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이방인」은 햇빛으로 가득한 한낮의 정적을 닮은 글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의 작은 소음들만으로 채워진, 배경음악이 없는 영화를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 기묘한 정적감은 이 소설의 핵심 요소인 듯 여겨지는데 행간의 침묵 덕분에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화영은 '2015년 새 번역에 부치는 말'에서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한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미 독자들에게 익숙한 고전이므로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 역시 가능한 한 피했다 하니 겁이 덜컥 나기도 했지만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아무런 잡념 없이 글의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p97)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긴장감이 흐르던 글의 침묵에 어느덧 균열이 생기고 만다. 인공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즉흥적으로 이 일을 벌이고 마는데 소설 속 뫼르소의 감정은 태양을 묘사하는 문장들로 대변되고 있다. 이를테면 "대낮의 빛이 마치 내 따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거나 "머릿속에서 태양이 꽝꽝 울렸고", 또는 "쏟아붓는 불비를 맞으며", "빛의 칼날이 솟아날 때마다", "이마 위에서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 같은 표현들이다. 뫼르소는 오직 현재만을 감각하며 빛을 즐기지만 그날의 태양은 엄마의 장례식 날과 같은 태양이었다. 통증을 유발하는 그 뜨거움을 견딜 수 없어 대낮의 침묵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지중해 지방의 사람들에게 태양이란 존재는 어떤 느낌일지 막연히 상상해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타국에서 경험했던 가장 강렬한 태양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리게 만드는, 그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생명의 빛이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빛으로 채워지는 것 같은 나른한 포만감을 느꼈고, 주변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식물처럼 빛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내 상황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인생이 반전될만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었다. 게다가 무척 겁을 먹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 내 피부에 닿는 빛의 감각이나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고 있다. 타국의 낯선 냄새들까지도 선명히 떠오른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나의 온 존재를 비추어주던 태양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갈팡질팡 오가던 나의 마음에 일종의 균형을 만들어 주었던 것은 바로 그 태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을 느끼게 해주었던 강렬했던 빛은 지금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 빛을 그리워한다. 카뮈가 고향의 빛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 「안과 겉」, 알베르 카뮈

 

 

 

카뮈는 그의 산문집 「안과 겉」에서 안정적인 균형이 아닌, '그 자체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균형'을 언급한다. 그것은 몸짓 하나 잘못하기만 해도 금이 가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그의 모든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손에서 빠져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 없는 정열,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에 있다고 말이다. 우리의 질문들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는 허무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허무'는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타국의 태양 아래서 내가 느꼈던 그 감정 역시 허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고 싶게 만드는 찬란한 허무였다. 오직 빛을 따라가는 식물처럼, 꽃피우다 소멸되고 말지언정 한껏 피어오르고 싶은 허무였기 때문이다. 빛의 결핍으로, 오히려 자의식의 과잉 속에 살아가던 내게 태양이 가르쳐준 진실이란 오직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의 과잉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기에 오직 빛을 감각하며 살아가다가 막다른 허무를 만난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살펴보는 습관 같은 건 없었던, 육체적 욕구에 감정이 방해받는 일이 많았던 뫼르소는 부조리를 경험하며 타인들의 유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은 사실주의도 아니고 환상적 장르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육화된 신화, 그것도 삶의 살과 열기 속에 깊이 뿌리박은 신화라고 봅니다. " - 알베르 카뮈

 

 

 

정적이 흐르던 글의 침묵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몇 페이지에선 드디어 폭발해 버린다. 소설 속의 정적이 심지가 되어 뜨거운 불비를 쏟아 버리는 것이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즈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부터 그저 슬펐다. 아마도 글 속에 담긴 불편한 정적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튼 몸짓 하나에도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침묵이었고, 삶의 무게에 입을 다물어버리게 만드는 불편한 침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뫼르소에게 벌어진 일들을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는 이야기로만 읽다 보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p44)

 

