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음 / 까치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한국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초대 통감 (統監)으로 기억되는 일본의 정치가입니다.

또한 1909년 하얼빈 역전에서 안중근 (安重根)의사에게 저격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에 더 촛점이 가 있지 그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사실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 정치가로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의 원훈 (元勳, 임금이 신뢰하는 늙은 신하)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정치 사법체계를 설계한 메이지 (明治)의 설계자입니다.

이책의 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계급사회인 막부(幕府)시대 말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무사 (武士)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슈번 (長州藩) 출신의 번벌(藩閥) 세력의 일원이 되어가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메이지의 설계자로서 메이지 일본의 헌법, 사법제도,의회제도, 정당제도 그리고 외교가로서의 일본의 국제관계에 공헌하는 이토의 모습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떻게 조선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대 조선통감이 되어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기반을 다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보호통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실상의 내정을 장악하고 제도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후임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

 

 

 

 

 

 

셋째, 위의 이런 관점은 그 자체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타자화시켜서 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에서 비서구를 바라보는 문명/비문명, 우등/열등의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통치'라는 정치행위는 철저히 대한제국이 '일본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조선의 정신은 '미개하다'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되고 '일본화'될 것을 추구합니다. 소위 보호통치 시기에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이토의 통치 후반기인 헌병통치기간 더 노골화되고, 이후 대한제국의 병탄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의 '일본화'를 더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일본유학'으로 조선황족의 '일본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일본화'의 영향은 1910년 병탄이후 진행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매우 긴 영향을 남겼습니다.

 

다섯째, 이런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보호통치의 원형을 영국의 이집트 지배모델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이집트 영국영사 크로머경 (Lord Cromer)은 1882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를 식민통치 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크로머경의 식민통치 방식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크로머 경에 대한 문헌을 보아야 다시 확인이 되겠지만 아무튼 이토는 거의 그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상이 제가 좀 더 눈여겨 본 사안들입니다.

 

흥미로운 몇가지를 좀 더 부가하자면, 메이지 초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長州)와 사츠마(薩摩) 출신 인사들이 유럽,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돌아본 이와쿠라 사절단 (岩倉使節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토는 평생동지이던 이노우에 가오루 (

 

또하나, 이 책에는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많이 내용이 부족합니다.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내용 자체가 책 한권에 담기는 무리이지만 아무튼 청일전쟁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과  일본의 중국 랴오둥 반도 점령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열강 3국이 간섭한 삼국간섭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 정계는 최초로 제국주의적 활동을 대외적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열강들의 시각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고 이후 언제나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등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에 더욱 신중해지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모든 과정에서 있어 언제나 열강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확인하는 것을 철저하게 여겼습니다. 뒤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선의 식민화를 실행시키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하얼빈에서도 러시아의 실력자인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그곳을 찿았던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탄정책을 실제로 집행하기 전 중국과 만주의 정세를 살피고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여 외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개인적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러시아는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한국의 극우세력들과 연햡전선을 펴는 듯 보이고,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

 

이책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죠. 과연 조선이 그렇게 미개한 나라였는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측 사료를 보아야 알 수는 있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직도 일본을 너무 표면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메이지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직접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일본의 시각으로 서구를 바라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도 대부분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하기 이전 후기 조선의 '서학'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일본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조선 고유의 시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명이 서학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제일 끝에 나온 몇마디 구절을 소개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통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 중략 --- 

 

"일본 측은 기록에 반대되는 기록은 지워버렸거나 개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만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제가 설립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Elite) 교육기관으로 일본 뿐만아니라 조선의 식민지 엘리트도 같이 양성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한 이후 미군정에 의해 '제국대학'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제국대학은 일본제국의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장 뛰어난 수재들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최신의 '근대학문'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철저한 차별교육을 행했던 일제는 조선 땅에서 사실상 '고등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아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은 보통 10여년 넘는 기간동안 일본에서 지내면서 중학교-고등학교- 제국대학의 모든 과정을 배워야 했습니다

