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흙과 집은 주인을 잃은 채로 남아 있고, 들판은 다시 숲으로 변하고 있으며, 사람의 집에 동물이 살고 있다. 수백 개의 죽은 전깃줄과 수백 킬로미터의 도로가 의미 없이 연결되어 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 「체르노빌의 목소리」 한국어판 서문, 2011년 3월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목소리였다. 읽는 동안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특히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분노와 슬픔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쉽게 잊힐까 그것이 더 두려워졌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쓰는데 거의 20년이 걸렸다는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일본의 원전 보호 체계도 규모 9.0의 강진 앞에서는 아기 옷에 불과했고, 배냇저고리처럼 약했다고..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다 보니 「문명, 그 길을 묻다」에 실린 제레미 리프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지난 10년간 유럽연합의 자문으로 활동해왔던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도 자세히 거론했었지만 재생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시대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미 학문적인 단계에서 실용적인 단계로 넘어왔다고 하는데 전 유럽연합 의장, 독일의 메르켈 총리, 프랑스의 올랑드르 대통령 그리고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재생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를 3차 산업혁명이라 일컬으며 '에너지 민주화'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유럽의 변화는 물론이지만 중국 역시 전력 분산을 위해 에너지 인터넷을 구축하는데 4년 동안 82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어인 안희경씨는 '깨끗한 에너지', '값싼 에너지', '안전한 에너지'로 홍보되는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견해를 묻는다. 그러자 순간 리프킨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나는 듯했고 이미 결론이 다 난, 시대에 뒤떨어진 안건을 왜 다시 끌어내는지 답답해하는 눈치였단다. 리프킨은 핵 발전이 청정에너지라는 홍보는 황당한 말이라고 답한다. 이 주장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2,000개의 핵발전소가 있지만 모두 노화해져서 가동을 멈춰야 할 처지인데다가 2,000개의 핵 발전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세계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6퍼센트만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후 변화에 최소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퍼센트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 영향력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더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세계 필요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채우려면 노후된 핵발전소를 다 철거하고, 40년 동안 매달 3,000개의 새로운 핵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 리프킨은 이를 전혀 이득이 없는 사업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국제원자력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우라늄 매장량은 매우 부족해서 2030년이 되면 비용이 올라가 적자가 될 것이며, 테러리즘이 강도를 더해가는 시대에 세계 곳곳에 플루토늄이 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우 네바다주에 핵폐기물 지하창고를 세우는데 16년 동안 80억 달러를 썼지만 이후 단 한 번도 그 지하창고를 열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미 그곳이 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핵폐기물을 완벽하게 저장하고 있는 처리장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  

 

 

 

70년 동안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음에도 아직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핵발전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담수의 40퍼센트를 냉각수로 사용하는데,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뜨거워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과 프랑스는 이른 시일 내에 핵발전소의 문들 닫아야 한다. 해양에 핵발전소를 세울 수는 있지만 쓰나미와 태풍이 더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게 된 원인 역시 핵연료봉이 마당 창고 안에 있었고, 쓰나미가 몰려오자 핵연료봉이 무너지게 되면서 원자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은 왜 비싼 핵발전을 사용하려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생산할 수 있는 공짜 그린 전기가 있는데요. "

 

 

 

핵발전은 몇몇 회사에게만 이득이 돌아간다고 리프킨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으로 소유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 독일이 하는 것처럼, 모든 한국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이를 'Power to the People', 즉 '국민에게 권력을 쥐여줬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 민주화를 통해 가능합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해 이미 에너지를 선점하고 있는 기업들의 반발은 없는지 인터뷰어가 묻자 리프킨은 독일과 덴마크의 예를 들며 거대 전기회사들이 생산 분야에서 발을 빼고 있다고 답한다. 분산적인 에너지 생산은 수직적인 거대 기업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들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이동하고 있단다. 기존 기업들의 새로운 역할은 네트워크를 통합하도록 돕는 서비스 제공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조직하고 연결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독일의 전력회사인 RWE AG, EnBW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전력회사이며 세계적인 기업인 EDF도 새로운 전환에 동참했다고 한다. 생산양식이 바뀌면 정치 시스템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정치 시스템은 변할 겁니다. 중앙집권화에서 분산화될 거예요. 중앙 정부는 코드, 규정, 표준, 정보를 상호 교환하여 처리하는 틀을 세우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역의 활동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3차 산업혁명을 위한 그들만의 마스터플랜을 여건에 맞게 창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지역 단위들은 와이파이처럼 연결될 것입니다. 수평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분권화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지금의 권력구조를 바꿀 겁니다. 이는 권력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동입니다. "

