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마담 보바리」도 그런 경우인데 언제부터인지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를 찾아가는 어느 여행기에서도, 작가들의 에세이에서도, 최근에 읽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어느 책에서도 플로베르를 이야기했다. 어떤 작가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작가를 경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좀 묘한 감상을 남겼다.

 

 

 

"그녀의 전 존재 속의 그 무슨 반동으로 인하여 그녀가 저리도 정신없이 생의 쾌락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p399)

 

 

 

읽는 내내 한편으론 짜증스러웠고, 한편으론 경탄했다. 작가의 완벽주의가 그 이유였는데 하나하나 갈고닦고 조인 듯한 문장은 그 자체로는 훌륭했지만 인물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그런 감정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주어진 대본대로 현장에서 즉흥 연기를 하는 배우들 같았다. 엠마는 엠마의 역할을, 샤를르는 샤를르를.., 인물들이 소설 밖으로 나와 실존할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아니라 상자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그 캐릭터를 실감하려면 다시 책을 펼쳐들고 작가의 섬세한 비유와 설명에 집중해야 한다.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정해진 이야기 속에, 자신의 성정을 과장되게 연기하며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다.

 

 

 

플로베르는 어느 편지에서 '무(無)에 관한 책',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단다. 그의 뜻대로 이 책은 지탱하는 힘이 굉장했다.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향해 가면서도 적확한 비유들로 가득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환점마다 완벽한 무대장치를 해놓은 듯 느껴졌다. 샤를르와 엠마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절묘한 교차가, 주변 인물들의 완벽한 쓰임새가 정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성향으로선 이런 조감도를 말하게 되는 것 자체가 소설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비평가들의 즐거움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정과거, 부정과거, 현재분사, 특정 대명사, 특정 전치사 등을 완전히 새롭고 개인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비롯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실재와 지식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

 

 

 

최근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란 책을 읽다가 플로베르의 문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여러 편의 모작을 발표했는데 유명한 작가의 글쓰기 특징을 모방해서 마치 그 작가가 쓴 것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글쓰기 연습은 자기만의 문체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프루스트는 플로베르를 모작하며 그 문체의 특징을 반복함으로써 대상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플로베르에 의해 프랑스어 문법이 재창조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뛰어나다는 플로베르의 문체를 원문 그대로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줘도 읽지를 못 하니) 아쉬웠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임에도 섬세한 세공품을 보는 것 같았는데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조망하는 느낌이 든다. 문장에 고요히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속의 창문들이, 평소엔 열린 적이 없던 것들도 하나씩 차례대로 열리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쌓여 있던 먼지들이 날리며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을 되찾는 느낌이다. 늘 무언가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내겐 또 하나의 현미경을 쥐여주는 글보단 정체되어 있는 공기가 순환되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다. 플로베르의 직유보단 프루스트의 은유가 좋은 이유이다.

 

 

 

"반쯤 펼쳐진 채 오므라들 줄 모르는 그 손 자체가 그때까지 견디어온 무수한 고통을 겸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수도자와도 같은 완고함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 표정이 돋보였다. 두 눈은 웬만한 슬픔이나 감동으로는 결코 녹일 수 없는 푸른빛이었다. 오랫동안 가축들과 함께 어울려 지낸 나머지 그녀는 가축들처럼 말이 없고 덤덤해져 있었다. (...) 이리하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이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세기에 걸친 이 노예 생활이 불려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 (p219)

 

 

 

그럼에도 정말 뛰어나다 생각했던 부분은 로돌프와의 관계가 시작되는 '농사 공진회' 장면과 레옹과의 시작을 알리는 '대성당'의 묘사였다. 참사관의 연설과 그들의 대화가 교차하는 '농사 공진회' 장면은 엠마와 로돌프의 격정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주변 상황의 묘사를 통해 각 계층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오십사 년 간의 근속에 대한 포상으로, 은메달 한 개와 이십오 프랑을 받는 자그마한 노파는 그것으로도 더없이 행복해한다. 하지만 연설이 끝나자 각자는 제 위치로 복귀해 주인들은 하인들을 거칠게 다루고, 하인들은 가축들을 후려친다.

 

 

 

그런가 하면 설레는 마음으로 엠마를 기다리는 레옹에게 '대성당'은 신성함이 아닌 규방 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그가 지금껏 음미해 본 일이 없는 온갖 우아함과 정조가 허물어지려 할 때의 매혹에 감싸인 채, 천장의 궁륭들은 그녀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성당지기는 그들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기는커녕 거창한 어조로 성당을 안내해주려 한다. 격정을 앞둔 레옹의 초조함과 눈치 없는 장광설의 교차는 대성당이라는 배경과 그들의 일탈이 만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급기야 성당 밖으로 뛰쳐나간 그들은 마차를 탄다.

 

 

 

"이따금 마부는 마부석에 앉아서 거리의 술집들 쪽으로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곤 했다. 대체 무슨 미치광이 같은 격정에 사로잡혔기에 이 손님들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 채 내처 달리고만 싶어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멈추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곧 등 뒤에서 어서 가라고 호령하는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p356)

 

 

 

