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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p182)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를 읽는 내내 나는 카뮈를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의 감성과 추론, 그에 따르는 결론을 생각하기보단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말이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하겠소. 당신은 이제 곧 죽게 됩니다. "라는 말을 1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접했던 카뮈는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죽음을 대면해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마치 그의 태양처럼 희고도 검은빛의 세상, 아름답지만 무심한 세계였으리라 짐작된다. 다소 비장한 어조로 부조리에 대해,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안의 번민들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엔 그동안 읽었던 카뮈의 글들이 웅웅 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느 페이지를 읽을 땐 부랴부랴 「이방인」을 펼쳐 보기도 했고, 어떤 문장은 「결혼·여름」으로 달려가게 했으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안과 겉」을 다시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뮈는 늘 한결같은 말들을 했다. 그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서로를 조명해주며 말이다.

 

 

 

카뮈에게 '희망'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비약이나 도피, 체념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위의 무게에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그에 반항하고, 자유를 획득하며, 열정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나 자유는 부조리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엔 죽음이 존재하기에,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더 훌륭히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이상한 사막은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은 채 사막 속에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사막이다. 그때서야,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사막에서는 서늘한 행복의 물이 여기저기 솟아나게 될 것이다. "결혼·여름 (p69)

 

 

 

카뮈가 다른 산문에서도 종종 언급하는 '사막'이란 단어는 어떤 정신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사유가 극한에 도달하는 물 한 모금 없이 황량한 장소를 뜻한다. 아마도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주어진 운명을 직시하며 명철한 의식을 유지하는 정신을 말하는 듯싶다.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회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 무겁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는 것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라면 그 부조리를 정면으로 인식함으로, 오히려 자유와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시지프의 바위는 그의 것이기에, 산에서 내려오는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 「안과 겉」 (p63)

 

 

 

카뮈의 고향은 태양과 바다가 있는 곳, 자연의 사치와 정신의 사막이 공존하는 곳이다. 매일의 아침은 처음인 듯 다시 태어나며, 어둡고 광막한 밤은 가차없는 고독이다. 자신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곳, 그곳에서 삶에 대한 그의 사랑이 솟아난다. 물리적인 환경은 다르지만 어쩌면 내 정신의 고향 역시 카뮈와 같은 곳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카뮈를 읽을 땐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나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은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의 글은 그 단단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나를 울린다.

 

 

 

카뮈가 말하는 세계엔 내세가(종교적인)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직 우리가 몸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세나 어떤 관념으로 도피하는 것을 그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런 희망을 꿈꾼다. 다행히 아직은 체념하는 법은 모르지만, 어떤 두려움, 극단의 공포 앞에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어떤 신을 향해서든 간절히 기도하게 되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단 하나의 열망, 그것이 희망이든 도피이든 회피이든 무엇에든 매달려보고 싶은 그런 감정,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사랑을 배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 「안과 겉」 (p91)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단 하나의 진실은 사랑과 고통은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그 고통이 있는 곳에 나의 사랑이 있다. 이 부조리한 진실을 나는 이제야 명확히 쓰고 있다. 하지만 카뮈는 「안과 겉」을 쓰던 당시인 22살 무렵 이미 이 말을 하고 있다. 카뮈는 1958안과 겉을 재출간하며 다시 쓴 서문에서 "인생 자체에 관해서는 지금도 <안과 겉>에서 서툴게 말한 것보다 더 많이 알지는 못한다. "라고 말한다. 카뮈의 저작을 더러 읽고 난 후 다시 읽는 「안과 겉」의 서문은 이상할 만큼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자신이 판단하기엔 서툰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며 카뮈는 '그래, 바로 그거야'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고독했지만 충만한 사랑, 쏟아지는 햇빛, 그 안에 이미 자신이 찾고 있던 진실이 있었다고 말이다.

 

 

 

카뮈의 원천은 안과 겉」에 묘사한 가난과 빛의 세계이고, 그곳엔 사랑하는 어머니의 침묵이 있다. 장애를 지니고 있어 생각도, 말도 서툰 그의 어머니는 그녀 앞에 놓인 세계의 무심함과 고독 앞에 그저 무거운 침묵을 드리울 뿐이다. 그리고 카뮈는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사랑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그 결과물이 되었을 「최초의 인간」은 카뮈의 죽음으로 미완에 머물렀지만 다듬지 못한 진솔한 목소리가 묻어있어 더 빛이 난다. 단순히 완성을 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다 만 초고일 뿐인데도 묵직한 감동이 있다.

 

 

 

"맞아요. 난 인생을 사랑했어요. 탐욕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동시에 인생이 끔찍스럽고 접근 불가능한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게 바로 내가 인생을 믿는 이유예요. 회의주의 때문에. 그래요, 나는 믿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항상. " - 「최초의 인간」 (p44)

 

 

 

카뮈의 반항, 자유, 열정은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 더 많이 살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것,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개개인을 소중히 여기며, 동시에 함께 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그것만큼 더 강한 반항과 자유, 열정은 없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답도 오직 한 가지뿐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남김없이 사랑하고, 부족한 만큼 더 넓은 가슴을 만들어 또 사랑할 것.. 이 부조리한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그것밖엔 없다고, 나는 행복한 시지프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행복이 구태여 낙관론과 불가분의 관계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행복은 사랑과 관계있는 것일 뿐 ― " - 「결혼·여름」 (p65)

 

 

 

"우리는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야 하고 이토록 명백하게 부당한 세계 속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며 이 세기의 불행에 중독된 민중들에게 행복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 - 결혼·여름」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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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9-1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을 굴리고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오는 시시푸스를 상상행봅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도요. 저는 시시푸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하긴 어렵지만 신들을 비웃는 시시푸스를 상상하면 왠지 통쾌해지더라구요.

`무의미를 강요한다고 무의미해지나`

반항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시다니
감동적인 리뷰입니다. 저도 요즘 사랑에 관심이 많거든요^^

물고기자리 2016-09-12 13:47   좋아요 0 | URL
그런 장면이 영상처럼 보이네요. 비웃는 시시포스 멋집니다! 시이소오 님껜 그런 게 어울리죠 ㅎ 제가 그래서 시이소오 님의 글을 좋아하고요^^

`무의미를 강요한다고 무의미해지나`
곱씹어 볼수록 참 좋습니다.

