사정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으며 단지 다중채무자로 만든 사회로 공격의 대상을 돌린다. 나는 듣고 또 듣는다. 그들의 그칠줄 모르는 그네들의 곯아 터진 사연부터 모든 것을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듣는다. 그들에게 나는 배설을 위한 도구인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무모한 당당함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까움이 앞선다. 물론 사회적 책임의 범주에 속하는 다수가 더 많다. 책임을 이행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은 다양하게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발목잡힘에서 어떤 식으로든 탈피하면 훨씬 사악해진다. 다시는 그 지긋지긋한 채무의 전철을 올라타지 말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음에도 이번에는 더 빠르고 위험천만한 급행열차를 탄다. 채무는 그렇게 퍼지고 추락한다.

어쩌면 굴레는 벗어날수록 빠져드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의적 책임은 곧 정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의는 공정한 룰이 보이지 않음에도 오롯이 작동하는 건강한 사회의 단면에 다르지 않다. 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정의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불온하고 비열한 사회의 망령에 사로잡히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에 우울해진다.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의 주어진 원죄처럼 말이다. 나아가 탐욕은 길들이지 못하는 치명적인 욕망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든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은 낭떨어지 위를 외줄타기하며 그 순간 입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꿀 한 방울과 같지 않을까? 달콤함에 담보된 욕망,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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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엉뚱하게
곡우님이 무슨 일을 하실까에 대해서 열심히 추측하는 중입니다.

금융권의 채무 불이행이나 변제를 위한 팀일까? 아니면 복지 기관의 상담사? 또는 검사? 변호사?
글 분위기로 볼 때 아마 경찰은 아닐거야........ 이런 생각들.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거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욕망을 너무 미화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탐미적인 영화, 광고, 문학, 미술...
남탓 하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거미줄에 허우적대는 내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전.

穀雨(곡우) 2010-10-07 11:00   좋아요 0 | URL
아...제 글이 좀 무거웠죠...^^
전 금융권에서 일합니다. 법무팀이라고는 하지만 기실 채권관리팀이 더 어울립니다.
제게 낯익은 풍경은 재판정에서 펼쳐지는 모습들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계형보다 쾌락형이 더 많은 현실입니다.
어젠 욱하게 하는 어떤 분 덕에 장황설을 뱉어 냈습니다.
다시 봐도 거칠기 짝이 없는 글입니다. 내릴까 심각하게 고민중....^^

마녀고양이 2010-10-07 11:39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었는데요.
아마 열받는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 많이 만나실거 같습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으실듯 합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맘에 걸리시면, 글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글 있습니다. ㅎㅎ

穀雨(곡우) 2010-10-07 12:08   좋아요 0 | URL
스트레스야 어디든 없을 수 있을까요...?
근데 더 황망한 건, 내부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겁니다.
소통이 막힌 상태, 꽉 조이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참
불편합니다.
 

햇살이 가깝다. 밀쳐 내기만 하던 온기가 이젠 정겹다. 몸이 가라앉아서일수도 있겠으나 가을 속 햇살은 까슬까슬한 맛이 난다. 하지만 치대고 부비다보면 금세 보들보들한 양모나 순면으로 짠 스웨터가 주는 밀도감과 촉감이 이내 차오른다. 몸이 으슬어슬할 때나 약간 피부의 숨결이 긴장을 머금을 때, 스웨터는 다정하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피부에 와 닿는 감촉, 질감을 사랑한다. 그것은 비단 스웨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작위를 탈피한 자연적인 사물이나 대상에 관심이 크다.

 

온종일 도시의 역겨움에 들쑤시고 헝클어진 채 돌아 온 저녁 무렵, 에너지를 고갈시킨 마음을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욕조에 라벤다향이 풍부한 입욕제로 풀고 담궈 흘려 버린 후, 밟는 마루의 감촉을 또한 사랑한다. 발 끝으로 퍼지는 맨들맨들한 감각의 전률은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감마저 일깨운다. 또한 무료하게 나른함이 창 사이로 부유하듯 퍼지는 휴일 오후,건조한 공기의 접촉이 좋다.