김화영의 여행기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는 「마담 보바리」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엔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기도,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나에겐 플로베르에 대한 궁금증을 안겨준 첫 시작이기도 했다. 플로베르가 묘사한 루앙 대성당은 모네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첨탑에 대한 묘사는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레옹에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찬사가 성가시기만 하다. 성당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 엠마와 함께 탄 마차는 내처 달리기만 하는데, 오직 달리는 모습만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그 속도감과 격정이 느껴진다. 바로 그 마차 안의 사정이 궁금해진 제2제정의 검찰이 「마담 보바리」를 법정에 세웠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플로베르는 풍기문란죄로 기소를 당하지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살롱을 출입하며 세력가들과 친분을 쌓아 두었던 덕에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같은 해에 「악의 꽃」을 발표한 보들레르는 똑같은 죄목으로 기소당하지만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을 선고받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는 모습은 어느 시대건 다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엠마는 왜 그토록 자극적인 것들을 필요로 했을까. 멈추지 않고 달리는 마차처럼 그토록 격정적으로 달리고만 싶었을까..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 (p132)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p410)

 

 

 

어쩌면 사랑에서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를 살던 여자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엠마가 연애편지를 쓰는 대신 소설을 썼더라면, 그림을 그렸더라면,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이곳에서 느끼지 못 하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 추구하느라 오히려 누릴 수 있는 행복마저도 고갈시키는 엠마에게, 남편 샤를르는 존재 자체로 굴욕감을 주었다. 길게 이어지던 엠마의 결혼 행렬은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라는 깨달음 이후로 더 큰 자극을 찾아 치닫다가 장례 행렬로 바뀌게 된다. 엠마가 다른 남자들과 행복의 밀어를 나누던 뜰 안의 벤치에선 남편 샤를르가 사랑의 슬픔에 숨이 막혀 죽는다. 샤를르는 소설에서 엠마의 모든 행위들을 부각시켜주는 다른 한쪽의 균형을 묵묵히 담당하다가 그렇게 조용히 퇴장한다.

 

 

 

소설에선 워낙 극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엠마와 같은 성정은 누구에게도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환상이나 이상을 채워줄 무언가를 추구하는 성향은 그 정도의 차이와 대상만이 다를 뿐, 사람들 대개는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어쩌면 엠마도 어떤 대상을 사랑했다기보단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정신을 격정적인 상태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려면 어떤 자극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같은 선상에서 극과 극의 성정인 엠마나 샤를르가 아니라 약제사 '오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금사자 여관 앞에 있는 오메 씨의 약국이다! " (p109)

 

 

 

플로베르 역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마을 용빌을 묘사할 때 오메의 약국을 세세하게 그려 보인다. 오메는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의 인물로 이 소설에선 엠마 이상으로 분주하다. 묻지 않았는데도 설명하고, 끊임없이 참견하며, 유식한 체하기를 좋아하는 영악한 기회주의자다. 플로베르가 수집한 다양한 지식들은 모두 오메의 입을 빌려 나열되는데 그는 '루앙의 등불'이라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기도 한다. 물론 기자정신에 입각해서라기보단 자신에게 유리한 계산이 있어서이다. 인물들 중 가장 열심히 말하는 인물이라서 오메가 있는 곳에선 독자인 우리들도 가차 없이 그의 의견을 들어야만 한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상대적으로 눈치는 없는 사람인데 오메는 알게 모르게 엠마의 일탈을 부추기기도 한다.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많은 요즘은 오메와 같은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알아야 할 정보들이 많아지다 보니 시선은 산만해지고, 듣는 귀는 작아지지만 상대적으로 각자의 입은 커져가는 느낌이다. 그나마도 소설 속 오메에겐 그 말들을 들어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간다. 하지만 그저 그런 현실의 오메들은 그처럼 만족하기 어렵다. 더 많이 말하고, 더 크게 말해보아도 공허할 뿐이다. 때론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이 소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 자신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름답고 적확한 묘사와는 상관없이 무엇이든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젠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인물들, 문장들 때문일 듯도 싶다. 읽는 동안 카뮈의 글이 그리웠다. 정적 속에도 힘을 지니고 있는 그런 글들이, 한편으론 체호프의 서늘한 위안이 필요했고, 또는 어지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말함에도 간절함이 담겨 있던 파묵의 글이 내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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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5-2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적속에서도 힘을 잃지않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 리뷰 정말 좋네요 ^^

물고기자리 2016-05-29 18:0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 님 덕분에 제 말하는 입이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수철 2016-06-0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저 `덩달이`가 되지는 않는 부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에요. 아무려나

잘 읽었습니다. 마담 보바리는 대학 신입생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교수(혹은 강사)의 지도 하에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 어떤 교수를 만났느냐에 따라 보바리 부인에 대한 평가는 판이했을 거라는. ㅎㅎㅎ

저의 보바리 부인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페이퍼로 쓰거나 말거나 하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6-01 10:00   좋아요 1 | URL
저는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문학을 학문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인지 어떤 선입견 없이(무식한 거죠^^) 제 맘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학이 매력적인 건 정답이랄 게 없어서인 것 같아요. 읽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 수많은 갈래길을 만드는 게 저는 좋더라고요.

한수철 님의(아니, 뭐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수철 님이네요!) 보바리 부인 평가는 어떨지 궁금해요ㅎ

오늘은 공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AgalmA 2017-01-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담 보바리 > 읽고 물고기자리님 글 보고 싶어 찾아왔어요^^ 어쩜, 저랑 밑줄이 이리도 똑같은지 움찔움찔ㅎ 그 유명한 마차 장면은 익히 들어서 감흥이 크지 않았는데 농사 공진회는 정말 엄지b 물고기자리님이 제가 언급하고 싶던 부분 반은 해주신 거 같아 리뷰 쓰고 싶지 않아지네요ㅋ; 이거 나름 편한 거 같기도. 누가 먼저 잘 말해 주고 있으니^^ 이렇게 치밀한 소설은 리뷰 쓰기도 까다로워서... 500페이지를 이렇게 단숨에 읽는 거 오랜만였어요. 역시 플로베르~

