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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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와 같은 글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려 놓은 밑그림 위에 각자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색을 입힐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단편의 매력이자 장점은 누군가의 삶 어느 한 부분에 갑자기 던져진 듯한 느낌을 주는, 느닷없는 시작과 끝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방비하고 당황스러운 채로 어떤 인상이 각인되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축복받은 집」은 조금 달랐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느낌,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웃들의 삶에 초대받아 다녀온 느낌이었다. 

 

 

 

활자를 더 좋아하는 성향이지만 이 책만큼은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때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신선한 단어들의 조합이나 문장의 여운보단 이야기로서의 기능이 더 뚜렷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싶었고, 사리를 입은 모습을, 손목에서 겹겹이 찰랑거리는 팔찌들의 소음을 음악처럼 듣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스토리가 너무 완고하지 않아 괜한 장면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스케치와 같아서 볼 때마다 다른 관점의 인상들을 끌어낼 수 있는 영화 말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서 봤다. 단편들마다 인도인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인도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어떤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몇 편을 연달아 찾아 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 또 보고, 그걸로도 부족해 새삼스레 갠지스 강에 대한 다큐멘터리까지 찾아 보았으니 말이다. 라다크 지방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겸사겸사 보았고, 라자스탄 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생겼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상되는 것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사실 내가 글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경로는 태반이 이런 식인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곤 한다. 특히 어떤 부분에 관심이 생기면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해결되는 지점까지 쭉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편이다. 덕분에 얼마 전에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 소설 「등대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어떤 영상을 통해 찾아내었는데, 저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정원이라도 가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엔 성장 환경이나 개인의 역량, 시대의 상황뿐만 아니라 장소의 역할도 클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사람과 장소라는 연결 고리를 생각하며 말이다.

 

 

 

최근에 읽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도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안 이덴은 지금까지의 삶을 지우고 싶어 여행을 떠나고, 우연히 발견한 어떤 공간과 장소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은 단지 풍경이 아닌 누군가이며 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에겐 희망 대신 연민이, 어떤 장소들에 대해선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이 생기는 것 같은데 키냐르에게도 그런 정서가 있는 듯싶었다. 물론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이 글의 방향성처럼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을 읽는 동안 내 의식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떠나고 있었다. 굳이 도착할 곳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사실 아직 그 여정이 진행 중인데 너무 멀리 가면 이 책에 대한 막연한 감상조차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듯 잠시 멈춰 서 있는 중이다. 작가가 서른 초반에 출간한 단편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부유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작가들의 그런 나이를 좋아한다. 각인하거나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케치만 할 수 있을 나이의 글들을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절묘하게 모아놓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글의 완성도는 부족할지 몰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밑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삶이 이미 충분히 무거운 사람들에겐 너무 촘촘한 그물의 내용보단 조금은 성긴 그물이 더 편하게 읽힌다. 그래서 꾸역꾸역 채워주려는 이야기보단 거꾸로 나의 이야길 풀어 흐르게 만들어줄 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줌파 라히리가 내게 준 축복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단편들은 우리 삶의 한 일면이었고, 하나로 흐르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면 지금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네 인생이 전개될 거야. " (p210)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중 하나는 <센 아주머니의 집>이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지만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아 슬픈, 인도에서 온 센 아주머니와 추억할 것이 없어 외로운, 미국 아이 엘리엇의 만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단편들 중 가장 영상으로 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두 대륙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조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센 아주머니는 엘리엇에게 추억을 나누어주고, 엘리엇은 센 아주머니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다. 어린 나이에도 사람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지닌 엘리엇은 외로움을 잘 견뎌낼 것이고, 센 아주머니 역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좋았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정착하게 되는 화자의 이야기는 덤덤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기와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굳이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이 없더라도 때때로 삶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 속에 우릴 내팽개치곤 한다. 지도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근근이 견디든, 아니면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든, 그 이전으로 돌이킬 방법 같은 건 없다. 살면서 몇 번이나 낯선 대륙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더구나 그곳은 가고 싶지 않던 곳일 수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난폭하다.

 

 

 

하지만 새로운 집에서 마치 보물을 찾듯 성물을 찾아내어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는 트윙클처럼, 일시적인 정전에 맞서 촛불을 준비하는 슈쿠마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해주는 릴리아 처럼어떤 뉴스가 닥치더라도 위엄 있게 견디기 위해 단정하게 옷을 입는 피르자다 씨처럼, 때로 단순한 것들의 위엄이 삶의 다양한 불안들로부터 우릴 지켜낸다. 내가 찾고자 하는 장소도 그런 곳인 것 같다. 지형지물이나 공간으로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삶의 어떤 국면을 맞닥뜨리든, 모든 행복과 불행을 아우르며 삶이라는 경이로움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목적지도, 도착의 의미도 없는 것 같다. 매번 비슷한 듯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별것 아닌 걸로 위안을 주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그들이..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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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5-0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과 다르게요, 어떤 소설이 모종의 주목을 받아, 영화화되는 점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싫었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예요.

그런데요,
물고기자리 님의 글이 이번에는 잘 안 읽힙니다. (아 물론, 제 탓일 거예요! 음주 중이어서일까요?)

아무튼 저는 항상 이 작가는

줌마 라피히라고 말해요. ㅎㅎㅎ

굳어졌어요. 줌마 라피히로.....

물고기자리 2016-05-08 22:35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것처럼 느껴져서 크게 관심 같지 않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이 있다고 하면 관심이 가긴 하지만요ㅎ

근데 이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영화가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잘 안 읽히는 건 어떤 탓이라기보단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유하듯 썼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사실 매번 그런 것 같긴 하네요ㅎ) 그렇다고 좀 더 잘 써보기 위해 고민을 하거나 고치진 않겠어요!ㅎ

저는 줌파 라리히로 착각하게 되는데 제대로 기억하려고 몇 번 반복해서 외웠어요ㅎ

AgalmA 2016-10-09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즉각적 행위고, 데생은 명상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말년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다듬지 않고 멈출 때˝를 알아야 하는 모든 예술 작업. 물고기자리님이 보신 줌파 라히리도 그러했군요 :)

물고기자리 2016-10-09 13:17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 의미의 멈춤이죠 ㅎ

사실 생각이란 건(독자로서) 그 멈춤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거든요.

위대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읽을 땐 이미 인간에 대해 모든 걸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못 하지만^^;;,

스케치 같은 글을 읽으면 뭔가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줌파 라히리의 모든 글을 읽어보진 않아 잘 모르지만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그것을 충분히 담되 적당히 생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는 것 같았어요.

A 님 덕분에 제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뭔가 뻘쭘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