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지주제와 소작정책의 식민성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12
최은진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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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소작정책이 어떠했는지 정리한 소책자.
책 말미의 참고문헌이 잘 정리되어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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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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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회구조에 관한 책으로 저자의 강의안을 정리한 책입니다.

사회학적인 계급론적 측면과 법제적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선의 신분제를 다루었습니다.

조선의 전기부터 후기까지 포괄한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의 사회구조및 계급에 대해 고찰하고 조선의 정치. 경제를 제도적 측면에서 고찰했습니다.

핵심적인 사항위주로 정리되어 있어 가독성이 훌륭합니다.

이 책은 조선의 신분제를 전혀 새로운 학설로 여겨지는 양천제(良賤制)로 보고 왜 조선이 양천제를 시행한 사회인지 설명합니다.

여태 우리가 알고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계층 신분 사회라는 주장은 일제 초기 다나카 도쿠타로 (田中德太郞)라는 조선총독부 통역관이 조선 사회에 대해 쓴 유람기에서 유래했고 연구논문이 아닌 피상적 관찰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주장이 고착화되어 교과서에까지 실린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출처를 밝히고 조속히 수정되었으면 합니다.

신분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책은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정의하는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에 대해 설명합니다.

양인은 사대부를 포함한 일반적인 상민(常民)을 말하며 군주의 통치대상의 모든 백성을 말합니다. 천민은 죄를 지어 형사적 처벌을 받아 상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신분을 말합니다.

따라서 법제적 관점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면 천민은 존재할 수없는 신분입이다.

양인 신분은 과거에 합격해 정부관리가 된 사대부와 일반 양인으로 나누어집니다.

저자에 따르면 사대부는 국왕을 도와 조선사회를 통치하는 지배계층으로 철저하게 능력에 따른 선발제도를 거쳐 선발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 계급과 양인 사이에 차별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으나 16세기 중종대를 거치며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유교화되고 그 차별이 고착화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대부와 양인 모두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오직 천민 신분인 노비들만 이런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국왕의 통치대상이 아니고 신민으로 취급받지 못해 신민의 의무도 질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 천민인 노비는 대부분 지주계급인 사대부 가문의 농업생산과 기타 여러 잡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중앙정계에서 국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 물질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조선 중기가 지나고 후기로 갈수록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는 조선이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가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서구학자의 주장이 노비=농노로 보는 일반적인 서구학자들의 개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노비가 다른 사회의 노예와 다른 점은 ‘인격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으로 단지 재산취급을 받고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고대 로마의 노예나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노예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사대부 계급의 존재로 인해 국왕의 왕권이 많이 제한되었던 나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만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거나 최소 많은 제약을 가했던 나라입니다.

국왕의 왕권이 네차례 ( 태종, 세조, 중종, 인조) 찬탈(簒奪)되었고 건국 초기인 태종 때를 제외한 나머지 세정은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국가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고 군신관계가 부모 자식관계와 같다고 여겨지던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끝의 두번의 왕위찬탈은 반정(反正), 즉 옳지 못한 것이 바로잡힌다는 명분으로 사대부들에게 인식되어 사대부의 권력이 사실상 국왕을 능가하는 상황을 정당화해주는 계기가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조선을 현재와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최소 사회의 모순은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사대부 지배계급이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의리 (義理)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펼쳤으나 물질적 기반을 등한시하고 국방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상관(堂上官)이상의 거의 모든 고위관리가 문관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16세기 이후의 전란이나 외국과의 분쟁에 휘말릴 때 물질적 군사적 고려를 할 수 없는 지배층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단지 조선 후기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이 매우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둘째 조선 사대부가 추종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민생중심보다 자신의 정신적 수련을 강조하는 수기(修己)중심이다 보니 아무래도 사회를 보는 시각이 결여되고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에 치우칠 위험이 존재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金尙憲,1570-1652)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성리학자들이 얼마나 대책없고 무모했는지 소설과 영화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청군에 맞서 변변한 군사력도 없이 남한산성이 갇혀 공성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신세인데도, 백성들 생각은 안하고 명과의 의리만 생각하고 해결책을 내놓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조선이 토지를 비롯한 재산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강조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제 정치 체제였지만 조선의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보았고 실제 농지의 매매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농지 이외의 땅은 모두 국가소유로 보고 모든 백성들이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재적 발전론 관점에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고 체계화시키기 노력한 책이지만 계급적 관점에서 조선사회를 바라본 점은 신선했지만 경제문제는 사적소유권이 인정되었다는 점 말고 경제 자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인상입니다.