물고기자리 2017-01-24 00:34   좋아요 1 | URL
저는 감상을 쓰기 전엔 어떤 리뷰도 읽지 않는 뻔뻔한 스타일인데(다른 사람이 언급했건 말건 나는 내 맘대로 쓸 거야!^^), 아갈마 님은 읽으시는군요 ㅎ

밑줄이 똑같다니 신기해요. 어쩌면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에도 겹치는 것들이 꽤 있을 것 같아요 ㅎ

제가 이 글을 쓸 당시엔 카프카나 플로베르 같은 치밀한 머리형 작가들에게 얼마간 질려있던 상태라 좀 시니컬하죠^^

감상에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난히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어요. 너무 완벽한 문장들이 많아 그 부분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런 부분들이 더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 부분을 (언젠간)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은데 아갈마 님 덕분에 다시 반추해보게 되었어요 ㅎ

AgalmA 2017-01-24 00:50   좋아요 0 | URL
읽을 때도 있고 안 읽을 때도 있어요^^
물고기자리님 경우는 특별한데, 님 글 많이 봐와서 저랑 겹치는 감상이 많을 것이다 기대반 재미반이 늘 있죠^^ 제가 읽은 책 리뷰 쓰신 거 있음 참 좋아요. 분명히 제게 남겨주실 게 있는 분이니까^^
마담 보바리처럼 영원히 회자될 작품 경우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관점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글이란 게 그런 성격도 있잖아요ㅎ

물고기자리님처럼 저도 머리형 글쓰기 스타일 딱 제 취향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작품 만나면 나도 당신 분석해주겠어 하는 오기가 생기죠ㅎㅎ 나보코프 때처럼ㅋ

물고기자리님 겨울 동면 끝나면 오실 겁니까. 늘 기다리고 있어요^^ 감기 조심/

물고기자리 2017-01-24 01:08   좋아요 1 | URL
지금 막 아갈마 님 글을 읽고 댓글을 쓰고 왔는데 또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아갈마 님께 그래요! ㅎ 그리고 아갈마 님껜 누구도 흉내 내지 못 할 고유의 관점들이 있어요. 그냥 막 쓰셔도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저도 빨리 돌아오고 싶어요!! ㅎ 늘 고맙고요^^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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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와 같은 글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려 놓은 밑그림 위에 각자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색을 입힐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단편의 매력이자 장점은 누군가의 삶 어느 한 부분에 갑자기 던져진 듯한 느낌을 주는, 느닷없는 시작과 끝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방비하고 당황스러운 채로 어떤 인상이 각인되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축복받은 집」은 조금 달랐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느낌,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웃들의 삶에 초대받아 다녀온 느낌이었다. 

 

 

 

활자를 더 좋아하는 성향이지만 이 책만큼은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때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는 신선한 단어들의 조합이나 문장의 여운보단 이야기로서의 기능이 더 뚜렷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싶었고, 사리를 입은 모습을, 손목에서 겹겹이 찰랑거리는 팔찌들의 소음을 음악처럼 듣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스토리가 너무 완고하지 않아 괜한 장면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스케치와 같아서 볼 때마다 다른 관점의 인상들을 끌어낼 수 있는 영화 말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서 봤다. 단편들마다 인도인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인도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어떤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몇 편을 연달아 찾아 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 또 보고, 그걸로도 부족해 새삼스레 갠지스 강에 대한 다큐멘터리까지 찾아 보았으니 말이다. 라다크 지방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겸사겸사 보았고, 라자스탄 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생겼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상되는 것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사실 내가 글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경로는 태반이 이런 식인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곤 한다. 특히 어떤 부분에 관심이 생기면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해결되는 지점까지 쭉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편이다. 덕분에 얼마 전에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 소설 「등대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어떤 영상을 통해 찾아내었는데, 저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정원이라도 가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엔 성장 환경이나 개인의 역량, 시대의 상황뿐만 아니라 장소의 역할도 클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사람과 장소라는 연결 고리를 생각하며 말이다.

 

 

 

최근에 읽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도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안 이덴은 지금까지의 삶을 지우고 싶어 여행을 떠나고, 우연히 발견한 어떤 공간과 장소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은 단지 풍경이 아닌 누군가이며 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에겐 희망 대신 연민이, 어떤 장소들에 대해선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이 생기는 것 같은데 키냐르에게도 그런 정서가 있는 듯싶었다. 물론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이 글의 방향성처럼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을 읽는 동안 내 의식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떠나고 있었다. 굳이 도착할 곳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사실 아직 그 여정이 진행 중인데 너무 멀리 가면 이 책에 대한 막연한 감상조차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듯 잠시 멈춰 서 있는 중이다. 작가가 서른 초반에 출간한 단편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부유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작가들의 그런 나이를 좋아한다. 각인하거나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케치만 할 수 있을 나이의 글들을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절묘하게 모아놓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글의 완성도는 부족할지 몰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밑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삶이 이미 충분히 무거운 사람들에겐 너무 촘촘한 그물의 내용보단 조금은 성긴 그물이 더 편하게 읽힌다. 그래서 꾸역꾸역 채워주려는 이야기보단 거꾸로 나의 이야길 풀어 흐르게 만들어줄 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줌파 라히리가 내게 준 축복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단편들은 우리 삶의 한 일면이었고, 하나로 흐르는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면 지금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네 인생이 전개될 거야. " (p210)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중 하나는 <센 아주머니의 집>이었다. 별것 없는 이야기지만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아 슬픈, 인도에서 온 센 아주머니와 추억할 것이 없어 외로운, 미국 아이 엘리엇의 만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단편들 중 가장 영상으로 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두 대륙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조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센 아주머니는 엘리엇에게 추억을 나누어주고, 엘리엇은 센 아주머니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다. 어린 나이에도 사람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지닌 엘리엇은 외로움을 잘 견뎌낼 것이고, 센 아주머니 역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좋았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정착하게 되는 화자의 이야기는 덤덤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기와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굳이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이 없더라도 때때로 삶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 속에 우릴 내팽개치곤 한다. 지도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근근이 견디든, 아니면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든, 그 이전으로 돌이킬 방법 같은 건 없다. 살면서 몇 번이나 낯선 대륙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더구나 그곳은 가고 싶지 않던 곳일 수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난폭하다.

