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들을 때면 청각을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진동을 통해 몸과 소리가 서로 공명하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하물며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음원을 듣노라면 음악의 진동이 손으로도 전해져온다. 그래서 가끔씩은 비트나 베이스 음이 강한 음악을 손으로(?) 들어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이 온몸으로 휘감겨오는 느낌이 좋다. 단지 눈으로만 좇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으로 고요히 잠기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는 건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불필요한 끈적임 없이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의 리듬이 몸을 감싸오는 것 같다. 그런데 요 네스뵈의 소설은 잔혹할 땐 굉장히 잔혹한 미스터리 장르이고, 그래서 더 역설적인 매력이 있다. 음악적인 리듬과 미스터리의 만남은 아름다움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더더욱 강렬히 대비시켜주는 것과 같다. 따뜻하지만 냉혹하고, 두렵지만 믿게 된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이 어둠과 밝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하모니를 이루어 간다.

 

 

 

요 네스뵈는 실제로 인기 뮤지션이기도 하단다.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음악을 좋아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글엔 음악이 흐르는 걸 느낀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귀에 직접 속삭이는 것 같다. 이런 작가들은 캐릭터를 잘 만들어 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사에 뛰어난 작가들도 있지만 캐릭터를 끝까지 이끌고 가는 작가들에겐 캐릭터가 이미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음악에 존재하는 리듬처럼 캐릭터의 목소리를 집중력 있게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아들은 내 책장에서 꽤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나에게 주는 언젠가의 선물로 아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성」을 읽을 즈음부터 이어지던 무력감은 쉽게 떨쳐지질 않았었다. 나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될 때마다 가야 할 곳을, 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깨어날 때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내용의 꿈을 꾸고는 한다. 이럴 땐 대개 힐링이 되는 좋은 글, 착한 글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간의 극한적 상황을 다루는 글을 더 선호하므로 요 네스뵈를 선택했다.

 

 

 

육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 왜 이리 얇게 느껴지는지, 최대한 천천히 읽었는데도 너무 빨리 읽는 것은 아닌가 싶어 중간중간 멈추고 딴 일을 하기도 했다. '해리 홀레'도 그렇지만 요 네스뵈의 주인공에겐 마음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보살펴주고 싶고, 이야길 들어주고 싶고, 나도 아무 말이든 계속해서 하고 싶어진다. 나이가 많든 적든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의 주인공 소니는 대놓고 '소년'이라 불린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믿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재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이 가리키는 옳음을 향해 몸을 사리질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기계처럼 완벽하고 철저한 캐릭터보단 냉기와 온기가 공존하며 감성과 생각이 동시에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좋아하게 된다. 상황을 통제하기보단 모든 감각을 열어 놓고 있어, 자신들도 잘 다치지만 강한 캐릭터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유명 뮤지션이기도, 저널리스트, 경제학자이기도 하단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엔 단지 음악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오슬로의 어두운 실상들, 인간성의 면면들이 설명이 아닌 묘사를 통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상황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여 나가는지를 묘사해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주저하고 갈등하지만 그 선을 넘어보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처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소설에서나마 비극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

 

 

 

실제로 요 네스뵈의 이 말은 꽤 효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고서 최악의 기분이 되었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어떤 색의 감정은 비슷한 색으로 해소되는 걸 느낀다. 인간의 잔악함과 나약함,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상황마다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삶엔 동화 같은 환상은 없다는 걸,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걸 알지만 다시 한 번의 그 깨달음으로 오히려 평온해지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니 말이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

 

 

 

이는 최근에 읽은 「정희진처럼 읽기」의 문장 중 하나이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악에는 애초에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라고 말한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다. 악에는 의도가 아닌 의지가 있을 뿐이라고 정희진은 말한다.

 

 

 

나는 늘 긍정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완전한 긍정은 완전한 부정이 될 수도 있고, 일종의 회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어둡고 우울한 기운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들 역시 불편한 게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고 자신을 과신하지도, 자학하지도 않으며 늘 내게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는 게 좋다. 그러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순발력 있게 나의 옳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장르소설의 미덕은 독자를 희롱하는 트릭이 아닌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퍼즐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 네스뵈의 소설엔 그런 미덕이 있다. 유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누군가가 강요당하거나 선택했던 그 조각들에 의해 맞추어져 가는 퍼즐 같은 인생을 관조하게 되니 말이다. 동시에 들려오는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을 향해 연주되고 있다. 잔인한 휴식이라고 할까, 요 네스뵈의 습기 없는 서정성을 그래서 좋아한다..

