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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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에서는 보통 전화를 걸 때 들어본 적이 없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먼 곳,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 (p33)

 

 

 

프란츠 카프카 「성」을 읽는 나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주파수를 잘 못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집중해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점점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초반 5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엔 두 번이나 깊은 잠이 들었다. 내용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낯섦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책 때문이 아닌 나의 컨디션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만 읽자는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느껴지는 무력감이 나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카프카의 위력인지 알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기의 성분조차 고향의 것과는 아주 다른 그런 타향, 너무 낯설어 숨 막혀 죽을 지경이면서 그곳의 어처구니없는 유혹에 빠져서 계속 가다가 계속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타향에 온 기분이었다. " (p63)

 

 

 

카프카는 나의 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러 작가들이 카프카의 「성」을 왜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는질 알 것 같았다. 이에 비하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벌레가 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변신」은 카프카의 가벼운 농담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카프카는 마치 미로를 설계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고, 그 길로 오차 없이 이끌고 있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소설을 읽듯, 일상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찾으려는 마음을 접어두고 주인공 K를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섰고, 이후엔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 사정에 대해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지해요. " (p82)

 

 

 

카프카의 인물들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이 해야 할 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저 자기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정해진 루틴대로 늘 같은 상황, 같은 일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다. 책 속의 이야길 내 의지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K를 통해 먼 곳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전달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물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나의 세상은 서로 다른 성처럼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는 행위에 내 자유를 박탈당한 기분이라고 할까, 나의 주관적 판단이나 인상을 배제 받은 것 같은 소외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의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어요. " (p126)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상념들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두가 착각인 것 같고, 인물들에 대한 신뢰감도 들지 않았다. 어떤 것이 왜곡이고 어떤 것이 진실일지 막막함을 느꼈다. 대개의 소설은 읽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읽을 때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야기의 흐름을 떠올리면 연결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글은 깊은 안갯속으로 다시 들어설 때처럼 잠시의 주춤거림이 필요했다. 나의 주파수를 카프카의 주파수에 맞추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카프카의 문장에선 시선을 멀리 둘 수가 없다. 바로 지금 내디딘 발 앞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걸어온 자리에 발자국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꿈길을 걷듯이, 나는 다시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것 또한 무력감의 이유였고, 잠이 들진 않았지만 피로가 쌓여갔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피곤해하니까. " (p367)

 

 

 

「성」은 카프카의 대표작이자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언급된다고 한다. 지극히 폐쇄적이면서 한편으론 무한히 개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화, 종교, 실존주의, 사회적, 정신분석적, 전기적 등등 많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에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설의 경우 책을 다 읽기 전까진 작품 해설을 읽지 않는 개인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론의 관점이라는 틀이 아닌, 사소한 나의 감상을 먼저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앞서 내가 느낀 감정은 무력감과 피로감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였지만 주인공 K의 심리에 이미 초반부터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무익한 성으로의 여행, 아무리 봐도 헛수고인 하루, 아무리 봐도 허망한 희망인 거죠. " (p253)

 

 

 

읽는 내내 잠이 부족한 것 같았고, 마음이 어수선했다. 성의 토지 측량사로 초빙되었지만 성에는 닿을 수 없던 주인공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런 일이 있기는 했던 걸까, K가 토지 측량사이긴 한 걸까, 성이란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등등의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을 한 개인이 얼마만큼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진실의 진실성을 과연 왜곡 없이 파악해 낼 수 있기나 한 건지를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앎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지, 그러므로 삶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일들이 사람을 기죽이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장애물들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죠. " (p369)

 

 

 

열심인 사람들, 깨어 있으려는 사람들, 측량하려는 사람들일수록 이상할 만큼 중요한 순간엔 잠이 들어 버린다. 힘을 주면 줄수록 튕겨져 나가는 것 같다. 집요하게 예측하고 예감하려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같다. 개방인 동시에 폐쇄의 이유, 앎과 동시에 왜곡인 이유처럼 결정적인 때일수록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때문에 주저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점은 잘 알아두세요. 가끔은 전체 상황과는 무관한 그런 기회도 생겨난다는 것을요. 그러한 기회가 오면, 한마디의 말, 한순간의 눈길, 한 번의 신뢰 표시만으로도 기력을 소진하면서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 더 많은 걸 성취할 수도 있지요. " (p370)

 

 

 

나도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에 속하는 것 같다. 좀 더 살펴볼 것들이 많다며 돌아가길 주저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삶의 방식이 이럴 땐 피로감이 만만치 않다. 늘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선 저절로 힘이 빠지는 걸 경험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나를 개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곡식알에 비유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체를 통과하려면 별나고 특이한 형태의 작고 능숙한 낟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p378)

 

 

 

삶의 경험이 늘어 갈수록 유연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유연함이란 나약함이 아니다. 유연하려면 우선 지탱해줄 근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어에 상당한 힘을 비축하고 모든 근육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유연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도 나를 그 앎 속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벗어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

 

 

 