사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조세제도 이외에 다른 설명이 부족한 건 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조선은 굉장히 독특하게 경제를 운용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런 경제체제도 후기에 들어 소수의 문벌과 외척세력의 영향 아래 들어가 결국 조선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조선의 경제관련문제는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제를 주로 공부해서 그런지,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보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는데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경제와 국방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선의 역사를 서구 학자들이 보는 틀에 맞출 필요도 없지만 조선이 산업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나라였는지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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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계승범 교수님이 2014년 쓰신 16세기 중종 당시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조선의 유교화 과정 (Confucian transformation)을 다룬 책입니다.

제가 두번째로 읽은 계승범 교수의 책입니다.
첫번째는 ‘정지된 시간(2011, 서강대 출판부)’로 19세기 고종말까지 이어진 조선의 ‘대명사대의식’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정지된 시간’에서 보여준 극단적 대명사대의식이 언제 누구로부터 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전기 (15-16세기) 정치사와 조선의 성리학 수용과정을 살핍니다.

몇가지 중요한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선이 유학을 정치원리로 삼아 건국하였지만, 조선의 정치현실은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고, 왕권의 권위가 없고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태조에 대한 태종의 왕위찬탈, 단종에대한 세조의 왕위찬탈이 일어났고, 중종도 사실상의 왕위찬탈로 보위에 오릅니다. 17세기 인조 역시 왕위찬탈로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찬탈(王位簒奪)이란 왕이 될 수 없는 자가 왕이 된다는 말로 특히 유교국가의 근본이 어느정도 정립된 이후에 일어난 세조의 단종폐위와 욍위찬탈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폐하고 중종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도 반정으로 포장되었으나 신하가 욍을 폐위시키고 유배시켰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15세기 조선은 명을 중원을 통치하는 대국으로 보았지만 절대적인 천하(天下)의 중심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즉 고려말부터 유학 특히 성리학이 정치권에 영향을 미쳤지만 명을 절대적으로 보고 사대(事大)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정치사상운동으로 사림(士林)이 등장하고 유교적 덕목인 의리(義理)의 가치를 절대시하게 되자, 조선은 스스로 천자인 중국의 번국 (藩國)으로서 명에대한 사대를 단순 외교관계이상의 부자관계, 천륜관계로 절대화합니다.

이는 이후 일어나는 임진왜란으로 대명사대관계가 더욱 절대시되고 인조때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처한 현실과 극심한 모순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셋째, 기존의 조선전기 학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저자가 강단역사학의 주류인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이 아니고 미국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워싱턴 대학(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공부를 하신 이력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단 사학에서는 그리고 교과서에서 사림은 지방에서 은거하던 유학자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해서 조선의 정치에서 영향을 준 것으로 설명을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즉 편의적으로 조선의 사대부를 훈구(勳舊)와 사림으로 나누어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지배계층으로 설명하지만 이 이론의 역사적 근거가 없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기록과 족보를 봤을 때 사림과 훈구는 서로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얽혀있고 무엇보다 공신이나 훈구세력으로 분류된 인사들 중 사림에 우호적이거나 최소 묵인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사림의 출신지는 지방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한양이었고, 심지어 고려이래 명문거족의 자제나 공신의 자제 등 훈구세력으로 불려도 무방한 자제들이 사림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람은 훈구와 지향점이 다른 같은 사대부이자 조선의 지배층으로 한양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림을 훈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획계층 또는 새로운 계급으로 봐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16세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유교적 의리를 절대시하면서 각종 물질적 가치를 폄하하고,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절대시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성리학으로 바뀝니다.

이때 유교화 과정에서 일어난 이런 의리 중심의 가치 절대화는 성리학적 사대부가 대지주이자 지배층으로 무한한 권력을 누리지만 경제와 군사에 힘을 쏟지 않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부실한 군사문제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전쟁이 임진왜란이고, 왜란 후에도 군비증강에 손을 넣고, 절대적 대명사대주의에 빠져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다가 공격을 받은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의리만 중시하고 경제적 이익이나 군사문제는 군자(君子)의 일이 아니며 격이 낮은 소인(小人)이나 하는 일이라며 폄하했습니다.

조선 지배계층의 이런 절대주의적 성리학적 시각을 감안할 때, 두번의 전란을 겪고도 나라가 거의 망할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변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불만이 쌓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명을 섬기는 지금 입장에서 이해할 수없는 의식을 19세기 말까지 이어온 겁니다.