 

 

"그때 나는 엄마의 장례식 날, 간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 (p124)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맞이할 죽음도 이렇게 빠져나갈 방법이라곤 없는 것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오랫동안 단두대로 가기 위해선 그것이 설치된 대 위로 올라가야 된다고, 계단을 올라가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며 사실인즉 그 기계는 그냥 땅바닥에 지극히 간단히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두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이란 이렇게 우러르며 향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희망 없는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린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 (p17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오직 태양을 향하는 식물처럼, 그저 존재한다는 진실만으로 과묵하게 살아가던 뫼르소를 통해 이 세계의 무심함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세 가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온통 태양과 죽음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삶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폭발시켜 행복을 이야기하는 뫼르소처럼 말이다.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찬미가 아닐까 싶다. 죽음의 신화를 벗기고, 삶에서 신화를 찾는 소설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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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01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따뜻한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1 19:40   좋아요 1 | URL
네, 덕분에 따뜻한 저녁시간이 됐어요^^

cyrus 2016-02-0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세상의 의지. 전집판, 전집판 양장본, 일러스트판. 이번에 또 나왔네요.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6-02-01 20:10   좋아요 1 | URL
김화영 님에 의하면 원문에 가장 밀착되도록 노력했다고 하는데 2015년 새 번역이라 그런지 간결한 문체라 집중하기 좋았어요ㅎ

지금행복하자 2016-02-0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이라는 말에 혹~ 합니다. 벌써 두권이 있는데도 말이죠~

물고기자리 2016-02-01 21:13   좋아요 0 | URL
옛 번역을 가지고 있지 않아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오래된 소설을 읽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설명하는 투의 문장이 없어서 저는 좋더라고요ㅎ

비로그인 2016-02-0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뮈의 이방인은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인 것으로 압니다. 님은 소설을 꽤 심층적으로 읽는 것 같군요. 서평도 아주 잘 쓰시네요. ^^

물고기자리 2016-02-01 21:42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서평은 아니고요^^ 그저 느껴지는 대로 끄적여 놓은 평범한 감상문입니다ㅎ

짜라투스트라 2016-02-01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아~~ 글이 너무 좋아요^^

물고기자리 2016-02-01 21:15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2-02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ㅎ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는 머가 먼지 전혀 몰랐었는데 실존주의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소설도 조금 알 것 같더군요ㅎ

물고기자리 2016-02-02 07:53   좋아요 1 | URL
저는 읽을 때 비평적인 어떤 이론보다는 태양을 비롯한, 뫼르소가 느끼는 여타의 감각들에 집중해서 읽었었어요ㅎ

주인공의 심리를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질 않으니까 오히려 소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감상에 정답은 없으니 읽는 사람들마다 여러 다른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뫼르소의 입장이 되어본 것만으로도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후련했어요^^

시간이 좀 흘러 다른 느낌으로 집중해보면 또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다시 읽고 싶어요ㅎ

고양이라디오 2016-02-02 08:0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주인공과 소설에 몰입하는게 가장 좋은 감상법인 것 같아요. 번역도 중요한 것 같고요.
저도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는 익숙해서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을 안하게 되는데 말입니다ㅎ

저도 다시 읽어볼 땐 땡볕에 몸을 좀 드러내봐야겠네요^^

물고기자리 2016-02-02 08:26   좋아요 0 | URL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저는 친절하지 않은 소설 속에서 헤매는 걸 참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판단하려 하기보단 관찰자이자 체험자가 되려고 하는 편이라 비평적 읽기와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요ㅎ

땡볕^^, 저는 소설을 읽는 동안 강렬한 태양이 그리웠어요ㅎㅎ

서니데이 2016-02-02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따뜻하고 좋은 저녁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2 19: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ㅎ

서니데이 2016-02-04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편안한 저녁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4 18:48   좋아요 1 | URL
매번 서니데이 님의 안부 글로 저녁시간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