10대 감수성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일본어를 통애 시와 소설을 읽게 되니 사실상 이들의 정체성 (identity)는 일본인으로 만들어 집니다.
모든 사고를 일본의 시각을 통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땅과 조선인들을 철저히 '타자'로 인식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도 일제 식민 말기 교육을 받았던 원로라고 불리는 고위 관료 출신들이 아직도 일본을 어려워하고 일본어가 편하다는 발언을 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소위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계 원로라는 분들을 청와대에서 모아 의견을 듣는데 일본의 애로사항을 '일본어'로 청취하고 논의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대법원이 의도적으로 개입해 '강제징용' 관련 판결을 늦추고 행정부와 거래한 사법농단만이 문제가 아니라 원로라는 분들의 이런 태도는 다분히 일제 강점기의 교육이 한국에 남겨놓은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협상이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 (attitude)가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면 한국의 소위 원로들이 보여준 지나치게 협조적인 태도는 일본이 한국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식민지 조선의 엘리듵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제국대학 (帝国大学)은 1886년 근대 일본의 초대 대각 출범 당시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일본제국대학령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총 9개의 학교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도호쿠,나고야,오사카,타이코구 그리고 게이조 혹은 경성)가 세워졌는데, 대만에 설립되었던 타이코구제국대학과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본토에 세워졌습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연구를 위해 프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 개인적으로 당시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를 존경하였기 떄문에 초기 프러시아의 제도를 많이 받아 들이는데, 대학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즉 제국대학들은 모두 프러시아의 대학을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철저하게 차별적 교육정책을 시행했는데 유일한 제국대학인 경성제대를 제외하고는 연희전문, 보성전문으로 대표되는 전문학교들이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 중 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대학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화 '동주(2016, 이준익 감독)'으로 잘 알려진 송몽규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한국에 크게 두가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번째는 현대 한국의 근대적 헌정질서 (憲政秩序)를 수립한데 기여한 것입니다.
한국 '제헌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유진오 박사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인사입니다.
한국의 제헌헌법(制憲憲法)은 유진오 박사와 조선 총독부에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제국대학 졸업생들이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당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밖에 없었고 임시정부 인사들도 일단 이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에 공화국 정체 ( 政體, forms of government)를 구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 현실적 사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들이 근대 한국의 한국과 지식사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에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상당수의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졸업 후 조선 총독부의 관료가 되거나 각급 학교의 교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초기 한국의 지식사회는 이들 제국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됩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을 정립시켰다는 평을 듣는 이병도부터 한글학회를 만들어 국어학의 기틀을 잡은 외솔 최현배 선생까지 모두 제국대학 졸업생들입니다.

한국은 '근대 (Modern)'의 개념을 서양으로보터 직접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어의 흔적과 일본식 번역에 의한 용어들이 일상생활에 존재합니다. 교육을 통한 일제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꼬리를 한국에 그대로 드리우고 있습니다.

최근 기존의 전형적인 역사해석 (conventional interpretation)을 배격하고 좀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학자들으 그저 학문의 소명이란 서양학문 또는 일본으로 들어온 서양학문의 수입으로 알았습니다.
제대로된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고, 그나마 해제가 제대로 달린 책들이 나오기 시작된 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제가 접하게 되는 영어권 학자들의 책을 보면 우선 분량에서 기가 질립니다. 한 주제에 대해 800-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즐비하고 그중 약 200 페이지는 주석과 참고문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책들은 그런 정도의 심도와 근거를 가진 책을 보기 힘듭니다.

한국의 연구환경이 아직 영어권에 비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외부인로서 추정하게 될 뿐입니다.

두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려 합니다.

하나는 어릴 적 보았던 기억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만 해도 잡지와 책은 모두 일본식으로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책은 모두 세로쓰기가 되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문고판과 유사한 작은 문고판 책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렸을 때 기억에 남겨졌던 이런 것들이 모두 일본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일본에 가보고 알았습니다.

두번째로 이책의 성격입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이책은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의 행적을 연구한 첫 연구서로 주로 도쿄/교토제국대학 졸업생들을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한국의 지식인/기득권 층의 기원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시작을 한 것으로 앞으로 후속연구가 필요한 것이지요.

