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
김선주 지음, 김범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9월
평점 :
하버드대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김선주 교수의 ‘1812년 홍경래난’에 대한 연구서입니다.
저자가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이전까지 ‘홍경래난’을 설명했던 방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 반란을 설명합니다.
저자의 관점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청북 지역( 청천강 이북지역)에서 발생한 홍경래난은 이 지역(평안도지역) 지배층이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한양의 경화사족 (京華士族) 중심의 권력독점과 지역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청북지역의 지배층이 일으킨 반란입니다.
따라서 이 반란을 봉건지주층과 농민층과의 충돌에 의한 것이라는 계급투쟁적 관점의 설명이 유효하지도 않고, 사료적 뒷받침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사료로 볼 때 농민층이 지배층인 양반에게 반란을 일으킨 기록은 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설명방식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 한양의 중앙조정세력들은 평안도지역 지배층인 이 지역출신 양반들이 제대로된 유교적 교양도 없고 무예만을 숭상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가 안정되고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쌓아가고 많은 이 지역 양반자재들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도 이들을 고위공직에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이들을 차별해서 이들이 중앙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샛째, 이에 더해 향안을 통해 서북지역 재정에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던 서북지역 양반들의 의사에 반하여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지방재정에 개입해 그들의 부를 수탈해 가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중앙조정은 분명히 서북지역 양반들이 가진 경제적 힘을 과소평가했고 정조 사후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 노론세력들의 일방적 권력독점 아래 당시 조선에서 한양다음으로 경제력이 컸던 평안도 양반들이 요구하는 ‘사회적 지위 보장’을 무시했던 것이 이 반란의 원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홍경래난은 그래서 조선왕조의 사대부정치가 균열을 일으키고, 지역을 고려하지 않은 한양중심의 일방적 정치방식이 정조사후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함께 악화일로를 걸어 지방 지배층의 반발을 일으켰고, 이일이 일어난 지역이 북쪽지방에서 가장 상업경제가 발달한 평안도 지역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홍경래난이 발생했던 평안도 정주, 박천, 선천, 철산, 용천 등은 현재도 북한지역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해방이후 보수의 원류를 이루었던 사상계지의 지식인들도 공교롭게도 대부분 위에서 언급한 평안도 출신들이고, 미국의 북장로교가 개항이후 일제시대에 전략적으로 선교지역으로 정한 지역도 바로 평안도 지역입니다.
예전부터 청으로 사행을 떠나려면 지나쳐야만 하는 곳이 평안도였고 특히 압록강 하구의 의주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청과의 교류가 있었고 병자호란 당시부터 청나라에 진출한 서양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조선내내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주의 여진족들과도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이런 특성이 이 지역의 개방성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북한의 핵심지역이 평안도인데도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서북지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살펴보았는데 지역의 인문적 연구를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은 충격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 어떠하든, 보수 진보를 떠나서 오랫동안 역사의 중심지였던 지역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