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한국의 첫개항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항구입니다. 중국 산동(山東), 요동(遼東)지방과 배편으로 지척인 곳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인천에 정착한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천과 인연이 있는데다 중국음식 , 특히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해외에서는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많이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인천역 앞에 자리한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리 큰 곳은 아닙니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미국 뉴욕만해도 엄청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인천은 정말 소소합니다.
이는 제가 알기로 1960-70년대 이땅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멸시때문에 이렇게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이 이땅에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이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건 사실상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을 개항(開港)한 이후부터입니다.

개항이후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인천에 들어섰고 그 이후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이후 15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인천을 터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때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과 군벌(軍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양상을 띄는 혼란이 일어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다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더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처음 중국산 면포와 비단등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던 화상(華商)들은 조선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총독부와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사업을 그들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산 면포 등에 대해 일본산 직물들이 싼값에 거래되기 시작하고 총독부에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갑자기 사업에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총독부의 규제를 받아오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국의 나라에서 버틸 수 없던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나 귀국했고 화상들의 사업은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미군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합니다. 패전국 일본과의 교역은 군정 당국이 막아서 일시적으로 인천화상들은 호황을 잠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자 이후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냉전(Cold War)의 영향으로 공산국 중국과 민주주의 국가 한국간의 교역은 중단되고 인천 화상들의 대 중국 교역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선 한국의 군사정부는 중국과의 거래를 불허하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인에 비해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한국정부의 차별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을 보게 되고 이동과 작업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집을 하게 됩니다.

초기 화교들은 포목상이나 잡화점 등 장사를 주로 많이 했지만 이들 업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자 음식점 등 다른 업종에 대한 비중이 많이 커진 것으로 압니다.


근대이후 한국땅에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들만의 기억과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국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된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연구한 책도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2016)

심층 인터뷰를 통한 인류학적 접근을 했던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인천화교들의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입니다.
인천화교협회의 사료를 통한 경제사회사 연구죠. 인천대학교에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인천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화교들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인천의 중국음식을 이야기한다면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짜장면뎐( 프로네시스,2009)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회상에 잠길만한 내용을 처음으로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천 구도심에 가게되면 저는 근처의 유명한 화상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기본 50년 이상된 곳들도 많고 짜장면의 경우 발상지가 인천이라 가면 먹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려스러운 요새의 중국관련 뉴스와 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좋던 싫던 중국인들이이땅에 들어와 산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고 특히 인천의 경우 작지만 아직도 중국화교와 화교들이 제공하는 특유의 중식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화상 중국집을 이야기하면 인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인천 문화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이 상황에 긴장한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들과 서구 유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만이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길어봐야 18세기 이후 나온 개념과 체제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백인 남성들애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860년대까지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들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조강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고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소위 유럽의 근대 이전 동서양은 모두 절대주의 전제왕정 체제였습니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체제도 변질되어 정말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덮어놓고 민주주의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20대 국회의 약 40%의 의원들이 법조인 출신이라고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40%가 법조인인가요? 법조인이 국회를 과다점 유(over represented)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할 여성과 청년 그리고 농민들은 국회에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합니다. 즉,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50-60대 남자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출신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황은 차라리 대의제 만주주의를 악용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소수의 고위 공산당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과 차이가 뭐죠? 두 국가 모두 소위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과정을 이끌어갑니다.

따라서 그 정치체제를 부르는 명칭보다 중요한 건 정말 정치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새 서구의 지식인 층에서 나오는 중국 혐오 발언은 과한 면이 많습니다. 다분히. 인종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 따라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여론주도층도 본인이 미국과 유럽에 사는 것마냥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냅니다.

역사적으로 미국보다 중국과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공이던 전쟁이던 외교 등 무엇이던간에 한국은 중국과 더 오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건 냉전으로 인한 몇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 상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방법이 없어요.

미국이 중국에 적대한다고 덩달아 적대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자살골이죠.

오히려 미국과 일본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일본과의 마찰은 미국과 해결해야 합니다.