 

사소한 감촉, 때론 어떤 쾌락보다 더 자극적이고 행복함에 들뜬다. 지금처럼 기가 흐트러진 상태에는 어김없이 피부로 전이되는 자극의 향연에 더 예민해진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의 턱밑을 하릴없이 쓰다듬어 줄 때의 감각의 상호작용처럼 보다 긴밀하고 살갑게 바뀐다. 그래서 나는 잠시의 여운이나마 경계에서 퍼져 나가는 동심원을 향한 소멸의 애잔함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은 마음이 된다.  

 

이런 날은 어김없이 마음은 물 위를 걷는다. 잔잔하게 닦은 수면 위를 걷는 유쾌한 상상은 감각의 파라다이스로 이끈다. 그렇게 마음을 놓이고 나면 맑은 에너지가 솟아 나는 기분이 든다. 직감처럼 감각의 모든 말초신경을 정화하고 닦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내게 사소한 감촉은 행복을 잇는 연결고리다.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불쾌한 감촉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유리막과 같다.

 

행복이 거창하다면 좋으련만 현재 나는 지금의 감촉으로부터의 행복이 좋다. 감촉은 사색을 낳고 자판을 톡톡 튀어 다니며 뻗어 나가는 생각의 우듬지를 거머쥐는 해갈의 기쁨 또한 상쾌하다. 이럴 때 쓰는 글은 대개 긍정적인 생각을 유추한다. 매개된 대상이 행복을 연결시키는 단초가 되었기에 인과율상 당연한지 모른다. 별 뜻 없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의 단면이자 편린의 조각이지만 사소함은 위대함을 품는 모태가 된다.

 

청아한 가을 날, 무얼 먹을까 잠시 고민하고 재탕에 삼탕을 더 해 이미 진득해 진 식용유로 튀겨 낸 돈까스를 먹고 인위적 포만감을 느낀 후 살갗에 닿는 따사로운 햇살과 몸집을 불린 바람의 감촉에 나는 아득한 사색에 잠시 스며든다. 여유는 언제나 예정하고 오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나는 늘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맥없이 붙잡고 허탈해 하고 기진한다. 그래도 나는 사소함으로부터의 시간이 살갑다. 삶이 답답하고 무거울 때는 가볍게 붙든 사소함의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은 더 말랑말랑해지고 경쾌하게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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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5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날의 아름다움이 인생은 살만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큰 봉우리를 향해 달려가도,
그 길은 작은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을테고,
언덕을 올라가는 길 쉬엄쉬엄 흐르는 개울과 빛나는 햇살이 저를 부추깁니다.

곡우님의 사소한 향연..... 마음이 즐겁습니다.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10-05 22:14   좋아요 0 | URL
스펜서 존슨이 쓴 비즈니스우화인 <피크 앤 밸리>가 생각나는군요.
마고님이 즐거우셨다니 저도 즐겁습니다....^^

비로그인 2010-10-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아한 가을날에 재탕삼탕한 기름으로 튀겨진 돈까스를 먹고 이런 감상에 젖는 사람....
정말 드물다 못해 희귀하죠~~푸히히~

穀雨(곡우) 2010-10-05 22:14   좋아요 0 | URL
그죠. 저두 희귀종인가봐요...ㅋㅋㅋ

다크아이즈 2010-10-0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한 곡우님. 사소함의 자유가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일상은 언제나 그 자유마저 쉬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깨끗하게 치워진 마루에서 햇살 가득 받으며 글놀이할 때가 제겐 사소함의 자유랍니다. 님, 행복한 가을 맞으시길. 언제나 산뜻한 칼럼 같은 글을 올리시는 곡우님...