시이소오 님이 사랑을 품고 계셔서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ㅎ

AgalmA 2016-09-1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과 겉> 서문 저도 물고기자리님처럼 뭉클했어요. 지금 이 글도 그렇고요.
어떤 앎은 표현의 미숙은 있겠지만 성숙한 채 태어나죠. 까뮈는 그걸 보았고 말하고 있었죠.
˝진실은 거짓의 맨언굴˝이라고 한 이성복 시인의 표현이 사실을 담고 있지만, 물고기자리님 이 글을 읽으면 그 표현은 더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언어의 폭이란 참....

물고기자리 2016-09-12 13: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다시 읽으며 <안과 겉>이 새삼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원석 같은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인간 카뮈에 대한, 살아가는 것의 비슷비슷한 감정에 대한 슬픔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저는 요즘 A 님 글에 위로를 많이 받아요. 어딘지 모르게 광물적인 느낌인데 거기에 따뜻함이 느껴지거든요. 꼭 카뮈의 글처럼 말이죠 ㅎ (예전처럼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지만 잠은 좀 주무시는지 걱정도 됩니다^^)

AgalmA 2016-09-12 17:48   좋아요 1 | URL
따뜻한 광물ㅎㅎ; 재밌으면서 멋진데요~ 광물만큼 제가 단단한가 하면...그래서 따뜻한을 붙이신 걸테죠? 그래서 까뮈 글을 얘기하신 걸 테고.....까뮈에 빠져 계셔서 모두에게서 까뮈다운 것을 캐치해 내신 걸 수도ㅎ; 물고기자리님이 그리 보신 것이 터무니없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제 일상사에 대해선 할 말이;;;

물고기자리님 글이 제게도 많은 위안이 됩니다. 강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물고기자리 2016-09-13 10:22   좋아요 0 | URL
제가 가끔 뜬금없이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제 맘대로 느낌을 표현하곤 하는데 A 님이 잘 받아주셔서 감사하죠 ㅎ

근데 정말로 따뜻한 광물질의 느낌이에요. 음악으로 치면 금속성의 음색을 내는 현악기가 의외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듯이요.

물은 무심히 흘러가지만 돌은 어떤 것을 지탱해주기도, 이리저리 차이기도, 햇볕에 뜨겁게 달궈지기도, 도르륵 굴러가기도, 그저 묵묵히 견디다가 보석이 되기도 하잖아요^^ 단단하게 표현하지만 여리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분이라 생각해요! ㅎ

지진이다 뭐다 세상이 어수선하네요.. 우리 모두 잘 견뎌봅시다^^

AgalmA 2016-09-14 01:07   좋아요 0 | URL
물고기자리님은 언어치료사 같아요ㅎ 돗자리 깔면 문전성시! 그래서 제가 계속 물고기자리님 언어 마술에 홀릭 상태지요ㅎㅎ

문득 현악기 같은 작가라면 키냐르가 아닐까 싶어요. 혀끝애서 맴도는 그것은 현! ㅎㅎ

물고기자리님에겐 어떤 지진의 울림이 스쳐갔을까 궁금해하며... 추석 연휴 맛난 거 먹으며 물고기자리님이ㅡ[-_-] 네모난 저를 떠올리셔도 되고ㅋㅡ싱긋 웃으실 일 있으면 좋겠다 바라며 총총...

cyrus 2016-09-1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

물고기자리 2016-09-13 21:51   좋아요 0 | URL
일부러 찾아와 인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잘 보낼 것 같습니다 ㅎ
cyrus 님도 연휴 내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서니데이 2016-09-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물고기자리 2016-09-13 21:53   좋아요 1 | URL
cyrus 님과 약속이라도 하신 듯 나란히 오셨네요 ㅎ

아무래도 제가 이웃 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초딩 2016-09-1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 이메일로 보내뒀어요~ 나중에 꼭 읽게요~ ㅎㅎㅎ
추석 잘 보내세요~~~

물고기자리 2016-09-14 13:37   좋아요 1 | URL
나중에 읽으신다니 어쩐지 긴장됩니다!^^

좀 더 잘 생각하고 썼어야 했는데..ㅋ

늘 부족한 제게 다정한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딩 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ㅎ

초딩 2016-09-14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천성은 그렇게 선했다˝
로 맺음합니다.
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ㅜㅜ 그냥 뭉클하네요.
이 낮에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6-09-14 16:27   좋아요 1 | URL
낮에 뭉클하셨다니 고맙기도, 어쩐지 부끄럽기도 합니다^^;;

2016-10-14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2-0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며칠 물고기자리님 생각 많이 나서 보고 싶어 찾아 왔다가 이 글을 다시 읽고 물고기자리님도 지금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뇌를 바라보며 휴지의 순간이실까 하며 문장마다 물고기자리님이 공감하며 님이 이입했을 생각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듯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삶인 것을 인간은 왜이리 복잡하고 고통스럽게 살게 된 운명인 것일까요. 삶이 너무도 어지러워 무언갈 잡는다는 게 대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궁상맞은 이 댓글 안부인사에 물고기자리님은 상냥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전해 주실테죠. 물고기자리님과의 대화는 늘 그랬죠 :)
아프지 않게, 춥지 않게 잘 지내고 계신 거지요.

이 겨울 다 가기 전에 프루스트 또 꺼내 읽다가 물고기자리님 생각이 난 건지도 몰라요. 님도 프루스트 읽으실 때 제 생각하셔야 합니다. 빙긋.

물고기자리 2016-12-04 15:12   좋아요 2 | URL
저도 빙긋^^

요즘 읽기는 읽는데(아주 천천히요) 쓰는 건 잠시 멈춤 상태에 있어요. 어쩌면 생각도요 ㅎ

최근 어떤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었거든요. 그러다가 문득 제 의식이 가장 풍요롭던 시절은 오히려 생각을 내려놓고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란 걸 깨달았어요. (최근까지는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행복이었는데 말이죠 ㅎ)

지금까지 책을 거울삼아 제 자신을 밑 바닥까지 두루 파헤쳐 보는 작업을 했다면, 지금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내는 중이에요.