 

 

 

제레미 리프킨은 수평적 권력으로의 이동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수십억의 인구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에너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고, 이는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문제는 그런 시대적 기류를 적절한 시기에 함께 타고 흘러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결단을 과연 적시에 내릴 수 있는지, 이것이 한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능력이며, 국민의 능력일 것이라고 말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는 동안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길 땐 해결할 답은 없다는 것 단 하나만 떠올랐다. 불행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외엔, 아픈 것 외엔, 절망하는 것 외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의 정부가 30년 전의 체르노빌보다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국민들을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이끌어내고 급기야는 분노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면 모를까, 때론 슬퍼하는 것조차도 지친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이젠 개개인이 똑똑해져야 할 것 같다. 스마트 시대에 살면서 서로의 생활을 염탐하듯 기웃거리는 것으로, 분노를 배설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기술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수직적 에너지 체계를 거부하는 것으로, 수평으로의 이동을 도모하는 것으로 변화를 꿈꾸어야 할 것 같다. 전 지구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신구 세력의 움직임, 그리고 오늘 우리의 문명이 맞닥뜨린 전환점을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배워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체르노빌 사람이 되어버린다.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생물체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내 딸의 이름은 카타였다. 카튜센카..... 일곱 살에 사망했다. " - 니콜라이 포미치 칼루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소. 그곳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쓰레기통에 던졌소. 막내아들이 졸라서 군모를 줬소. 아들은 절대로 벗지 않고 매일 쓰고 다녔소. 2년 후 아들은 뇌종양 진단을 받았소. 나머지는 알아서 쓰시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소..... " - 어느 군인

 

 

 

"우리 머릿속에서 군사적 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 같은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나 1초 만에 재로 변한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평화적 핵은 안전한 전구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아이처럼 보았다. " - 게나디 그루세보이 (벨라루스 의원, 체르노빌의 아이들에게 재단 대표)

 

 

 

"저는 비가 무섭습니다. 바로 그게 체르노빌입니다. 눈이 무섭습니다. 숲도, 구름도, 바람도 무섭습니다. 체르노빌, 그는 내 집에 있습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 1986년 봄에 태어난 내 아들 속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픕니다. 얼마 전 신문에 1993년 한 해 동안 벨라루스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절을 20만 번 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주요 원인은 체르노빌입니다. " - 알렉산드르 레발스키 (역사학자)

 

 

 

"두려움과 억울함. 그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아직도 기억해요. 모든 것이 일어났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었어요. 정부는 침묵했고, 의사들도 아무 말이 없었어요. 우리 지구는 주 정부의 지시를 기다렸고, 주 정부는 민스크를, 민스크는 모스크바의 연락을 기다렸어요. 아주 긴 사슬이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어요. 어딘가 멀리에서, 고르바초프와 또 몇 명이, 두세 명이 우리 운명을 결정짓던 거예요. 모두를 대신해 판단했어요. 수백만 명의 운명을..... 그리고 동시에, 얼마 안 되는 몇 명의 사람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미치광이도, 머릿속에 테러 계획이 든 범죄자도 아닌 원자력 발전소의 평범한 당직 직원 말이에요.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체르노빌이 콜리마와 아우슈비츠,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넘어선다는 걸 알게 됐어요. " - 류드밀라 드미트리예브나 폴랸스카야 (시골 교사)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오면 KGB가 필름을 가져갔다. 그리고 빛을 쏘여 못 쓰게 된 필름을 돌려줬다. 얼마나 많은 문서가, 증거가 파기됐는지, 과학을 위해서도, 역사를 위해서도 쓰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 - 이리나 키셀레바 (기자)

 

 

 

"핵보다 상부의 진노를 더 두려워했다. 모두 전화와 명령을 기다렸지만 직접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개인이 지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의 심판을 믿는다. 체르노빌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했다. " - 바실리 보리소비치 네스테렌코 (전 벨라루스 과학 아카데미 핵에너지 연구소 소장)

 

 

 