 

 

 

하지만 새로운 집에서 마치 보물을 찾듯 성물을 찾아내어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는 트윙클처럼, 일시적인 정전에 맞서 촛불을 준비하는 슈쿠마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해주는 릴리아 처럼어떤 뉴스가 닥치더라도 위엄 있게 견디기 위해 단정하게 옷을 입는 피르자다 씨처럼, 때로 단순한 것들의 위엄이 삶의 다양한 불안들로부터 우릴 지켜낸다. 내가 찾고자 하는 장소도 그런 곳인 것 같다. 지형지물이나 공간으로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삶의 어떤 국면을 맞닥뜨리든, 모든 행복과 불행을 아우르며 삶이라는 경이로움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목적지도, 도착의 의미도 없는 것 같다. 매번 비슷한 듯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별것 아닌 걸로 위안을 주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그들이..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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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5-0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과 다르게요, 어떤 소설이 모종의 주목을 받아, 영화화되는 점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싫었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예요.

그런데요,
물고기자리 님의 글이 이번에는 잘 안 읽힙니다. (아 물론, 제 탓일 거예요! 음주 중이어서일까요?)

아무튼 저는 항상 이 작가는

줌마 라피히라고 말해요. ㅎㅎㅎ

굳어졌어요. 줌마 라피히로.....

물고기자리 2016-05-08 22:35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것처럼 느껴져서 크게 관심 같지 않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이 있다고 하면 관심이 가긴 하지만요ㅎ

근데 이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영화가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잘 안 읽히는 건 어떤 탓이라기보단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유하듯 썼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사실 매번 그런 것 같긴 하네요ㅎ) 그렇다고 좀 더 잘 써보기 위해 고민을 하거나 고치진 않겠어요!ㅎ

저는 줌파 라리히로 착각하게 되는데 제대로 기억하려고 몇 번 반복해서 외웠어요ㅎ

AgalmA 2016-10-09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즉각적 행위고, 데생은 명상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말년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다듬지 않고 멈출 때˝를 알아야 하는 모든 예술 작업. 물고기자리님이 보신 줌파 라히리도 그러했군요 :)

물고기자리 2016-10-09 13:17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 의미의 멈춤이죠 ㅎ

사실 생각이란 건(독자로서) 그 멈춤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거든요.

위대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읽을 땐 이미 인간에 대해 모든 걸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못 하지만^^;;,

스케치 같은 글을 읽으면 뭔가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줌파 라히리의 모든 글을 읽어보진 않아 잘 모르지만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그것을 충분히 담되 적당히 생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는 것 같았어요.

A 님 덕분에 제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뭔가 뻘쭘하네요^^;;
 
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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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내고, 쳐내고, 압축해 놓은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은 최소한의 형태만 갖추어 놓은 조각 작품을 보는 듯했다. 더 이상 축약할 것이 없다 싶을 만큼 깎아내고 연마해놓아 응시하는 대상을 향해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선을 만들어 준다. 마치 소리 내고 싶은 음을 정확히 한 음씩만 연주하는 것처럼 집중하고, 음미하고, 기대하게 했다..

 

 

 

"난 혼자 있을 필요가 있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내 인생에서, 내 삶의 본질 안에서, 혼자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 " (p28)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주리라. " (p9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의 글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의 볼륨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금만 작게 말해주세요.., 그래도 다 들리거든요.. '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 말이다. 문장의 밀도가 아니라 문장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의 차이인 것 같은데 카메라를 의식하는 배우의 연기처럼 강요하고 설득하려는 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에게 가장 설득적인 글은 독자가 아닌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글이다. 높이높이 쌓아올리는 방식보단 좀 더 깊고 깊게 파고드는 글.. 파스칼 키냐르의 글엔 적절한 공백과 침묵이 흐르고 있어 생각 속으로 고요히 침잠할 수 있었다. 한 음, 한 음을 내리누르는 듯한 단조의 여운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 (P123)

 

 

 

"길을 잃으려 했고, 길을 잃는 게 좋았고, 마침내 길을 잃었다. " (P134)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길을 잃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선호하는 책들은 문장이 간결하든, 복잡하든 모두 그런 유형이었다. 낯선 장소에 홀로 있을 땐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최대한 보고, 듣고, 기억하게 된다. 낯섦에 반응하는 나를 통해 새삼 나라는 존재를 예민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시선을 지닌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기도, 새로운 가능성이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방향성이 뚜렷해 오직 그 길로만 가야 할 것 같은 글보단 이곳저곳을 방황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좋다. 그 방황조차도 강압이나 강요 없이, 작가 스스로 먼저 탐색하기 시작한 길을 관찰하듯 따라가는 게 좋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게 맞는 길을 찾아보며 말이다. 길을 잃고 나서야 나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발밑에서 도로의 모래가 밟혀 서걱거리는 소리 덕분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던 기억이 나요. " (P273)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 늘 떠나야 하는 사람들. 홀로 있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 정적이 필요한 사람들 말이다. 머무는 동안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시선을 얻어 나의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그 불안의 실체를 직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방향성은 섣부른 확신이 아니라 발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 서걱거림을 알아차릴 때 돌연 깨닫게 된다. 떠날 수 있어야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떠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틀 안에 갇혀 늘 같은 시선으로, 같은 생각으로 머무는 것은 공생이 아닌 착취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중간에서 만나려면, 그것도 즉각적으로 만나려면 항상 그 자리에서 숨 막히도록 머물지만 말고 잘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생 관계에서는 각자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대방을 사정없이 착취한다. 만일 하나가, 우연히, 상대방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경우, 그로 인해 파트너는 질식한다. 상대방이 그를 굶주리게 하면, 그 자신도 죽게 된다. 공생 관계를 균형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극도로 불안정한 대립이다. " (P318)