그동안 좀 시끄럽다, 소음이 많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게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제 내면의 소리더라고요 ㅎ

어쩌면 나를 알고자 했던 집요함은 나를 비우기 위한, 가볍고 투명해지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나도 싶어요.

제가 글을 썼던 이유도 일정 기간 동안 마음의 둑 안에 쌓인 것들을 비우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수문을 열어둔 채 잠시 좀 흐르게 두려고요. 어쩌면 이것 역시 이런저런 것들을 견디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일 테죠..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제가 본능적으로 택했던 것은 힘을 빼는 거였는데, 글을 쓰면 쓸수록 제 자신의 에고가 더 강화되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흘러가는 순간을 투명하게 포착하고 싶어질 때 다시 쓰게 되겠죠.

이런 대화를 일상의 관계에서, 사회적인 언어로 한다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곤욕스러울 텐데;;^^ 마음의 소리들을 대화로 나누던 A 님이라 편하게 할 수 있네요 ㅎ

프루스트가 아니어도 종종 떠오를 거예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글 친구가 있어서 참 좋아요. 지금 낮술을 몇 잔 한 채로 끄적이는 거라 너무 수다스러울지 몰라요;;^^

AgalmA 2016-12-04 22:04   좋아요 0 | URL
가장 아팠을 때 나는 가장 살아있는 상태 아니었던가 했던 역설과 비슷하네요.
물고기자리님이 불행한 상태는 아니구나 안심되는 말씀이셔서 한숨 놓입니다.
오랜만에 물고기자리님 뵈니 반가웠어요. 역시 물고기를 보려면 물가로 가야지 한다는ㅎ
연말 잘 보내시고 또 종종 찾아 뵐께요 :)
낮술이라니...저도 다음 주말엔 낮술 시도해봐야 겠어요^^

물고기자리 2016-12-05 10:56   좋아요 1 | URL
다음부턴 취중 댓글은 자중하겠습니다 ㅎ 무슨 말인지;; A 님의 댓글을 읽으며 제 글을 이해해봅니다 ㅎ

아마 적당한 말을 건져올리기가 어려웠나 봐요. 살면서 만나는 어떤 고통은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는 말, 결국 제가 찾은 답은 기꺼이 끌어안고 흘러가는 것이더란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면을 확장시키는 공사를 하는 것으로요^^ (쉽지 않아요;;)

연말이라는 말에 새삼 놀랐어요. 이번 가을은 하루하루가 참 길었는데 어느새 지나갔네요. 표지판도 걸지 않고 잠수를 하는 바람에 걱정을 끼쳤던 것 같아요 ㅎ 반가웠고, 따뜻했고, 덕분에 저를 돌아보게도 됐어요. 우리의 촛불도, 나라를 밝히는 촛불도 꺼지지 않게 잘 지켜야죠..

A 님도 연말 잘 보내세요!! ㅎ

한수철 2016-12-0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 님.

근황을 적어주셨구먼요.

왜 페이퍼를 안 올리시지? 의문했을 뿐 Agalma 님처럼 댓글을 달 생각은 전혀 못했네요. 바보네요.

건강하세요.


물고기자리 2016-12-05 11:01   좋아요 1 | URL
어이쿠 반가워요!^^

그러고 보니 위에 A 님부터 차례대로 잠수를 했던,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만났네요 ㅎ

‘바보네요‘

뭔가 한수철 님 식의 힘내라는 위로 같아서 묘하게 따뜻합니다^^

제가 수철 님 특유의 힘 빼게 만드는(어깨를 툭 떨어트리게 되는 ㅋ) 편안함을 좋아하거든요 ㅎ

시간 되는 대로 (몰래몰래) 친구들 글을 읽고 힘을 내서 잠수 생활도 잘 하겠습니다!! 수철 님도 건강하세요^^

2016-12-14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1-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좋은 일 가득한 정유년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물고기자리 2017-01-01 20:03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잠깐 서친 님들 글을 읽고 있었는데 반갑네요 ㅎ

서니데이 님도 새해 복 아주아주 많이 받으세요!
늘 챙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서니데이 2017-01-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위화「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문집이다. 책을 읽고, 쓰고, 여행하는 이야기랄까, 꽤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소박한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위화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어떤 스토리가 없는 짧은 글을 쓰는 데는 그의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 또 다른 산문집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선 풍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삶과 성찰들이 펼쳐지니 말이다.

 

 

 

여행에 관한 산문으로 예를 들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스스로가 섬세한 관찰 렌즈가 되어 어떤 결론이나 생각이 아닌 독자를 위해 주변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듯 묘사해준다. 나로선 가장 선호하는 유형의 글인데, 자신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이런저런 묘사들을 통해 오히려 저자의 생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을만한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예민한 수신기와 같은 하루키의 시선은 내가 궁금해하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줄 때가 많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떠나고 싶다는 생각보단 계속해서 읽고 싶단 생각이 든다.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이런 기분으로 말이다.

 

 

 

또 다른 유형의 예로는 번역가 김화영의 경우인데, 그의 여행기에선 장소에 대한 여행이라기보단 생각 속으로의 또 다른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을 장소에 녹여내는데, 가끔은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런 생각에서 저런 생각으로 펼치고 나열하는 방식이어서 그 독특함과 아득함에 매료되기도, 또 그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화의 경우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간다. 주변을 포착하는 렌즈보단 직접적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술하는 방식이어서, 이야기가 풍부할 땐 마치 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몰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짤막한 글을 쓸 땐 그저 평범한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 같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느낌의 글들이 많아졌는데, 위화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비슷비슷한 내용을 연이어 읽다 보니 지나친 소박함에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뭐지?' 싶은 마음에 먼저 출간되었던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는 이 책은 보다 힘 있고, 충실했다. 하지만 또 '뭐지?' 싶어졌다. 두 책을 연달아 읽다 보니 더 쉽게 눈에 들어왔는데 내용 중 겹치는 부분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위화가 말하는 그 '거대한 차이' 역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언급한 내용이었다. 어쩐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에 책날개를 읽어 보니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고,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중국에서도 출간한 내용으로 두 책의 내용이 일정 부분 반복될 수밖에 없었을 거란 걸 말이다. 그럼에도 나처럼 연이어 읽은 독자들에겐 뭔가 허무한 부분이 있는데 한 권씩 따로 읽었으면 저마다 나름으로 좋았을 테지만 연달아 읽다 보니 재방송을 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 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 (p13)