""우리가 죽으면 학문이 될 거야. " 안드레이가 말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다 우리를 잊을 거야. " 카탸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죽으면 무덤에 묻지 마. 나는 무덤이 싫어. 거기에는 죽은 사람들이랑 까마귀밖에 없잖아. 나는 들판에 묻어줘. " 옥사나가 부탁했어요. "우리는 죽을 거야..... " 율라가 울었어요. 이제 하늘을 보면 하늘이 살아 있어요. 내 친구들이 거기 있으니까요. " - 어느 어린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 그 길을 묻다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릴레이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안희경 씨는 2013년 12월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시작으로 2014년 5월 스리랑카의 A. T. 아리야라트네를 인터뷰하기까지 22만 리 길을 이동하며 세계의 지성들을 만나 우리가 가야 할 문명의 길에 대한 답을 구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무척 좋아하는데 한 권의 책으로 열한 분의 석학들을 만날 수 있다 하니 더욱 기대가 컸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리처드 윌킨슨,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하워드 가드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웬델 베리, 원톄쥔, A. T. 아리야라트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한 분은 이 시대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인터뷰할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지만 목소리와 몸짓에는 청년 같은 기백이 넘쳤고,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었으며, 그가 풀어내는 말에는 세밀하게 집중해도 다 품기 힘든 방대한 지식과 사유가 넘쳐났다고 한다. 미리 준비했던 수많은 질문은 물거품이 되었고, 흰 눈송이가 바다로 빨려 들듯 그가 품고 있는 생각들 속으로 저자의 모든 질문과 의도는 녹아버렸다고 한다. 나도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1925년생 노학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겸손히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예를 하나 들면 <뉴욕 타임즈> 일요판 한 회에 담긴 정보가 18세기 개화기에 살던 가장 똑똑한 남자나 여자가 아는 정보보다 더 많습니다. 그들이 온 생을 거쳐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많죠. 이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적으로 숙달할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p183)



그는 이 책의 영어 제목인 「Seeking the Way To Save Our Civilization」의 가장 기본 전제부터 짚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공위(空位) 기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83)



인터레그넘은 두 왕의 재위 기간 사이를 말하는데 옛 왕은 죽고, 새로운 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 이는 옛 방식이 매우 빨리 노화되어 더 이상 적절하게 작동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활동 방식들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를 비유한다.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라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리스크는 옛날 방식과는 달라요. 매우 유동적이고, 신비롭고, 짙은 안개 속에 있죠. 우리는 위험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무엇을 강타할지 모릅니다. ˝ (p188)



'지금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유발된 문제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자구책을 찾도록 기대 받고 있다고' 말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을 언급하며 문제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건데, 책임은 개인이 지는 이 모든 것의 뒤에는 권력과 정치의 이혼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권력이란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고,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요즘은 권력이 지구 전체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과 무역이 세계화되었고, 무기 교역과 테러리즘까지도 세계화된 현실에선 모든 종류의 권력이 국가가 조절하는 영역 밖에 거주하게 되었다. 세계화된 권력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한 상태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안다면, 적어도 이론이라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변화를 독려할 수 있겠죠. ˝ (p196)



우리의 한 손에는 정치적인 조절로부터 벗어난 권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지속적으로 권력의 부재로부터 고통받는 정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권력과 정치가 통합된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는 이 둘의 동거가 가능합니다. ˝ (p204)



˝각 도시의 시장들은 다른 도시의 시장이 하는 일을 지켜봅니다. 뭔가 흥미롭다 싶으면 더 자세히 살피다가 쓸모 있다고 여겨지면 자기 시에 적용하죠. 강압 없이, 입법 없이, 경찰 없이! 효율적인 소통 규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있어요. 한 도시에서 시작된 긍정적인 변화가 트렌드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 (p204)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고 의존하면서도 배척과 차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진보를 추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만년에 와서야 도달한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그것은 똑바로 뻗은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젊어서 상상할 때 진보란 얽히고설킨 장애 없이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부러진 비틀림 없이 말이죠. 그러나 실제 진보는 추의 운동 같습니다. ˝ (p205)



우리에겐 자유와 안전이 모두 필요하지만 결코 자유와 충분한 안전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서열 지어진 환경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기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불행은 말이죠, 사람들이 사실상 무제한의 자유를 구하고 싶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안전을 투항시키는 데서 오고 있습니다. ˝ (p208)



그가 청년기였을 땐  '일생을 거는 프로젝트를 만들라'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말이 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조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에겐 당장 내년에 할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문제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신 행복은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것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행복의 레시피가 아닙니다. 이는 지루함의 레시피입니다. ˝ (p212)



