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이 년 전 당신의 글들과 단상을 적은 공책들로 가득 찬 작은 여행가방을 제게 주셨습니다. 평상시처럼 장난스럽고 짓궂은 말투로, 당신이 떠난 후, 그러니까 당신 사후에 이 글들을 제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 (p43)

 

 

 

아버지의 여행가방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으로, 1957년에 수상한 알베르 카뮈부터 2008년의 J. M. G. 르 클레지오까지 모두 열한 분의 수상 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연설인데, 이 책의 제목으로도 인용되고 있다. 최근에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회고록인 「이스탄불」에 의하면 파묵의 아버지는 권위와는 무관한 분으로,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해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길 반복하셨다. 파묵의 수상 연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여행가방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가방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의 집필실을 찾으셨던 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지만 가방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그 주위만 서성거렸다는 것이다.

 

 

 

˝왜였을까요? 물론 그건 가방 안에 숨겨진 물건의 신비스런 무게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그 무게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방 안에 자신을 가두고 책상에 앉아 구석에 틀어박혀서 종이와 펜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창조해낸 것, 즉 문학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 (p44)

 

 

 

파묵의 아버지는 당신이 한창때이던 1940년대 후반에 이스탄불에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셨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시를 쓰며 고단한 문학적 삶을 살고 싶어 하진 않으셨다. 아버지는 큰 서재를 가지고 계셨고, 때로 서재 앞에 있던 긴 의자에 누워 사색과 공상에 빠지곤 하셨다.

 

 

 

˝제게 진정한 문학의 출발지는 책들로 둘러싸인 방에 자신을 감금하는 것입니다. ˝ (p51)

 

 

 

하지만 파묵이 겪었던 아버지는 외로움을 피해 친구, 사람들, 모임, 농담, 그리고 집단에 섞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서재는 이 세상의 작은 그림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그것은 이스탄불에서 본 세계였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되 그 중심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터키인은 그 경계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서재 한 귀퉁이에는 이스탄불의 책과 문학이 있었지만 이것과는 상이한, 고통과 희망을 주는 서양문학 책들이 있었다.

 

 

 

"저는 아버지 역시, 후에 제가 나이 들며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삶에서 탈출하여 서양으로 도망치기 위해 소설을 읽었다고 느꼈습니다. " (p54)

 

 

 

파묵의 아버지는 단조로운 가정생활을 지루해하다가 가족을 떠나 파리로 가서는 자신을 호텔 방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쓴 것들을 터기로 가져왔다. 아버지의 가방을 보며 이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쓰는 것은 사회, 국가, 민족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가방을 보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서 아주 작은 충돌조차 참아내지 않으시고,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사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가 났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질투했다'고 말할 수 있고, 어쩌면 그 표현이 더 적확했기에 내적으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럴 때면 분노에 찬 목소리로 ˝행복은 무엇인가? ˝ 하고 자문하곤 했다고 한다. 홀로 방에서 심오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인지, 모든 사람과 조화롭게 사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몰래 글을 쓰는 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들이나 신문들 모두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행복인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 정반대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일은 가치 있지 않을까요? 가족들로부터 수없이 도망쳤던 아버지를 제가 얼마나 알고 있고, 그분의 내적 혼란을 얼마나 감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 (p56)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열고, 그 안의 공책들을 읽기 두려웠던 진짜 이유는 아버지가 훌륭한 작가 일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에서 위대한 문학이 나온다면 아버지의 내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아버지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로서만 남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가방을 처음 연 것은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불행이나 비밀을 알고자 했던 충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목소리는 저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던 인물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 (p57)

 

 

 

오르한 파묵이 수상 연설에서 아버지의 가방을 이야기했던 이유는 그 가방을 통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던 데 있었고, 파묵에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변방에 있다는 것과 진정성 이 두 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는 중심부가 있고, 그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고, 깊은 모멸감, 자신감 부족, 무시당한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진정으로 설파하고 연구해야 할 것은 인류가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이와 연관 지어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두려움입니다. ˝ (p59)

 

 

 

˝단지 제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 (p60)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서양에 대해 느꼈던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저 역시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서 진정으로 배운 것, 진정한 낙관주의의 원천은 이 위대한 작가가 서양과의 애증 관계에서 출발해 이 애증의 다른 쪽에 세운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 (p61)

 

 

 

그렇다면 오르한 파묵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진솔한 고백을 읽자니 코 끝이 찡해졌고, 아버지의 여행 가방 이야기로 담담히 시작되는 파묵의 수상 연설은 겉치레 없이 아름다운 한 편의 문학 그 자체로 여겨졌다.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제가 쓴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싶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오로지 현실을 바꾸었을 때에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씁니다. 저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이스탄불에서, 터키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이 제게 가져다준 명성과 관심이 좋기 때문에 씁니다. 홀로 있기 위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씁니다. 제 작품이 읽히는 것이 좋아서 씁니다. 한번 시작한 이 소설을, 이 글을, 이 페이지를 이제 끝마쳐야지 하는 생각에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서 이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씁니다.



