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출간된 신간입니다.

구한말 고종 재임시 서울에서 초대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의 평전입니다.

내용은 거의 90%이상 베베르가 조선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1860년대부터 189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을 다룹니다.

이 책은 러시아 외교관의 외교활동을 러시아 사료를 통해 접근했다는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계 러시아 역사연구자인 벨라 보리소브나 박의 러시아어 저서를 한러관계사를 전공한 두 전공자께서 한국어로 번역한 책입니다.

글의 대부분이 외교문서의 인용이 많은데다 번역투도 있어 아무래도 한국 연구자가 직접 저술한 책처럼 가독성이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가 1840년 아편전쟁이후 영국이 영향력을 동아시아지역으로 점차 넓히고 있었고 시베리아로 동진을 해서 연해주에까지 진출한 러시아도 조선과 함경도에서 국경을 맞대면서 조선문제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베베르라는 러시아 외교관은 중국전문가로 외교관에 들어선 인물로 최초에 중국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해 1884년 조선과 러시아와의 수교조약을 체결한 실무자였으며 조선과 러시아와의 육로교역을 위한 조러육로통상장정을 체결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조건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갑오개혁(甲午改革,1894), 을미사변 (乙未事變,1895),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1895) 등을 현장에서 지켜본 외교관 중 한명이었습니다.

아마 외교관 베베르가 한국 근대사에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은 그 자신이 고종과 가까운 고종의 정책자문을 해왔다는 사실과 최초 조선에 러시아공사관을 개설하고 제정러시아와 조선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역사적 고비마다 일제의 조선의 주권 침해에 맞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1896)이 일어나는데 이 정치적 행위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게 됩니다.

을미사변이라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상태였던 고종은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고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은 궁궐을 에워싸는 등 그들의 침략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러시아의 개입은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친일내각을 붕괴시키고, 정국의 반전을 이루게 되고, 고종은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친일내각을 경질하고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민영환과 윤치호를 특사로 보내 러시아 군사고문과 러시아 병력지원을 요청합니다.

러시아 외무성은 한반도에서 이익이 서로 부딪치는 일본과 무력충돌을 피하려 했지만 일본이 조선을 그대로 점령하게 놔둘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외교 기조를 이어갑니다.

고종의 러시아 병력 요청도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베베르의 오랜 요청 끝에 성사됩니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 러시아는 조선보다 만주와 연해주에 더 많은 외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베베르가 일본의 영향력 강화에 맞서는 러시아의 외교정책 전환을 촉구했지만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이익우위를 인정하면서 대조선정책을 소극적으로 일관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다시 맞붙을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1890년대 말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1880년대 청의 대조선 간섭이 강화되어 조선을 속국처럼 대할 당시는 모두 청국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었고 청일전쟁(1894-1895)를 치룬 이후에도 일본은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매우 버거워 했습니다

하지만 청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러시아와 조선은 대조선 정책을 두고 러시아와 맞서지만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하면서 교묘하게 러시아를 회피합니다.

일본에게 러시아를 비롯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울주재 서구 외교관들의 존재는 관리를 해야만 하는 걸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전반적인 책 내용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애서 언급한 구한말의 정치적 격변은 각각의 사건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존재합니다.

러시아 사료를 중심으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조명한 책으로는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눈보라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경인문화사,2012)’를 보시기 바랍니다.

민영환의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 참석에 관한 김영수 교수의 책도 유익합니다.
미국을 통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러시아 차르를 알현하고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연해주를 거쳐 인천에 다다르는 사행길을 다룹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

흔히 긍정적으로 해석되던 친일 개화파의 갑오개혁과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연구서도 있습니다. 책분량이 상당해 그냥 참고로 소개합니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2017)’입이다.
갑오개혁은 친일파들이 일본을 등에 없고 사실상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또 하나의 왜란이라면 측면에서 접근한 해석으로 사실상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에서 조선을 침략했던 규슈의 삿쵸동맹(薩長同盟)의 후예들이 300여년아 지난 후 친일파 앞잡이들은 내세워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관점으로 갑오 개혁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는 사실상 고종의 러시아망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입니다.

