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님께서 2000년 출간하신 논문집으로 고종통치기인 조선말과 대한제국 초창기의 통치상황을 ‘사료’로서 검증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고종시대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시각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합니다.
이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이를 주도한 ‘급진 개화파 ‘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이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들이 한국최초의 근대개혁세력이었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친일개화파를 긍정하는 관점이 바로 전통적인 관점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한국의 ‘개화사상사’를 서술한 책이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 입니다.
이 관점에서 친러세력인 민비는 수구세력으로 그려지고, 고종은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별 역할이 없는 조선의 무력한 전제군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근대화에 대한 행동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사람은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으로 망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고종시대사를 읽는 관점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며 사료검증을 시작한 연구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이태진 교수님의 원래 주분야가 조선사이기 때문에 이 책에는 고종이 영향을 받은 선대의 임금인 정조의 통치방식과 정치관이 고종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18세기-20세기초를 아우르는 근세사/근대사로서 전통적인 (혹은 친일적인) 관점과 대비되는 이 책의 논점은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입장에서 개화를 추구한 전제군주로서 유교의 통치방식에 서양의 근대화를 접목시키려 했다는 점입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연구하시는 정통 역사학자입장에서도19세기를 지배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족세력의 세도정치는 정상으로 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안동 김씨를 비롯한 과거 세도정치가들은 ‘명문’이라고 치켜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19세기의 국정농단(国政垄断)세력일 뿐입니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이익집단일 뿐입니다. 조선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정조 사후 19세기 내내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를 알고 있는 고종은 정조를 본받아 사대부가 아닌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민국론 (民國論)적 입장의 통치를 합니다. 전제군주이지만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지 사대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주장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세도정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상당히 급진적 주장이지만 이 주장은 철인군주러고 알려졌던 정조때부터 주장되었어온 통치론입니다. 고종은 정조를 본받기 위해 19세기 내내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을 다시 세우고 정조의 민국론을 본받아 조선의 국왕으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집스런 쇄국론(鎖國論)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역시 평가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조선이 개화를 해야 하는데 유교적 쇄국론에 매몰되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흥선대원군은 평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내내 조선정치를 주무르던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끊어버린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 편견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한말 그중 대원군 시기만 고찰한 자료는 찿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통치기의 일부로 항상 인식되어 왔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대원군 시기의 조선이 어떠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서도 평가가 완전히 상반됩니다. 전통적인 설명에서 민비는 수구파이며 민씨 척족세력을 등에 업은 근대화를 방해하는 인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극히 친일적 시각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 동해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일본이 지극히 경계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다면,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알고 있는 조선 왕가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과거 근대사 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일본의 외교문서 등의 사료만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 일본에 유리한 해석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시대를 보면 따라서 외척인 민씨일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좀 있습니다. 외척이며 세도가인것처럼 보이지만 민씨 중에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조선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분분투한 인물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환(閔泳煥,1861-1905)으로 고종의 특명을 받고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1895년 니콜라이2세 대관식때 러시아를 다녀온 인물로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분입니다. 이분이 남긴 ‘해천주범(海天秋帆)’이라는 사행서는 드물게 미주와 유럽 그리고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애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합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알려진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여 머물며 현재의 덕수궁인 경우궁으로 궁궐을 옮겨 환궁합니다.
명치유신이후 조선을 넘보던 일본은 친러파로서 그리고 고종의 국정 파트너이기도 한 명성황후를 시해해 승기를 잡은 줄 알았으나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移御)로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1896년 당시 일본운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이어 이후 고종은 당시 친일내각을 모두 사임시키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종래의 청국과의 책봉관계를 완전히 종식시킵니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와 관련해서 러시아쪽 사료에 근거한 연구서인 김영수교수의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청일전쟁 전까지 청국은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주재시키고 조선을 청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훼방 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병자호란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 그리고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화이론적 조공책봉 관계가 19세기 들어 근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청국의 방해를 제치고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실제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은 청국의 방해로 매우 늦어졌습니다.
이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한제국 당시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에 관한 내용입니다.
- 18-19세기 서울의 근대적 도시발달 양상(p307-356)
-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 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 사업(p357-386)
이 내용은 서울의 근대적 도시경관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18세기 정조시기까지 소급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상업발달 상황과 한강 주변의 상업활동과 이에 따른 서울 성곽 바깥지역의 인구증가 추계도 같이 고찰합니다.