 

 

 

그럼에도 위화의 산문을 읽으며 느꼈던 건 그는 소박한 독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시대를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을 지닌 작가라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 자신이 급변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중국 문혁 시기에 성장했고, 이후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은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투쟁과 폭력들을 목도했고, 수많은 사형 장면을 목격했으며, 의사이신 부모님과 함께 병원의 숙소에서 살았던 위화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며 자랐다. 그가 늘 불면에 시달리는 이유는 숙소 가까이에 있던 영안실에서 들려오는 갖은 곡소리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데 수없이 많은 곡소리, 갖가지 곡소리를 다 들었고, 한밤의 곡소리는 저마다 그를 불러 깨웠다는 것이다.

 

 

 

"밤의 곡소리는 공허했다. 이는 내 유년 잠자리의 친구가 되어 내가 생의 변경에 누워 죽음의 잠꼬대를 듣게끔 했다. 삶의 뜨거움 속에서 죽음의 서늘함을 찾았지만 죽음의 서늘함은 다시 더 많은 뜨거움을 발산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다. " (p82)

 

 

 

도처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회피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삶을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위화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 일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여겨왔다. 세상의 처음 모습이 그때 우리 인상에 들어오고, 우리가 크고 나서하는 모든 일들은 그저 그 유년 시절에 지녔던 기본 모습의 부분적인 수정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는 편인데, 내가 무엇을 수정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가진 프레임의 모양과 크기를 알아야만 다른 곳을 보려는 노력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저 밖을 바라보는 시선만을 가지곤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공허함 뿐이지만 나의 모양과 크기를 알면 내가 보는 세상이 왜 동그란지, 네모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깨우쳐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문학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글만 쓰면 집으로 돌아간다. " (p83)

 

 

 

위화의 창작은 그를 심리적 암시이자, 상상의 귀착점인 그곳으로 인도하고, 독자인 나는 글을 읽으며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의 이야기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채워주었고, 세월이 흘러 나의 이야기가 풍성해졌을 땐 타인의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나와 내가 너무 멀었거나, 너무 가까워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문학을 통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로 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의 발견이 없었을 땐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발견도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읽게 되면 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의 치료법을 찾게 된다. 아니, 찾는 과정 자체가 치료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 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 (p112)

 

 

 

위대한 작가는 다들 자기만의 독특한 자세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의 길을 가고, 그런 뒤 인류 공통의 주제로 모인다고 말한다. 문학의 존재는 서로를 낯설게 함이 아니라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최종적으로 독자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위화의 독서 경험은 나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어떤 작가의 정거장을 거치든 문학의 신비함이란 나의 자화상을 찾게 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됨으로, 비교적 단단하게 말이다. 개인적으로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책이란 어떤 방법론, 기술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읽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생길 땐 간절함으로, 담담할 땐 담담하게 읽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삶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독자로서의 경험을 말하거나 자신의 삶을 말하는 책엔 관심이 간다. 그 고독한 시간을 견디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내면이란 어떤 것일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으며,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서 작가로서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단 독서 경험을 말해주는 것이 더 좋다. 글을 쓰는 과정이나 어떤 시기에, 어떤 필요에 의해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자신의 책을 스스로 해설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출간된 책은 그 글을 읽은 독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로서 억울하거나 답답한 때는 있겠지만 그래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한해선 과묵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은 내 생각에는 오직 윌리엄 포크너뿐이다. " (p95)

 

 

 

이 책을 통해 위화의 독서 경험을 다소나마 알 수 있었는데 윌리엄 포크너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에게 절묘한 한 수를 배웠기 때문이다. 바로 심리묘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인데 포크너를 통해 진정한 심리묘사에, 실은 심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스토옙스키와 스탕달을 읽을 때에도, 두 사람은 심리 묘사의 대가이지만 심리묘사 차원의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이언 매큐언을 읽은 후유증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매큐언의 단편 소설은 '예리한 칼날' 같고, 읽는 과정은 '칼날을 만지는 과정'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밖에 잘 알려진 작가들, 또는 내가 접해보지 못 했던 작가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형제」의 서사 언어를 두고 일부 비평은, 당신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우선 단숨에 잘 읽힌다고 말하고, 이어서 언어가 간결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명하겠다. 간결하지 않은 언어가 어떻게 단숨에 읽힐 수 있는가? 이것은 언어의 역할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본다. " (p228)

 

 

 

그리고 이 책의 부록엔 위화가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는 「형제」의 출간으로 자신의 창작 인생에서 가장 거센 조롱을 당했다고 말한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썩 달갑진 않았었다. 하지만 재차 읽다 보니 부조리한 세상을 주시하며,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를 고민하는 위화 자신에게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란 신기한 게 인간관계와 비슷해서, 처음엔 조금 짜증스럽게 읽혔던 부분도 재차 읽을 땐 이해하는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정말 좋았던 책은 감상도 짧게 남기는 편인데, 아무래도 책의 내용에 저항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책은 그 이유를 생각해보느라 좀 더 읽어보게 되고, 감상 역시 비교적 세세하게 쓰게 된다. 어쩌면 이런 과정 역시 내가 하는 독서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좀 더 바라보게 된달까, 나의 관점이 아닌 저자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그래서 읽다가 정이 들어 별점이 높아질 때가 있다. 사실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엔 빠르게 별 세 개를 눌러 두었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와 중복되는 부분들이 꽤 있고, 위화에 대한 관심도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몰라도 될 것 같은 일기 같은 글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 권만 읽는 경우와, 좀 더 가볍게 읽고 싶은 독자들에겐 나름으로 좋은 책일 수도 있기에 별 네 개로 변경했다. 뭘 이렇게까지 고민하나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동안 읽었던 위화의 소설이 좋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

