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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네덜란드는 한갓 꿈이에요. 황금과 연기로 된 꿈이에요. 낮에는 연기같이 더욱 칙칙하고 밤이면 더욱 금빛으로 빛나지요.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그 꿈속에선 로엔그린이 살고 있지요. 마치 핸들이 높직한 검은 자전거를 타고 꿈꾸듯이 가는 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불길한 흑조떼처럼 바다 주위로, 운하들을 따라, 온 나라를 쉼 없이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거예요. (...) 그들은 더이상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수천 킬로나 떨어진 자바로, 그 머나먼 섬으로 떠나고 없는 겁니다. " (p23)

 

 

 

몇 달 전, 알베르 카뮈의 여정을 담은 「나눔의 세계」를 읽을 때 카뮈의 「전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4년 10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잠시 체류했던 카뮈는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며칠 동안 「전락」의 무대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페이지에 실린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책 속에서 인용된 문장들을 읽는 동안 이상할 만큼 쓸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강렬한 태양빛으로 가득하던, 그동안 읽었던 카뮈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도처에 싸늘한 물이 흐르고 있는, '물과 안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을 읽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변호사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재판관 겸 참회자지요. " (p18)

 

  

 

알베르 카뮈의 「전락」은 온통 말로 가득한 감옥이다. 주인공 클라망스의 집요한 독백은 뛰어가듯 단숨에 읽히지만 달리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전력질주하여 도착한 곳은 클라망스가 용의주도하게 놓은 덫 한가운데이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시대 사람들이 '말콩포르'라 부르던 땅 속의 독방처럼 눕지도 서지도 못 한 채 자신이 유죄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겸손한 이든, 오만한 이든 우리는 모두 유죄라는 걸 말이다.

 

 

 

가도 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컹물컹한 지옥과도 같은 곳, 아니 지옥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대기실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다. 타인을 심판하려 할수록 자신의 더 큰 잘못을 발견하게 되는 그곳은 고상한 방법으로 남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지식인들이라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다. 다른 이들을 심판하려면 먼저 자신을 고발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곳이며, 자신이 방관한 익사자의 마지막 비명이 숨통을 죄어오는 곳이다.

 

 

 

"왜 우리가 언제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정당하고 관대한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지킬 의무가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가만 놔둡니다. (...) 그들이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게 있다면 그것은 잊지 말고 기억하는 의무이겠는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아요. 정말이지, 친구들에게서 우리가 좋아하는 건 이제 금방 죽은 친구, 그래서 고통이 아직 생생한 그 주검, 즉 우리 자신의 감동, 요컨대 우리들 자신이라구요! " (p41)

 

 

 

겸손과 겸양, 덕망을 갖춘 사람의 가면을 벗기고 나면 실은 그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익사하는 사람의 비명소리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된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타인을 심판하려 들고, 관계가 멀수록 그에게 더 관대해진다. 하지만 이런 것도 그나마 좀 숨 쉬고 살 수 있을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지금의 우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그 비명을 못 들은 체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들을만한 여력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익사하는 사람의 비명을 들으려면 누군가는 다리 위에 있어야 하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들어야 할 귀가 닫혀 있고, 같이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심판하고 혐오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작 참회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만족감에 취해 있고, 양심을 돌아보려는 사람들은 비교적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혹시 동심원을 그리며 배치된 암스테르담의 운하들이 지옥의 둥근 테두리들과 흡사하다는 사실에 착안해보셨는지요? " (p24)

 

 

 

"인간이 맛보는 최대의 고통은 율법도 없는 가운데 심판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쎄 우리는 바로 그런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겁니다. " (p120)

 

 

 

카뮈가 묘사한 그때의 그곳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 역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인  것 같다. 홀로 말하는, 독백하는 인간 클라망스처럼 우린 모두가 서로의 거울이며 초상화다. 바다와 운하와 안개로 둘러싸인, 사방이 온통 물컹물컹한 지옥을 향해 흘러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권력자들에게 멸시당하고 강제당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은 이젠 이곳에서 당연한 듯 서로를 멸시한다. 그러니 우리들 모두는 저마다 피해자이며 가해자이고 동시에 방관자이며 재판관이다.

 

 

 

"나는 끝이요 시작입니다. 내가 율법을 선포합니다. 요컨대 나는 재판관 겸 참회자다 이겁니다. " (p121) 

 

 

 

혐오와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는 사회, 그들 중 한 사람이 지금의 내 모습인 듯싶다. 저마다의 피난처로 숨어들어 오직 입만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말과 글의 홍수를 만들며 그 안에서 속절없이 떠밀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떻게 보면 인류 전체가 모두 공범자이자 조난자인 것 같다. 도처에 흐르고 있는 분노와 혐오의 강물에서 서로를 구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침내 이 요상한 입심에 도취해버린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니까요. 내가 행복하다는 걸 믿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도록 행복하다 이겁니다! 오오! 태양이여, 바다여, 그리고 무역풍에 씻기는 섬들이여, 생각만 해도 가슴 질리는 청춘이여! 다시 좀 눕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는 건 아닙니다. 누구나 때로는 혼란에 빠지는 때가 있고 (...) " (p145)

 

 

 