穀雨(곡우) 2010-10-05 22:15   좋아요 0 | URL
와우..느와르님이시네요. 계절이 연달아 바뀌는 동안 잘 지냈나요..?
습관이 무서워요. 글도 그런가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하네요....ㅋㅋ
 

환절기다. 나는 계절이 바뀌면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어김없이 고뿔이 엄습한다. 추석 전 연휴부터 지금껏 폭풍처럼 바쁘게 몰아 치기도 하였거니와 달콤한 휴가 이후 적응이 더디 되었던 것이 컸던 모양이다. 게다가 회사 내 관련 자격증 취득시험이 함께 겹쳐 리뷰도 지지부진했고 포스팅도 겨우 얼핏설핏 게을렀다.

 

아마 지난 한 주가 하반기 들어서 가장 바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토요일 시험 준비를 위해 잠을 설치고 설상가상 옆지기의 고모님이 지병으로 인해 금요일 별세하셨고 아직 노총각으로 지내던 큰 처남이 이번 달 네째주에 결혼식이 있어 주말 또한 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기가 떨어지고 흐름이 악화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지 싶다.

 

그런데 우연한 이어짐인지는 몰라도 나는 감기를 큰 아이가 걸리면 꼭 따라 한다. 다른 식구들 모두 무탈하게 지내건만 나에게는 거르는 법이 없다. 큰 아이도 자주 아픈 편은 아니지만 아빠를 닮아 민감보이인 셈이다. 옆지기는 그게 너무 재밌기도 하고 우스웠던지 연신 입방아를 찧어 댄다. 저질체력이라나 뭐라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모든 것에 해당된다. 내가 큰 아이의 감기를 고스란히 물려 받고 며칠을 고생을 해도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나는 감기에 걸릴때마다 감(減)기(氣)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글자 그대로 하면 기가 모자라서 몸의 운행의 흐름이 흐트려져 생기는 일종의 몸살로 해석된다. 몸에 살을 맞는다는 순 우리말마따나 감기에 걸리면 온몸이 욱신 욱신거리고 뼈마디에 바람이 든 것처럼 쑤쎠대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지는 상태를 붙잡는다.

 

감기와 몸살의 음절에 새긴 뜻은 심오하다. 모든 글자가 그렇게 쓰이기로 하는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건만 떠올릴 때마다 새록새록하니 미쁘다는 사실이다.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해 보면 오히려 단어가 가진 외투를 벗고 속내에 감춘 진기한 과거의 시간이 해맑게 열리니 말이다. 그 옛날 누군가에 의해 감기를 정의하고 몸이 이렇게 변했으니, 마치 살을 맞아 쓰러질 것 같은 어지러운 상태로 풀이하고 단어를 만들어 쓰기로 은연중에 합의한, 그 시간이 스르륵 열린다. 언젠가 유명한 한 역사학자가-누군지는 기억이 없다- 이르기를 지명에도 사연과 교감이 담겼다는 말처럼 말도 그리 생성되고 명을 이어 왔을테다.

 

나는 감기에 담긴 생각의 그릇을 투영하지만 실은 벗어나지는 못하는 우매함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감기의 예고에 늘 만용을 부리고 생활의 리듬을 소월히 하게 된 댓가다. 며칠 아프고 나면 절로 낫는 것이 감기라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감기로 인해 한 템포 쉬어가는 강제감압장치처럼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속담 중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비 온 뒤 땅은 굳어지고 감기는 밥상머리 위에 내려앉는다는 말처럼 감기로 인해 운행의 호흡을 가다듬고 심신을 보존하라는 자연의 섭리의 속삭임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이제 감기는 아들에게 기생하다 싱싱한 어린 것의 단맛을 모두 쏙 골라 먹은 비실비실한 감기바이러스에도 맥을 부리지 못하는 즈질체력이라는 멀쓱함이다. 오늘도 필시 집에 돌아가 골골할 나를 옆지기는 모처럼 만난 안주거리 삼아 씹어 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옆지기의 행동이 얄미워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나의 즈질체력이 한심해서 그런 것이니....자업자득이다...

