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음 / 까치 / 2015년 4월
평점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한국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초대 통감 (統監)으로 기억되는 일본의 정치가입니다.
또한 1909년 하얼빈 역전에서 안중근 (安重根)의사에게 저격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에 더 촛점이 가 있지 그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사실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 정치가로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의 원훈 (元勳, 임금이 신뢰하는 늙은 신하)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정치 사법체계를 설계한 메이지 (明治)의 설계자입니다.
이책의 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계급사회인 막부(幕府)시대 말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무사 (武士)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슈번 (長州藩) 출신의 번벌(藩閥) 세력의 일원이 되어가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메이지의 설계자로서 메이지 일본의 헌법, 사법제도,의회제도, 정당제도 그리고 외교가로서의 일본의 국제관계에 공헌하는 이토의 모습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떻게 조선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대 조선통감이 되어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기반을 다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보호통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실상의 내정을 장악하고 제도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후임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寺内正毅)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병탄 (倂呑)은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책의 성격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가로서의 일생에 대한 전기 (Biography)의 성격을 띄면서 에도 막부 말부터 메이지 시대 정치사를 포괄하는 성격을 띱니다.
내용을 다 들여다 볼 수는 없고 중요한 몇가지만 짚고 가려고 합니다.
첫째, 일본의 사료,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한 이 글을 가해자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특히 1904년 이토 히로부미의 첫 대한제국 방문 이후의 모든 기록이 일본 측 기록밖에 없고 대한제국 측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료가 일본 측의 것 밖에 없어 생기는 역사의 관점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기록을 중요시한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는데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한국인들은 스스로 독립을 지킬 수 없는 민족이다
2. 대한제국의 군주(고종)과 지배층은 시대정신과 국가관이 없었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했다
3. 일본의 한반도 진출은 침략이 아니라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힌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4. 일본이 취한 한국의 보호조치는 한국인의 문명화와 식산흥업을 위한 것이었다
5. 이토 히로부미는 침략자가 아니라 문명의 사도였다
6. 의병은 세상물정 모르는 폭도였다
7.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위의 이런 관점은 그 자체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타자화시켜서 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에서 비서구를 바라보는 문명/비문명, 우등/열등의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통치'라는 정치행위는 철저히 대한제국이 '일본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조선의 정신은 '미개하다'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되고 '일본화'될 것을 추구합니다. 소위 보호통치 시기에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이토의 통치 후반기인 헌병통치기간 더 노골화되고, 이후 대한제국의 병탄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의 '일본화'를 더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일본유학'으로 조선황족의 '일본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일본화'의 영향은 1910년 병탄이후 진행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매우 긴 영향을 남겼습니다.
다섯째, 이런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보호통치의 원형을 영국의 이집트 지배모델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이집트 영국영사 크로머경 (Lord Cromer)은 1882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를 식민통치 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크로머경의 식민통치 방식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크로머 경에 대한 문헌을 보아야 다시 확인이 되겠지만 아무튼 이토는 거의 그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상이 제가 좀 더 눈여겨 본 사안들입니다.
흥미로운 몇가지를 좀 더 부가하자면, 메이지 초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長州)와 사츠마(薩摩) 출신 인사들이 유럽,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돌아본 이와쿠라 사절단 (岩倉使節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토는 평생동지이던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의 도움으로 이 사절단에 참여하여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와 친분을 다지고 메이지 권력의 중심부에 더 접근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이 사절단 활동을 통해 이토는 또한명의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와도 인연을 맺게 되어 초기 조슈에서의 그의 주군이었던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와 정치적으로 소원해지는 관계가 됩니다. 기도 다카요시는 막말 이토 히로부미가 정계로 진출할 때 그의 배경이 되었던 조슈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하지만 권력지향적 성격을 가진 이토는 과거의 주군을 버리고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이 최초로 본격적으로 서구의 문명을 시찰한 사절이라는 의미에서 일본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실제 이 사절단의 구미시찰이후 메이지 일본의 기본적인 실력양성방안이 설정되고 발전되었지만 정치사적 측면에서 그 이전 조연에 불과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중앙의 거물 정치가로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입니다.
또하나, 이 책에는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많이 내용이 부족합니다.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내용 자체가 책 한권에 담기는 무리이지만 아무튼 청일전쟁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과 일본의 중국 랴오둥 반도 점령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열강 3국이 간섭한 삼국간섭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 정계는 최초로 제국주의적 활동을 대외적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열강들의 시각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고 이후 언제나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등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에 더욱 신중해지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모든 과정에서 있어 언제나 열강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확인하는 것을 철저하게 여겼습니다. 뒤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선의 식민화를 실행시키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하얼빈에서도 러시아의 실력자인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그곳을 찿았던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탄정책을 실제로 집행하기 전 중국과 만주의 정세를 살피고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여 외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개인적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러시아는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한국의 극우세력들과 연햡전선을 펴는 듯 보이고,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전 총리의 손자인 아베 현 일본 총리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기 위해 정치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기시감 (Dejavu)를 요즘처럼 느끼게 되는 경우가 흔치 않는 것 같습니다.
이책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죠. 과연 조선이 그렇게 미개한 나라였는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측 사료를 보아야 알 수는 있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직도 일본을 너무 표면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메이지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직접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일본의 시각으로 서구를 바라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도 대부분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하기 이전 후기 조선의 '서학'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일본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조선 고유의 시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명이 서학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어떤 경우든 상대방을 잘 알아야 어떤 전략이든 어떤 대화든 어떤 외교든 승리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일본의 과거를 다시 되집어 봐야 하는 이유이고 그들의 과거 결정사항을 복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제일 끝에 나온 몇마디 구절을 소개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통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 중략 ---
"일본 측은 기록에 반대되는 기록은 지워버렸거나 개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