 

 

 

"인간 세상의 두려움은 갖가지 치가 떨리게 하는 폭행만이 아니라 운명의 가차 없는 냉혹함에서도 비롯된다.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 (p139)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 (p233)

 

 

 

"내가 쓴 것은 우리의 삶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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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몇 가지의 이유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일종의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 오는 날의 묵직한 공기는 나를 차분히 눌러주어 고요히 침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습기 어린 장막이 드리운 듯 나에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빗소리에 주변의 다른 소음들이 묻히는 것도 좋다. 사춘기 시절엔 특히 비 오는 날의 모든 것들이 좋았다. 머리카락과 옷이 젖는 것도, 찰박거리는 발걸음도 좋았다. 친한 친구와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어느 버스에 올라탄 적도 있었다. 종착지를 경유해 돌아오는 동안 오직 비에 젖어드는 거리를 보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햇볕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갈망하게 된 것 같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릴 때와는 달리 결핍이나 상실감을 알게 될 즈음부턴 강렬한 빛에 이끌리게 되었다. 볕이 좋은 날엔 나른한 고양이처럼, 읽던 책도 잠시 덮어 두고 오직 빛을 느끼며 조용히 호흡을 해본다. '비'는 새삼 나를 각인시켜 주었지만 '햇볕'은 빛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빛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점점 옅어지다가 이윽고 투명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해야 하고 극복하려 애쓸 필요 없이, 나 자신이 빛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그 느낌을 좋아한다. 내 몸의 경계가 없어지고, 추구해야 할 것도, 도달해야 할 곳도 없이 내가 온 세상과 일치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요가를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몸을 경계 없이 움직이게 될 때 어느새 동작은 서서히 줄어들고 나의 호흡 외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어떠한 나로 경계 짓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 때 나는 더없이 가벼워진다.




특히 마음이 늘 활발히 움직이는 나는 그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상념이 많은 나의 기질상 계속해서 정화해나가지 않으면 켜켜이 가라앉은 앙금들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차오르면 비우고, 다시 차오르면 거듭 비우는 것이 나의 균형을 잃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 - 「행복의 충격」

 

 

 

김화영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을 통해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었다. 김화영이 인용한 그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관능적인 풍요로움이 가득한 지중해 연안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과는 달랐다. 김화영에 따르면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행복은 반드시 아이러니컬한 형용사가 동반된 것들이었다. 어두운 행복, 비참한 행복, 눈물겨운 행복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로방스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열린 풍경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 -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는 카뮈의 서문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르니에의 사유는 카뮈의 서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섬」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고,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와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말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몇몇 문장에 마음이 움직였다. 격렬함보단 은은하고 고요한 동의였다. 하지만 그의 사유 자체보단 그의 정신이 더 와 닿았다. 원치 않는 고립의 섬이든, 자발적인 도피의 섬이든, 아니면 섬과 섬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든, 스스로 딛고 있는 땅을 인식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순례를 말이다. 자신의 정신을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는 섬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굳이 순례를 멈추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확신을 피하고 싶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 섬」

 

 

 

그르니에가 사랑했던 그의 고양이 물루는 해야 할 동작만을 정확히 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릴 때도 제가 가진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쏟아가며 옹크린단다. 매 순간 제 행동에 흠뻑 몰두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필연적인 행동을 하는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르니에는 말한다.



하지만 필연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에 열려있어야 할 것 같다. 바라보기만 하는 섬이 아니라 도착할 수 있어야 하고, 다시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섬과 섬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침묵과 도약이 아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대답을 들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도피이든, 고립이든, 나에게 묻고 대답하며 나는 섬 사이를 방황하고 싶다. 때에 따라 비를 맞기도, 햇볕을 쪼이기도 하며 유연하게 살고 싶다. 영원한 정착이란 또 다른 고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카뮈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섬」이 준 충격과 영향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외엔 비길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지드의 감동은 찬양의 감정과 동시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남긴 반면 「섬」이 보여준 감동은 자신들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랄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으로부터 딴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야성적인 행복으로부터 깨어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섬」을 읽으며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느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과잉의 풍요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신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 어떤 이는 부족함을 채워야 하고, 또 다른 이는 과함을 덜어내야 한다. 결핍 투성이는 까닭 모를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지나친 풍부함은 오히려 정신을 삭막하게 만든다. 결핍은 풍족한 미래를 기다리며 채움을 갈망하고, 과한 풍족의 희열 속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에 공(空)에 매혹당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린 저마다 이렇게 다른 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만나는 절묘한 균형의 순간이, 그때의 벅찬 희열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때론 나와 다른 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비슷한 섬을 발견할 땐 다정히 말을 걸어보기도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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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9-11 23:16   좋아요 1 | URL
마음을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성향들은 세심하다, 섬세하단 말을 곧잘 듣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익사할 것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웃픈 말이긴 하지만 가끔은 그런 마음이 저를 단련시켜 준다는 걸 느껴요. 저의 짐이면서 동시에 무게중심이 되어주거든요. 힘들 땐 몇 곱절 더 힘들기도 하지만 기쁠 땐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웃기도 하니까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이 년 전 당신의 글들과 단상을 적은 공책들로 가득 찬 작은 여행가방을 제게 주셨습니다. 평상시처럼 장난스럽고 짓궂은 말투로, 당신이 떠난 후, 그러니까 당신 사후에 이 글들을 제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 (p43)

 

 

 

아버지의 여행가방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으로, 1957년에 수상한 알베르 카뮈부터 2008년의 J. M. G. 르 클레지오까지 모두 열한 분의 수상 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연설인데, 이 책의 제목으로도 인용되고 있다. 최근에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회고록인 「이스탄불」에 의하면 파묵의 아버지는 권위와는 무관한 분으로,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해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길 반복하셨다. 파묵의 수상 연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여행가방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가방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의 집필실을 찾으셨던 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지만 가방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그 주위만 서성거렸다는 것이다.