행복하다는 말이 울음처럼 느껴지는 건 나의 착각인 걸까? 마치 클라망스의 쉼 없는 독백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전락」은 무거운 안개 속, 겹겹이 조여드는 운하의 한가운데에 갇힌 듯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드는 것 같다. 카뮈의 글답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그건 지옥의 마지막 테두리에서 들려오는 경각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무더위와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한없이 추락하듯 읽었지만 한편으론 적절했던 독서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경이로움은 그동안 읽었던 글들이 나의 무의식 속에서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카뮈의 작품 중엔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는 「전락」을 읽는 동안 문득 카프카의 「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도착할 수 없었던 성으로의 여행, 미로를 헤매는 기분, 그때의 무력감이 말이다. 더 이상 카프카는 읽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다른 관점에서의 '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카프카의 글이 그렇듯, 카뮈의 '전락'이 그랬듯, 출구가 없는 곳에서 낙오될 것이 아니라 명철한 의식으로 직시하며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야 맞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체념하지 않는 것,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란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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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9-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시지프 신화`를 통해 이 포스트로 회귀합니다 ^^
카뮈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어떤 것들이 그를 이렇게 쓰게 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시지프 신화`의 해설을 읽고 조금은 고개가 끄덕끄덕거려졌습니다.
그와 동이세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과 책들을 `시지프 신화` 뒷장에 빼곡히 포스트잇으로 붙였구요.
`전락`도 즐겁게 추가해봅니다.
카뮈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방인, 시지스 신화) 인간 존재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는데, 전락은 `심판`에 대해서 다루는 것 같군요.
`자아`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도 듭니다.
카뮈가 열심히 연구한 카프카의 `성`도 조심스럽게 추가해봅니다. ^^

모쪼록 즐겁고 담백한 금요일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9-09 11:09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 <시지프 신화>를 다 읽고 <이방인>, <결혼. 여름>, <안과 겉>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 역주행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겠어요 ㅎ

마침 현실의 고민들과 겹쳐서 진도는 시원찮지만 그래도 카뮈는 한두 페이지라도 계속 읽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카뮈는 결국 사랑을 말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부조리의 극한까지 사유하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요.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 가장 난해하다고는 하지만 저는 어떤 면에선 가장 선명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이 어딘지를 정확히 가리켜 보인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작품 이후에 미완성 작인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며,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싶었어요.

(초딩 님 말씀처럼 타인에게로 향해야 한다고요 ㅎ)

제가 카뮈의 저작을 읽은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생각이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이는 중이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막연한 감상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는 부분들도 있고요..

물론 즐겁고 담백한 하루가 되길 응원해주시는 초딩 님 덕분에도 힘이 납니다!!^^

 
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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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몰두하게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작가의 내면으로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있다. 한 사람의 정신 속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들.., 파스칼 키냐르「신비한 결속」이 내겐 그랬다. 키냐르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호흡이 점점 고요해지며 내가 어딘가로 스며드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감이 점점 옅어지는 듯싶다가 주변으로 서서히 흩어지는 느낌,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파도가 되고, 바위가 되고, 길이 되며, 바람이 되고, 나무가 되며, 새가 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동하고, 멈추어 지그시 바라보고,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 '여기로 가야지. 저기로 가야지. 여기서 생각 좀 해보자. 저기서 생각 좀 해보자. 이곳의 아름다움을 좀 누려야 해. 저곳의 아름다움도 좀 누려야 해.' 이 모든 아름다움은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살아 있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추억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웠던 것의 살아 있는 추억이다. 삶은 이 세계를 만들어낸 시간의 가장 감동적인 추억이다.' " (p191)

 

 

 

어떤 '곳'엘 가면 본능적으로 이곳은 나에게 좋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몸과 마음이 바로 여기라고 이야기해주는 장소 말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마치 그 장소와 탯줄로 연결된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선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기척을 지워 조용히 조용히 그곳의 풍경으로 스며들게 된다. 내가 무한히 작아지고, 동시에 커지는 느낌이다. 더 높이, 더 깊이..,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일지라도 한 번 부풀어 올랐던 마음의 경계는 그 느낌을 쉽게 잊지 못하게 된다.

 

 

 

키냐르의 글도 그런 풍경과 닮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을 만나도 피로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잠깐 멈칫 바라보다가도 이내 다시금 걷고, 또 걷는 사색의 과정과 비슷하다. 주인공 클레르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에게도 잠깐의 희열을 주는 장소가 아닌, 항구적으로 '결속'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곳'을 열망하게 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파트 숲과, 잘 포장된 아스팔트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도 꽃도 너무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에게 맞는 곳엘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콘크리트와 '결속'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무던한 성향은 못되니 말이다. 하지만 키냐르의 글은 그런 장소를 대신해준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 (p161)

 

 

 

키냐르의 주인공에겐 어떤 '결핍'이 존재한다. 그것도 근원적인 결핍이다. 살아가면서 잃은 것이 아닌, 이미 잃으면서 시작된 삶이다. 그 결핍은 키냐르 자신의 것과 비슷한 듯싶다. 바로 모정의 결핍,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오랜 결핍이다. 키냐르는 어느 강연에서 "어머니는 나를 거의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고백했다 한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자폐증을 앓았던 키냐르에겐 그런 정서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의 글에선 결핍을 채워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솔직하고, 간결하고, 진지하다.