인천의 화상들은 100년 이상 한국에 살아온 이웃이란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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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이철승 교수의 두번째 불평등 연구서인 ‘쌀 재난 국가(2021)’을 완독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의 동의여부를 떠나 사회과학적 실증연구의 좋은 사례를 본 것 같아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여태껏 서구의 이론과 사례를 소개하고 번역하는데 치중하고 현재 한국이 직면한 현실분석에 인색한 한국의 연구풍토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식 인사관리제도인 ‘연공제’가 벼농사를 짓던 동아시아 특유의 소농사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고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합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팩트( Fact)를 확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사료로서 확인하려 한다면 사회과학자인 자신은 과거의 상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드물게도 한국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에서 나온 데이터 분석이 가미된 연구서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선례(先例)’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비슷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 있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의 경우입니다.

다른나라의 사례와 이론이 한국에 맞지 않는 건 풍토와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여태 서양이론을 수입한 학자들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분석은 고사하고 왜 어떤 이유로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스스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불과 30여년 만 하더라도 서양학문이 아닌 한국학이나 동양학을 하면 괴짜 취급을 당하기 쉽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누가 연구를 해야 하나요?

서구에서 나온 책 중에서 한국학을 하신 스위스출신 마르티니 도히틀러 박사의 ‘한국의 유교화과정(너머북스,2013)’을 읽고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출신 한국학자 분이 우리도 잘 모르는 가족 친족 제도부터 중세 한국이 어떻게 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한국의 사료를 정리해 두터운 연구서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한국학자가 쓴 연구서를 읽을 때 너무 어려운 용어를 남발해 어렸을 때 나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책들의 저자의 ‘앎’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이가. 개인적으로 문장이 짧고 간결하며 쉬운 글을 쓰시는 분의 지식이 더 깊은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소화되지 않아 보이는 글이라는 건 내용 자체도 소화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가 읽은 연구서 중 역사적 부분을 고찰하고 동시에 역사적 자료를 분석까지 한 한글로 쓰인 책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해외의 이론과 설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이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논쟁할 이유는 없고 그냥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문 367쪽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입니다.

이책은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2019)’와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입니다.

전작이 386세대가 너무 오랜기간(30여년) 동안 연공제라는 인사제도의 덕을 보고 오랫동안 정치 경제권력의 상층부를 독점하다보니 한국의 세대간 불평등이 생겼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이책은 전작에서 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연공제가 어디서 생겼고 언제부터 생겼으며 왜 한국 땅에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연공제가 생긴 이유가 벼농사를 짓는 한국의 소농경제체체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와 조선이후 정착된 과거제도를 통해 국가통치권력과 연결되며 국가를 통한 ‘지대추구’가 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을 소환합니다.

한국에 아직도 제대로된 직무평가기준과 숙련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없다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온대로 편하게 살아온 것이지만 앞으로 바뀐 환경에서 연공제는 과거 발전주의 시대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찿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는 벼농사 시대의 최초한의 구휼만을 미덕으로 알았던 ‘작은정부’는 예상되는 인구감소와 마을과 대가족의 해체와 파편화된 사회구조 속에 보편적 복지마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봅니다.

즉 하루빨리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 ‘빨갱이’소리를 듣는 기막힌 현실에서 실제로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실현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 2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도 정부는 확대 재정정책을 추구하는데 인색하며 아직도 공공의료인프라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계의 부채가 역대급으로 증가하는데도 정부는 세수추계를 잘못 예측하고 OECD국가 중 최저수준의 국가부채 증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재부 관료들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IMF가 정해둔 1990년대 말 작성된 ‘재정준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균형 재정을 주장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작은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의 유효성은 2007-2009 금융위기로 이미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큰정부의 재정 투입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철밥통 기득권인 공무원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재난의 시기인데도 확인할 수 있는 건 공무원들의 ‘영혼없음’을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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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 풍속에 관한 책입니다.

미국 오레곤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의 소장된 작품들을 연구해서 서양 특히 영미권의 지식인들이 일제강점하의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연구한 책입니다.

본문이 총 194쪽 밖에 되지 않으니 약간 학술적인 산문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서구 유럽이 비서구, 특히 중동과 동양( 또는 아시아)를 어떻게 보는지는 특히 비교문학 ( comparative literature)분야에서 그 단초를 제시하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관점입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문예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의 명저 ‘오리엔털리즘( Orientalism, Vintage, 1978)’이 그 이론적 분석틀을 처음 제공했습니다.