해외로의 망명이 여의치 않으니 일본이 접근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을 해서 의병들의 봉기를 지휘했다는 지점을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던 고종을 근대적 군주로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이 아마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2000)’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종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서양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의 조선애 관한 개괄적 역사서애서 비롯된 면이 크고 일제가 의도적으로 고종의 능력을 폄하해 유약한 군주로 만들어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고종은 재위 40년이 넘었던 통치자로 오랫동안 통치한 18세기의 영조만큼 오래 재위한 임금이기도 하고 스스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에서 조선을 개화로 이끈 군주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구한말은 조선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처음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던 시기이기도 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시기입니다.
일제의 흔적이 남기전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 유교적 사고방식을 지닌 상태이지만 변화하는 환경과 정세에 이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다시 한번 들여다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다만 19세기를 휩쓸었던 민란이 일어난 원인이 정조 사후 발생한 세도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이 역사에 끼친 악영향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100여년간 그 이전에 확립되었던 조선의 정치제도가 무너져내린 겁니다.


이들이 모든 걸 망가뜨려놓아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군대를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된 군대가 전혀없고 국가자체 재정도 부족하니 청나라와 러시아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에게 병자호란 (丙子胡亂,1636)에서 패하고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의 예를 지내고 심양으로 왕세자도 인질로 보내고 백성들도 인질로 보냈는데도 도대체어떻게 했길래 250여년 만에 군대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집권층인 양반사대부들에게 있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 안하고 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무신을 천대하고 돈버는 상업활동을 천대해서 화을 자초한 것입니다.

같은 양반인데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차별하고 문과급제의 기회를 주지 않던 나라였습니다.

19세기초를 흔들었던 ‘홍경래의 난(1811-1812)’이 평안도에서 지역 지배층의 불만으로 일어났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김선주,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경상도와 충청도 그리고 서울과 경기지방 출신 양반들이 국정을 좌지우지 한거죠.

19세기에도 기원전 7세기 쯤의 고대 중국 문헌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니 상황이 황당하고 할 수밖에 달리 생각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조선후기시대에 관해 읽어본 책들을 보면 결국 이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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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의 첫개항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항구입니다. 중국 산동(山東), 요동(遼東)지방과 배편으로 지척인 곳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인천에 정착한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천과 인연이 있는데다 중국음식 , 특히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해외에서는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많이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인천역 앞에 자리한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리 큰 곳은 아닙니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미국 뉴욕만해도 엄청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인천은 정말 소소합니다.
이는 제가 알기로 1960-70년대 이땅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멸시때문에 이렇게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이 이땅에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이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건 사실상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을 개항(開港)한 이후부터입니다.

개항이후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인천에 들어섰고 그 이후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이후 15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인천을 터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때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과 군벌(軍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양상을 띄는 혼란이 일어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다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더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처음 중국산 면포와 비단등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던 화상(華商)들은 조선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총독부와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사업을 그들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산 면포 등에 대해 일본산 직물들이 싼값에 거래되기 시작하고 총독부에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갑자기 사업에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총독부의 규제를 받아오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국의 나라에서 버틸 수 없던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나 귀국했고 화상들의 사업은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미군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합니다. 패전국 일본과의 교역은 군정 당국이 막아서 일시적으로 인천화상들은 호황을 잠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자 이후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냉전(Cold War)의 영향으로 공산국 중국과 민주주의 국가 한국간의 교역은 중단되고 인천 화상들의 대 중국 교역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선 한국의 군사정부는 중국과의 거래를 불허하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인에 비해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한국정부의 차별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을 보게 되고 이동과 작업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집을 하게 됩니다.

초기 화교들은 포목상이나 잡화점 등 장사를 주로 많이 했지만 이들 업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자 음식점 등 다른 업종에 대한 비중이 많이 커진 것으로 압니다.