 

 

 

자신의 음을 잘 아는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나는 동시에 나의 음을 연주하게 된다. 자신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동시에, 타인과 나의 세계를 연주하다 보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화음을 만들어 낸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의례적인 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 낯섦은 없었다. 기대감을 안고 멀리 떠날 짐을 꾸렸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안 이덴이 빌라 아말리아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미 익숙한 장소에 다다른 것 같았다. 혼란스러움 대신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더 깎아내리다 보니 마침내 골조만 남겨 놓은 텅 빈 건물이 된 듯 말이다. 하지만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삶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떠남'은 잘 견디는 힘을 만들어 준다. 모든 장식을 제거한 나라는 구조물을 발견하게 해주고, 나에 대한 환상이 없어질수록 타인에게도 관대해지게 된다. 작가들은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어떤 느낌일까.. 후련한 기분일까, 아니면 공허할까.. 어쩌면 키냐르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다. 파스칼 키냐르빌라 아말리아는 음악가이기도 한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키냐르의 다른 책들은 어떤 느낌일지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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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4-2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음계를 아우르는 서평. 좋네요 ^^ 왜 책을 안내시는지 의아합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바다에 풍덩 몸을 던져버리고 싶네요^^

물고기자리 2016-04-21 20:07   좋아요 0 | URL
이 소설엔 유난히 수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바다에서요!) 키냐르의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으시다니 엄청난 투시력이 있으신 듯합니다^^

왜 그런 의아함을 가지시는지 저는 그게 더 의아합니다!!^^ (그래도 감사해요ㅎ) 사실 요즘은 책을 읽어도 감상을 쓰는 게 심드렁한 상태라 바쁘다는 핑계를 위로 삼아 자꾸 미루고 있거든요ㅜㅜ 쓰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 같아 허전하긴 하면서도 말이죠. 그래도 키냐르의 소설은 어떤 말이든 하지 않고 지나가면 섭섭할 것 같아서 끄적여 보았는데 저는 시이소오 님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ㅎ

한수철 2016-04-2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좋은 글 올려 주셨으면 좋겠어연.

물고기자리 님은 예민하신 분인데,

아니 그래서 좋게 여겨졌어연.

음......

물고기자리 2016-04-27 10:15   좋아요 0 | URL
고마워연ㅎ

좋은 글이라고 말할 건 없지만 독자층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어느 한 부분이었음 싶어요^^ 근데 저는 쓰는 것보단 읽는 걸 더 즐기는 성향인 것 같아요ㅎ

˝음..... ˝으로 끝나는 막줄은 뭔가 한수철 님 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한수철 님의 표현 방식이라는 생각이요ㅎ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등대로」를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서 읽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소설들이 그렇듯, 다 읽고 난 후에도 읽었다는 포만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소설은 무언가 꽉 차오르는 듯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잘 아는 감정의 파도들이 수시로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인생이라는 화폭 위에 사람과 삶, 예술을 섬세한 터치로 그려 넣은 듯한 이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프루스트의 소설이 시각적인 감각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며 화사하게 만개한 꽃과도 같이 의식을 개방하게 만든다면 울프의 소설은 심연 속으로 깊이 잠기는 기분이었다. 마치 걸어간 자리들마다 깊은 웅덩이가 생기는, 인생이라는 습기 많은 길을 점점 더 묵직해지는 발걸음으로 내딛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사람들의 온갖 감정으로 가득 적셔진 해면처럼 느껴졌다. " (p46)

 

 

 

이것이야말로 내가 너무 잘 아는 감정이 아니던가..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였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감정 배출소가 되어왔던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인의 감정을 잘 듣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듣는다는 건 공감하고, 수용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원치 않아도 그 사람의 앙금을 고스란히 흡수해야만 하는 심리적인 노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의 감정과 분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노동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온몸으로 거부해 보지만 말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 역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마치 말라버린 우물에 돌멩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에게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한결같이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 그 일은 정말이지 힘만 많이 들고 얻는 건 적은 작업이었다. " -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들 중엔 이런 심리적인 노동에 소모되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그의 성정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하루키 역시 듣는 사람이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정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정작 자신의 감정은 상실해 버렸거나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것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 상실감의 근원을, 심연의 우물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하루키의 작법은 비교적 건조한 편이다. 번잡한 앙금들은 가라앉히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무심한 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하루키의 문장을 걷는 것에 비유하자면 뽀송뽀송하게 마른 길을 산책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나의 무게나 타인의 무게를 거두고 부유하는 느낌,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글로 편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울프의 「등대로」가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무게에 타인의 무게까지 겹쳐진 느낌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울프의 자전적 이야길 체험하는 수준에서 가볍게 읽어갈 수 있는 소설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인간관계에, 생각하는 방식에, 감정의 무게에 쉽게 휩쓸릴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 숨 막히는 느낌이 힘겨워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책은 읽히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 같다. 30대의 나는 '싯다르타'와 같은 글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또 그때의 내겐 그런 글들이 꼭 필요했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때였고, 특정 분야의 전문서적이나 논문들을 읽어야 했던 30대의 나는 문학과는 잠시 결별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척 힘들었기에 요가 수련과 더불어 명상이나 마음공부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읽는 '싯다르타'는 그저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런 종류의 책으로 해소할 수 없다면 다시 「등대로」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물론 봄날의 햇살과 꽃망울을 돋우는 자연의 신비를 책보다 더 열심히 읽었지만 말이다. (이젠 새로운 계절이 주는 가르침이 여느 책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창문들은 열고 문들은 닫아야 하는데 ― 그 단순한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 (p40)

