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는 동안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1960년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당시 강한 충격으로 튕겨져나간 작은 검정 가방 안에서 '쓰다 만 초고'의 상태로 발견된 육필 원고를 편집한 이 소설은 아직 소설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느닷없이 바뀌기도 하고, 판독 불가능한 글자는 빈칸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쓰고 삭제해야 할 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도, 중복된 장도 있는가 하면, 원고 사이사이에 끼여 있던 낱장들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카뮈의 맨 얼굴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소설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다. 다듬어지기 전의 이야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을, 그의 문학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경험이었지만 어쩐지 훔쳐 읽는 것 같은 수치스러운 마음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개방하기 전의 비포장도로를 남몰래 달리듯, 덜컥거리는 생생한 감각으로 한 사람의 삶 속을 허락 없이 침범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감동이 어우러져 있는 이 복잡한 심경 덕분에 카뮈와 이 책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자크 코르므리'는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무엇이든 혼자 알아가야 할 '최초의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역사와 전통이 없는, 장애와 가난마저 짊어지고 있는 그의 가족에겐 그나마의 얄팍한 과거마저도 무의미해진다. 가난한 고아였던 자크의 아버지 역시 '최초의 인간'이었지만, 현재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사망한 후론 가족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곱씹을만한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은 없을뿐더러 오직 현재에 집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크에겐 아무리 가지고 누려도 모자람이 없는 태양이 있고, 미친 듯이 사랑하며, 전심전력으로 사랑받기를 열망하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떨리고 부드럽고 뜨거운 시선이 어찌나 깊은 뜻을 담고 그를 향하고 있었는지 아이는 뒷걸음치며 머뭇거리다가 그만 밖으로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니까> 하고 그는 층계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 (p102)
어릴 때 병을 앓아 미미한 청력을 지닌 어머니는 문맹인 데다가 아주 적은 어휘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말 없는 체념을 강요받아 혼자 격리된 채,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정복된 적 없이, 모습은 아름답지만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채로, 항상 웃음 짓고 있기에, 그의 마음이 어머니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기에 더욱더 접근이 불가능한 채로,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쉬는 날도 없이 고달픈 노동을 반복하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아무런 원한도 없어져 버린, 남의 것이건 내 것이건 일체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듯 한 어머니의 무심한 시선은 늘 발코니 너머의 거리로 향해져 있다. 어머니의 주변엔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자크 역시 그 침묵 앞에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가, 가슴 아픈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어서..... " (p45)
옳고 그름을 알려줄 정신적인 유산도, 따라야 할 권위도 없다 보니 매일매일 새로운 태양처럼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그러니 그 나날들은 첫날의 기쁨이자 채워지지 않는 공허였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아버지가 목격했던 단두대에 대한 이미지는 그가 유일하게 물려받은 유산이자 고통이었다. 하지만 자크에겐, 아니 카뮈에겐 어머니의 침묵이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해주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공허를 이겨낼 수 있을만한, 무한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어머니의 침묵은 오히려 그를 삶으로 치닫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 어머니의 저 탄복할 만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혹은 사랑을 찾으려는 한 사나이의 노력을 다시 한 번 더 그 작품의 중심으로 삼아보겠노라고..... " - 「안과 겉」에 부친 서문, 카뮈
사실 카뮈의 시선엔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에겐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카뮈에게 그토록 예민한 시선을 만들어 준 것은, 삶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준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순수한 침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그 침묵을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더 사랑했고, 그만큼 마음 아파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거리로 향해져 있는 어머니의 무심한 시선은 어디에서든 여전히 카뮈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카뮈에겐 태양이 있었고, 바다가 있었다. 세상이 주는 가장 호화로운 것을 무상으로 받아 온몸으로 누리는 놀이가 있었고, (그 한편으론 현실감각이 뛰어난 할머니의 무정한 채찍질도 있었지만) 내면의 굶주림을 채워 줄 학교와 책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엔 어린 카뮈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다. 카뮈가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분, 알제의 옛 초등학교 스승이신 루이 제르맹이다. 이 소설에도 실명으로 등장하며 따뜻한 일화를 채워가는 그분의 이야기는 장 그르니에와의 연결점만 생각하게 했던 카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았던 카뮈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전문은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수록되어 있는데 카뮈는 그 연설을 루이 제르맹에게 바친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그 당시 가난한 어린 학생이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리고 손수 보여 주신 모범이 없었더라면 그런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 카뮈의 편지, 1957년 11월 19일
「최초의 인간」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그분의 교실에서 어린 자크(어쩌면 카뮈)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느낀다. 또한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삶이 안으로 닫혀 버린 것 같았던 그에게, 세상으로의 출구를 열어 준 것은 기분 좋은 잉크 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책들이었다. 일상의 굶주림보다 더 강렬했던 내면의 굶주림을 책들이 채워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인간'이었기에 알고자 하는 열망은 더더욱 강렬했고,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진부함 역시 쉽게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려받은 정신이 없었기에 자유로운 정신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오랑 지방의 이런 해변에서는 여름 아침이 날마다 세계의 첫 아침 같아 보인다. 황혼은 날마다 이 세상 마지막 황혼인 양, 해질 무렵 온갖 빛깔을 짙게 물들이는 마지막 광선이 장엄한 임종을 알린다. (...) 이곳이야말로 때 묻지 않은 순수의 땅이다. " - 「결혼·여름」, 카뮈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다 보니 그동안 읽었던 그의 다른 책들 역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다녀온 「이방인」의 뫼르소가 하염없이 바라보던 거리의 풍경이, 그 장면의 묘사가 왜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카뮈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쓰지 않았고, 바꾸어 말하면 그가 알고 있는 것만을 꾸밈없이 정직하게 썼던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기에 공허와 침묵을 이해했고, 이 세상의 무심함을 깨달았으며, 그럼에도 매일 다시 태어나 임종을 맞이하는 오랑의 저 해변처럼 새로운 정신을 갈망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을 말이다.
어떤 면에선, 서른 살쯤 이후부터의 나 역시 '최초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전에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매일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태양이자 바다이며, 나의 제르맹 선생님이었던 책들 덕분인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며 오늘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책들 말이다.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카뮈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살아있었다면 명작으로 남게 될 소설이었을 테지만 나는 이 미완의 소설이 고마웠다. 훔쳐 읽는 듯한 미안했던 마음은 이렇게라도 읽은 흔적을 남겨보는 것으로 조금은 덜어보고자 한다..
"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카뮈의 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창작을 택했다.> " - 「카뮈를 추억하며」, 장 그르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