 

 

 

˝왜였을까요? 물론 그건 가방 안에 숨겨진 물건의 신비스런 무게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그 무게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방 안에 자신을 가두고 책상에 앉아 구석에 틀어박혀서 종이와 펜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창조해낸 것, 즉 문학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 (p44)

 

 

 

파묵의 아버지는 당신이 한창때이던 1940년대 후반에 이스탄불에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셨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시를 쓰며 고단한 문학적 삶을 살고 싶어 하진 않으셨다. 아버지는 큰 서재를 가지고 계셨고, 때로 서재 앞에 있던 긴 의자에 누워 사색과 공상에 빠지곤 하셨다.

 

 

 

˝제게 진정한 문학의 출발지는 책들로 둘러싸인 방에 자신을 감금하는 것입니다. ˝ (p51)

 

 

 

하지만 파묵이 겪었던 아버지는 외로움을 피해 친구, 사람들, 모임, 농담, 그리고 집단에 섞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서재는 이 세상의 작은 그림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그것은 이스탄불에서 본 세계였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되 그 중심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터키인은 그 경계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서재 한 귀퉁이에는 이스탄불의 책과 문학이 있었지만 이것과는 상이한, 고통과 희망을 주는 서양문학 책들이 있었다.

 

 

 

"저는 아버지 역시, 후에 제가 나이 들며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삶에서 탈출하여 서양으로 도망치기 위해 소설을 읽었다고 느꼈습니다. " (p54)

 

 

 

파묵의 아버지는 단조로운 가정생활을 지루해하다가 가족을 떠나 파리로 가서는 자신을 호텔 방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쓴 것들을 터기로 가져왔다. 아버지의 가방을 보며 이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쓰는 것은 사회, 국가, 민족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가방을 보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서 아주 작은 충돌조차 참아내지 않으시고,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사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가 났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질투했다'고 말할 수 있고, 어쩌면 그 표현이 더 적확했기에 내적으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럴 때면 분노에 찬 목소리로 ˝행복은 무엇인가? ˝ 하고 자문하곤 했다고 한다. 홀로 방에서 심오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인지, 모든 사람과 조화롭게 사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몰래 글을 쓰는 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들이나 신문들 모두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행복인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 정반대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일은 가치 있지 않을까요? 가족들로부터 수없이 도망쳤던 아버지를 제가 얼마나 알고 있고, 그분의 내적 혼란을 얼마나 감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 (p56)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열고, 그 안의 공책들을 읽기 두려웠던 진짜 이유는 아버지가 훌륭한 작가 일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에서 위대한 문학이 나온다면 아버지의 내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아버지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로서만 남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가방을 처음 연 것은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불행이나 비밀을 알고자 했던 충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목소리는 저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던 인물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 (p57)

 

 

 

오르한 파묵이 수상 연설에서 아버지의 가방을 이야기했던 이유는 그 가방을 통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던 데 있었고, 파묵에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변방에 있다는 것과 진정성 이 두 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는 중심부가 있고, 그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고, 깊은 모멸감, 자신감 부족, 무시당한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진정으로 설파하고 연구해야 할 것은 인류가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이와 연관 지어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두려움입니다. ˝ (p59)

 

 

 

˝단지 제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생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 (p60)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서양에 대해 느꼈던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저 역시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서 진정으로 배운 것, 진정한 낙관주의의 원천은 이 위대한 작가가 서양과의 애증 관계에서 출발해 이 애증의 다른 쪽에 세운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 (p61)

 

 

 

그렇다면 오르한 파묵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진솔한 고백을 읽자니 코 끝이 찡해졌고, 아버지의 여행 가방 이야기로 담담히 시작되는 파묵의 수상 연설은 겉치레 없이 아름다운 한 편의 문학 그 자체로 여겨졌다.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제가 쓴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싶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오로지 현실을 바꾸었을 때에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씁니다. 저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이스탄불에서, 터키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이 제게 가져다준 명성과 관심이 좋기 때문에 씁니다. 홀로 있기 위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씁니다. 제 작품이 읽히는 것이 좋아서 씁니다. 한번 시작한 이 소설을, 이 글을, 이 페이지를 이제 끝마쳐야지 하는 생각에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서 이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씁니다.



도서관들이 영원할 것이며, 저의 책들이 그 서가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기 때문에 씁니다. 삶, 세계,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롭기 때문에 씁니다.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씁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씁니다. 항상 갈 곳이 있는 것 같지만 마치 꿈속에서처럼 도저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씁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 씁니다. ˝ (p64)

 

 

 

사실 이 리뷰를 쓰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고, 파묵의 정신에 좀 더 공감케 하고자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게 되었다. 오르한 파묵이 내 생에 최고의 작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문학에 대한 경험 역시 짧지만 가독성과 상관없이 그의 글에선 그가 그토록 우려하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라는 사실을 떠나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알아가다 보니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책을 읽는 이유와 같았다. 쓰는 사람의 고통과 행복을, 읽는 사람으로서의 고통과 행복으로 코 끝이 찡해지도록 교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가방의 주인공인 파묵의 아버지는 외로운 문학의 길보단 행복한 일상을 선택하신 분이셨지만 파묵이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과 자극을 주셨다. 그에게 강한 신뢰를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엔가는 이 상을 받을 거라고 오랜 세월 동안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게 이 커다란 상과 영광을 주신 한림원 위원님들 그리고 귀빈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 (p67)

 

 

 