근대이후 한국땅에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들만의 기억과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국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된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연구한 책도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2016)

심층 인터뷰를 통한 인류학적 접근을 했던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인천화교들의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입니다.
인천화교협회의 사료를 통한 경제사회사 연구죠. 인천대학교에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인천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화교들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인천의 중국음식을 이야기한다면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짜장면뎐( 프로네시스,2009)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회상에 잠길만한 내용을 처음으로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천 구도심에 가게되면 저는 근처의 유명한 화상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기본 50년 이상된 곳들도 많고 짜장면의 경우 발상지가 인천이라 가면 먹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려스러운 요새의 중국관련 뉴스와 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좋던 싫던 중국인들이이땅에 들어와 산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고 특히 인천의 경우 작지만 아직도 중국화교와 화교들이 제공하는 특유의 중식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화상 중국집을 이야기하면 인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인천 문화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이 상황에 긴장한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들과 서구 유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만이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길어봐야 18세기 이후 나온 개념과 체제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백인 남성들애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860년대까지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들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조강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고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소위 유럽의 근대 이전 동서양은 모두 절대주의 전제왕정 체제였습니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체제도 변질되어 정말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덮어놓고 민주주의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20대 국회의 약 40%의 의원들이 법조인 출신이라고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40%가 법조인인가요? 법조인이 국회를 과다점 유(over represented)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할 여성과 청년 그리고 농민들은 국회에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합니다. 즉,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50-60대 남자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출신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황은 차라리 대의제 만주주의를 악용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소수의 고위 공산당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과 차이가 뭐죠? 두 국가 모두 소위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과정을 이끌어갑니다.

따라서 그 정치체제를 부르는 명칭보다 중요한 건 정말 정치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새 서구의 지식인 층에서 나오는 중국 혐오 발언은 과한 면이 많습니다. 다분히. 인종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 따라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여론주도층도 본인이 미국과 유럽에 사는 것마냥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냅니다.

역사적으로 미국보다 중국과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공이던 전쟁이던 외교 등 무엇이던간에 한국은 중국과 더 오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건 냉전으로 인한 몇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 상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방법이 없어요.

미국이 중국에 적대한다고 덩달아 적대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자살골이죠.

오히려 미국과 일본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일본과의 마찰은 미국과 해결해야 합니다.

인천의 화상들은 100년 이상 한국에 살아온 이웃이란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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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이철승 교수의 두번째 불평등 연구서인 ‘쌀 재난 국가(2021)’을 완독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의 동의여부를 떠나 사회과학적 실증연구의 좋은 사례를 본 것 같아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여태껏 서구의 이론과 사례를 소개하고 번역하는데 치중하고 현재 한국이 직면한 현실분석에 인색한 한국의 연구풍토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식 인사관리제도인 ‘연공제’가 벼농사를 짓던 동아시아 특유의 소농사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고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합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팩트( Fact)를 확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사료로서 확인하려 한다면 사회과학자인 자신은 과거의 상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드물게도 한국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에서 나온 데이터 분석이 가미된 연구서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선례(先例)’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비슷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 있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의 경우입니다.

다른나라의 사례와 이론이 한국에 맞지 않는 건 풍토와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여태 서양이론을 수입한 학자들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분석은 고사하고 왜 어떤 이유로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스스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불과 30여년 만 하더라도 서양학문이 아닌 한국학이나 동양학을 하면 괴짜 취급을 당하기 쉽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누가 연구를 해야 하나요?