 

 

 

 

 

"모든 아들은 언젠가 자기가 아버지처럼 될 거라고 믿죠. 안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실망하는 거예요. 자신의 결함, 미래의 패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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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30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맛깔나는 표현!!^^
그런 느낌 너무 좋지 않아요?
당장 그 음악을 찾아 내 듣지않곤 못견디게 하는...
글..장르에선..그게 가능한데...
이상해요..
음악을 내내 말하는 하루키는 너무 대놓고 말해서그런지
째즈 이외..나머지는 음악을 불러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거든요.
오히려..이 부분은 북유럽쪽 작가들이 더 탁월해..장르작가들..클래식이든 팝이든 뭐든 음악적 상상을 불러일으켜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1: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소설을 읽다가 음악 찾아 들은 적 정말 많아요^^ 그장소님도 음악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ㅎ

하루키는 음악을 글로 묘사하려는 성향이고, 요 네스뵈는 음악을 품고 글을 쓰는 것 같아요^^ 하루키의 글에선 걷는 것 같은 일정한 리듬감이 느껴진다면, 요 네스뵈에게선 음악으로 전신이 휘감기는 기분이 들어요ㅎ

작가에게 그런 감성이 있어서인지 소설을 읽는데도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한 주파수를 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스릴러물에서 무슨 음악이 들리냐고 핀잔을 주어도 할 말은 없지만ㅎㅎ, 이렇게 공감을 해주시니 좋습니다^^

저도 장르물은 북유럽 스타일과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ㅎ

[그장소] 2015-10-30 22:15   좋아요 2 | URL
그쵸?리드미컬이..관건이네..그래서..하루키는 재즈에서 더 탁월하게 그 감각이 오나봐요.

북유럽쪽은 영화음악부터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진짜..딱 그느낌..스티븐 킹 원작이지만 영화
로는 다들 늦게야 원작자인 줄 알았던 쇼생크 탈출..에서 그 소나기 속 빗줄기 샤워씬 있죠..
음악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다니까요!.
이 사람들은 ..그랑제..막심..다들..만만찮아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2:28   좋아요 1 | URL
˝음악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다니까요!˝ 너무 공감되네요ㅎ 갑자기 영화도 보고 싶고, 음악도 듣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 어떤 것에서든 영감을 받고 감각적으로 열리는 느낌이 정말 좋아요!

[그장소] 2015-10-30 22:35   좋아요 1 | URL
음~~이제..사람만 받아들이면 되는데...ㅋㅋㅋ

물고기자리 2015-10-30 22:3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

[그장소] 2015-10-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 확! 깨죠^^ ㅎ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0-30 22:42   좋아요 1 | URL
전혀요ㅋㅋ 알고 보면 제가 더 깨실걸요?^^

[그장소] 2015-10-3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알고보면..물고기 잡아먹고있는 곰...팅이 자리..그런거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2:46   좋아요 1 | URL
딱 그런거죠!ㅋㅋ^^

[그장소] 2015-10-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후...매력인데...그거!곰도 잡고..물고기도 접고..1석2조!?^^

물고기자리 2015-10-30 22:49   좋아요 1 | URL
그렇게 되나요? ㅋㅋ

[그장소] 2015-10-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0-30 23:03   좋아요 2 | URL
그장소님 만담에 일가견 있으신 건 진작에 알았지만^^ 만담력이 정말 최고이십니다!! 좀 슬픈 발라드를 듣고 있었는데 눈과 귀의 부조화로 인해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ㅋ

[그장소] 2015-10-30 23:04   좋아요 1 | URL
음..오..그런거 무진장 좋아라 하는데...^^
왜..낙엽이 놓고 말하자고..자꾸..그러나요?ㅎㅎㅎ

AgalmA 2015-10-31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댓글 소나타도 듣기 좋네요~

어느 프로파일러가 그러더군요. 우리 모두 살인을 꿈꾸지만, 살인자는 그걸 실행하는 자라고.
제 생각에도 그래요.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면서도 거기 지배당하고 싶어하기도 하죠. 모든 예술과 문학은 그걸 끝없이 말해 왔고요. 자본주의는 완벽히 거기 부합하는 괴물로 커왔고요. 인간은 참 희한한 생물...