 

p.s) 과연 몸짱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잘 아는 분, 미리 감사의 말씀과 아낌없는 조언 부탁한다. 내게 조언해 주는 분은 아마 엄청 잘 생기고 이쁜 사람이 틀림없을 테다. 거기다 성격까지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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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0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을 1등으로 하면 1등으로 이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얼른 쓰기는 씁니다만, 즈질체력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고로...별로 드릴 말씀이 읍써요~~ㅠㅠ
밥이랑 잠이 보약일거예요.
운동을 싫어해서 잘 안하지만(아예 안할껄요), 삼시 세끼 꼬박 밥 한그릇씩 먹고 충분한 잠을 자고...요건 지키려고 합니다.그래서긍가 감기는 잘 안걸려요~
꿀복근 같은거 키우시게요?
그렇다면 고건 트레이너를 찾아야죠~~푸히히~

穀雨(곡우) 2010-10-04 18:01   좋아요 0 | URL
꿀복근은 언감생심이구요.
단지 튼튼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아, 마기님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 맞습니다...^^

blanca 2010-10-0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저는 주말에 완전히 감기에 먹혀 들어가 울고 다녔습니다. 눈물과 콧물--;; 저는 감기를 너무 심하게 앓아요. 딸내미한테 안옮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곡우님도 그러셨군요. 저도 감기라는 명칭에 대하여 예전에 동료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 분의 말씀으로는 의지력이 강하면 하루만에 떨어져 나간다고 하더라구요. 기가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그 얘기도 수긍이 좀 가는 게 저는 학창시절부터 시험만 끝나면 감기에 걸리곤 했거든요. 무언가 아주 중요한 일을 준비할 때에는 안 거리더라구요. 감기에 대해 저도 생각 많이 해요. 안 걸려야 하는데. 새록해록하니 미쁘다....어디에서 이런 예쁜 단어들을 가져오시나요? 무엇보다 감기 빨리 나으시기를 바랍니다.

2010-10-04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0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을 3등으로 하면 3등으로 이쁨 받는 사람 되는 건가요?^^
maggie님이 삼시 세끼 밥 한그릇 씩 먹고 충분한 잠을 잔다...이건 믿을 수 없슴~다.결코~!!!

감기는 공기중 감염이 아니라,비말감염이래요~
타액이나 콧물,가래 등에 섞여서만 전염되는 것이니까...
뽀뽀 안 하고,한 그릇 같이 사용 안하고,재채기 할 때 주의하고 하면 괜찮으실 거래요~^^

빨리 쾌차하셔서 가을 밥상만이 아니고,가을 하늘도 만끽하시길~~~!

穀雨(곡우) 2010-10-05 13:06   좋아요 0 | URL
감기의 의학적 원인이 이것이었군요..^^
하루 지나니 콧물은 홍수처럼 터지고 목은 이미 수몰되어 잠겼습니다.
그러니 머리도 지끈지끈....나아지기 위한 몸부림이겠지요...

유난히 오늘의 가을 하늘, 청아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0-10-05 16:40   좋아요 0 | URL
아니~~내가 삼시 세끼 잘먹고 충분히 잠을 자는 것에 대해 양철댁이 이의가 있으신 것 같군요~~응?
난 그렇게하고 있다구요.흥~

감기가 저런 경로로 전염되는 것이야 뭐 이해가 가지만...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하에 있다고 다 걸리는 것은 아니므로, 난 잘먹고 잘자는 방법으로 몸의 저항력과 자생력을 키워야한다고 굳게굳게 믿씨미다!!!

마녀고양이 2010-10-05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減)기(氣), 아 딱 와닿는군요.
저도 환절기마다 달고 다닙니다. 아마 기가 약해지면, 알아서 착 붙는듯한 느낌입니다.

곡우님두 그러시군요. ^^
저는 이쁘지두 않고 성격도 지랄맞아서 몸짱 되는 비결은 알려드리지 못 하지만
감기 빨리 나으시라는 기원은 드릴 수 있겠네요!