 

 

 

"불안은 오랜 동반자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친구는 아닐지라도 좋은 조언자이다. 조여오는 목구멍은 고통스럽고 가혹하지만 시간이 분배하는 패들을 기막히게 읽어내는 요정이다. " (p34)

 

 

 

어머니와 연결되지 못한 채 성장한 자아는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해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된 불안은 내면의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기원이 되기 위해 가야 할 곳으로, 사람들의 곁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이 소설엔 사랑보다 더 깊은 '결속'들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가 그 주인공이다. 키냐르 못지않게 늘 어떤 '곳'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을 지닌 채 살아가는 내겐 그의 글도 일종의 '곳'이 된다. 그곳엔 살아오며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해를 끼치거나 조여오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초월한 내면의 장소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역할을 해준다. 작가 자신에게도, 독자에게도 말이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더 이상 두려움이 두렵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의지가 되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추위를 사랑하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려도 외출을 즐기고, 낮게 뜬 구름을 사랑하고, 체념을 사랑하고, 고독을 사랑하고, 불면을 가상하게 여기며, 밤을 좋아하고, 한밤중의 정처 없는 보행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일단 세계가 광대무변한 존재로, 마구 쳐들어오는 불가해한 존재로, 완전히 초연한 존재로 별안간 바뀌게 되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해변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때 세계는 출생과도 흡사해진다. " (p117)

 

 

 

'라클라르테'는 파스칼 키냐르가 이 소설에 만들어 넣은 가공의 항구도시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는 작은 도시, 절벽에 붙어 있는 마을, 절벽 위의 황야, 개암나무숲에 가려진 소박한 집, 아주 작은 골짜기의 틈새로 이어진 내포, 이러한 곳들이 주인공 클레르를 결속시켜 주는 '곳'이다. 마치 조난당한 것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던 클레르는 이곳에서 항구적이며 믿음을 주는 관계에 속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기원 내의 시초인 양, 근원적인 평화를 얻는다. 키냐르는 노장사상에 관심이 많아 1996년 장자의 고향을 여행했는데, 이후의 작품들에 그 경험을 꾸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역시 언뜻 사랑 이야기인 듯싶지만 철학에 가까운 내용이라 사색하듯 읽어야 했다.

 

 

 

두 어번을 반복해 읽다 보니 이보다 먼저 읽었던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가 떠올랐다. 그래서 두 달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었다. 두 소설 모두 '곳'에 대한 결속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비슷한 길을 다른 정경으로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빌라 아말리아'의 안 이덴에 더 가깝다.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는 안 이덴의 완성형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클레르는 도약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키냐르 역시 "클레르가 무척 부럽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소설이라는 그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저자인 키냐르가 주인공 클레르에게 상당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클레르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걷기는 '곳' 안에서 무엇의 길을 트고, 시간 안에서 무엇을 구멍 낸다. " (p219)

 

 

 

"그녀라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부르는 것이 그런 것이리라. 나중에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점차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220)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소설을 쓰는 것이 키냐르에겐 치유 그 자체인 듯싶다. 글을 읽는 동안 이 소설은 저자 자신을 위한 것일 거란 생각이 그저 이유 없이 들었다. 자신이 닿고자 하는 곳에 클레르를 가게 함으로, 그의 은밀한 내적 소망을 이룬 듯 보였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침묵이 좋아진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고, 가슴 저미는' 침묵에 휩싸일 때, 나의 내면이 가장 활력적이란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담고 있다 보면 저절로 빠져나가야 할 것들이 빠져나가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좀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침묵이 필요할 때,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꽤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최소한의 인물과, 대화랄 게 거의 없는 내면의 묘사, 축약과 도약이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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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7-0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군요. 신비한결속. 박연준, 장석주 에세이를 읽다 마주쳤어요. 걷기는 곳안에서 무엇의 길을트고, 시간안에서 무엇을 구멍낸다, 소설속 그녀처럼 하염없이 걷고싶네요. 키냐르도 읽고 싶은데 말이죠. 책이 너무 많아요 ㅎ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저는 물고기자리님 팬이에요 ^^

물고기자리 2016-07-07 14:28   좋아요 0 | URL
신기한 게 키냐르의 글에선 실제로 걷는 것 같은 속도감이 느껴져요. 황야와 고원을 하루 종일 걸은 것 같고, 제게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요ㅎ

조용히 사색하고 싶은 어떤 장소가 필요할 때도 키냐르의 글이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자, 입장하셨으면 문은 닫겠습니다. 잘 쉬었다 가십시오..` 이런 느낌이요^^

읽고 싶은 책이 많지만 저는 시이소오 님의 독서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겠습니다^^ 지금 제 시기는 뭔가 `느림`의 시기인 것 같거든요;;

팬이라면, 혹시 안티팬은 아니겠지요?ㅋㅋ
뭔가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아지네요ㅎ

저도 시이소오 님의 팬이라고 하면 너무 접대용 멘트 같으니까 원래 팬이었다고 말할게요^^

AgalmA 2016-08-23 0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다보면 특히 ˝결핍˝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걸 주로 말하는 게 아니 잘 말하는 방법이 소설이라서 그런 지도 모르죠.
하루키가 보여주는 ˝결핍˝, 파묵이 보여주는 ˝결핍˝, 키냐르가 보여주는 ˝결핍˝, 까뮈가 보여주는 ˝결핍˝....
비슷한 듯하면서도 작가들의 개성만큼 다양한 ˝결핍˝들을 느낄 수 있죠.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비밀의 세계나 우물 속으로 들어가 치유하는 걸 보거나,
키냐르의 주인공들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으로 가 치유하는 걸 보거나,
헤세의 주인공들이 마을을 떠돌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면서
저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보게 되죠.
이곳 서재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할 테죠. 침묵할 장소는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단점? ㅎ
공간과 시간을 같이 생각해야 된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그저 과학적인 생각만은 아닌 거죠.
치유는 공간만 있어도 안 되고 시간만 있어도 안 되죠.
공간과 시간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물고기자리님의 키냐르에 대한 감상처럼 저도 비슷한 만족감을 얻는데요.
키냐르의 문장은 톡 하고 파문을 만들고 동심원을 그리며 잦아들면서 미묘한 위안을 줘요
썰의 재미보다 이쪽이 제 취향이라서 더 그럴 테죠.