요 근래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둘러싼 공방으로 한국에서 '엘리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국민을 계몽대상으로만 여기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주무른다는 사실이 어느정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이 책에서 언급된 인사들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임정, 거절당한 정부
이해영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사실 매우 슬픕니다.

제목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사회, 특히 미 중 영 소 4대 열강으로 부터 정부로서의 ‘ 승인 ‘ 을 거절당했습니다.

중국 상해(上海)와 충칭 (重慶)에 주재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 해방 당시까지 오랜기간 망명정부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 (趙素昻) 선생이 백방으로 노력을 했음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망명정부로서 열강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는 대외적인 요인과 대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대내적으로 한국독립운동 진영이 열강이 생각과는 반대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연해주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독립 운동 진영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었고 상해 중심의 임시정부 쪽은 망명정부의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력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열강들은 독립운동진영이 ‘분열’되었다고 보았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 영국,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한 세력으로만 보려고 한 것입니다.

소련은 연해주 중심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세력이 향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 볼때 더 선호되기 때문에 상해와 충칭에 있었던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할 이유가 더더욱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는 결국 절대적 패권을 거머쥔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통치를 겪은 나라들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실시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잡았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대표성을 가진 망명 정부도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의 국민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여 이런 정책 방향을 잡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제2차세계대전의 질서를 구축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방어하는 현재의 미국 대 아시아 전략의 기본 틀을 잡습니다.

한국은 그저 전후 처리 대상으로서 일본에 종속된 체 처리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러합니다.

하지만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을 못받았다는 것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무장독립운동이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을 위한 이런 정치활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이 책은 2018년 개최된 망명정부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결과물로 소품과 같은 글입니다.

짧은 글임에도 공식 외교문서를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책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출판된 여러 책 중 하나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대해 나름 간략한 소개는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프랑스의 망명정부였던 자유프랑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런던에 망명해 있던 자유 프랑스는 힘과 실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땅을 연합군보다 먼저 밟았고 이런 행위는 프랑스를 신탁 통치하려던 미국의 프랑스 정책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드골 (Charles De Gaulle)은 연합군과 미국이 꺼려했음에도 전후 프랑스 정치를 이끄는 정치가가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바라던 일이 프랑스에서는 일어났으나 한반도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Sub Prime Mortgage) 대출회사의 파산으로 시작된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서술한 책입니다.

특히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필자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서 경제위기를 대처하는 미국의 정책라인의 제일선에서 일했기 때문에 제3자가 해석이 아닌 직접적 증언 ( first hand account)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전임 앨런 그린스펀( Alan Greenspan) 연준 의장 재임시 유지된 저금리 정책과 그로인해 촉발된 부동산 가격 의 폭등이 2007년 부동산 가격의 하락과 더불어 부동산을 담보 (collateral)로 설정되어 있던 모기지 대출이 부실화되면서 시작된 경제위기 입니다.

특히 신용상태가 좋지 않았던 저소득자들은 부동산 버블시기 생애 처음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아용해 주택을 구입했으나 주택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대출 원리금이 상승하고 이에 따라 상환불능 상태에 빠지고 서브 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부실화되어 모기지 대출회사는 파산을 신청하게 됩니다.

이에 더해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포함해 다른 여러 대출을 섞어 증권화(securitization)시켜 자본시장에 팔던 거대 은행들도 자산이 부실화되면서 유동성위기에 처하게 되어 1929년 대공황이후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 economic crisis)에 처하게 됩니다. 이 2007-2009년 세계경제위기는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전설적인 마이스트로 ( the legendary maestro)로 알려져 있는 앨런 그리스펀 전 연준 의장의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 버블을 촉발시켜 그가 이 경제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앨런 그린스펀의 통화정책과 그의 연준 재임 시절의 이야기는 그의 회고록, The Age of Turbulence (Penguin, 2007)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저도 밴 버냉키 ( Ben S. Bernanke) 의장의 책은 처음 보는데 이분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2007-2009년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The Federal Reserve Board)에 위원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 분은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University)에서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경제학자였습니다.

그러니 경제위기가 닥친 이후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해야 할일과 하면 안되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요.