끝으로 ‘유교화 과정(Confucian Transformation)’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즉 조선이 고려 당시의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바뀐다는 말인데, 이책에서는 조선이 점진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변화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1388)이라는 극적인 정변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화는 계기가 되었지만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지배계층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 혁명(Revolution)의 요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고려 말 성리학이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이래 고려의 지배층이 성리학을 정치지배원리로 받아들였고, 점차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사회로 퍼져나가 16세기 중종 때 조선에 정치원리이자 사회통치원리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교화 과정’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읽었던 ‘한국의 유교화 과정(2013)’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은 정치과정보다 조선사회의 기반인 가족(家族), 친족(親族), 결혼제도가 고려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관찰한 책입니다.

유교사회에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보다 중요한 천륜(天倫)으로 이해되는 만큼 유교의 종법(宗法)과 관련된 분야를 살피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 가계의 족보가 부계(父系)를 따라 정리되고 남자가 가는 장가가 여자가 오는 시집으로 바뀌는 것 모두 조선의 유교화 영향으로 그 이전에 없던 현상이라는데 주목합니다.

인류학적 방법론을 쓴 위의 책이나 각종 사료를 분석하고 장기사 (長期史)의 관점에서 조선전기 유교화 과정의 원인 결과를 추적한 이 책 모두 조선이 어느날 갑자기 유교국가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조선사 자체가 교과서에서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해방이후 처음 조선전기의 역사를 훈구-사림의 대립구도로 설명한 이병도( 李丙燾1896-1989)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병도씨의 이력을 보면 일본 유학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후 서울대애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습니다. 아무튼 이후 이병도의 훈구-사림 대립구도는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고,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가설에 지나지 않고 사료들이 증명하는 바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훈구-사림은 지향이 다른 같은 지배층으로 한양의 중앙정치무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사대부계층일 뿐이고, 조선의 지식유통단계로 보더라도 중국과 직접 교류가 쉬운 한양이 성리학의 최신 사조를 더 쉽게 접할 수 있지 지방에 사림이 근거한다는 설명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최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나 비주류를 자처하는 학자들 중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사료에서 증거도 찿을 수 없는 과거의 이론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자의 양심의 문제이지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병도씨의 이론이 도그마(dogma)가 되어 새로운 시각의 이론을 배격한다면 이는 작게는 한국의 학계에 그리고 넓게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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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전력산업의 역사를 다룬 전문 역사서입니다.

보기드문 경제사 전문서이며 여러 기간 산업 중 전기. 전력 발전. 배송전 사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종( 高宗, 이 책에서는 광무황제, 光武皇帝로 지칭) 당시 미국의 콜브란과 황실합작으로 전기사업을 시작하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기 전까지 대한제국 내내 미국의 콜브란은 거의 독점적으로 전차 전등 사업을 영위하고 막대한 이윤을 챙겼는데, 여기에는 고종이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이권을 주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한성전기로 사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의 전력회사는 이후 한미전기회사로 전환되고, 정세 변화에 따라 러일전쟁이후 콜브란은 지분을 일본에 넘기고 이후 일한와사(日韓瓦斯)라는 회사로 통합됩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마국과는 비밀협정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지배를 서로 용인하면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데어도어 루즈벨트는 일제의 조선지배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정치인으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일제 강제병합에 관련이 있으니 따로 이사람에 대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거류민촌이 남산 아래 충무로에서 용산지역으로 확장되자 을사늑약 전까지 콜브란의 한미전기회사가 추진한 용산쪽으로의 전차노선 확장은 일본이 계획했던 경인선 철도의 이권과 충돌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일본은 조선병합 이전부터 미국과의 이권갈등을 겪었고 콜브란의 정치노선을 경인철도와 연계하기 위한 갖가지 공작을 펼쳤습니다.

전력산업이 경제발전과 도시화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조선의 농업문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문제, 도시확장 문제가 거론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무력점령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후 조선의 전력산업을 재편합니다.