 

 

 

「등대로」는 울프 스스로 '소설' 대신 '엘레지'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부모님의 섬세한 초상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며, '내 영혼에 열린 어떤 열매에도 이제 손이 닿을 것 같다'고 했을 만큼 부모로부터의 고착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던 작품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어서 의식의 흐름을 나열하는 모든 문장들이 지극히 섬세하며 사색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울프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램지 부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며 그들의 순간들을 마치 예술 작품처럼 한 곳에 모으고 정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창문은 열고 문은 닫아야 한다는', 램지 부인이 늘 되뇌는 저 말은 무심한 세월이 그런 순간들을 침범하고 흐트러 놓지 못하게끔 막으려는 주술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적셔진 해면 같았던 램지 부인이 소진되고 기진하여 세상을 떠나자 거침없는 세월의 바람이 문틈으로 침범하고 만다.

 

 

 

"그녀가 그렇게 뒤뚱거리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는 모습은 삶이 그저 기나긴 슬픔이요 고생임을,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눕는 삶, 물건들을 꺼내고 치우고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는 듯했다. 일흔이 다 되도록 그녀가 아는 세상은 수월하지도 아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쳐서 굽어졌다. (...) 그러나 뒤뚱대며 다시 일어나 자신을 추스르고는 여전히 곁눈질로, 자신의 얼굴, 자신의 슬픔조차 비스듬히 건너다보는 눈길로, 거울 앞에 서서 입을 헤 벌린 채 망연히 미소 지었다. " (p175) 

 

 

 

이 소설은 생각할만한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문장들을 옮겨와 감상을 적고 싶어졌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 소설의 매력이란 문장 속을 기꺼이 헤매고, 음미하게 만드는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소설의 2부는 추상적인 묘사만으로 10년이란 세월의 경과를 보여주는데 읽을 때마다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던 램지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빈집이 세월에 스러지는 과정은 우리의 내면이 황폐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힘이 있었으니, 간간이 찾아와 빈집을 청소하는 맥냅 부인의 움직임이었다. 풍랑에 몸을 맡기는 배처럼 뒤뚱거리며, 세상의 냉소와 분노를 무시하듯 흘금거리며, 세월의 웅덩이와 망각으로부터 부패와 부식을 막아내었고, 삶의 위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죽었노라, 제각기 홀로 / 그러나 나는 더 거친 바다 밑에서 /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잠기었노라 " - 윌리엄 쿠퍼의 시, 「익사자」의 마지막 구절

 

 

 

램지 부인이 살아 있던 시절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등대의 불빛이 아름다웠다. 문을 닫아 세월이 흩트리지 못하게 막아주던, 혼돈의 와중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해주던 동안엔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드러난 등대의 실체는 그저 헐벗은 바위 위의 삭막한 탑일뿐이었다. 그런 등대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끊임없이 아내에게 동정을 구함으로 위안을 얻으려 했던 램지 씨는 결국 그녀를 소진시키고 기진하게 만드는 감정의 폭군이었지만 인간의 삶이나 지식을 대면하는 시선만큼은 거짓 없이 초연했다. 그가 늘 읊조리던 쿠퍼의 시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에서 '등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역자 해설에선 '등대는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이자 세월이며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고 말한다. 내가 느끼는 등대는 사람과 삶과 추구하는 지향과 예술, 그 모든 것들을 관조하는 내면의 시선인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보이는 정경이란, 어떤 것이든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거리감이 있을 땐 무언가 있을 것만 같은, 상상과 동경으로 그 대상이 아름답게 포장되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폐허가 드러나며 공허함을 가져오는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 역시 바로 그 거리에 있는 것 같다. 램지 부인이 했던 역할은 사람들 사이에 아름다움과 친밀감을 선사해주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의 유지가 아니었을까.. 그 마법과 같은 균형을 위해 그녀 자신은 소모되고 탕진되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순간이, 새벽이 몸을 떨고 밤이 정지하는 주저의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깃털 하나만 저울에 내려앉아도 무게가 기울어 버리는, 그런 순간이. 깃털 하나에도, 집은 주저앉고 무너져서 어둠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것이었다. " (p185)

 

 

 

그 균형이 깨어지고 나자 각자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고, 상대에게 더 가까워진다. 폐허가 드러나고 불편해졌다. 하지만 가까움이란 연민을 만들어준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사람들 저마다는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존재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곁눈질로 흘금거리며 버티어 내든, 직시하고 파고들며 심연으로 빠져들든, 우리에겐 삶을 관조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깃털 하나의 무게를 알아차릴 수 있는, 나와 밖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말이다. 비록 깨달아지는 순간이 지극히 찰나적이며 짧게 반짝거린다 하더라도 나의 삶을 비추어주는 등대는 내 안에 있는 그 시선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멀리, 때로는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그 시선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게 다였다 ― 단순한 질문이지만, 해가 갈수록 죄어드는 것이었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 (p211)