한국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따른 서구의 ‘시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azing)’을 다룬 책은 물론 이 책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리엔탈리즘이 기본적으로 동양을 여성적이며 정적인 대상이며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ahistorical) 주체가 아닌 대상 (objective)으로 보고 있으며,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문명국인 서양의 국가들이 비문명적인 동양을 계몽하고 깨우쳐 문명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서양의 백인 남성들이 저지른 폭력과 착취 그리고 식민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소거된 체 겨우 300여년에 이르는 서구 유럽의 경제적 힘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점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변방에 머물렀던 서유럽이 이렇게 오만하고 폭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저질러온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노예무역의 역사를 지우고 고상하게 포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폭력성은 공산주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골수 자본주의자들, 특히 근본주의적 시장자본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을 공격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폭력적인 건 두 체제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튼 한국어로 쓰여진 책 중에서 제 인상에 가장 많이 남은 책은 고미숙 선생이 2001년 출판하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찿아서 (책세상,2001)’입니다.

근대적 신체의 탄생과 병리학과의 관계, 위생관념과 근대개념을 연결시키면서 문명안들인 서양인들이 근대 초기 조선인들을 어떻게 인식했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세여인도 모두 기독교인이고, 모두 중산층이상의 집안에서 여유롭게 교육을 받았던 20세기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베라 잉거슨 (Vera Ingerson)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미국인으로 특히 기독교의 교세가 강하기로 유명한 평안도 선천, 정주, 강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신의 미국여인으로 조선으로 오기 전 전문적인 간호교육을 받았습니다.

평안북도는 일제상점기 이전부터 청과의 사행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에서 한양 다음으로 큰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대외무역이 종사해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서양인들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현재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감히교파가 모두 평안도에서 월남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우 반공 세력이 나온 지역이면서도 또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진출한 반일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한 곳입니다.

조선말기 19세기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는 아래의 책을 참조바랍니다.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다음 인물인 거트루드 워너(Gertrude Warner)는 시카고 출신의 아시아 유물 컬렉터로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중국과 일본의 고미술품과 풍속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글 서두에서 소개된 시카고 대학 교수인 프레드릭 스타(Fredrick Starr)외의 인연으로 그가 ‘조선불교’에 대한 강연 관련 조선의 불교 관련 사진과 슬라이드를 사들이기도 했던 그녀는 세번째 주인공인 영국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외의 친분으로 조선의 고미술품과 사진을 더욱 많이 수집하고 키스의 목판화를 다수 소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책뿐만 아니라 이미 그녀의 목판화에 대한 책들이 한국에 출판되어 있어 낯설지 않은 화가입니다.

세명 중 유일하게 영국출신이고 일본에 오랫동안 살았던 일본통 독신여성입니다. 일본에서 목판화 (우키요에, Ukiyoe, 浮世絵)를 배워 자신의 사실적인 회풍에 접목시킨 화가로 유명합니다.

최근 그녀의 저서 중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책과함께,2020)’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책은 그녀가 1946년 런던에서 출판한 ‘’Old Korea’를 번역한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에 처음 입국해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을 직접 목격해 조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가졌던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이책은 저자가 언급했듯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례연구’에 해당됩니다.

대부분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활동한 영미권 여성들에 해당되는 사례이지만 서구 특히 영미권의 오리엔털리즘은 극복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확대와 관련하여 중국에 대한 거짓정보가 내외신 가리지 않고 난무했던 사실이나 최근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커지자 영미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거론하는 듯 백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도를 넘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서구문명이 중국에 뒤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내제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7세기-20세기를 제외하고 중국이 문명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들은 그래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까지만 해도 별볼일 없던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이미 일본을 추월한 상태여서 일본을 아시아 정책의 축으로 삼았던 미국에서 격렬한 반응이 더 나오는 것 같습니다. 군사적 긴장이지만 그 내면에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고 서구의 오만함(arrogance)이 깔려 있습니다.

정치와 예술은 별개의 분야가 아니고 무의식과 행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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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1968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관련된 책입니다.

Beyond Vietnam: The United States and Asia(Alfred. A. Knopf,1968)


위의 책이 오늘 소개할 책으로 출간된 지 53년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서를 소개하는 건 1968년 당시의 상황을 당시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당시의 상황이 현대사로 포함되어 있어 현재시점에서 비교가 가능한 것도 고서를 읽는 이유입니다.