말과 침묵이 잘 배합된 인간이길, 키냐르를 읽을 땐 그런 겸손을 바라게 됩니다.
마음이 사나울 때 좋은 치유약 같은 작가, 키냐르. :)

물고기자리 2016-08-23 12:02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이렇게 콕! 집어 말해주시는 센스^^

사람들은 저마다 결핍된 존재들이고, 채우길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독서가 좋은 건 처음엔 무엇이 결여된 지도 모른 채 허기를 채우듯 읽고 또 읽게 만든다면,

어느 순간부턴 그 결핍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내공을 만들어 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 힘을 유지시켜 주는 건 다름 아닌 `쓰기`인 것 같고요.

사실 결핍이란 채워도 채워도 공허하기 마련이지만 그걸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선 제 균형추란 걸 깨닫게 되는 것 같거든요.

살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인 거죠. 그래서 집요하게 파고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과정을 언어화하는 작가들이 참 좋아요.

이 서재도 제겐 그 과정 중에 있는 저만의 치유 장소이죠. 치유라고 말하긴 하지만 영원한 회복을 바란다기보단 계속해서 생각하길 바라는 장소에요. 하지만 그 과정이 공유되는 장소이기도 하기에 배설 같은 글이 되지 않도록 되돌아보긴 해요 ㅎ

(언젠가 제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제 글들이 마치 길 잃은 아이들처럼 이 공간을 맴돈다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거든요. 사실 너무 개인적인 몇몇 글들은 비공개로 돌려 놓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침묵하면서도 말하고, 말하면서도 침묵할 수 있는 게 글인 것 같아요. 집요하게 말하고 또 말해도 배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글이 제가 읽고 싶은 글이고, 쓰고 싶은 글인 것 같고요.

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어떤 이의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와 만나기도 하겠죠^^) 서로의 시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장소인 것 같아요.

동시간은 아니지만 서로의 파동이 각자의 현재에 울림을 주는,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난 A 님이 무척 반갑고 좋습니다^^

AgalmA 2016-08-23 14:14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물고기자리님이 더 애정하고 관심을 기울이셔서 가끔 질투가 날 때도 있는데ㅎ 그 작가들을 저보다 더 잘 말해 주셔서 고마울 때가 더 많아요. 저만 그런 건 아닐걸요~
작가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면서 자식이면서 독자들을 이어주는 중매쟁이? ㅎㅎ
물고기자리님이 다음엔 어떤 작가와 소통하며 말씀하실까 늘 궁금해하고 있어요. 이곳이 물고기자리님께 그런 자리라는 게 잘 느껴져요. 알라딘은 땡 잡았다! 아, 나 정말 주책;

제가 댓글 달아서 물고기자리님 침묵에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니 대댓글에 신경쓰시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 나아가시길^^ 제 경우는 댓글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나중엔 놓칠 거 같아 안 달 수 없긴 하더라는;;
아무튼, 아무튼 전 물고기자리님 말도 좋고 침묵의 결도 좋고 그래요^^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 (p174)

 

 

 

스물두 살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결혼 첫날밤에 파경에 이른다. 1960년대 초반이었던 그들이 결혼할 당시는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둘 다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연애 기간부터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던 에드워드는 어떻게 하면 민망하지 않게, 성공적으로 해낼 것인가에 만 몰두해 있었고, 플로렌스에겐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듯했다. 바로 성행위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혐오의 감정인데, 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를 통해 그들이 소통할 수 없었던 이 민감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나간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고, 왜 이다지도 소심하고 순진했을까?" (p48)

 

 

 

정신착란을 겪는 어머니를 보호하느라 부조리한 판타지 속에서 자란 에드워드는 자존심 강하고, 자기방어적인 청년이다. 그는 결혼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어서 시작되기를 바라며 그저 앞으로 내달리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플로렌스에겐 아버지와 관련하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치부해버린 어떤 기억들이 있다. 에드워드를 사랑하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유폐시켜 놓았던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운 기억은 그와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성행위에 대한 혐오와 공포의 감정이 되어 그녀를 위협한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열망 외엔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플로렌스는 사랑에 따른 의무감을 앞세워 자신의 두려움을 회피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서툰 열망과 플로렌스의 공포는 그들의 첫날밤이란 긴장감 속에서 급기야 폭발하고만 것이다.

 

 

 

"그녀는 늘 서툰 대답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간단한 심리적 반응, 너무나 평범한 것이라서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감각을 통해 사람과 사건, 그리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즉시 인지하는 능력이 자신에겐 결핍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던 것이다. " (p77)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두 사람의 첫날밤에 일어난 일은 생략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간간이 반추하는 그들의 성장과정은 적당한 생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공백으로 남겨둔 것들은, 특히 플로렌스가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은 글로 설명하는 것 이상의 암시를 주어 그녀의 혐오와 수치심을 헤아리게 한다. 스스로 정확히 바라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문제가 아닐 테지만, 무거운 침묵으로 남겨진 것은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대상이 그녀의 아버지였기에, 스스로의 기억을 더더욱 깊고 어두운 곳에 봉인해 두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유폐시켜 놓았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 (p167)

 

 

 

그들이 머물던 호텔의 해안가엔 수 천 년 동안의 폭풍으로, 마치 체로 쳐서 골라낸 듯한 조약돌이 십팔 마일에 걸쳐 크기별로 깔려 있었다. 동쪽으로 갈수록 큰 돌들이 놓여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 어부들은 한밤중에 육지로 올라와도 조약돌의 크기를 더듬어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사실 진작부터 이 해변에 나가고 싶었다. 같이 걸으며 돌들을 주워모아 그 크기를 비교해보고, 폭풍이 정말로 해변에 질서를 가져다주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순진하고 소심한 그들은 각자의 불안에 휩싸인 채, 비공식적인 관습에 매여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식에 집중해야 했다.