 

 

 

예술이란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을 작품으로 남겨 영원히 고정시켜 놓은 결과물인 것 같다. 등대의 불빛은 어두운 가운데에서, 인생의 풍랑 속에서 그 가치가 드러난다. 위대한 작가들이 자신의 어둠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강렬한 빛은 우리의 삶을 여전히 비추어준다. 하지만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불빛일지라도 나의 순간들 역시 빛으로 고정시켜 놓을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 놓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나를 가장 적확하게 위로해주었던 것은, 나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버릴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그런 찰나들을 기록해 두었던 나의 글들이었다. 에둘러 표현해도, 많은 생략이 있었어도 나 스스로는 그것들을 알아보며 그 순간들을 복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터널에 들어섰을 때 예전의 지표를 확인하며 다시 빠져나올 수 있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울프는 「등대로」를 씀으로 그녀가 표현했던 대로 어머니에 대한 고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에겐 벗어난 순간과 다시 되돌아가는 순간들이 여전히 반복 중일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거나 단련시켜 주는 것 역시 그런 반복에 있다. 제자리걸음 같으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완전함이란 없지만 매 순간 최선은 있다는 걸 믿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등대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약간은 자조적인 의문을 담은 눈길로, 왜냐하면 현실로 돌아올 때면 사물과의 관계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 한결같은 불빛을, 냉혹하고 사정없는, 그토록 그녀 자신이면서 또 자신이 아닌, 그토록 자신을 사로잡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혹되어 꼼짝할 수 없는 채로 불빛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것이 그 은빛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밀봉되어 있는 어떤 것을 쓰다듬기나 하는 듯한, 그 어떤 것이 터지기만 하면 기쁨으로 넘쳐흐를 듯한 기분으로, 자신은 행복을, 절묘한 행복, 강렬한 행복을 맛보았었다고 생각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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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4-0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 전에 읽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물고기자리님 글 읽으니 살짝 떠오르는 것들이 있네요. 조만간 다시 붙잡아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4-05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오래 읽은 책 같아요. 최대한 밀어내기도,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면서요^^ 단번에 써 내려간 것 같은, 버릴 것 하나 없는 문장들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야나 님은 (잘 모르는 제가 언뜻 보기에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시고, 가꾸시는 분 같아서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시이소오 2016-04-0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고 고품격의 리뷰란 이런것이군요. `등대`와도 같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울프의 책이 저는 잘 안 읽혀요.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4-05 18:28   좋아요 0 | URL
칭찬이 지나치게 후하신 것 같긴 하지만 봄꽃 향기처럼 감미롭긴 합니다 ㅎ

프루스트를 읽기 시작한 후론 만연체 글의 매력에 빠져든 것 같아요. 근데 이런 책들은 이젠 다 읽은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시점이 어지간해선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무한 루프로 계속 읽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시이소오 님의 꼼꼼한 리뷰를 읽으면 책을 대신 읽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한 맘이 들어요ㅎ 리뷰도 어느 방향으로든 치우치지 않게 잘 쓰시고요^^

시이소오 2016-04-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는 한쪽으로 치우쳐있고 편파적이고 편향적인데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ㅋ ^^

물고기자리 2016-04-05 18:34   좋아요 1 | URL
헐!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그 치우친 쪽을 제가 좋아하나 보죠 ㅎ
 
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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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예컨대, 우리의 오타와 집 정원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느낌 같은 것. 제 말은 어머니의 인생이 충분한 것이었느냐는 거예요. 어머닌 준비가 되셨나요? 아니면 겁이 나시나요? 제가 뭘 해드리면 좋죠? " (p432)

 

 

 

캐럴 실즈의 대표작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스톤 다이어리」는 데이지 굿윌 플렛이란 여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여정을 다룬 소설이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스토너」를 연상시키는 책이었지만 감상은 조금 달랐다. 스토너의 삶이 슬픔과 위안을 동시에 주었다면 데이지의 삶을 통해선 공허와 쓸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1905년에 태어나 구십여 해의 짧지 않은 생을 살았던 데이지는 탄생의 순간을 비롯해 비극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어떤 면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 공허한 느낌은 무엇일까.. 불행이든 행복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긴 생애를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들로 채워진 소설이었지만,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던 현실성 때문인지 마음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불편한 여운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았다. 리뷰를 쓰기엔 내 마음의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았고, 쓰지 않고 넘어가기엔 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소설이어서 며칠 동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데이지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장마다 대략 십 년 정도의 삶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을 이루는 형식들이 다채롭다.

 

 

 

"인생이란 끝없는 증언의 연속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간에, 우리의 상태는 목격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관심받기를 원한다. 우리 자신의 추억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 다른 설명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식들, 탄생과 사랑, 죽음 같은 의식들은 누구에게든 그리고 소용이 있든 없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인가? " (p64)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데이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목소리들이 필요했다. 한 사람의 삶이란 어느 날 갑자기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삶으로부터 연결될 뿐만 아니라 생의 순간들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돌조각을 하나씩 쌓아 올려 탑을 만들어 가듯 저마다의 위치에서 볼 수 있었던 면면들이 모이고 모여 입체적인 구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전체의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숨겨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에겐 선명한 페이지로 기록되지만 그것 역시 어느 한 면일 뿐이며, 대개는 읽다만 페이지가 되거나, 뜯겨져나간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겐 해독 불가한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 봉인해 놓은 페이지들도 있다.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 (p159)

 

 

 

소설 속 데이지의 삶은 곧은 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해서 마치 우리들의 실제 기억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데이지의 내면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부가 가려져 있거나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일생을 그린 소설임에도 타인에 의해서만 묘사되는 손님처럼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실제로 한 사람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것들이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언가로 늘 분주했던 삶이지만 정작 그 안에 자신은 없었던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 또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저 주변의 필요에 의해 그에 맞는 조각처럼 살았던, 그래서 몸이든 마음이든 쉼 없이 움직여야 했던, 공허를 마주하기 싫어서 더 분주했지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공허를 찾아내어 갈수록 텅 비워지고, 결국엔 공백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들처럼 말이다.

