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 추리작가이자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인 레이먼드 챈들러. 그가 만든 사립 탐정 캐릭터인 '필립 말로'는 후대 하드보일드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54년 출간된 「기나긴 이별」은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장르 소설에 속하지만 문학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영향을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책을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을 만큼 챈들러를 좋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1960년대 내 영웅이었습니다. ˝라고 했고, 그의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의 일부는 「기나긴 이별」의 완벽한 오마주라고 한다. 이 책을 읽어 보니 두 작가의 문체는 표현의 밀도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하루키의 인터뷰 시점은 2004년인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제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제 목표랍니다. ˝
사실은 이 문장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뿐만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도 관심이 생겼더랬다. 그래서 조만간 읽어야 할 작가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았고, 하루키 역시 그 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꽤 읽었고, 그의 글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나의 성향상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우선 그 책을 읽었다. 그런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요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언제고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이 소설을 미루지 않고 읽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각각의 책으로도 의미가 있었지만 카라마조프를 인용한 하루키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독서의 연결성을 느끼는 계기도 되었다.
하루키가 글쓰기의 이상이라고 언급한 그 반쪽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는 것 역시 나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집요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면 한동안 그것과 연계된 것들을 두루 탐색하는 성향 덕분에 어떤 해엔 오로지 역사에만 몰두하거나 사회과학만을 탐독하기도 한다. 지금의 추세론 한동안 소설을 읽게 될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그 출발점은 대가들의 인터뷰집인 「작가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몇 년 만에 다시 정독했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책장에서 읽히길 기다리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이 장바구니에서 대기 중이고, 필립 로스의 책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책들을 읽다 보면 연계된 새로운 관심분야가 또 생길 테니 이 독서의 방향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다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로 돌아오면, 챈들러의 문장에 대한 이야길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탐낼만한 문장들이 많았고, 줄거리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은 내용마저도 소음이나 잡담처럼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정묘한 스케치를 하는 듯한 서술들은 작은 사슬들이 서로 연결돼 듯 촘촘히 이어지며 장소나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구체화시켜준다.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만 이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밀한 표현에도 강약과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조절이 미흡한 글을 읽을 때면 음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볼륨을 줄이거나 키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균형 있는 문장력을 지녔더라도 메마른 느낌이 드는 글은 문학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역할만을 한다. 감정적 유형임에도 감정으로 흘러넘치는 문장을 싫어하지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푸석한 느낌을 주는, 인간에 대한 습기가 없는 글엔 마음이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온기도 좋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형식적인 따뜻한 글에는 쉽게 진력을 내는 편이다. 따뜻함이 흘러넘쳐 과하게 친절한 글도 식상하다. 그보단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담담한 문체의 글에서 인간의 슬픔에 공감하는 한 방울의 눈물에 더 마음이 간다. 펑펑 울어버리는 눈물은 자기 설움이 원인일 때가 많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퍼 올리는 마른 습기 한 조각은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그 마지막 편인 「기나긴 이별」이 처음이라 전작의 느낌은 알지 못하지만 챈들러의 글에선 냉소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통찰력과 약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즈음의 장르 소설과 비교하자면 사건에 대한 서술의 비중보단 사색적인 문장들이 많아서 스토리를 통해 지적인 쾌감을 얻고자 하는 성향의 독자들에겐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반대로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조급증이 없고, 사람의 심리나 행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아름다운 문장들과 더불어 시대나 장소에 대한 통찰력을 덤으로 얻지 않을까 싶다.
아직 전부를 알진 못 하지만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필립 말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는, 아직 손님이 들지 않은 막 문을 연 바에서 필립 말로와 함께 '김릿' 한 잔을 마셔보고 싶어진다.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진짜 김릿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