穀雨(곡우) 2010-10-05 22:17   좋아요 0 | URL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 왕주사 한대맞고 지금은 한결 나아졌어요...^^
감기란 녀석이 그렇잖아요. 끊어 오르다 금세 식어 버리는 주전자처럼....
아마도 마고님 기원이 단방약이었나 봅니다. 감사...^^
 
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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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보이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확실, 그것은 규명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경계는 비현상계의 미지의 존재로 각인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닿은 적 없는 곳, 그곳은 존재에 대한 현상을 묻고 따질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상상한다. 시간 너머의 세계,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 평행한 시공간의 틈 어디에서, 보이는 현상계와 흡사하게 닮은, 다차원의 세계가 존재하리라는 믿음은 의외로 강고하다. 그곳을 연결해 줄 커넥터로 기능할 무엇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 인간의 마음 속 한 구석을 견고하게 채우고 있는 믿음인 "외계의 생명체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당위처럼 같은 맥락의 차원이다. 어쩌면 확증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단단한 이유 또한 인간이 가진 의식 중 직관에서 동인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직관의 힘을 광대한 에너지라 믿는다. 직관은 때론 둥글둥글한 호기심으로 때론 예리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문제를 푸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또한 직관에 대한 의식은 모든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의 원천이라고 본다. 직관에 귀 기울일 때 세상이 열리고 진실에 보다 밀접해진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세상을 직관이 만든 패러럴 월드의 구현이라 정의하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모든 의식의 흐름을 정제하고 통제하여 걸러 낸 정수가 바로 이 책에 담겼다 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창조해 낸 세상은 인간의 의식의 기저 어딘가에 가 닿아 상호작용하고 공감하게 하는 방편이 되는 재료가 되는 것을 보면 우연을 넘은 정확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가 빚은 생각의 총체가 탄생하기까지는 다채로운 직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테고 행운의 바퀴처럼 우연성을 가장해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닐 테다.  기실 하루키에 대한 직관이 빚은 영향력은 의식이 퇴적되고 쌓이고 다져진 조각들의 조합의 과정이다.  그 속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성을 드라마틱하게 구축한다.

 

실제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채로운 영향의 흔적을 책 전편에  흩뿌려 놓는다. 그것은 외따로이 혹은 뭉쳐져 가상된 세계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은폐하며 정교하게 짜인 세계를 창조하는 자양분이 된다. 따지고 보면 하루키는 대단한 관찰력과 창의력의 소유자라는 놀라움에 이른다. 전편을 장악하는 신포니에타의 협주곡을 위시하여 체호프, 프루스트의 편린들이 적절하게 배합되고 두개의 달과 공기번데기, 고양이마을, 리틀피플이 어우러져 혼합되는 변주를 매혹적이게 경청하게 된다. 여기에 하루키는 그의 간결하고 인상적인 문체로 감정의 속도를  빠르게 변속하며 몰입의 속도를 높인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은 붙드는 순간 세계는 멈추고 그 속에 침투하는 몰입의 늪에 중독된다. 아울러 그는 방대한 분량의 서사 구조에서 오는 위압감을 경쾌한 흐름과 드라이브로 쾌속질주를 유도하는 힘은 가히 압권이다. 이러한 그의 문장력과 기교가 더해지고 합체되면 막강한 화력으로 엄청난 감정의 폭발력을 불러일으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에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통찰하고 부여잡은 의식의 흐름과 세계에 대해 구현한다.  의식의 흐름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연결고리를 통해 설정인물들의 심리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 타자의 심리적 변화요소에 어떤 방법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섬세한 필치로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심리의 이면에 숨은 감각의 고리를 정교한 메스로 해부하듯 드려다 보고 절개해 생생한 이미지를 숨 막힐 듯 잡아내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하루키에게 시간을 설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며 설계된 세계가 구동하는 장면은 한편의 자연이 빚어낸 황홀한 완경을 감상하듯 바라보게 되는 영겁의 순간으로 상승하게 만든다. 이것은 대가의 혼이 담긴 필력의 완성이라 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1Q84의 세계는 카오스다. 질서를 무력화시키는 혼돈의 세상이다. 질서와 혼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오마메가 고속도로출구를 통해 1Q84의 세계로 진입하였듯 질서는 정연하게 각자의 역할대로 움직이며 수평의 세계를 지향한다.  무방비 상태의 의표를 찌르는 일격, 카오스는 혼돈 속의 질서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직관에 이끌려 결합하게 되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결국 예정된 질서는 마방진의 수처럼 적확한 수치다. 이렇듯 균열한 틈바구니를 밀고 나오는 미세한 시간의 흐름은 하루키가 지향한 1Q84의 세상에서 재창조된다.  몽환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1Q84의 10월에서 12월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과도 같다.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제거하고 공기번데기를 통해 반대편 세상의 후카에리의 몸을 빌려 덴고의 아이를 품는 과정은 결합의 산물인 생명의 잉태와 또 다른 세상의 출현을 맺어주는 의미로 부각된다.