파묵의 아버지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가방을 꾸려 세상의 중심을 향해 떠나는 실질적인 여행을 했다면, 오르한 파묵에겐 아무 때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자신의 내면이 바로 그의 여행가방이자 중심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은 그의 가방을 열어 보며 그 속에서 자신과 같이 세상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을 만나기도, 결국엔 변방을 자신의 중심으로 만드는 희망을 만나게도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저는 읽고 싶어서 읽습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읽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조금은 행복해졌습니다.. 라고. 자신을 잃기 위해 책을 읽지만 결국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되는 독자로서의 여정을 사랑한다고 나 역시 고백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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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22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묵의 ˝아버지의 가방˝은 마치 오에 겐자부로 <익사>의 파묵판 같아요.
파묵의 아버지가 상을 받을 거라 격려하던 부분은 에밀 아자르와 (푼수같은) 엄마의 모습 같기도 하고^^...
인간은 참 멀면서도 비슷하단 말이죠.
올리버 색스의 일기장은 천 권이 넘는다고 하죠. 환자를 진단하고 사색한 많은 글...우리는 글(일기 외 기타 등등)을 `나`라는 지향점에서 출발하고 모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렇게 `수많은 외부성`이 공존해야만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걸 쉽게 잊는 듯.
결국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물고기자리 2015-08-22 18:31   좋아요 1 | URL
인간은 비슷하단 말도, 나와 밖의 공존이란 말도 공감합니다^^ 파묵은 자신을 스스로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외적 요인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상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한편으론 부러웠을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거든요.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으로만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불행하기도, 행복하기도 한 것 같고요. 나이 들수록 작가에 대한 동경보단 인간적인 연민이나 이해를 하게 되고 사람으로서 알게 되는 의미에서 책 읽는 것이 좀 더 즐거워지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글만 달랑 던져 놓고 정신없이 다른 일을 하다가 달려와서 그런지 제 댓글도 정신 사나운 것 같네요 ㅋ

보물선 2015-08-22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하기 위해 읽습니다! 좋네요!!
나이들어도 눈이 온전했으면 좋겠어요. 계속 읽고 싶어요.

물고기자리 2015-08-22 21:21   좋아요 0 | URL
네 ^^ 읽고,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평생 눈이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ㅎ
 

˝내가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이스탄불은 내게 논쟁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운명에 관한 것이다. ˝ (p21)

 

 

 

1952년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고요한 집>, <하얀 성>, <검은 책>,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눈> 등을 집필했고 유수의 유럽 문학상들뿐만 아니라 2006년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스탄불」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청년기까지 도시와 자신의 추억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파묵은 이스탄불의 역사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변방이자, 가장 고립된 시기에 태어났다.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성장한 파묵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해 오십 년간 살았던 집과 거리, 마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에 대한 이 예속감은, 도시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되는 의미이다. ˝ (p20)

 

 

 

이 책의 키워드이자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는 '비애' 로서 역사적, 문화적인 이스탄불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오르한 파묵은 이를 꽤 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표현된 비애의 정서는 슬픔과는 다르다고 한다. 가난한 대도시의 무기력과 그곳의 인간 군상을 보며 서양인들이 느꼈던, 외부로서의 감정이 슬픔이라면, 비애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발전시킨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런 비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중 하나는 그들이 대제국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슬프게 알려주는 유적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오늘날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애는 이스탄불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된다. ˝ (p146)

 

 

 

시인과 삶 사이에 뿌연 창과 같은, 삶에 맞서 의식적으로 물러나 움츠리고 있다는 의미의 이 감정은 마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패와 우유부단, 패배, 빈곤을 의식적으로 자랑스럽게 선택한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실과 결핍의 결과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처럼 제시되기 때문이다. 시인에겐 삶 그 자체보다 삶의 슬픈 투영이 더 매력적인 것처럼 말이다. 오르한 파묵은 자기 자신도, 이스탄불의 모든 것들도 세밀한 풍경화를 바라보듯 살피며 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랜 시간 관찰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진솔하게 설명해준다. 풍경화의 진짜 주제는 풍경만큼이나 그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그에게 이스탄불은 비애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정경인 것 같았다. 우울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에겐 행운이었던 비애감이다.

 

 

 

˝몰락하여 붕괴된 제국의 잔재, 잿더미 아래서 무기력, 빈곤 그리고 우울과 함께 퇴색되며 낡아 가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때로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떤 소리는 실은 이것이 행운이었다고 내게 말한다.) ˝ (p20)

 

 

 

˝이스탄불에서 비애는 음악의 중요한 분위기이며 시의 기본적인 단어일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정신 상태 그리고 도시를 도시이게 만든 재료의 암시이다. ˝ (p131)

 

 

 

이런 이유로 부정적인 만큼이나 긍정적으로 여겨진 감정이며 파묵이 느꼈던 비애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내면화하고, 한 공동체가 모두 함께 공유한 슬픈 연대와 같은 감정이라고.

 

 

 

˝이스탄불은 하나의 대도시로서 비애를 모두 함께 긍정하며 산다. ˝ (p148)

 

 

 

어린 시절 오르한 파묵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여기는 아이였다. 뽀뽀, 칭찬, 달콤한 말과 함께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 품으로 옮겨 다니는 똑똑하고 얌전한 아이였단다. 주변을 세밀히 관찰하길 좋아하고,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호기심 많았던 어린 파묵은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는 아버지를 대신했던 어머니의 사랑에 형과 경쟁해야 했었다. 대가족과 함께 머물던 5층짜리 가족 아파트는 마치 어두운 박물관 같았고 지루했다. 물건들로 꽉 찬 어둡고 우울한 집, 부모님의 불화, 형과의 경쟁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상상의 세계로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뇌리 한구석엔 자신과 똑같은 다른 오르한이 이스탄불의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단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인터뷰에서도 자신은 터키의 특성인 동양과 서양적 충동 사이에서 두 가지 영혼을 갖는 낙관주의자란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실과의 관계를 잃을지도 모르지만 정신분열의 상태는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이다. 어쩌면 작가에겐 분열되어 아픈 것보다 하나의 영혼만을 가진 것이 더 비관적일지도 모르겠다. 이스탄불과 오르한 파묵은 서로 닮은 것 같다. 폐허와 현실의 삶이 공존하고, 동양과 서양, 비애와 긍정이 공존한다. 실제로 파묵은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땐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엔 다수의 흑백 사진과 그림들이 실려 있는데 그가 고른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면서 오르한 파묵의 마음속 정경들을 느껴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엔 색감이 없는 사진과 그림들을 볼 땐 풍경의 외형보단 이면의 정서를 먼저 느끼게 된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마침표를 쉽게 만날 수 없는 그의 문장은 때로 여섯 페이지에 걸친 쉼표 끝에 겨우 마침표를 만날 수 있었을 정도로 세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화려한 수사가 없는, 마치 흑백의 정경 같은 그의 글은 자신의 정서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드러낸다. 책 속의 낯선 흑백 사진들은 내가 살아 본 경험이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행복한 외로움의 정경을 보는 듯 말이다. 그 느낌의 근원은 바로 회화적 정경의 아름다움이었던 것 같다. 영국의 예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러스킨은 '우연성'에 의한 건축의 회화적 아름다움대해 이야기했었다고 한다.