1968년이면 아직 베트남전쟁(1960-1975)이 종결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1965년 한국과 일본사이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고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저자 라이샤우워 교수는 1961-1965년 기간동안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분으로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아직 농업국가였고 경제개발계획이 진행중이었으며 아직 경부고속도로도 완공되기 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 國共內戰,1927-1950)을 숭리로 이끈 마오쩌뚱(毛澤東)이 아직 살아있었고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1965년 북베트남에 대규모 폭격을 했지만 전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남베트남 지역에서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에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는 방법을 찿는데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전문가인 저자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로 다른 저개발된 아시아의 나라와 다르고 미국의 중요한 아시아정책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한국과 만주에서 식민화를 시킨 역사는 고스란히 설명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패전이후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시켰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언급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 시대 전범과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시켜 두 사회의 체제붕괴를 막고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세력에 대응하는 봉쇄정선을 구축했습니다. 미국입장에서 패전이전까지 일본이었던 한국에서 친일파들이 일제 당시의 직무를 그대로 해방 후에도 하는 건 미국이 묵인하고 당시 아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입장에서 취할 단기적 해결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일본과 한국에서의 미국 점령군(occupied force)이 행한 군정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세계대전 당시 육군정보 계통에서 일을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연구를 한 미국의 제1세대 일본/동아시아 전문가로서 1961-1965년까지 주일대사를 지낸 분이라서 아무래도 친일적인 성향이 보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1965년 도쿄올림픽도 치루고 해서 아시아에서 선진국 반열에 든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컸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인 중국을 봉쇄하는 차원에서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당시는 미국이 중국을 인정하지 않고 장개석 (蔣介石) 총통이 다스리는 타이완을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도 국공내전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간 장 총통의 타이완이 미완의 내전의 결과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고,현재 중국-타이완 관계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정책과 타이완의 ‘독립정책’이 충돌하는데다가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미군 해군기지 존재+세계최대 반도체 와이퍼 생산국)으로 인해 미국-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50여년 전 중국의 경제규모가 보잘 것 없는 후진국이고 중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이 고려할 바가 없는 정도라고 생각된 것인데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은 이미 일본을 넘어섰고 군사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와 미국과 서구유럽권에서는 현재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고 중국과의 전쟁가능성까지 나오고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사안입니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거의 황화(黃禍, yellow peril)로 생각될 정도로 매우 무자비합니다.

서구유럽권과 영미권 선진국들이 18세기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힘을 인식하게 되고 헤게모니 자체가 흔들리게 되자 위기감이 증폭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기감이 커지자 서구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저술과 강연들을 지속하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미개함을 강조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소수의 엘리트와 부자 중심의 과두정치체제(oligarchy)로 변해가고 있고 불평등이 심화해 가고 있는데 한가하게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건 좀 어딘가 어설퍼 보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철저히 미국 국무부 담당자 입장에서 쓰여진 미국의 국익 극대화 방안에 따른 책이고 1968년 당시 미국은 국공내전 이후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사실과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험이 당시 최대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 참전에서 미국의 국익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찿을 수 있던 역사적 교훈이라고 설명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평가하면서 아직도 미국외교가 19세기의 외교를 답습하고 있고 서구중심적 외교로 일관하여 비서구권인 아시아에 대한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1968년 당시 미국에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 아시아 언어에 능통한 지역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불안정한 저개발국이 대부분인 아시아 지역은 당시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지역으로 결국 미국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결국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다고 보았으며 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인 일본이 그 선도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우위는 2021년 현재까지도 유효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말하지 않은 행간에 결국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잠복해 있는 셈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선택해 중국의 해양진출울 봉쇄(containment)하는 교두보로 삼았고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 본토를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타이완에 행한 식민지 지배 역사를 묻어둔 체 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에 몰두하게 한 셈입니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민족주의(nationalism)가 확산되고 민족분쟁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것은 지역의 문제로 관여하지 않고 미국은 단지 은행가처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조를 각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맞게 자원분배의 역할만 하는 것이 더 맞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결정은 각국이 하고 미국은 단순히 지원만 해야 미국에게 전가되는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일본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분의 주장이 상당부분 실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확인을 해보지 않아서 아직 뭐라 더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요새 1960년대에 나온 책을 몇 권 읽어보니 왜 사람들이 고서를 찿아 읽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당대의 현안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평가를 내렸고 어떤 의견을 내는 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외교와 각국 국제관계 상황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20세기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외교의 한 장면이 역사화되는 과정을 1968년 출판된 저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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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님께서 2000년 출간하신 논문집으로 고종통치기인 조선말과 대한제국 초창기의 통치상황을 ‘사료’로서 검증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고종시대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시각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합니다.