 

또한 하루키는  아오마메와 덴고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로 우시카와를 전면에 배치한다. 우시카와는 선구의 아웃사이더 해결사로 타락한 변호사이며 동물적인 감각과 기괴한 모습이 야누스의 형상처럼 대조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Q84의 세상이 1Q85의 또 다른 통로가 열려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며 하루키의 다음 행보를 내비친다.  리틀피플이 날뛰고 경계가 허물어지며 또 다른 문이 열리는 혼돈의 과정을 하루키는 우시카와를 통해 암시하고 보여준다. 여기서 하루키는 대칭적 구조에 대한 강한 조화를 맞추며 이중적 나선구조를 이어주는 끈을 조화롭게 설정한다. 선구의 핵심일원인 포니테일과 스킨헤드, 타이거오일의 왼쪽과 오른쪽, 리틀피플과 빅브라더, 껍데기와 알맹이처럼 흑과 백의 부조화 속의 대칭구조를 통해 현상계와 비현상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하루키는 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1Q84의 세계에서 살아 숨 쉬게 하였다. 덴고의 아버지가 현상계의 껍데기를 벗어 나 NHK수금원으로 아오마메와 덴고, 우시카와를 차례로 방문하여 수금독촉을 하는 난해한 장면은 데자뷰에서 오는 기시감처럼 생경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아마도 하루키는 의식의 중추가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 어디에선가 재생되고 스며들 것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동시대를 사는 세상 저 편의 낯선 공간에 나와 같은 인간이 살아 움직인다는 상상, 섬뜩함이 몰고 오는 서늘한 상상이다. 풀리지 않는 미제와 같은 하루키가 던진 난제는 이야기가 계속 뻗어 나갈 것이라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인지한다.

 

이렇듯 무라카미 하루키, 그에 대한 열광은 이제 전설이다. 세상을 온통 1Q84의 세계에 홀리게 만든 그의 이야기에 마비되었다. 플롯 곳곳에 깃든 완벽한 장치들을 통해 실제 두 개의 달이 뜨고 공기번데기가 생산되는 세상에 서 있는 착각이 든다.  그가 설정한 모든 장치들을 풀어 나열하면 일정한 알고리즘의 틀 속에 모이는 이유 또한 하루키의 아우라가 유발한 엄청난 에너지다. 아오마메의 푸름에서 이끼 긴 푸른 달이 연결되고 존재감을 상실한 달에서 덴고의 강인함을 유추케 하는 음양의 완벽한 대칭적 조화. 하루키의 이 소설은 완전한 세상의 경계에 머무는 불완전한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 속에서 나는 구부러진 시간을 마주한다. 1Q84의 생소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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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2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0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1Q84를 읽고 리뷰를 쓰면서, 얼마나 정리가 안 된채 헤매었던지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를 긁어다 올리고 끝냈답니다.
그만큼 제게 난해한 작품이었고, 그만큼 제게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곡우님의 리뷰를 읽으니, 머리 속의 혼돈 상태가 훨씬 가라앉고 있습니다. 기억을 다듬으면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굉장히 공감이 가는 리뷰입니다.

穀雨(곡우) 2010-10-05 22:19   좋아요 0 | URL
쓰고 지우기를 숱해 반복했어요. 하루키를 단박에 정의한다는 게 쉽지 않더군요.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고님의 공감의 표시,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