서구에서 나온 책 중에서 한국학을 하신 스위스출신 마르티니 도히틀러 박사의 ‘한국의 유교화과정(너머북스,2013)’을 읽고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출신 한국학자 분이 우리도 잘 모르는 가족 친족 제도부터 중세 한국이 어떻게 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한국의 사료를 정리해 두터운 연구서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한국학자가 쓴 연구서를 읽을 때 너무 어려운 용어를 남발해 어렸을 때 나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책들의 저자의 ‘앎’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이가. 개인적으로 문장이 짧고 간결하며 쉬운 글을 쓰시는 분의 지식이 더 깊은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소화되지 않아 보이는 글이라는 건 내용 자체도 소화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가 읽은 연구서 중 역사적 부분을 고찰하고 동시에 역사적 자료를 분석까지 한 한글로 쓰인 책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해외의 이론과 설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이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할 이유는 없고 그냥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문 367쪽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입니다.

이책은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2019)’와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입니다.

전작이 386세대가 너무 오랜기간(30여년) 동안 연공제라는 인사제도의 덕을 보고 오랫동안 정치 경제권력의 상층부를 독점하다보니 한국의 세대간 불평등이 생겼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이책은 전작에서 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연공제가 어디서 생겼고 언제부터 생겼으며 왜 한국 땅에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연공제가 생긴 이유가 벼농사를 짓는 한국의 소농경제체체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와 조선이후 정착된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통치권력과 연결되며 국가를 통한 ‘지대추구’가 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을 소환합니다.

한국에 아직도 제대로된 직무평가기준과 숙련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없다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온대로 편하게 살아온 것이지만 앞으로 바뀐 환경에서 연공제는 과거 발전주의 시대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찿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는 벼농사 시대의 최초한의 구휼만을 미덕으로 알았던 ‘작은정부’는 예상되는 인구감소와 마을과 대가족의 해체와 파편화된 사회구조 속에 보편적 복지마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봅니다.

즉 하루빨리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 ‘빨갱이’소리를 듣는 기막힌 현실에서 실제로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실현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 2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도 정부는 확대 재정정책을 추구하는데 인색하며 아직도 공공의료인프라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계의 부채가 역대급으로 증가하는데도 정부는 세수추계를 잘못 예측하고 OECD국가 중 최저수준의 국가부채 증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재부 관료들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IMF가 정해둔 1990년대 말 작성된 ‘재정준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균형 재정을 주장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작은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의 유효성은 2007-2009 금융위기로 이미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큰정부의 재정 투입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철밥통 기득권인 공무원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재난의 시기인데도 확인할 수 있는 건 공무원들의 ‘영혼없음’을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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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 풍속에 관한 책입니다.

미국 오레곤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의 소장된 작품들을 연구해서 서양 특히 영미권의 지식인들이 일제강점하의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연구한 책입니다.

본문이 총 194쪽 밖에 되지 않으니 약간 학술적인 산문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서구 유럽이 비서구, 특히 중동과 동양( 또는 아시아)를 어떻게 보는지는 특히 비교문학 ( comparative literature)분야에서 그 단초를 제시하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관점입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문예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의 명저 ‘오리엔털리즘( Orientalism, Vintage, 1978)’이 그 이론적 분석틀을 처음 제공했습니다.

한국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따른 서구의 ‘시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azing)’을 다룬 책은 물론 이 책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리엔탈리즘이 기본적으로 동양을 여성적이며 정적인 대상이며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ahistorical) 주체가 아닌 대상 (objective)으로 보고 있으며,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문명국인 서양의 국가들이 비문명적인 동양을 계몽하고 깨우쳐 문명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서양의 백인 남성들이 저지른 폭력과 착취 그리고 식민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소거된 체 겨우 300여년에 이르는 서구 유럽의 경제적 힘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점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변방에 머물렀던 서유럽이 이렇게 오만하고 폭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저질러온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노예무역의 역사를 지우고 고상하게 포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폭력성은 공산주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골수 자본주의자들, 특히 근본주의적 시장자본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을 공격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폭력적인 건 두 체제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튼 한국어로 쓰여진 책 중에서 제 인상에 가장 많이 남은 책은 고미숙 선생이 2001년 출판하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찿아서 (책세상,2001)’입니다.