 

 

 

달그락 거리는 조약돌을 밟으며 발끝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몰두할 수 있었다면 플로렌스는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역시 그녀의 몸짓과 반응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지 않고 좀 더 기다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해변에 나온 건 두 사람의 사이를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은 때였지만 플로렌스는 어떤 면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지나친 예의로 경직된 그들의 관계에서 벗어나 비록 그를 향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랜 분노를 배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설 속의 어부들처럼 폭풍이 만들어 놓은 해변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소통하지 못 했던 그와 그녀의 차이를 말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 (p197)

 

 

 

좋은 방법을 찾지 못 했을 땐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에드워드가 깨달은 것도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스물두 살의 나이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은 뒤늦게 깨달은 에드워드의 회한으로 마무리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결말이 나쁘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플로렌스는 일상생활에선 서툴렀지만 음악과 관계된 일이라면 언제나 자신 있고 유연했다. 그들이 헤어진 이후로 급변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타고 개방적으로 살아가던 에드워드는 그가 결심했던 일에서 멀어졌지만, 플로렌스는 그녀의 꿈을 이루었다.

 

 

 

"평론가는 리뷰 끝부분에 사중주단의 리더인 제1바이올린 주자를 부각시켰다. (...)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그녀는 비단 모차르트나 음악뿐만이 아니라 마치 삶 자체와 사랑에 빠진 여인 같았다. " (p193)

 

 

 

어차피 인생이란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다. 상처를 주기만 하는 사람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으며, 어떤 인생이든 이야기의 끝에는 회한이 남기 마련이다. 자신의 두려움은 그 존재 자체를 회피하려 할 때는 문제가 되지만 스스로 바라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플로렌스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선택은 에드워드와 상관없이 그녀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이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가장 큰 행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혐오와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플로렌스의 이야기보단 그녀 자신의 꿈을 이룬 결말이 더 좋았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서툰 사랑은 갑자기 성숙해지기 어렵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건 성숙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타인과의 소통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먼저이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개인이 많아질 때 더불어 행복한 우리들도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의 미덕은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서로를 '사랑'으로 기억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서로 함께 했더라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언 매큐언의 글이 매력적인 건, 어느 한 쪽으로 둥글리지 않는 이런 예리함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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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7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7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책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마담 보바리」도 그런 경우인데 언제부터인지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를 찾아가는 어느 여행기에서도, 작가들의 에세이에서도, 최근에 읽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어느 책에서도 플로베르를 이야기했다. 어떤 작가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작가를 경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좀 묘한 감상을 남겼다.

 

 

 

"그녀의 전 존재 속의 그 무슨 반동으로 인하여 그녀가 저리도 정신없이 생의 쾌락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p399)

 

 

 

읽는 내내 한편으론 짜증스러웠고, 한편으론 경탄했다. 작가의 완벽주의가 그 이유였는데 하나하나 갈고닦고 조인 듯한 문장은 그 자체로는 훌륭했지만 인물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그런 감정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주어진 대본대로 현장에서 즉흥 연기를 하는 배우들 같았다. 엠마는 엠마의 역할을, 샤를르는 샤를르를.., 인물들이 소설 밖으로 나와 실존할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아니라 상자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그 캐릭터를 실감하려면 다시 책을 펼쳐들고 작가의 섬세한 비유와 설명에 집중해야 한다.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정해진 이야기 속에, 자신의 성정을 과장되게 연기하며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다.

 

 

 

플로베르는 어느 편지에서 '무(無)에 관한 책',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단다. 그의 뜻대로 이 책은 지탱하는 힘이 굉장했다.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향해 가면서도 적확한 비유들로 가득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환점마다 완벽한 무대장치를 해놓은 듯 느껴졌다. 샤를르와 엠마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절묘한 교차가, 주변 인물들의 완벽한 쓰임새가 정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성향으로선 이런 조감도를 말하게 되는 것 자체가 소설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비평가들의 즐거움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정과거, 부정과거, 현재분사, 특정 대명사, 특정 전치사 등을 완전히 새롭고 개인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비롯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실재와 지식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

 

 

 

최근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란 책을 읽다가 플로베르의 문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여러 편의 모작을 발표했는데 유명한 작가의 글쓰기 특징을 모방해서 마치 그 작가가 쓴 것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글쓰기 연습은 자기만의 문체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프루스트는 플로베르를 모작하며 그 문체의 특징을 반복함으로써 대상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플로베르에 의해 프랑스어 문법이 재창조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뛰어나다는 플로베르의 문체를 원문 그대로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줘도 읽지를 못 하니) 아쉬웠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임에도 섬세한 세공품을 보는 것 같았는데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조망하는 느낌이 든다. 문장에 고요히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속의 창문들이, 평소엔 열린 적이 없던 것들도 하나씩 차례대로 열리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쌓여 있던 먼지들이 날리며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을 되찾는 느낌이다. 늘 무언가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내겐 또 하나의 현미경을 쥐여주는 글보단 정체되어 있는 공기가 순환되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다. 플로베르의 직유보단 프루스트의 은유가 좋은 이유이다.