이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이를 주도한 ‘급진 개화파 ‘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이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들이 한국최초의 근대개혁세력이었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친일개화파를 긍정하는 관점이 바로 전통적인 관점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한국의 ‘개화사상사’를 서술한 책이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 입니다.

이 관점에서 친러세력인 민비는 수구세력으로 그려지고, 고종은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별 역할이 없는 조선의 무력한 전제군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근대화에 대한 행동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사람은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으로 망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고종시대사를 읽는 관점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며 사료검증을 시작한 연구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이태진 교수님의 원래 주분야가 조선사이기 때문에 이 책에는 고종이 영향을 받은 선대의 임금인 정조의 통치방식과 정치관이 고종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18세기-20세기초를 아우르는 근세사/근대사로서 전통적인 (혹은 친일적인) 관점과 대비되는 이 책의 논점은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입장에서 개화를 추구한 전제군주로서 유교의 통치방식에 서양의 근대화를 접목시키려 했다는 점입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연구하시는 정통 역사학자입장에서도19세기를 지배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족세력의 세도정치는 정상으로 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안동 김씨를 비롯한 과거 세도정치가들은 ‘명문’이라고 치켜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19세기의 국정농단(国政垄断)세력일 뿐입니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이익집단일 뿐입니다. 조선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정조 사후 19세기 내내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를 알고 있는 고종은 정조를 본받아 사대부가 아닌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민국론 (民國論)적 입장의 통치를 합니다. 전제군주이지만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지 사대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주장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세도정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상당히 급진적 주장이지만 이 주장은 철인군주러고 알려졌던 정조때부터 주장되었어온 통치론입니다. 고종은 정조를 본받기 위해 19세기 내내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을 다시 세우고 정조의 민국론을 본받아 조선의 국왕으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집스런 쇄국론(鎖國論)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역시 평가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조선이 개화를 해야 하는데 유교적 쇄국론에 매몰되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흥선대원군은 평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내내 조선정치를 주무르던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끊어버린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 편견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한말 그중 대원군 시기만 고찰한 자료는 찿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통치기의 일부로 항상 인식되어 왔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대원군 시기의 조선이 어떠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서도 평가가 완전히 상반됩니다. 전통적인 설명에서 민비는 수구파이며 민씨 척족세력을 등에 업은 근대화를 방해하는 인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극히 친일적 시각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 동해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일본이 지극히 경계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다면,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알고 있는 조선 왕가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과거 근대사 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일본의 외교문서 등의 사료만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 일본에 유리한 해석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시대를 보면 따라서 외척인 민씨일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좀 있습니다. 외척이며 세도가인것처럼 보이지만 민씨 중에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조선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분분투한 인물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환(閔泳煥,1861-1905)으로 고종의 특명을 받고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1895년 니콜라이2세 대관식때 러시아를 다녀온 인물로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분입니다. 이분이 남긴 ‘해천주범(海天秋帆)’이라는 사행서는 드물게 미주와 유럽 그리고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애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합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알려진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여 머물며 현재의 덕수궁인 경우궁으로 궁궐을 옮겨 환궁합니다.

명치유신이후 조선을 넘보던 일본은 친러파로서 그리고 고종의 국정 파트너이기도 한 명성황후를 시해해 승기를 잡은 줄 알았으나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移御)로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1896년 당시 일본운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이어 이후 고종은 당시 친일내각을 모두 사임시키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종래의 청국과의 책봉관계를 완전히 종식시킵니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와 관련해서 러시아쪽 사료에 근거한 연구서인 김영수교수의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청일전쟁 전까지 청국은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주재시키고 조선을 청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훼방 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병자호란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 그리고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화이론적 조공책봉 관계가 19세기 들어 근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청국의 방해를 제치고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실제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은 청국의 방해로 매우 늦어졌습니다.

이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한제국 당시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에 관한 내용입니다.