행복은 어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상업적인 마케팅에 의해 잘못 이끌리고 있다고 말한다. 마케터들이 이런 문제들을 단박에 해치울 해법들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우리에게 삶의 실제를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견을 달자면 약이냐 요리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플 때마다 처방을 받기 위해 약국으로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건강을 도모해 나갈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권력과 정치를 재혼시켜야만 해요. ˝ (p215)



우리가 행동으로 다시 심어내고 재생하고 뒤바꿔내는 전환이 없다면 우리는 못난 이데올로기를 대치하는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답은 세상에 나올 거라고요. 나는 당신 세대가 그 길을 이루도록 모든 행운을 전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 대안들은 어딘가에서 당신들이 발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창조해야 합니다. 기회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니까요. 저는 그저 사회학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살라고 조언해주는 카운셀러가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 어떤 선택 상황이 놓여 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p216)



내가 바우만의 인터뷰에 이끌린 이유도 그가 구체적 방법보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우만의 말대로 진보가 추의 운동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만 볼 것이 아니라 왜 뒤로 밀려나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보단 다음 세대가 다치지 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또 한 분은 스리랑카의 간디라 불리는 A. T. 아리야라트네였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인데도 모든 교육이 무상이며 GDP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삶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수가 월등히 높다고 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스리랑카 최대의 민중 조직인 사르보다야 운동의 창시자다.



저자는 첫 인터뷰 대상자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마지막 인터뷰이는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라고 마음에 품었단다. 사르보다야 운동의 실천 덕목은 불교의 팔정도라고 하는데 고전적인 방식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운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개인,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가 스스로의 전망을 가져야 해요. ˝ (p413)



˝우리네 삶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형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개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413)



˝세월호가 물에 잠길 때 나도 울었어요.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뒤늦게 드러나는 보도를 보니 역시 구조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그 어린 목숨이 잠길 때까지 조직의 꼭대기에서는 무엇을 한 겁니까? 언론은 누가 주무른 걸까요? 조직의 꼭대기를 좌우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돈, 권력을 부르짖는 사람들인 겁니다. 권력과 돈이 그들의 종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권력과 돈이 우두머리가 된 사회적 순위를 교체해야 합니다. ˝ (p413)



당장의 돈 흐름을 살리겠다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땅도 주고 권리도 팔지만 초국가적 기업들은 성장이 아닌 가난을 만들고 떠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장지수만 높이고 결국에는 빈곤만 남는다는 것이다.



˝길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까지 고려하자는 거지요. ˝ (p416)



아리야라트네는 사르보다야 운동이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인 1만여 마을이 참가하며,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그 답은 정치적 중립에 있습니다. ˝ (p424)



그들은 지독하게도 독립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며,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만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동시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 (p425)



사르보다야 운동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대신 아리야라트네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전할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보려고 한다.



˝그래요, 제가 좀 오래 살았으니까 감히 말을 꺼내보겠습니다. 마담 프레지던트, 부디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첫 번째 목표는 당신의 모든 권력과 돈, 지식, 지혜를 모아 당신의 내각과 각계 리더들이 이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네 단어입니다. 'The Last, The First'예요. 마하트마 간디가 우리에게 남긴 말입니다. 진정한 개발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그 사회 속 마지막에 놓인 사람이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 나라의 번영을 부자나 중간 계층에 맞춰서 꾸려가면 안 됩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사람이 조금 성장할 때, 나머지 모든 국민도 혜택을 보게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부자들에게 말하세요. 부는 반드시 가난한 이들과 나눠야 한다고요. 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그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마세요. 당신의 권력도 국민과 나누세요.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생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결정의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반드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정치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저 나이 많은 행복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조언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p438)



인터뷰어인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소 팔아 대학을 다녔던 30년 전 청년들은 졸업과 함께 정규직이 되었지만, 대출로 대학에 다니는 그들의 자식들은 무보수 인턴을 버텨낼 재력과 스펙 쌓기에 투자할 자금 지원이 없으면 서른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혹은 마흔이 되어도 잡기 힘든 정규직 전환 기회를 바라보며 가난과 울적함을 버텨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p8)



요즘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공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인다. 늘 화가 나 있는 듯 보인다. 사회의 흐름이 곧 우리들의 표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문명, 그 길을 묻고 있는 것이고, 떠도는 마음들이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여 희망 쪽으로 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열한 분의 지성들이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결국 우리들의 답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