도서관들이 영원할 것이며, 저의 책들이 그 서가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기 때문에 씁니다. 삶, 세계,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롭기 때문에 씁니다.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씁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씁니다. 항상 갈 곳이 있는 것 같지만 마치 꿈속에서처럼 도저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씁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 씁니다. ˝ (p64)

 

 

 

사실 이 리뷰를 쓰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고, 파묵의 정신에 좀 더 공감케 하고자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게 되었다. 오르한 파묵이 내 생에 최고의 작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문학에 대한 경험 역시 짧지만 가독성과 상관없이 그의 글에선 그가 그토록 우려하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사실을 떠나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알아가다 보니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책을 읽는 이유와 같았다. 쓰는 사람의 고통과 행복을, 읽는 사람으로서의 고통과 행복으로 코 끝이 찡해지도록 교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가방의 주인공인 파묵의 아버지는 외로운 문학의 길보단 행복한 일상을 선택하신 분이셨지만 파묵이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과 자극을 주셨다. 그에게 강한 신뢰를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엔가는 이 상을 받을 거라고 오랜 세월 동안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게 이 커다란 상과 영광을 주신 한림원 위원님들 그리고 귀빈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 (p67)

 

 

 

파묵의 아버지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가방을 꾸려 세상의 중심을 향해 떠나는 실질적인 여행을 했다면, 오르한 파묵에겐 아무 때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자신의 내면이 바로 그의 여행가방이자 중심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은 그의 가방을 열어 보며 그 속에서 자신과 같이 세상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을 만나기도, 결국엔 변방을 자신의 중심으로 만드는 희망을 만나게도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저는 읽고 싶어서 읽습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읽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조금은 행복해졌습니다.. 라고. 자신을 잃기 위해 책을 읽지만 결국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되는 독자로서의 여정을 사랑한다고 나 역시 고백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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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22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묵의 ˝아버지의 가방˝은 마치 오에 겐자부로 <익사>의 파묵판 같아요.
파묵의 아버지가 상을 받을 거라 격려하던 부분은 에밀 아자르와 (푼수같은) 엄마의 모습 같기도 하고^^...
인간은 참 멀면서도 비슷하단 말이죠.
올리버 색스의 일기장은 천 권이 넘는다고 하죠. 환자를 진단하고 사색한 많은 글...우리는 글(일기 외 기타 등등)을 `나`라는 지향점에서 출발하고 모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렇게 `수많은 외부성`이 공존해야만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걸 쉽게 잊는 듯.
결국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물고기자리 2015-08-22 18:31   좋아요 1 | URL
인간은 비슷하단 말도, 나와 밖의 공존이란 말도 공감합니다^^ 파묵은 자신을 스스로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외적 요인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상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한편으론 부러웠을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거든요.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으로만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불행하기도, 행복하기도 한 것 같고요. 나이 들수록 작가에 대한 동경보단 인간적인 연민이나 이해를 하게 되고 사람으로서 알게 되는 의미에서 책 읽는 것이 좀 더 즐거워지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글만 달랑 던져 놓고 정신없이 다른 일을 하다가 달려와서 그런지 제 댓글도 정신 사나운 것 같네요 ㅋ

보물선 2015-08-22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하기 위해 읽습니다! 좋네요!!
나이들어도 눈이 온전했으면 좋겠어요. 계속 읽고 싶어요.