최초 조선의 지리적 요건이 수력발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한 후 화력발전을 위주로 산업정책방향을 잡았으나 조선의 하천이 유역변경식 발전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수력발전 위주로 전력발전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서부터 해방전까지 조선의 전력생산은 수력이 주력이고 화력은 부수적인 설비로 개편되고 80%이상의 수력발전이 한반도 북쪽에 몰리게 됩니다. 북쪽은 장진강 수력발전이 주력이고 남쪽은 영월화력발전이 주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전기발전사업과 배전사업은 모두 총독부가 일본의 민간기업인 닛치스 (日室)에게 경영을 일임했습니다. 사실상 조선의 전력사업을 일본의 민간 기업의 영향 아래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불균형적인 전기발전산업의 양상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대립이 격화되고 결국 남북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당시 한반도 남쪽의 전력서정이 극도로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됩니다.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북한지역에 있어 북한이 전력공급을 중단할 경우 단전의 우려가 커져 미군정당국이 북한과 전력공급협상을 해야 했습니다.

헌국전쟁을 거치며 남한지역의 전력부족은 현실로 나타났고 1950년대 한국의 경제관료들 사이에는 자본이 초기 많이 투하되도 경제성이 좋은 수력발전위주로 전력산업발전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미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원을 틀어쥐고 있던 미군정 당국은 빠른 시일내 건설할 수 있는 도시 주위의 화력발전 위주로 가야한가고 주장했습니다.

즉 미국이 단기적이고 투입대비 결과가 좋은 방식을 선호해 대체로 한국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불리한 방식을 택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본 기억이 나는게 미군정의 대한정책이 대체로 ‘현상유지’애 만족했고 편의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이 해방 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익때문에 한국에 왔지만 솔직히 한국인의 생활은 별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분단이후 노후화된 영월화력발전을 대신해 북한강 수계의 청평, 화천수력발전이 남한지역 전기발전의 주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60년대 장면 정권 당시는 전력사업의 국영화에 중대한 고비를 맞는 시점으로 이해됩니다. 1954년 헌법개정 당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기간산업의 ‘국영화’조항이 삭제되고
전력사업에 대한 민영화의 길이 열린후 1961년 5.16군사정변이전까지 장면정부는 사실상 전력사업의 민영화의 기틀을 잡습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무력 쿠데타 이후 기존의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전력을 출범시키고 전기산업을 국영화 했습니다. 군사정권은 전기사업을 전면 국영화한 것은 아니고 민간업자의 사업참여를 인정해 사실상 그 전 장면정권과 정책면에서 차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즉 1961년부터 한국의 전기산업은 국영과 민영이 공존하는 체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총평을 할까 합니다.

산업정책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있다면 개별산업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한국전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기발전, 전기배송전 사업이 어떤 과정울 거치며 발전해 왔는지 그 개요를 설명해줍니다. 이책의 각 3부는 사실 각각 독립된 저서가 되어야 마땅할 내용입니다.

특히 일제가 만든 북한 중심의 수력발전형태와 그 장기적 영향은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상당히 많은 저서들은 미군정의 통치정책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이후 한국의 대기업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보려면 미군정의 경제정책도 다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번째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 대해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되게 유포되는 정보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장 언급할 수 있는 건 박정희 군사정부가 실행한 경제정책의 상당수가 전임 장면정권에서 입안되었고, 훗날 군사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자유주의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군사정권 이전에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건우 교수께서 2017년 펴낸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느티나무책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장 한국 전력도 장면정권의 법률안을 일부 수정해 적용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박정희 정권때문에 경제개발을 잘했다라는 ‘오해’는 더이상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한국의 산업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외세의 영향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시끄러운 용산지역은 오랜세월 외세가 점령했던 땅입니다.

가깝게는 한국 전쟁이후 주한미군의 부근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일본인촌이 있던 지역입니다.
현재 동부이촌동이 아직도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 역시 용산입니다. 한강하구가 지금처럼 막혀있지 않았던 시기 산동반도를 통해 황해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만나는 곳이 용산이기 때문에 이렇게 옛날부터 용산이 군사요충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일제가 한국의 전력사업의 초기 구조에 영향을 미친 사실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부정적 의미에서입니다.

오직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전력발전을 한반도 북부에 편중된 상태로 건설되었고, 그 영향은 일제가 패망 후 20여년 이상 지난 자그마치 1960-70년대까지 미쳤습니다.

한반도 남쪽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 전력부족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는 해방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쟁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의 후속으로 군사정권 이후 전력사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60-2010년 시기의 전력산업사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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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홍콩 -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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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민주화운동 취재기입니다.

오랫동안 관광지로 유명했던 홍콩에 대해 가이드북을 만들어왔던 저자가 2016-2019년을 뒤흔들었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르포를 썼습니다.