 

 

 

"반쯤 펼쳐진 채 오므라들 줄 모르는 그 손 자체가 그때까지 견디어온 무수한 고통을 겸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수도자와도 같은 완고함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 표정이 돋보였다. 두 눈은 웬만한 슬픔이나 감동으로는 결코 녹일 수 없는 푸른빛이었다. 오랫동안 가축들과 함께 어울려 지낸 나머지 그녀는 가축들처럼 말이 없고 덤덤해져 있었다. (...) 이리하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이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세기에 걸친 이 노예 생활이 불려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 (p219)

 

 

 

그럼에도 정말 뛰어나다 생각했던 부분은 로돌프와의 관계가 시작되는 '농사 공진회' 장면과 레옹과의 시작을 알리는 '대성당'의 묘사였다. 참사관의 연설과 그들의 대화가 교차하는 '농사 공진회' 장면은 엠마와 로돌프의 격정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주변 상황의 묘사를 통해 각 계층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오십사 년 간의 근속에 대한 포상으로, 은메달 한 개와 이십오 프랑을 받는 자그마한 노파는 그것으로도 더없이 행복해한다. 하지만 연설이 끝나자 각자는 제 위치로 복귀해 주인들은 하인들을 거칠게 다루고, 하인들은 가축들을 후려친다.

 

 

 

그런가 하면 설레는 마음으로 엠마를 기다리는 레옹에게 '대성당'은 신성함이 아닌 규방 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그가 지금껏 음미해 본 일이 없는 온갖 우아함과 정조가 허물어지려 할 때의 매혹에 감싸인 채, 천장의 궁륭들은 그녀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성당지기는 그들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기는커녕 거창한 어조로 성당을 안내해주려 한다. 격정을 앞둔 레옹의 초조함과 눈치 없는 장광설의 교차는 대성당이라는 배경과 그들의 일탈이 만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급기야 성당 밖으로 뛰쳐나간 그들은 마차를 탄다.

 

 

 

"이따금 마부는 마부석에 앉아서 거리의 술집들 쪽으로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곤 했다. 대체 무슨 미치광이 같은 격정에 사로잡혔기에 이 손님들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 채 내처 달리고만 싶어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멈추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곧 등 뒤에서 어서 가라고 호령하는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p356)

 

 

 

김화영의 여행기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는 「마담 보바리」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엔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기도,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나에겐 플로베르에 대한 궁금증을 안겨준 첫 시작이기도 했다. 플로베르가 묘사한 루앙 대성당은 모네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첨탑에 대한 묘사는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레옹에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찬사가 성가시기만 하다. 성당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 엠마와 함께 탄 마차는 내처 달리기만 하는데, 오직 달리는 모습만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그 속도감과 격정이 느껴진다. 바로 그 마차 안의 사정이 궁금해진 제2제정의 검찰이 「마담 보바리」를 법정에 세웠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플로베르는 풍기문란죄로 기소를 당하지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살롱을 출입하며 세력가들과 친분을 쌓아 두었던 덕에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같은 해에 「악의 꽃」을 발표한 보들레르는 똑같은 죄목으로 기소당하지만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을 선고받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는 모습은 어느 시대건 다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엠마는 왜 그토록 자극적인 것들을 필요로 했을까. 멈추지 않고 달리는 마차처럼 그토록 격정적으로 달리고만 싶었을까..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 (p132)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p410)

 

 

 

어쩌면 사랑에서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를 살던 여자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엠마가 연애편지를 쓰는 대신 소설을 썼더라면, 그림을 그렸더라면,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이곳에서 느끼지 못 하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 추구하느라 오히려 누릴 수 있는 행복마저도 고갈시키는 엠마에게, 남편 샤를르는 존재 자체로 굴욕감을 주었다. 길게 이어지던 엠마의 결혼 행렬은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라는 깨달음 이후로 더 큰 자극을 찾아 치닫다가 장례 행렬로 바뀌게 된다. 엠마가 다른 남자들과 행복의 밀어를 나누던 뜰 안의 벤치에선 남편 샤를르가 사랑의 슬픔에 숨이 막혀 죽는다. 샤를르는 소설에서 엠마의 모든 행위들을 부각시켜주는 다른 한쪽의 균형을 묵묵히 담당하다가 그렇게 조용히 퇴장한다.

 

 

 

소설에선 워낙 극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엠마와 같은 성정은 누구에게도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환상이나 이상을 채워줄 무언가를 추구하는 성향은 그 정도의 차이와 대상만이 다를 뿐, 사람들 대개는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어쩌면 엠마도 어떤 대상을 사랑했다기보단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정신을 격정적인 상태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려면 어떤 자극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같은 선상에서 극과 극의 성정인 엠마나 샤를르가 아니라 약제사 '오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금사자 여관 앞에 있는 오메 씨의 약국이다! " (p109)

 

 

 

플로베르 역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마을 용빌을 묘사할 때 오메의 약국을 세세하게 그려 보인다. 오메는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의 인물로 이 소설에선 엠마 이상으로 분주하다. 묻지 않았는데도 설명하고, 끊임없이 참견하며, 유식한 체하기를 좋아하는 영악한 기회주의자다. 플로베르가 수집한 다양한 지식들은 모두 오메의 입을 빌려 나열되는데 그는 '루앙의 등불'이라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기도 한다. 물론 기자정신에 입각해서라기보단 자신에게 유리한 계산이 있어서이다. 인물들 중 가장 열심히 말하는 인물이라서 오메가 있는 곳에선 독자인 우리들도 가차 없이 그의 의견을 들어야만 한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상대적으로 눈치는 없는 사람인데 오메는 알게 모르게 엠마의 일탈을 부추기기도 한다.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많은 요즘은 오메와 같은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알아야 할 정보들이 많아지다 보니 시선은 산만해지고, 듣는 귀는 작아지지만 상대적으로 각자의 입은 커져가는 느낌이다. 그나마도 소설 속 오메에겐 그 말들을 들어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간다. 하지만 그저 그런 현실의 오메들은 그처럼 만족하기 어렵다. 더 많이 말하고, 더 크게 말해보아도 공허할 뿐이다. 때론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이 소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 자신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름답고 적확한 묘사와는 상관없이 무엇이든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젠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인물들, 문장들 때문일 듯도 싶다. 읽는 동안 카뮈의 글이 그리웠다. 정적 속에도 힘을 지니고 있는 그런 글들이, 한편으론 체호프의 서늘한 위안이 필요했고, 또는 어지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말함에도 간절함이 담겨 있던 파묵의 글이 내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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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5-2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적속에서도 힘을 잃지않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 리뷰 정말 좋네요 ^^