2016-05-2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3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법률이나 규칙이 어떻든 생명이란 가장 가치 있고 절대 낭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

- 관전둬


˝죄악에 대항해야 하는 것은 경찰이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니다. ˝

 - 뤄샤오밍

 

 

 

13.67은 홍콩의 경찰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이 2013년부터 1967년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여섯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모음이다. 여섯 개의 단편은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주제를 이어받고, 마지막 편을 읽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개별의 단편이 사건의 해결에 집중하는 추리적 재미를 준다면, 연결된 여섯 개의 단편은 홍콩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사회소설로도 읽힌다. 장르소설의 대체적 흐름이 캐릭터와 문학적인 묘사에 공을 들이는 추세인데 반해 이 소설은 철저히 사건 해결 중심이고, 캐릭터를 통한 사회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이 이 책의 매력이자 장점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찬호께이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성장한 세대로 홍콩 중문 대학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플로차트를 그려놓고 계획한 흐름 안에서 정확하게 움직여가는 듯 한 그의 글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완벽히 부합되는 것 같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를 반영한 각각의 데이터로서 하나의 아웃풋이 다음의 인풋이 되어 순환하는, 우연 같은 필연성의 구조를 보여 준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두 주인공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에겐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각각의 별칭이 있다.

 

 

 

관전둬 - 'CIB(형사정보과)의 천리안'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 탐정.


뤄샤오밍 - '날수신탐'
일처리가 매섭고 추리력이 뛰어난 탐정.

 

 

 

이렇게 두 인물에 대해 요약하고 보면 홍콩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유치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 관전둬에겐 무한한 신뢰를, 뤄샤오밍에겐 지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이다. 그 시기에 경찰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관전둬를 통해 한 도시를, 한 시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전둬는 뤄샤오밍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선배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샤오밍, 사건 수사는 관례를 고수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경찰 조직에는 발전도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매뉴얼대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



1960년대의 좌파폭동, 1970년대의 경찰과 염정공서 분쟁, 1980년대의 강력범죄, 19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을 목도, 2000년대의 사회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 관전둬는 재치 넘치고 노련하면서 고결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단편인 <빌려온 시간>이었는데 이 단편을 통해 소설을 바라보던 시선은 2013년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이 시대의 홍콩에서 관전둬가 선택한 운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공에 감탄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읽기엔 더없이 좋았던 소설이었다. 또한 재능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했고, 선과 악이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재능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능력이 진짜 재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현상을 보든, 책을 읽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들은 결국 나를 통한 선택이란 걸 알게 될수록 더더욱 지혜를 갈망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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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추리작가이자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 레이먼드 챈들러. 그가 만든 사립 탐정 캐릭터인 '필립 말로'는 후대 하드보일드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54년 출간된 기나긴 이별은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장르 소설에 속하지만 문학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영향을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책을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을 만큼 챈들러를 좋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1960년대 내 영웅이었습니다. ˝라고 했고, 그의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의 일부는 「기나긴 이별」의 완벽한 오마주라고 한다. 이 책을 읽어 보니 두 작가의 문체는 표현의 밀도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하루키의 인터뷰 시점은 2004년인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제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 한 권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제 목표랍니다. ˝



사실은 이 문장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뿐만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도 관심이 생겼더랬다. 그래서 조만간 읽어야 할 작가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았고, 하루키 역시 그 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꽤 읽었고, 그의 글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나의 성향상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우선 그 책을 읽었다. 그런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요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언제고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이 소설을 미루지 않고 읽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각각의 책으로도 의미가 있었지만 카라마조프를 인용한 하루키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독서의 연결성을 느끼는 계기도 되었다.



