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어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다. 어떤 생각에 집중하려면 먼저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는데 완성된 생각을 써 내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끄집어 내고, 그 모양들을 확인해보아야 비로소 생각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글자를 좋아하지만 어릴 때부터도 그림보단 활자들이 많은 책을 더 좋아했었다. 순정만화를 읽더라도 그림에 주목하는 순간보단 말풍선 속의 글에 집중하는 순간이 더 길었으며, 읽는 순간과 빨리 이별해야 하는 것이 아쉬워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 전집류처럼 최대한 길게 이어나가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꿈속에서조차도 어느 순간의 이미지에서 급작스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클로징 멘트처럼, 독백 형식의 문장으로 꿈의 종결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새로운 형태의 문장들을 만나면 반가워진다. 단어들이 흩뿌려진 위치나 모양들을 살피다 보면 나의 생각들도 새로운 문장으로 재편성되며 의식이 풍부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섬세한 인간 관찰을 담은, 프루스트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만연체 역시 나에겐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게다가 어떤 문장 들은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감동 못지않은 환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작가들이란 모호했던 감정이나 생각에 형태를 만들어 주는 조각가이고, 단어의 연주가이거나 화가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민한 정신을 지닌 종합 예술가였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 (2권 p4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을 읽을 땐 생상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었다. 음악이란 듣는 것 자체로도 큰 기쁨이지만 음악이 글로 표현되는 걸 읽는 건 또 다른 감동인 것 같다. 표현하는 사람의 단어들로 다시 한 번 연주되기 때문이다. 빛과 형태와 질감이 부여된 음악은 소리가 아닌 단어의 물결로도 나를 찰랑거리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을 특별하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생각하는 방식에 있지 않을까 싶다. 스쳐 지나가는 상황들에 의미가 생기는 건 그 순간을 빚어내어 형태를 만들어준 '생각' 덕분이니 말이다.
"단순히 양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삶의 나날들은 다르다. 그 나날들을 횡단하기 위해 나같이 다소 신경 예민한 사람들은 자동차의 '기어'를 다양하게 조절한다. 올라가는 데 한없이 시간이 걸리는 험하고 힘겨운 나날도 있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속력으로 내려가는 비탈길 같은 날도 있다. " (2권 p34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스노비즘'(속물근성)이라고 1권의 각주에서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2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스완'의 사랑이나, 지문이 풍부한 연극의 대본 같기도 했던 인물들의 묘사 역시 소설의 주제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식의 흐름을 촘촘히 서술해가는 만연체의 글에선 특별히 무엇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제를 인식하는데 집중하기보단 프루스트의 생각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감각, 감정들을 채집하는 프루스트적 기억법에 말이다.
"삶에서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 (1권 p42)
우리는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나의 내면을 투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방한 것일 뿐일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황을 해석하고 있는 나에 대한 관찰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판단하는 근거는 밖이 아닌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루스트처럼 자신을 향한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글이 좋다. 어떤 주제에 닿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인생이 하나의 주제로 정의될 수 있는 건 아니듯이) 모든 사소한 것들을 관찰함으로 나의 반응점들을 늘려가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문장, 새로운 단어들로 나라는 관점을 풍부하게 하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바이올린이 고음으로 올라가 마치 무엇을 기다리듯 머물러 있었다. 기다림은 오래 지속되었고, 바이올린은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아보고, 대상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흥분 속에서, 자기 곁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숨지기 전에 그 대상을 맞이하려는 듯, 또는 놓으면 금세 닫히는 문을 간신히 지탱하듯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대상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잠시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으로 고음을 이어 갔다. " (2권 p269)
우리의 한순간은 때로 이 음악처럼 간절하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 대상을 발견하려는 기다림으로, 알아차리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애틋함으로 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의미는 과거의 시간들보단 현재 잃어가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에게 깨어있기만 한다면 드문드문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기어'로 완급을 조절하며, 음악처럼 연이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감상을 남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진정한 감상이란 읽고 싶은 부분들을 다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여러 부분들을 몇 번씩 반복해 읽었는데 우리의 생각을 가장 닮아있는 만연체 글의 특징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흘러가는 생각들을 요약해 낼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듯 프루스트의 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은 마음을 그린 풍경화이고, 섬세한 초상화이며, 영혼을 품은 음악이고, 온갖 색소로 아름답게 피어오른 감각의 꽃다발이었다. 그러니 좋은 그림이나 음악에 반응을 하듯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으며 우리의 삶에 무수한 반응점들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촘촘히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들은 당시엔 큰 의미를 찾기 어렵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으로, 음악으로 완성되어 간다. 우린 그 순간들에 깨어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채집하며 우리의 삶을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