물고기자리 2015-08-22 21:21   좋아요 0 | URL
네 ^^ 읽고,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평생 눈이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ㅎ
 

 

 

문명, 그 길을 묻다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릴레이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안희경 씨는 2013년 12월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시작으로 2014년 5월 스리랑카의 A. T. 아리야라트네를 인터뷰하기까지 22만 리 길을 이동하며 세계의 지성들을 만나 우리가 가야 할 문명의 길에 대한 답을 구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무척 좋아하는데 한 권의 책으로 열한 분의 석학들을 만날 수 있다 하니 더욱 기대가 컸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리처드 윌킨슨,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하워드 가드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웬델 베리, 원톄쥔, A. T. 아리야라트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한 분은 이 시대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인터뷰할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지만 목소리와 몸짓에는 청년 같은 기백이 넘쳤고,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었으며, 그가 풀어내는 말에는 세밀하게 집중해도 다 품기 힘든 방대한 지식과 사유가 넘쳐났다고 한다. 미리 준비했던 수많은 질문은 물거품이 되었고, 흰 눈송이가 바다로 빨려 들듯 그가 품고 있는 생각들 속으로 저자의 모든 질문과 의도는 녹아버렸다고 한다. 나도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1925년생 노학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겸손히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예를 하나 들면 <뉴욕 타임즈> 일요판 한 회에 담긴 정보가 18세기 개화기에 살던 가장 똑똑한 남자나 여자가 아는 정보보다 더 많습니다. 그들이 온 생을 거쳐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많죠. 이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적으로 숙달할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p183)



그는 이 책의 영어 제목인 「Seeking the Way To Save Our Civilization」의 가장 기본 전제부터 짚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공위(空位) 기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83)



인터레그넘은 두 왕의 재위 기간 사이를 말하는데 옛 왕은 죽고, 새로운 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 이는 옛 방식이 매우 빨리 노화되어 더 이상 적절하게 작동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활동 방식들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를 비유한다.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라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리스크는 옛날 방식과는 달라요. 매우 유동적이고, 신비롭고, 짙은 안개 속에 있죠. 우리는 위험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무엇을 강타할지 모릅니다. ˝ (p188)



'지금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유발된 문제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자구책을 찾도록 기대 받고 있다고' 말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을 언급하며 문제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건데, 책임은 개인이 지는 이 모든 것의 뒤에는 권력과 정치의 이혼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권력이란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고,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요즘은 권력이 지구 전체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과 무역이 세계화되었고, 무기 교역과 테러리즘까지도 세계화된 현실에선 모든 종류의 권력이 국가가 조절하는 영역 밖에 거주하게 되었다. 세계화된 권력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한 상태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안다면, 적어도 이론이라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변화를 독려할 수 있겠죠. ˝ (p196)



우리의 한 손에는 정치적인 조절로부터 벗어난 권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지속적으로 권력의 부재로부터 고통받는 정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권력과 정치가 통합된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는 이 둘의 동거가 가능합니다. ˝ (p204)



˝각 도시의 시장들은 다른 도시의 시장이 하는 일을 지켜봅니다. 뭔가 흥미롭다 싶으면 더 자세히 살피다가 쓸모 있다고 여겨지면 자기 시에 적용하죠. 강압 없이, 입법 없이, 경찰 없이! 효율적인 소통 규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있어요. 한 도시에서 시작된 긍정적인 변화가 트렌드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 (p204)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고 의존하면서도 배척과 차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진보를 추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만년에 와서야 도달한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그것은 똑바로 뻗은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젊어서 상상할 때 진보란 얽히고설킨 장애 없이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부러진 비틀림 없이 말이죠. 그러나 실제 진보는 추의 운동 같습니다. ˝ (p205)



우리에겐 자유와 안전이 모두 필요하지만 결코 자유와 충분한 안전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서열 지어진 환경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기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불행은 말이죠, 사람들이 사실상 무제한의 자유를 구하고 싶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안전을 투항시키는 데서 오고 있습니다. ˝ (p208)



그가 청년기였을 땐  '일생을 거는 프로젝트를 만들라'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말이 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조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에겐 당장 내년에 할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문제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신 행복은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것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행복의 레시피가 아닙니다. 이는 지루함의 레시피입니다. ˝ (p212)



행복은 어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상업적인 마케팅에 의해 잘못 이끌리고 있다고 말한다. 마케터들이 이런 문제들을 단박에 해치울 해법들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우리에게 삶의 실제를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견을 달자면 약이냐 요리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플 때마다 처방을 받기 위해 약국으로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건강을 도모해 나갈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권력과 정치를 재혼시켜야만 해요. ˝ (p215)



우리가 행동으로 다시 심어내고 재생하고 뒤바꿔내는 전환이 없다면 우리는 못난 이데올로기를 대치하는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답은 세상에 나올 거라고요. 나는 당신 세대가 그 길을 이루도록 모든 행운을 전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 대안들은 어딘가에서 당신들이 발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창조해야 합니다. 기회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니까요. 저는 그저 사회학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살라고 조언해주는 카운셀러가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 어떤 선택 상황이 놓여 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p216)



내가 바우만의 인터뷰에 이끌린 이유도 그가 구체적 방법보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우만의 말대로 진보가 추의 운동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만 볼 것이 아니라 왜 뒤로 밀려나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보단 다음 세대가 다치지 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또 한 분은 스리랑카의 간디라 불리는 A. T. 아리야라트네였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인데도 모든 교육이 무상이며 GDP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삶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수가 월등히 높다고 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스리랑카 최대의 민중 조직인 사르보다야 운동의 창시자다.