하루키가 글쓰기의 이상이라고 언급한 그 반쪽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는 것 역시 나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집요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면 한동안 그것과 연계된 것들을 두루 탐색하는 성향 덕분에 어떤 해엔 오로지 역사에만 몰두하거나 사회과학만을 탐독하기도 한다. 지금의 추세론 한동안 소설을 읽게 될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그 출발점은 대가들의 인터뷰집인 「작가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몇 년 만에 다시 정독했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책장에서 읽히길 기다리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이 장바구니에서 대기 중이고, 필립 로스의 책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책들을 읽다 보면 연계된 새로운 관심분야가 또 생길 테니 이 독서의 방향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다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로 돌아오면, 챈들러의 문장에 대한 이야길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탐낼만한 문장들이 많았고, 줄거리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은 내용마저도 소음이나 잡담처럼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정묘한 스케치를 하는 듯한 서술들은 작은 사슬들이 서로 연결돼 듯 촘촘히 이어지며 장소나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구체화시켜준다.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만 이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밀한 표현에도 강약과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조절이 미흡한 글을 읽을 때면 음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볼륨을 줄이거나 키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균형 있는 문장력을 지녔더라도 메마른 느낌이 드는 글은 문학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역할만을 한다. 감정적 유형임에도 감정으로 흘러넘치는 문장을 싫어하지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푸석한 느낌을 주는, 인간에 대한 습기가 없는 글엔 마음이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온기도 좋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형식적인 따뜻한 글에는 쉽게 진력을 내는 편이다. 따뜻함이 흘러넘쳐 과하게 친절한 글도 식상하다. 그보단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담담한 문체의 글에서 인간의 슬픔에 공감하는 한 방울의 눈물에 더 마음이 간다. 펑펑 울어버리는 눈물은 자기 설움이 원인일 때가 많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퍼 올리는 마른 습기 한 조각은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그 마지막 편인 「기나긴 이별」이 처음이라 전작의 느낌은 알지 못하지만 챈들러의 글에선 냉소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통찰력과 약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즈음의 장르 소설과 비교하자면 사건에 대한 서술의 비중보단 사색적인 문장들이 많아서 스토리를 통해 지적인 쾌감을 얻고자 하는 성향의 독자들에겐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반대로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조급증이 없고, 사람의 심리나 행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아름다운 문장들과 더불어 시대나 장소에 대한 통찰력을 덤으로 얻지 않을까 싶다.



아직 전부를 알진 못 하지만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필립 말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는, 아직 손님이 들지 않은 막 문을 연 바에서 필립 말로와 함께 '김릿' 한 잔을 마셔보고 싶어진다.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진짜 김릿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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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27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제 추세론 뇌과학, 진화생물학의 개미지옥에 빠진 듯 하여요;ㅋ;)...소설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우흑.

물고기자리 2015-06-27 21:53   좋아요 2 | URL
저도 뇌과학 분야를 좋아하니 리뷰 기다리고 있을게요 ㅎ 행복한 개미지옥에서 건투하세요~

고양이라디오 2017-07-2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좋아요!!! 상당히 공감갑니다^^ 저도 하루키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챈들러를 접해서 그런지 더 반가운 글입니다^^ <기나긴 이별> 훌륭했어요.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립탐정의 하루가 지나갔다. 정확히 전형적인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

 

 

 

레이먼드 챈들러기나긴 이별 시작 부분이다.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대부분 첫 소절에서 마음을 뺐긴다. 음악에 관한한 처음이 마음에 들면 마지막까지 좋아하게 된다. 그만큼 취향이 분명한 편이다. 여러 번 들어봐야 겨우 좋아지는 경우는 없었으니 말이다. 노래를 들을 때도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수의 음색이나 가사에도 예민해서 가창력이나 기교가 지나치게 뛰어난 노래보단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한 인물이 되어 잔잔한 감상을 남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첫 문장을 읽으면 대부분 느낌이 온다. 경험을 넓혀주는 소설이 될지, 좋아하는 소설이 될지 말이다.



서정적이며 섬세하지만, 아무런 꾸밈이 없어 다소 건조하고 무심한 문장들이 나의 취향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글이나 지나친 생략, 은유를 위한 은유, 문장을 가지고 놀려는 기교적인 오만함은 사양하고 싶어진다. 「기나긴 이별」을 읽기로 마음먹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 덕분이다. 이 책은 하루키가 무려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궁금해졌고, 너무 좋아하게 될까 봐 나름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으로 근 한 달간을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그리곤 처음 읽은 저 문장이 뭐라고 몇 번이나 읽었다. 소설 속 캐릭터와 내용을 전혀 모르면서도 감상을 쓰고 싶은 건 아마도 취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몰라도 글을 읽다 보면 어떤 목소리를 통해 글이 들리는 느낌이 든다. 단지 시각적인 정보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첫 문장을 읽으면 문체의 특성에 맞는 나름의 톤이나 리듬이 생긴다. 챈들러의 문장에서는 조용히 휘감기는 서정적인 내밀함과 단단한 근성이 느껴졌다. 하루키가 왜 챈들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키에게 영향을 준 것이겠지만 두 사람의 음색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루키가 좀 더 소년 같은 음색이라면 챈들러는 그보단 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빅 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연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로 기나긴 이별이 마지막 작품인데 어쩐지 읽기 전부터 조금 섭섭하고 아쉬워진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게 뭐라고 싶다가도 그것 덕분에 마음이 즐거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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