물고기자리 2016-05-29 18:0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 님 덕분에 제 말하는 입이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수철 2016-06-0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저 `덩달이`가 되지는 않는 부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에요. 아무려나

잘 읽었습니다. 마담 보바리는 대학 신입생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교수(혹은 강사)의 지도 하에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 어떤 교수를 만났느냐에 따라 보바리 부인에 대한 평가는 판이했을 거라는. ㅎㅎㅎ

저의 보바리 부인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페이퍼로 쓰거나 말거나 하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6-01 10:00   좋아요 1 | URL
저는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문학을 학문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인지 어떤 선입견 없이(무식한 거죠^^) 제 맘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학이 매력적인 건 정답이랄 게 없어서인 것 같아요. 읽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 수많은 갈래길을 만드는 게 저는 좋더라고요.

한수철 님의(아니, 뭐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수철 님이네요!) 보바리 부인 평가는 어떨지 궁금해요ㅎ

오늘은 공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AgalmA 2017-01-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담 보바리 > 읽고 물고기자리님 글 보고 싶어 찾아왔어요^^ 어쩜, 저랑 밑줄이 이리도 똑같은지 움찔움찔ㅎ 그 유명한 마차 장면은 익히 들어서 감흥이 크지 않았는데 농사 공진회는 정말 엄지b 물고기자리님이 제가 언급하고 싶던 부분 반은 해주신 거 같아 리뷰 쓰고 싶지 않아지네요ㅋ; 이거 나름 편한 거 같기도. 누가 먼저 잘 말해 주고 있으니^^ 이렇게 치밀한 소설은 리뷰 쓰기도 까다로워서... 500페이지를 이렇게 단숨에 읽는 거 오랜만였어요. 역시 플로베르~

물고기자리 2017-01-24 00:34   좋아요 1 | URL
저는 감상을 쓰기 전엔 어떤 리뷰도 읽지 않는 뻔뻔한 스타일인데(다른 사람이 언급했건 말건 나는 내 맘대로 쓸 거야!^^), 아갈마 님은 읽으시는군요 ㅎ

밑줄이 똑같다니 신기해요. 어쩌면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에도 겹치는 것들이 꽤 있을 것 같아요 ㅎ

제가 이 글을 쓸 당시엔 카프카나 플로베르 같은 치밀한 머리형 작가들에게 얼마간 질려있던 상태라 좀 시니컬하죠^^

감상에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난히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어요. 너무 완벽한 문장들이 많아 그 부분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런 부분들이 더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 부분을 (언젠간)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은데 아갈마 님 덕분에 다시 반추해보게 되었어요 ㅎ

AgalmA 2017-01-24 00:50   좋아요 0 | URL
읽을 때도 있고 안 읽을 때도 있어요^^
물고기자리님 경우는 특별한데, 님 글 많이 봐와서 저랑 겹치는 감상이 많을 것이다 기대반 재미반이 늘 있죠^^ 제가 읽은 책 리뷰 쓰신 거 있음 참 좋아요. 분명히 제게 남겨주실 게 있는 분이니까^^
마담 보바리처럼 영원히 회자될 작품 경우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관점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글이란 게 그런 성격도 있잖아요ㅎ

물고기자리님처럼 저도 머리형 글쓰기 스타일 딱 제 취향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작품 만나면 나도 당신 분석해주겠어 하는 오기가 생기죠ㅎㅎ 나보코프 때처럼ㅋ

물고기자리님 겨울 동면 끝나면 오실 겁니까. 늘 기다리고 있어요^^ 감기 조심/

물고기자리 2017-01-24 01:08   좋아요 1 | URL
지금 막 아갈마 님 글을 읽고 댓글을 쓰고 왔는데 또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아갈마 님께 그래요! ㅎ 그리고 아갈마 님껜 누구도 흉내 내지 못 할 고유의 관점들이 있어요. 그냥 막 쓰셔도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저도 빨리 돌아오고 싶어요!! ㅎ 늘 고맙고요^^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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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와 같은 글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려 놓은 밑그림 위에 각자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색을 입힐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단편의 매력이자 장점은 누군가의 삶 어느 한 부분에 갑자기 던져진 듯한 느낌을 주는, 느닷없는 시작과 끝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방비하고 당황스러운 채로 어떤 인상이 각인되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축복받은 집」은 조금 달랐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느낌,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웃들의 삶에 초대받아 다녀온 느낌이었다. 