 

 

 

어떤 건축물이 창조된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그 주위에 나타나는 담쟁이덩굴, 풀, 식물 같은 자연의 연장선과의 조화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 우리가 보고자 했던 형태가 아니라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우연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먼저 그 마을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한 발 떨어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회화적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거기 사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도시를 서양인의 시선으로, 때로는 동양인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 (p353)



˝나는 나를 이곳 사람으로도 이방인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최근 오십 년 동안 계속된 이스탄불 사람들의 도시에 관한 생각이기도 하다. ˝ (p393)



˝다른 사람에게서 이스탄불이 비애의 도시라고 듣는 것이 왜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 걸까? 왜 나는 나의 모든 삶을 보냈던 나의 도시가 내게 준 감정이 비애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 걸까? ˝ (p321)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던 오르한 파묵은 가족들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하지만 실상 건축과 관련된 행복한 기억이 없었고, 수업 중 마치 목숨을 건지고 싶은 듯 뛰어나가 이스탄불 거리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벽과 골목을 이미 샅샅이 알고 있는 이 도시를 가지고 언젠가는 무엇인가를 할 거라고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던 이 산책은 파묵에게 감동적인 흔적을 남겼다. 풍경마다 자신의 감정과 결합한 정경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도시의 일반적인 특징, 정신 혹은 정수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해 우회적으로 말한다. 우리 자신들 이외에 도시의 다른 중심부는 없다. ˝ (p475)

 

 

 

역사와 폐허, 폐허와 삶, 삶과 역사가 맞물려 있는 상태. 그 속에서 변질되지 않은 완벽함은 오르한 파묵에게 거부감을 준다고 한다. 그가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이유도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 (p501)

 

 

 

잃어야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다. 잃어버린 곳에선 점차적으로 회화적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그 정경은 우리의 마음속 풍경과 닮은 것 같다.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자신의 폐허를 바라볼 수 있어야 그 안에 갇히지 않고, 비애를 통해 긍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스포루스를 보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지구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급류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파도가 일고, 깊고, 어둡다. 하지만 파묵에겐 무한한 긍정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스탄불의 혼과 힘은 보스포루스에서 비롯된다며 말이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보스포루스로 산책 나갈 수는 있으니까. ˝ (p91)

 

 

 

사람과 장소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로서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은 훌륭했다. 한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역사의 현장이었던 보스포루스에 대한 뜻 모를 향수를 느꼈고 읽는 내내 이스탄불의 골목들을 누비며 그들의 비애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보스포루스를 찾아 삶을 무한히 긍정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사람에게 장소가 주는 의미로서 훌륭했다. 한 사람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생각과 정서의 바탕이 되는 '장소'를 가진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구석구석 탐색한, 모든 풍경마다 추억이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라면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사람이나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꼭 챙겨보는 편이다. 특히 자연경관 위주보단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실망할 것조차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곤 어느 저자의 저작들 중 단 한 권만 읽는 경우는 드물다.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을 찾기보단 한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모든 경험적 요소들을 얻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좀 더 다양한 시선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글에선 나름의 성향이 드러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앞서 자신의 기질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 다양함을 읽어가는 와중에 자신의 기질적인 단점을 더 부각시키거나 또는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한 사람의 '태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나는 지식에 앞서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찾은 마음의 장소에서 잠시 머물며 사색하다가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상을, 나는 그래서 좋아한다. 파묵에게 보스포루스가 있듯 내 마음속 보스포루스를 찾는 여정이 있는 한 삶이 최악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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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5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이 좋았어요. 파묵이 도시 전체를 생생하게 묘사했고, 주인공이 물건에 집착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파묵이 쓴소설 중에 <순수 박물관>이 유일하게 읽은 작품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8-05 22:33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 ㅎ 오르한 파묵이 물건이나 책, 지식 수집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이스탄불을 산책하고 돌아올 때마다 특이한 물건들을 하나씩 챙겨왔다고 하더라고요. 하다못해 벽돌 조각 같은 것도요 ^^ 파묵의 글이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계속 읽게 될 것 같아요 ㅎ

AgalmA 2015-08-06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은 풍경이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죠. 이스탄불의 정서와 풍경은 그곳에서만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창조적으로 바꾸는 건 바라보는 자에 따라 또 달라지겠지요....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

물고기자리 2015-08-06 01:12   좋아요 1 | URL
오랜 역사가 있는 장소에선 대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걸 보면 장소에 시간이 남긴 감정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좀 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그 풍경과 융화되는 구체적인 어떤 요소들이 있지 않나 싶고요 ^^ 도시가 파묵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파묵이 도시에서 글을 이끌어내는 환상적인 조합이 저는 참 부러웠어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가 주는 선물이겠죠?ㅎ

AgalmA 2015-08-06 01:28   좋아요 1 | URL
본다는 것의 의미라 존 버거 생각나는데요. 그도 시간, 순간의 의미를 참 잘 알고 있었던 듯...
꼬리의 꼬리를 무는 작가 퍼레이드ㅎ?

물고기자리 2015-08-06 01:33   좋아요 1 | URL
존 버거, 처음 듣는 분인데 찾아 보니 그런 제목의 책이 있네요 ㅎ 아무래도 이건 운명 같은데 읽어 봐야겠어요~

AgalmA 2015-08-06 01:44   좋아요 1 | URL
번역은 그닥 좋지 않아요...[동문선]이 좀 그렇잖아요(날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진 않겠지;;;) 감안하세요~
존 버거 신간 <사진의 이해>는 좀 나을라나 싶군요^^; 처음 만나는 저자라면 좀 예쁘게 만났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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