근대적 신체의 탄생과 병리학과의 관계, 위생관념과 근대개념을 연결시키면서 문명안들인 서양인들이 근대 초기 조선인들을 어떻게 인식했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세여인도 모두 기독교인이고, 모두 중산층이상의 집안에서 여유롭게 교육을 받았던 20세기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베라 잉거슨 (Vera Ingerson)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미국인으로 특히 기독교의 교세가 강하기로 유명한 평안도 선천, 정주, 강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신의 미국여인으로 조선으로 오기 전 전문적인 간호교육을 받았습니다.

평안북도는 일제상점기 이전부터 청과의 사행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에서 한양 다음으로 큰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대외무역이 종사해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서양인들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현재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감히교파가 모두 평안도에서 월남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우 반공 세력이 나온 지역이면서도 또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진출한 반일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한 곳입니다.

조선말기 19세기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는 아래의 책을 참조바랍니다.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다음 인물인 거트루드 워너(Gertrude Warner)는 시카고 출신의 아시아 유물 컬렉터로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중국과 일본의 고미술품과 풍속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글 서두에서 소개된 시카고 대학 교수인 프레드릭 스타(Fredrick Starr)외의 인연으로 그가 ‘조선불교’에 대한 강연 관련 조선의 불교 관련 사진과 슬라이드를 사들이기도 했던 그녀는 세번째 주인공인 영국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외의 친분으로 조선의 고미술품과 사진을 더욱 많이 수집하고 키스의 목판화를 다수 소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책뿐만 아니라 이미 그녀의 목판화에 대한 책들이 한국에 출판되어 있어 낯설지 않은 화가입니다.

세명 중 유일하게 영국출신이고 일본에 오랫동안 살았던 일본통 독신여성입니다. 일본에서 목판화 (우키요에, Ukiyoe, 浮世絵)를 배워 자신의 사실적인 회풍에 접목시킨 화가로 유명합니다.

최근 그녀의 저서 중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책과함께,2020)’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책은 그녀가 1946년 런던에서 출판한 ‘’Old Korea’를 번역한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에 처음 입국해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을 직접 목격해 조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가졌던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이책은 저자가 언급했듯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례연구’에 해당됩니다.

대부분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활동한 영미권 여성들에 해당되는 사례이지만 서구 특히 영미권의 오리엔털리즘은 극복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확대와 관련하여 중국에 대한 거짓정보가 내외신 가리지 않고 난무했던 사실이나 최근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커지자 영미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거론하는 듯 백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도를 넘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서구문명이 중국에 뒤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내제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7세기-20세기를 제외하고 중국이 문명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들은 그래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까지만 해도 별볼일 없던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이미 일본을 추월한 상태여서 일본을 아시아 정책의 축으로 삼았던 미국에서 격렬한 반응이 더 나오는 것 같습니다. 군사적 긴장이지만 그 내면에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고 서구의 오만함(arrogance)이 깔려 있습니다.

정치와 예술은 별개의 분야가 아니고 무의식과 행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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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1968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관련된 책입니다.

Beyond Vietnam: The United States and Asia(Alfred. A. Knopf,1968)


위의 책이 오늘 소개할 책으로 출간된 지 53년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서를 소개하는 건 1968년 당시의 상황을 당시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당시의 상황이 현대사로 포함되어 있어 현재시점에서 비교가 가능한 것도 고서를 읽는 이유입니다.