 

 

 

"그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 (p474)

 

 

 

그래서 또다시 몰두할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데이지는 우울했던 시기를 힘겹게 넘기고 맞이하게 된 노년의 평온했던 어느 때에도 자신이 아니라 두 분의 아버지(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 생존 여부를 모르는 시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많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었고, 손자와 손녀들도 여덟이나 있었지만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즈음엔 미래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과거에 매달려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있던 연결고리들을 찾아내고, 그 연결 속에서 또 다른 공허를 찾아냄으로 가슴 아픈 퇴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고독일지도 몰랐다. 인생 그 자체의 불행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고독감 말이다. " (p41)

 

 

 

"데이지 굿윌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영상들에서 이상한 점은 그녀가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람 그림자라든가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용기 있는 순간이든 부끄러운 순간이든 적어도 한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플렛 부인은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 일을 견딜 수 없었다. 여든 살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 (p451)

 

 

 

한 사람의 생이란 홀로 존재하는 순간을 증언할 수 없다. 글이나 영상으로 남긴다 해도 그것을 읽고, 봐줄 사람이 없다면 그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소설 속 데이지의 시아버지처럼 무려 백십 세가 넘은 장수의 삶을 누렸던 사람일지라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로 살아가던 사람의 생은 목격한 사람도, 증언해줄 목소리도 없기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공허하다. 그분의 존재는 데이지가 자신의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의 누군가들 역시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감이란 더없이 무력하다. 어쩌면 나 역시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되새김질하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나로서는 단 한 번도 소멸된 시간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것과, 우리 인생의 태반이 낭비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53)

 

 

 

우리 모두에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모든 생은 그 최후의 어둠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매일매일은 비슷한 듯 달랐으며 비통했거나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다만 언제 태어났고, 누구누구의 누구였으며, 언제 사망했다는 몇 줄로 요약되고 만다. 데이지의 삶만을 보더라도 그녀 혼자서 페이지를 모두 채우는 경우는 없었다. 구십여 년을 살았음에도 데이지의 것이라곤 서랍 하나에 담긴 흐트러진 몇 가지의 물건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시간들은 어느 곳으로 소멸되는 것일까..

 

 

 

"돌이 만들어내는 기적은, 단단하고 무감각한 물체를 땅속에서 꺼내어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 (p163)

 

 

 

책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나는 '머시 스톤 굿윌'을 생각했다. 주인공 데이지의 어머니였던, 스톤월의 고아원 출신이었기에 '스톤'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으며 무지로 인해 데이지를 낳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임신한 줄조차 몰랐던 그녀를 말이다. 평생 동안 이방인이었던 머시 스톤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데이지를 세상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데이지의 탄생은 곧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상실을 경험했던 데이지는 자신에겐 어떤 '결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은 바로 확실성의 핵이며, 내면의 값진 보석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삶에 밀착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인생에 달라붙으려면 상상력의 활동으로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스톤 다이어리」라는 책의 제목처럼 데이지가 펼쳐가는 삶은 어머니의 안쓰러운 삶을 연장시키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데이지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테고, 실제로 데이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머니를 낳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는 그 대상이 나였을 때를 포함해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서야 증명되는 것 같다.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서로의 무게를 전달해 줌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밋밋한 돌에 광채를 만들어 영원성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바람이 빠지듯 소멸되어 버리고 말 인생일지라도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주세요. " (p434)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며 쓸쓸했던 이유는 한 사람의 전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며, 언제고 닥칠 이별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미풍에도 흔들리기 쉬운 우리들의 삶을 알고 있기에, 가장 힘든 순간엔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들이기에, 그래서 데이지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했던 마지막 말 역시 나의 것이란 걸 알기에..,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고민하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읽자마자 별 네 개를 클릭했지만 묵직한 돌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은 긴 여운 때문에 다시 다섯 개를 눌러 본다..)

 

 

 

"난 평온하지가 못해.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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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 2016-03-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

물고기자리 2016-03-14 09: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한수철 2016-03-1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문득(핀트에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이승우의 소설 `부재증명`이 생각나네요. (제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나 자신이, 나의 부재(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데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 상황 같은 거요.

수많은 혀끝이 나 자신을 손쉽게 죽여가도, 나를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그런, 어떤.

아무튼 소개해 주신 책을 읽어봐야겠구먼요.^^

물고기자리 2016-03-14 09:34   좋아요 0 | URL
존재의 증명도 그렇지만 부재증명이라니 어쩐지 더 서글픈 것 같아요..

사람이란 자신의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직접 실감하지도 못하며 사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눈길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소한 중요한 순간만큼은 목격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요. 서로를 위해서 말이죠.. 어쩌면 서로의 뒷모습을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요.ㅎ

저도 이 소설은 작년쯤엔가 아이리시스 님의 페이퍼에서 보고 읽어야지.. 마음먹고 있던 건데 이제야 읽은 거예요.ㅎ

저는 한수철 님이 어떤 책을 언급하시면 되게 궁금해져요^^

서니데이 2016-04-04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4-05 12:14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다정한 서니데이 님이 다녀가셨군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점심 맛있게 드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