책의 초반에 이 분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조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출신이고 조모는 폴란드 출신으로 1940년대 초 뉴욕을 거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딜런 ( Dillon, South Carolina)에 정착했습니다. 유태인으로 1960년대 흑백분리정책이 시행되던 남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분이시지요. 이후 하버드와 MIT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스탠퍼드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합니다. 1960-70년대 수리적 경제학을 완성시킨 폴 사무엘슨 (Paul Samuelson)의 영향을 몸소 체험하며 주류경제학계에 몸담아 온 인물입니다.


이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핵심은 2부와 3부로 각각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발 이후의 경제 위기 대처 과정을 담은 부분과 그 영향력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책에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전통적인 정책 결정방식과 미국 의회에서의 정치 과정이 상세하게 나오지만 그보다 더 주목을 받는 것은 2007-2009 세계경제위기를 계기로 고안된 새로운 정책 수단입니다.

이 책에는 두가지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양적완화 (Quantitative Easing: QE)입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단기금리는 부동산 버블 당시 이미 낮은 상태였지만 미국의 경기 침체로 인해 지속적으로 금리인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의 단기금리는 거의 0에 가깝게 유지되게 됩니다.

전통적인 통화정책인 이자율 조정을 통한 정책을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연준은 양적완화라는 새로운 정책수단을 고안해 냅니다. 연준은 미국의 TB (Treasury Bill) 뿐만 아니라 정부보증의 모기지 채권 등을 매수함으로서 경제 전체의 통화량을 늘려갑니다. 정식명칭은 대량 자산 매수 ( Large Scale Asset Purchase)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언론에서 ‘양적완화’라는 용어로 사용되어 정착된 말입니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정책이고 전례가 없어 미 의회는 이 정책이 미국인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을 했습니다.

미국은 이런 예외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불황 ( Recession)과 디플레이션 ( Deflation) 위협에서 서서히 벗어났으나 문제는 경기 회복이 실업률 감소를 동반하지 않고 일어나는 고용없는 성장( Jobless Recovery) 의 경향을 보여 상당기간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시 정권에서 연준 의장으로 지명된 저자는 이후 오바마 정권에서 다시 지명을 받아 두차례 연준 의장을 역임합니다.
오바마 정권 초기 미국의 상하원은 모두 공화당이 장악합니다. 민주당 정권인 오바마 행정부와 미 의회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연준은 양적완화 (Quantitative Easing)라는 예외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미 의회가 균형재정 정책을 고수하며 재정정책의 확장을 거부하여 상당 기간 미국의 경기 회복이 늦어집니다.

연준의 두가지 정책적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여 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 Financial Stability), 동시에 최대 고용 유지 (Maximum Employment)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나 2007-2009년 경제 위기를 거치며 약간의 수정을 거칩니다. 두가지 서로 모순적인 두 정책을 같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Balanced Approach).

화폐경제학자(Monetary Ecomonist)로서 정체성을 고백한 저자는 하지만 디플레이션 위협에 처한 미국과 세계 경제는 단순히 연준과 같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만으로 정상궤도에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정부의 자정확장을 통해 교육과 의료 보험등 복지 분야에 대한 투자가 뒤따라야 국민들의 복지가 향상될 수 있다는 지적은 공감이 됩니다.

두번째 양적완화를 조정하기 위한 정책으로 양적완화의 축소 (Tapering)가 소개됩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연준이 모기지 채권을 비롯한 채권을 사들여 통화량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장기금리의 낮게 유지해왔던 기조를 서서히 바꾸어 점진적으로 연준의 채권매수 규모를 줄이는 것을 말합니다.

경제위기 이후 고용없는 경기 회복기조를 이어가자 양적완화기조는 2009년 이후 거의 5년간 지속됩니다.

지속된 양적완화가 금융시장에 지속적인 저금리 기조를 암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고 , 이 기조 아래에서 금융기관이 또 다시 고수익은 위해 위험 자산에 투자할 요인이 생길 수 있었고, 경제 안정성 확보를 위해 인플레이션에 대처해야 하는 연준 입장에서 테이퍼링 (Tapering)은 반드시 시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책은 하지만 저자가 연준에서 퇴임하고 후임 자넷 엘렌 ( Janet Yellen) 의장이 자리를 이어가 양적완화의 축소는 후임 의장이 완결지어야 하는 정책으로 결론 짓습니다.