1968년이면 아직 베트남전쟁(1960-1975)이 종결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1965년 한국과 일본사이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고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저자 라이샤우워 교수는 1961-1965년 기간동안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분으로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아직 농업국가였고 경제개발계획이 진행중이었으며 아직 경부고속도로도 완공되기 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 國共內戰,1927-1950)을 숭리로 이끈 마오쩌뚱(毛澤東)이 아직 살아있었고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1965년 북베트남에 대규모 폭격을 했지만 전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남베트남 지역에서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에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는 방법을 찿는데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전문가인 저자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로 다른 저개발된 아시아의 나라와 다르고 미국의 중요한 아시아정책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한국과 만주에서 식민화를 시킨 역사는 고스란히 설명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패전이후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시켰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언급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 시대 전범과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시켜 두 사회의 체제붕괴를 막고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세력에 대응하는 봉쇄정선을 구축했습니다. 미국입장에서 패전이전까지 일본이었던 한국에서 친일파들이 일제 당시의 직무를 그대로 해방 후에도 하는 건 미국이 묵인하고 당시 아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입장에서 취할 단기적 해결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일본과 한국에서의 미국 점령군(occupied force)이 행한 군정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세계대전 당시 육군정보 계통에서 일을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연구를 한 미국의 제1세대 일본/동아시아 전문가로서 1961-1965년까지 주일대사를 지낸 분이라서 아무래도 친일적인 성향이 보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1965년 도쿄올림픽도 치루고 해서 아시아에서 선진국 반열에 든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컸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인 중국을 봉쇄하는 차원에서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당시는 미국이 중국을 인정하지 않고 장개석 (蔣介石) 총통이 다스리는 타이완을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도 국공내전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간 장 총통의 타이완이 미완의 내전의 결과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고,현재 중국-타이완 관계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정책과 타이완의 ‘독립정책’이 충돌하는데다가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미군 해군기지 존재+세계최대 반도체 와이퍼 생산국)으로 인해 미국-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50여년 전 중국의 경제규모가 보잘 것 없는 후진국이고 중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이 고려할 바가 없는 정도라고 생각된 것인데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은 이미 일본을 넘어섰고 군사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와 미국과 서구유럽권에서는 현재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고 중국과의 전쟁가능성까지 나오고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사안입니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거의 황화(黃禍, yellow peril)로 생각될 정도로 매우 무자비합니다.

서구유럽권과 영미권 선진국들이 18세기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힘을 인식하게 되고 헤게모니 자체가 흔들리게 되자 위기감이 증폭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기감이 커지자 서구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저술과 강연들을 지속하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미개함을 강조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소수의 엘리트와 부자 중심의 과두정치체제(oligarchy)로 변해가고 있고 불평등이 심화해 가고 있는데 한가하게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건 좀 어딘가 어설퍼 보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철저히 미국 국무부 담당자 입장에서 쓰여진 미국의 국익 극대화 방안에 따른 책이고 1968년 당시 미국은 국공내전 이후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사실과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험이 당시 최대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 참전에서 미국의 국익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찿을 수 있던 역사적 교훈이라고 설명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평가하면서 아직도 미국외교가 19세기의 외교를 답습하고 있고 서구중심적 외교로 일관하여 비서구권인 아시아에 대한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1968년 당시 미국에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 아시아 언어에 능통한 지역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불안정한 저개발국이 대부분인 아시아 지역은 당시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지역으로 결국 미국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결국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다고 보았으며 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인 일본이 그 선도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우위는 2021년 현재까지도 유효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말하지 않은 행간에 결국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잠복해 있는 셈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선택해 중국의 해양진출울 봉쇄(containment)하는 교두보로 삼았고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 본토를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타이완에 행한 식민지 지배 역사를 묻어둔 체 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에 몰두하게 한 셈입니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민족주의(nationalism)가 확산되고 민족분쟁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것은 지역의 문제로 관여하지 않고 미국은 단지 은행가처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조를 각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맞게 자원분배의 역할만 하는 것이 더 맞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결정은 각국이 하고 미국은 단순히 지원만 해야 미국에게 전가되는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일본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분의 주장이 상당부분 실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확인을 해보지 않아서 아직 뭐라 더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요새 1960년대에 나온 책을 몇 권 읽어보니 왜 사람들이 고서를 찿아 읽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당대의 현안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평가를 내렸고 어떤 의견을 내는 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외교와 각국 국제관계 상황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20세기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외교의 한 장면이 역사화되는 과정을 1968년 출판된 저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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