저자는 첫 인터뷰 대상자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마지막 인터뷰이는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라고 마음에 품었단다. 사르보다야 운동의 실천 덕목은 불교의 팔정도라고 하는데 고전적인 방식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운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개인,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가 스스로의 전망을 가져야 해요. ˝ (p413)



˝우리네 삶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형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개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413)



˝세월호가 물에 잠길 때 나도 울었어요.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뒤늦게 드러나는 보도를 보니 역시 구조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그 어린 목숨이 잠길 때까지 조직의 꼭대기에서는 무엇을 한 겁니까? 언론은 누가 주무른 걸까요? 조직의 꼭대기를 좌우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돈, 권력을 부르짖는 사람들인 겁니다. 권력과 돈이 그들의 종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권력과 돈이 우두머리가 된 사회적 순위를 교체해야 합니다. ˝ (p413)



당장의 돈 흐름을 살리겠다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땅도 주고 권리도 팔지만 초국가적 기업들은 성장이 아닌 가난을 만들고 떠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장지수만 높이고 결국에는 빈곤만 남는다는 것이다.



˝길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까지 고려하자는 거지요. ˝ (p416)



아리야라트네는 사르보다야 운동이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인 1만여 마을이 참가하며,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그 답은 정치적 중립에 있습니다. ˝ (p424)



그들은 지독하게도 독립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며,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만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동시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 (p425)



사르보다야 운동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대신 아리야라트네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전할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보려고 한다.



˝그래요, 제가 좀 오래 살았으니까 감히 말을 꺼내보겠습니다. 마담 프레지던트, 부디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첫 번째 목표는 당신의 모든 권력과 돈, 지식, 지혜를 모아 당신의 내각과 각계 리더들이 이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네 단어입니다. 'The Last, The First'예요. 마하트마 간디가 우리에게 남긴 말입니다. 진정한 개발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그 사회 속 마지막에 놓인 사람이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 나라의 번영을 부자나 중간 계층에 맞춰서 꾸려가면 안 됩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사람이 조금 성장할 때, 나머지 모든 국민도 혜택을 보게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부자들에게 말하세요. 부는 반드시 가난한 이들과 나눠야 한다고요. 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그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마세요. 당신의 권력도 국민과 나누세요.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생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결정의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반드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정치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저 나이 많은 행복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조언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p438)



인터뷰어인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소 팔아 대학을 다녔던 30년 전 청년들은 졸업과 함께 정규직이 되었지만, 대출로 대학에 다니는 그들의 자식들은 무보수 인턴을 버텨낼 재력과 스펙 쌓기에 투자할 자금 지원이 없으면 서른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혹은 마흔이 되어도 잡기 힘든 정규직 전환 기회를 바라보며 가난과 울적함을 버텨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p8)



요즘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공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인다. 늘 화가 나 있는 듯 보인다. 사회의 흐름이 곧 우리들의 표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문명, 그 길을 묻고 있는 것이고, 떠도는 마음들이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여 희망 쪽으로 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열한 분의 지성들이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결국 우리들의 답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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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따가 보이고, 산 정상에는 흰구름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이 울고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 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바다와 산과 구름과 넓은 하늘이 펼치는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여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고 편안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구로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도 잊은 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p262)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나는 하늘과 바람, 햇빛과 어둠, 날마다 다른 공기 냄새, 정적의 풍요, 소음 속의 적막함 등 평범한 일상의 어떤 순간들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그 속에 잠시 머물곤 했었다. 지금도 아주 어린 시절 어떤 장소의 후각적 기억이나 공기의 무게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런 성향의 나에게 체호프가 묘사하는 자연의 정경이란 읽는다는 의식 없이 바로 체화되는 느낌이다. 아름답지만 애틋하게 말이다.