본문이 총 579 페이지의 책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정책결정 과정을 서술한 책이라 최소 거시경제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 한 이해가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으로 평가된 2007-2009년의 경제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 , 특히 시카고 학파 위주의 신자유주의 경제학 ( Neoliberal Economics) 이 제대로 된 유용한 경제학이 맞는지, 이들의 경제학이 너무 수리 모형에 치중하고 이론에만 치중하고 실제 경제를 도외시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바로 경제학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공한 이 경제위기는 분명 다시 한 번 복기하고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가 최고위 상류층에 속해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이 군데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본인이 세계 중앙은행장들의 모임에 멤버로 나가고 일종의 멤버십 클럽같다는 표현이 나올 때 저자가 미국 사회의 주류라는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상당히 인식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책에서눈 미국의 주류( Mainstream) 에서 통화정책과 경제위기에 대응하는의사결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지켜보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친구( Friends)와 동료 (Colleagues) 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들 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습니다.

책의 중간 중간 대공황을 전공한 학자답게 과거 미국이 겪었던 경제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1907년의 경제 위기 이후 1913년에야 설립되었고 연준은 미국의 정부기관으로 민관 양쪽에 걸쳐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초기 금융계는 JP Morgan 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은행가 한명에게 좌우되었고 1907년 경제 위기를 구출한 이도 사실 중앙은행이 아니라 JP Morgan이라는 금융업자라는 사실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JP Morgan 의 후계자 중 한명인 Benjamin Strong 은 초기 연방준비은행의 설립에 관여해 현재의 Wall Street의 현재를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영미권에서는 2009년 영국 여왕이 유명한 경제학 대학인 런던경제대학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방문해서 명망있는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경기침체 ( Recession) 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질책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똑똑한 경제학자들이 곧 닥칠 경기침체와 신용경색 ( credit crunch)를 예측하지 못했냐고 말입니다. 여왕이 특정 이슈에 대해 콕 찝어 발언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 경우이고 질문은 경제학이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핵심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학계에서 여러번 인용되었습니다. 경제학의 이제까지의 방법론에 회의가 든 것입니다.

http://www.theguardian.com/uk/2009/jul/26/monarchy-credit-crunch

재무쪽에서 오랜기간 일해 오면서 또 경제학을 공부해 왔고 경제에 관련된 여러 책을 읽어 오면서 많은 이들이 경제가 숫자를 다룬다고 수학과 유사한 어떤 체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경제는 숫자가 아니고 매일 매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기반입니다. 그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죠. 이 책에서 보이듯 모든 경제정책과 돈을 쓰는 모든 일은 또한 그 자체로 정치적입니다.

따라서 현재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체계는 사실 ‘정치경제학 ‘ 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고 최초에는 또 그렇게 불리기도 했습니다.

경제학 커리큘럼에 따라서 경제체계의 역사적 시각을 보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Dennis Kim > 대공황을 촉발시킨 서구의 중앙은행장들

일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은 1920년대, 즉 1918년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미국과 유럽,특히 영국, 독일, 프랑스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그 와중에 서구 제국의 중앙은행들이 세계경제의 회복을 위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어떤 결정을 했는지 자세하게 추적 관찰합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조선공산당 평전( 서해문집, 2017)’ 이 1919년이후 길게는 1930년대 초까지 일제하 조선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를 다룬 것이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된 지구적 영향에 있어 ‘Lords of Finance’의 내용은 배경으로서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191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강화조약( Paris Peace Conference)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미국의 유럽헤게모니 장악도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1920년대까지 금융의 기반으로 작동하던 금본위제( Gold Standard)가 붕괴하고 미국은 당시까지 최악의 대공황 ( The Great Depression)을 겪게 됩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관점에서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1910년대와 이후의 여파가 세계 정치 경제를 결정지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알라고 돌파구를 찿으려 했지만 안타깝게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은 그들의 상대인 소비에트러시아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작업에 매진합니다.

수많은 운동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로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을 찿아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