홍콩하면 딤섬과 완탕면이 생각나는 분들이라면 홍콩이 마주한 정치현실에 대해 이 책이 작은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홍콩이 지금의 홍콩이 된 것은 1842년에 일어난 아편전쟁때문이었고, 이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1997년까지 영국의 총독이 통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유산인 것이죠.

1984년 덩샤오핑(鄧小平)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기 위한 카드로 영국의 마거렛 대처 정부에게 주창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 즉 하나의 국가 안에 두개의 제도를 유지하자는 정치체제는 홍콩과 중국의 관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체제로 지탱되었던 홍콩의 서구적 개인주의적 자유는중국이 통치를 시작한 이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고 홍콩과중국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 과정을그리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입장에서는 타이완이나 홍콩이나 모두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베이징의 관할 하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역사적으로 1949년 공산주의 중국 수립을 전후해서 공산 중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만든 사회인 타이완과 홍콩은 항상 중국 중앙정부와 마찰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습니다.

홍콩의 경우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정치적 격변을 맞게 됩니다.

이책에 대한 느낌이 개인적으로 남다른 것은 2019년 말 홍콩이공대학에서 공성전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2020년 3월 홍콩에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시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아 홍콩의 MTR을 타고 어느 역을 가지 말아야 하는지 잔뜩 긴장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침 방문지역이 센트럴과 가까운 코즈웨이베이라 더 홍콩의 시위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간 홍콩에 있다 귀국했는데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2013년 홍콩의 침사추이를 방문하고 두번째 방문이었는데, 당시 홍콩인들이 왜 모두 거리에 쏟아져 나왔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르포를 보면서 어렴풋이나마 홍콩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우산혁명(2016)과 2019년의 민주화시위릏 이해하려면 좀더 시간을 거슬러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를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부도 1949년 천인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었고, 더 시간을 거슬러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의 종전을 고하며 그 이후 체제를 규정했던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중국 청년들의 항의를 계기로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1919년,1949년 그리고 1989년 중국 현대사의 획을 그은 사건이 모두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겁니다.

1989년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는 중국 지도부를 경악에 빠뜨렸고 체제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부는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나서 홍콩이 영국의 손에서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자 영국의 자유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던 홍콩인들에 대해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로의 순응을 요구했고, 중국의 손에 홍콩이 넘어간 이후 많은 홍콩인들이 호주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영국으로 떠났고 영연방 국가로 가지 못한 이들은 타이완으로 이주했습니다.

공산 중국을 떠나 만들어졌던 홍콩 사회에서는 비록 떠나지 못해도 공산주의 권위주의 통치체제에 대한 반감이 있어왔고, 영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자유롭게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중국 공산주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중국인으로 살 수도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1997년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홍콩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기 전까지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고백을 합니다.

중국으로 홍콩이 넘어간 후 일국양제가 끝난 이후 홍콩을 떠나려 했던 홍콩 젊은이들이 홍콩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신들의 정체성 자각에 대한 증언이 보입니다.

한국이 민주화된 나라로 홍콩인들에게 소환되는 것도 눈여겨 볼 지점이기도 합니다.

홍콩은 확실히 중국과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중국의 상하이와 홍콩을 모두 가보았지만 상하이가 그 규모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압도된다면 홍콩은 남국의 정서와 어우러진 묘한 영국풍이 인상적인 도시입니다. 단지 말이 중국 보통어와 광동어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 상하이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지만 홍콩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큰 차이입니다.

2000년 이전에 홍콩을 다녀온 적이 없어 1990년대의 영국령 홍콩은 저에게 어렸을 때 본 왕가위 감독의 영화’중경삼림(重慶森林,1994)’의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온통 ‘유통기한’에 집착하던 주인공의 모습으로요.

하지만 영국령 홍콩이 이미 사라졌고, 홍콩이 중국 땅이 되면서 이전에 우리가 알던 홍콩영화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슬퍼지기는 합니다.

얼마전 들은 이야기인데, 제도적으로 홍콩이 점점 중국의 정치체제에 흡수되어 가는 건 맞는 것 같으나 개인들 수준에서는 가령 홍콩 사람이 중국 상하이에 살고 있다면 아직도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전히 오랫동안 다른 체제 아래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질감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표지를 보면 여행 에세이처럼 생겼지만 내용은 홍콩과 중국간의 정치와 정체성에 대한 글이고 불가피하게 영국과 중국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300여쪽의 짧은 글이니 한번 정독해도 될 듯 합니다.
한 홍콩인 가족을 인터뷰하고 그일생을 같이 반추해보는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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