더욱이 체호프가 묘사하는 자연의 정경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투영하고 있어서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레 공감하게 만든다. 어떤 풍경이든 자연의 모습은 계속 변화해간다. 사람들의 생각은 구름처럼 모였다가 다시 흩어져버리고, 마음 역시 짙은 안갯속에 갇히기도, 삶을 향해 환하게 걷히기도 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름다움이나 벅참은 곧 황폐한 슬픔으로 변해버리기 마련이고, 완벽한 환희로 지켜봤던 순간이 완벽한 지옥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봐야 할 곳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잘 살펴보라며 조근조근 속삭여주는 듯한 체호프의 글은 담담한 듯 깊이 파고든다.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포장하지 않고, 진실과 사실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약함과 허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켜켜이 사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한 지평을 향해 열리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그는 슬플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를 따지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진실하고 솔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 (p273)



새로운 기쁨 뒤엔 새로운 실망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나의 소박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살아간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 같다. 새삼 글을 읽을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비록 번역된 글이지만 활자를 통해서라도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을 살았던 천재적인 작가와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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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3 1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겐, 지금은 고인이 된 알라디너가 준 선물이라 더욱 소중한 책이에요.

물고기자리 2015-08-13 12:13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 책이란 게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저자의 손에서 벗어난 후에도 이런저런 사연들과 함께 소중한 그 무엇이 되거나 연상시켜주니 말이에요. 책이 곧 사람인 듯도 싶고, 책이 있어 감사한 것 같아요..

AgalmA 2015-08-14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속 표현은 제가 뒤라스를 읽었을 때 심정과 비슷해서 응?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다시 읽어야 되나 봅니다....
꽤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도 <부영사>를 못/안 읽고 있는 저를 책망하게 되네요.

아마 물고기자리님께 떠넘기려는 술수인가 봅니다....

물고기자리 2015-08-14 10:17   좋아요 1 | URL
책을 읽을수록 느껴지는 건 잘 쓰는 것에 앞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작가의 진짜 실력인 것 같다는 거예요. 포장하지 않는 진짜 삶의 별것 없음을 말하지만 그걸 성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오히려 삶에 열기가 생기는 것 같거든요. 타인에게 드러나는 상대적인 진실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실망이나 후회도 담담히 끌어안을 수 있는 진짜 삶에 대한 용기 같은 거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도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란 관점보단 전 그런 시선으로 읽게 되더라고요^^ 그나저나 뒤라스의 <부영사>는 완곡한 권유인가요?ㅎ

AgalmA 2015-08-14 12:00   좋아요 1 | URL
뒤라스도 일탈과 불륜 내용이 많잖습니까. 그런데 물고기자리님이 체홉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뒤라스도 생에 대한 활력과 무력함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게 참 대담/섬세/담담(이 성질이 나란히 묶이는 게 신기)해서 독자가 쉽게 소설적 상황을 재단하지 못하게 만들죠...
체홉에 대해 이런 느낌을 말씀하고 계셔서 제가 뒤라스도 떠올린 걸 거예요.
뒤라스를 읽으시든 안 읽으시든 자유지만, 연결해 읽으시면 다른 말, 같은 느낌의 기묘한 일체감을 느끼시겠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읽어도 좋겠죠. 화양연화 같은 순간도 있어야 삶....

물고기자리 2015-08-14 12:07   좋아요 1 | URL
본질을 성찰할 수 있는 작가는 본질을 말할 수 있어 대담하고,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고 떠오르는 본질만을 말할 수 있으니 담담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기에 섬세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심플하게, 진실하게, 깊이 있게 말이죠. 뒤라스도 읽어 보고 싶어요^^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
- 수전 손택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
- 레이먼드 카버


˝당신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나니 다른 사람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집니다. ˝
-막심 고리끼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민음사에 이어 이번엔 열린책들의 선집으로 읽었는데 역시 체호프의 글은 담담한 듯 강렬했다. 몇몇 단편의 감상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이렇게 비슷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하찮은 것 -

나에게 하찮은 것이 타인에게도 하찮을 리 없다.