이 글이 흥미로운 것은 흔히 시구개정 (市區改正) 사업이 서울의 근대적 경관을 만들게 된 시초이고 이는 조선총독부가 최초로 실시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이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가운데, 사구개정 사업아 최초의 근대적 서울경관개조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입니다.
잘 알다시피 고종 당시 이미 전력회사와 전차가 서울을 운행하기 시작했고 이 일은 고종과 조선정주 그리고 미국인 사업가들이 함께 벌인 도시개조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총괄한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과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은 모두 미국 워싱턴 DC의 조선공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고종이 워싱턴 DC를 모델로 서울을 근대도시로 개조하려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이 글은 현재 서울의 경관이 언제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느냐에 대한 공간적 관심에 따라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친일성향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듯 일본이 없었으면 조선의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반박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고종이 근대화를 진행한 광무개혁(光武改革)의 진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이 급히 러일전쟁을 치루고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발전 속도가 빨라 식민지로 만들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고종 연간에 시행된 ‘광무개혁’과 서울개조사업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두가지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끝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정조에 대한 평가문제입니다. 정조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다양하 고 상충되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태진 교수는 정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유지하시는 대표적인 분으로 정조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근대적인 군주로 보았습니다. 정조의 긍정적인 정책들이 그대로 고종에게 이어졌다고 보고 있고 이 책은 고종이 정조의 정책 계승자로 인식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정조가 철저한 유교적 보수주의자로 조선의 결국 기득권층인 사대부 계급과 같은 노선을 걸은 군주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정조는 분명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철인 정치가 ‘로서 군주 개인의 학식과 자질로서 양반 사대부를 압도했던 인물이며 철저한 뛰어난 근본주의적 성리학자입니다. 그의 뛰어난 통치력과 자질은 정조가 사대부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와 정조 사후 자질이 그와 같지 않은 어린 임금이 등장한 이후 잇따라 왕비의 척족세력이 정권을 잡는 19세기의 세도정치가 이러지면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본인만이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난 정조의 치세가 결국 후대에 세도정치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전제정치에 대한 시각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전제정치는 ‘나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서구 편향적 인식으로 조선과 같은 왕조사를 보는데 적합한 시각이 아닙니다.
근대화를 거쳐 계급이 붕괴된 사회는 그 역사가 길어봐야 200여년 남짓입니다.
공산독재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전제주의적 왕정은 근대 이전 이미 1000년도 넘게 지속해 왔습니다.
따라서 전제정치 자체가 나쁘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과거를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고종의 경우는 맹목적 전제왕정을 펼친 것이 아니죠. 개화를 추구하는 전제왕정이었습니다. 왕정에서 주권은 왕에게 있고 재정권도 왕에게 있었습니다. 조선의 경우 이런 전제 왕정이 500년 이상 지속된 겁니다. 따라서 군주인 고종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과 주권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주권이 있는 왕에 반해 백성들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근대적 공화정을 주장하고 근대적 의회를 주장한다면 바로 ‘역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실제로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후 상해로 망명을 갔다가 살해 당하고 이후 역적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됩니다. 역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고종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따르지 않았다고 그가 근대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고루한 군주라는 평가는 따라서 정당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건 2021년의 생각이지 1890년대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사회가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을 보고 한국울 무시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그 나라가 지난 1980년대 ‘Japan as no.1’이라고 칭송되었던 일본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전한 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이 나라가 선진국이 맞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의 외양을 갖춘 것도 1945년 패망이후 미군의 점령치하에서 수정헌법이 도입되고 미국식 제도가 이식된 것으로 한국처럼 자발적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1860년대 이래 천황의 지배 아래 놓인 왕조국가일 뿐입니다.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자민당 일당 독재의 나라이고 국회의원들은 세습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나라이면서도 본인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입을 닫습니다.
허울뿐인 서구화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벌어집니다.
일본은 묵시적으로 아직도 이토 히로부미가 기초한 흠정헌법(欽定憲法)에 따른 천황중심제 전제국가로 보이고 일본 극우들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 국가적 면모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자신들의 기여가 크다고 주장하는 것도 현재 모든 것이 공허해져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