 

 

 

활자를 더 좋아하는 성향이지만 이 책만큼은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때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신선한 단어들의 조합이나 문장의 여운보단 이야기로서의 기능이 더 뚜렷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싶었고, 사리를 입은 모습을, 손목에서 겹겹이 찰랑거리는 팔찌들의 소음을 음악처럼 듣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스토리가 너무 완고하지 않아 괜한 장면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스케치와 같아서 볼 때마다 다른 관점의 인상들을 끌어낼 수 있는 영화 말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서 봤다. 단편들마다 인도인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인도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어떤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몇 편을 연달아 찾아 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 또 보고, 그걸로도 부족해 새삼스레 갠지스 강에 대한 다큐멘터리까지 찾아 보았으니 말이다. 라다크 지방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겸사겸사 보았고, 라자스탄 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생겼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상되는 것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사실 내가 글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경로는 태반이 이런 식인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곤 한다. 특히 어떤 부분에 관심이 생기면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해결되는 지점까지 쭉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편이다. 덕분에 얼마 전에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 소설 「등대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어떤 영상을 통해 찾아내었는데, 저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정원이라도 가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엔 성장 환경이나 개인의 역량, 시대의 상황뿐만 아니라 장소의 역할도 클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사람과 장소라는 연결 고리를 생각하며 말이다.

 

 

 

최근에 읽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도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안 이덴은 지금까지의 삶을 지우고 싶어 여행을 떠나고, 우연히 발견한 어떤 공간과 장소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은 단지 풍경이 아닌 누군가이며 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에겐 희망 대신 연민이, 어떤 장소들에 대해선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이 생기는 것 같은데 키냐르에게도 그런 정서가 있는 듯싶었다. 물론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이 글의 방향성처럼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을 읽는 동안 내 의식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떠나고 있었다. 굳이 도착할 곳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사실 아직 그 여정이 진행 중인데 너무 멀리 가면 이 책에 대한 막연한 감상조차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듯 잠시 멈춰 서 있는 중이다. 작가가 서른 초반에 출간한 단편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부유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작가들의 그런 나이를 좋아한다. 각인하거나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케치만 할 수 있을 나이의 글들을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절묘하게 모아놓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글의 완성도는 부족할지 몰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밑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삶이 이미 충분히 무거운 사람들에겐 너무 촘촘한 그물의 내용보단 조금은 성긴 그물이 더 편하게 읽힌다. 그래서 꾸역꾸역 채워주려는 이야기보단 거꾸로 나의 이야길 풀어 흐르게 만들어줄 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줌파 라히리가 내게 준 축복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단편들은 우리 삶의 한 일면이었고, 하나로 흐르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면 지금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네 인생이 전개될 거야. " (p210)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중 하나는 <센 아주머니의 집>이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지만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아 슬픈, 인도에서 온 센 아주머니와 추억할 것이 없어 외로운, 미국 아이 엘리엇의 만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단편들 중 가장 영상으로 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두 대륙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조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센 아주머니는 엘리엇에게 추억을 나누어주고, 엘리엇은 센 아주머니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다. 어린 나이에도 사람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지닌 엘리엇은 외로움을 잘 견뎌낼 것이고, 센 아주머니 역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좋았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정착하게 되는 화자의 이야기는 덤덤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기와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굳이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이 없더라도 때때로 삶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 속에 우릴 내팽개치곤 한다. 지도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근근이 견디든, 아니면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든, 그 이전으로 돌이킬 방법 같은 건 없다. 살면서 몇 번이나 낯선 대륙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더구나 그곳은 가고 싶지 않던 곳일 수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난폭하다.

 

 

 

하지만 새로운 집에서 마치 보물을 찾듯 성물을 찾아내어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는 트윙클처럼, 일시적인 정전에 맞서 촛불을 준비하는 슈쿠마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해주는 릴리아 처럼어떤 뉴스가 닥치더라도 위엄 있게 견디기 위해 단정하게 옷을 입는 피르자다 씨처럼, 때로 단순한 것들의 위엄이 삶의 다양한 불안들로부터 우릴 지켜낸다. 내가 찾고자 하는 장소도 그런 곳인 것 같다. 지형지물이나 공간으로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삶의 어떤 국면을 맞닥뜨리든, 모든 행복과 불행을 아우르며 삶이라는 경이로움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목적지도, 도착의 의미도 없는 것 같다. 매번 비슷한 듯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별것 아닌 걸로 위안을 주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그들이..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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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5-0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과 다르게요, 어떤 소설이 모종의 주목을 받아, 영화화되는 점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싫었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예요.

그런데요,
물고기자리 님의 글이 이번에는 잘 안 읽힙니다. (아 물론, 제 탓일 거예요! 음주 중이어서일까요?)

아무튼 저는 항상 이 작가는

줌마 라피히라고 말해요. ㅎㅎㅎ

굳어졌어요. 줌마 라피히로.....

물고기자리 2016-05-08 22:35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것처럼 느껴져서 크게 관심 같지 않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이 있다고 하면 관심이 가긴 하지만요ㅎ

근데 이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영화가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잘 안 읽히는 건 어떤 탓이라기보단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유하듯 썼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사실 매번 그런 것 같긴 하네요ㅎ) 그렇다고 좀 더 잘 써보기 위해 고민을 하거나 고치진 않겠어요!ㅎ

저는 줌파 라리히로 착각하게 되는데 제대로 기억하려고 몇 번 반복해서 외웠어요ㅎ

AgalmA 2016-10-09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즉각적 행위고, 데생은 명상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말년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다듬지 않고 멈출 때˝를 알아야 하는 모든 예술 작업. 물고기자리님이 보신 줌파 라히리도 그러했군요 :)

물고기자리 2016-10-09 13:17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 의미의 멈춤이죠 ㅎ

사실 생각이란 건(독자로서) 그 멈춤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거든요.

위대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읽을 땐 이미 인간에 대해 모든 걸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못 하지만^^;;,

스케치 같은 글을 읽으면 뭔가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줌파 라히리의 모든 글을 읽어보진 않아 잘 모르지만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그것을 충분히 담되 적당히 생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는 것 같았어요.

A 님 덕분에 제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뭔가 뻘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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