- 18-19세기 서울의 근대적 도시발달 양상(p307-356)
-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 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 사업(p357-386)

이 내용은 서울의 근대적 도시경관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18세기 정조시기까지 소급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상업발달 상황과 한강 주변의 상업활동과 이에 따른 서울 성곽 바깥지역의 인구증가 추계도 같이 고찰합니다.

이 글이 흥미로운 것은 흔히 시구개정 (市區改正) 사업이 서울의 근대적 경관을 만들게 된 시초이고 이는 조선총독부가 최초로 실시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이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가운데, 사구개정 사업아 최초의 근대적 서울경관개조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입니다.

잘 알다시피 고종 당시 이미 전력회사와 전차가 서울을 운행하기 시작했고 이 일은 고종과 조선정주 그리고 미국인 사업가들이 함께 벌인 도시개조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총괄한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과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은 모두 미국 워싱턴 DC의 조선공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고종이 워싱턴 DC를 모델로 서울을 근대도시로 개조하려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이 글은 현재 서울의 경관이 언제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느냐에 대한 공간적 관심에 따라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친일성향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듯 일본이 없었으면 조선의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반박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고종이 근대화를 진행한 광무개혁(光武改革)의 진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이 급히 러일전쟁을 치루고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발전 속도가 빨라 식민지로 만들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고종 연간에 시행된 ‘광무개혁’과 서울개조사업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두가지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끝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정조에 대한 평가문제입니다. 정조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다양하 고 상충되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태진 교수는 정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유지하시는 대표적인 분으로 정조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근대적인 군주로 보았습니다. 정조의 긍정적인 정책들이 그대로 고종에게 이어졌다고 보고 있고 이 책은 고종이 정조의 정책 계승자로 인식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정조가 철저한 유교적 보수주의자로 조선의 결국 기득권층인 사대부 계급과 같은 노선을 걸은 군주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정조는 분명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철인 정치가 ‘로서 군주 개인의 학식과 자질로서 양반 사대부를 압도했던 인물이며 철저한 뛰어난 근본주의적 성리학자입니다. 그의 뛰어난 통치력과 자질은 정조가 사대부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와 정조 사후 자질이 그와 같지 않은 어린 임금이 등장한 이후 잇따라 왕비의 척족세력이 정권을 잡는 19세기의 세도정치가 이러지면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본인만이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난 정조의 치세가 결국 후대에 세도정치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전제정치에 대한 시각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전제정치는 ‘나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서구 편향적 인식으로 조선과 같은 왕조사를 보는데 적합한 시각이 아닙니다.

근대화를 거쳐 계급이 붕괴된 사회는 그 역사가 길어봐야 200여년 남짓입니다.

공산독재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전제주의적 왕정은 근대 이전 이미 1000년도 넘게 지속해 왔습니다.

따라서 전제정치 자체가 나쁘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과거를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고종의 경우는 맹목적 전제왕정을 펼친 것이 아니죠. 개화를 추구하는 전제왕정이었습니다. 왕정에서 주권은 왕에게 있고 재정권도 왕에게 있었습니다. 조선의 경우 이런 전제 왕정이 500년 이상 지속된 겁니다. 따라서 군주인 고종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과 주권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주권이 있는 왕에 반해 백성들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근대적 공화정을 주장하고 근대적 의회를 주장한다면 바로 ‘역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실제로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후 상해로 망명을 갔다가 살해 당하고 이후 역적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됩니다. 역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고종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따르지 않았다고 그가 근대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고루한 군주라는 평가는 따라서 정당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건 2021년의 생각이지 1890년대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사회가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을 보고 한국울 무시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그 나라가 지난 1980년대 ‘Japan as no.1’이라고 칭송되었던 일본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전한 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이 나라가 선진국이 맞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의 외양을 갖춘 것도 1945년 패망이후 미군의 점령치하에서 수정헌법이 도입되고 미국식 제도가 이식된 것으로 한국처럼 자발적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1860년대 이래 천황의 지배 아래 놓인 왕조국가일 뿐입니다.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자민당 일당 독재의 나라이고 국회의원들은 세습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나라이면서도 본인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입을 닫습니다.
허울뿐인 서구화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벌어집니다.

일본은 묵시적으로 아직도 이토 히로부미가 기초한 흠정헌법(欽定憲法)에 따른 천황중심제 전제국가로 보이고 일본 극우들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 국가적 면모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자신들의 기여가 크다고 주장하는 것도 현재 모든 것이 공허해져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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