쉿! -

현실의 볼륨을 아무리 줄인 들, 아무리 비장한 들, 좋은 글이 나올 리는 없다. 현실과 격리된 채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닌, 주변의 하찮은 모든 것들이 삶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6호 병동 -

고통을 모르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박적으로 완고한 사람들은 자신의 완고함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른다. 생생한 감정을 만나면 생각 속으로 도피할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닌, 삶은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검은 수사 -

 

˝인생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그런 하찮거나 아주 평범한 이득을 위해 인생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강요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강좌를 얻기 위해, 평범한 교수가 되기 위해, 시들고 지루하고 따분한 언어로 평범한 그것도 남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마디로 평범한 학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꼬브린은 15년을 연구해야 했고, 밤낮없이 공부해야 했고,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아야 했고, 실패한 결혼 생활을 겪어야 했고, 기억하기도 싫은 온갖 어리석고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질러야 했다. 이제 꼬브린은 자기 자신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62)



˝그런데 바다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편지 조각들이 창턱에 흩어졌다. 다시 그에게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고....., ˝ (p163)

 

 

 

소설 속 이상적인 삶은 한 번의 생각만으로도 긍정적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체호프의 소설에선 이야기의 방향이 현실과 똑같이 흘러간다.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실제의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과 괴리된 이상만을 추구했던 주인공은 자신과 주변의 실제 삶을 망가뜨린 채 이상 속에서 행복한 미치광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체호프가 소설에서 다루는 내용은 어려운 학문이나 철학적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의 소박한 소재들로부터 삶의 정수를 파고들며 개개인의 삶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머릿속의 피상적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진짜 이야기를 장황하지 않게, 정곡을 찌르는 단편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짧지만 강렬하고 깊다. 뜨끔하고, 슬프고, 허무하지만 상대적 진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의 진실을 찾고 싶어진다. 빨리, 멀리는 못 가더라도 소박하게 한 걸음씩 움직이며 나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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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편소설의 대가를 계보로 만든다면, ‘체호프-오 헨리-레이먼드 카버-앨리스 먼로’로 정하고 싶어요. 이야기가 어렵지 않아서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작가들이에요.

물고기자리 2015-08-13 22:16   좋아요 0 | URL
오헨리 단편은 접해보질 않았는데 궁금하네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저도 좋아해요^^ 잔상이 꽤 오래가는 단편들이고 읽어도 읽어도 지겹지 않고요. 굳이 저도 순서를 꼽자면 앨리스 먼로보단 카버가 더 좋아요 ㅎ
 

˝법률이나 규칙이 어떻든 생명이란 가장 가치 있고 절대 낭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

- 관전둬


˝죄악에 대항해야 하는 것은 경찰이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니다. ˝

 - 뤄샤오밍

 

 

 

13.67은 홍콩의 경찰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이 2013년부터 1967년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여섯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모음이다. 여섯 개의 단편은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주제를 이어받고, 마지막 편을 읽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개별의 단편이 사건의 해결에 집중하는 추리적 재미를 준다면, 연결된 여섯 개의 단편은 홍콩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사회소설로도 읽힌다. 장르소설의 대체적 흐름이 캐릭터와 문학적인 묘사에 공을 들이는 추세인데 반해 이 소설은 철저히 사건 해결 중심이고, 캐릭터를 통한 사회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이 이 책의 매력이자 장점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찬호께이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성장한 세대로 홍콩 중문 대학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플로차트를 그려놓고 계획한 흐름 안에서 정확하게 움직여가는 듯 한 그의 글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완벽히 부합되는 것 같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를 반영한 각각의 데이터로서 하나의 아웃풋이 다음의 인풋이 되어 순환하는, 우연 같은 필연성의 구조를 보여 준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두 주인공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에겐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각각의 별칭이 있다.

 

 

 

관전둬 - 'CIB(형사정보과)의 천리안'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 탐정.


뤄샤오밍 - '날수신탐'
일처리가 매섭고 추리력이 뛰어난 탐정.

 

 

 

이렇게 두 인물에 대해 요약하고 보면 홍콩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유치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 관전둬에겐 무한한 신뢰를, 뤄샤오밍에겐 지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이다. 그 시기에 경찰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관전둬를 통해 한 도시를, 한 시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전둬는 뤄샤오밍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선배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샤오밍, 사건 수사는 관례를 고수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경찰 조직에는 발전도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매뉴얼대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



1960년대의 좌파폭동, 1970년대의 경찰과 염정공서 분쟁, 1980년대의 강력범죄, 19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을 목도, 2000년대의 사회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 관전둬는 재치 넘치고 노련하면서 고결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단편인 <빌려온 시간>이었는데 이 단편을 통해 소설을 바라보던 시선은 2013년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이 시대의 홍콩에서 관전둬가 선택한 운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공에 감탄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읽기엔 더없이 좋았던 소설이었다. 또한 재능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했고, 선과 악이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재능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능력이 진짜 재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현상을 보든, 책을 읽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들은 결국 나를 통한 선택이란 걸 알게 될수록 더더욱 지혜를 갈망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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