이 유명한 문장은 카프카가 그의 친구인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의 버림을 받고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썼단다. 카프카의 「성」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다. 카프카의 사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길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길 충분히 한 것 같다. 읽는 동안 내내 피로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몸이 나의 생각보다 더 많은 말들을 들려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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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그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에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깊게 새겨질 것이다. (...)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 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니라. 그리고 체호프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 (p342)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좋은 글이란 심장이나 지성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삶으로 향할 수 있는 작거나 큰 힘을 보태어 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작가라면 읽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하려는 순간, 나의 심장은 조금 빠른 리듬으로 두근거렸고, 기대감이 어린 전율이 등줄기를 살짝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필요하면 전화해는 카버의 미발표 단편들과 에세이, 그가 쓴 서문이나 서평들이 실려있는 책이다. 단편으로만 접했던 카버의 목소리를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의 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결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카버 작품의 일어 번역자이기도 했던 하루키는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가 옆에 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했단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 읽기 전의 기대감과 다 읽어 간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란 흔치 않다. 나에겐 하루키도, 카버도 그런 작가들에 포함되는데 두 작가를 모두 좋아하다 보니 그들의 글이 주는 서로 다른 여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루키의 인물에게선 삶과 타협하거나 농밀하게 밀착시키지 않은 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하루키의 주인공은 (적어도 의식적으론) 자신이 찾는 것도, 가야 할 방향도 확신하지 않고 있다. 저항하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한 걸음씩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찰해 나간다. 이런 여정엔 (의식이 고정되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데 확신 없이 시작된 여정이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의 유연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그의 인물에 동화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나 역시 나의 무의식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나를 관찰하게 된다.

 

 

 

카버의 글에선 고단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현실과 밀착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일상의 피로와 불안이 느껴진다. 삶의 체취가 진하게 풍겨온다. 무슨 일이 당장 일어날 것만 같다. 카버의 인물들에게서 피로와 불안을 덜어내면 오히려 비틀거리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유연하지 않다. 무엇인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곧 잃어버릴 것 같거나 이미 잃어버린 직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은 과장되지 않고 지극히 고요하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긴장하게 되고, 집중하게 된다. 

 

 

 

두 작가의 장점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 같다. 하루키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것들을 섬세하게 나열해가며 조금씩 무의식의 한가운데로 이끌어간다. 피로 없이 그 여정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카버는 직접적으로 불안을 건드린다. 여정을 거치지 않고 그 현장의 중심으로 곧바로 데려간다.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이니 만큼 카버에겐 과정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앙금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말이다.

 

 

 

하루키가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엔 함부로 결론짓지 않으려는 거리두기식 관찰법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없었다는 것도 포함될 것 같다.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카버에겐 하루하루를 벌어 돌보아야 할 자녀가 있었기에 글을 쓰면서도 어느 정도의 불안이 늘 따라다니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내 삶과 글을 만들고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이다. 알겠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비록 이제는 앞날이 상대적으로 더 명확하고 주위도 조용하지만 말이다. " (p194)

 

 

 

카버가 말하는 어느 빨래방에서의 일화를 읽을 땐 마음이 아팠다. 그의 당혹스러움과 무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걸리는 일엔 집중할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잡고 악착같이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의 환경에선 단편소설이나 시를 써야만 했다. "짬을 내 자리에 앉아, 운이 좋다면 재빨리 써서 완성할 수 있는 글들이어야만 했다. "고 말한다. 카버는 자신을 위해 하루에 한두 시간만 짜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 자체가 천국 같았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적어도 한동안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세상 말이다. 이와 더불어,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 하지만 내가 알고 살아가던 세상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살던 세상은 날마다 법칙과 방향과 속력이 바뀌는 듯했다. " (p186)

 

 

 

그의 삶은 달라졌지만 어느 순간부턴 자신이 원해서 단편소설과 시를 쓴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으며, 갑자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왜 아직 저녁식사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아이가 따지며 물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카버는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웠다고 한다.

 

 

 

"단편소설은 쉼표와 마침표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르는 결과물이었다. " (p192)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모두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문장의 간결함에 있다. 간결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표현함에 있어 스스로 혼란스럽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다른 경험을 했든, 두 사람 모두 결과적으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기질과 능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카버가 말하길 한 작가와 다른 작가를 구별지어주는 기준은 재능이 아니라고 한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차고 넘친다며,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작가,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트릭을 싫어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트릭이나 술책이 필요 없으며, 심지어 주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작가라면,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끔은 그냥 멍하니 서서 이런저런 대상을 바라보며 푹 빠져 입을 헤벌리고 감탄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은 석양일 수도 있고 낡은 신발 한 짝일 수도 있다. " (p164)

 

 

 

그리고 그는 신중하게 검토하는 자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결국 작가에게 있는 건 단어뿐이니, 기왕이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적절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말이다. 과장되었거나, 정확하지 않거나, 애매하다면 독자의 눈은 그 단어들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버리고 작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불운한 글을 "빈약한 열거"라 불렀단다.

 

 

 

"만약 제대로 쓴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음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 (p171)

 

 

 

레이먼드 카버는 그의 글이 간결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미니멀리스트' 수준으로 모든 걸 없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문학작품은 단지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작가와 독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한다. 독자에게 이해받는 걸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능력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알 수 있게 다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소소해서 놓치기 쉬운, 무시하기 쉬운 우리의 사소한 감정들을 새삼 건드려주고, 다시 보살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도 이런 말을 했었다. 쉬운 언어와 훌륭한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아주 친절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독자들도 알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오만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실린 작가의 말엔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좀 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그 후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나와 같은 시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

 

 

 

이것이 바로, 내가 카버와 하루키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복합한 현실을 그리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한편으론 나의 현실을 잊고, 또 다른 한편으론 현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여정을 같이 해주고, 카버는 단번에 그곳으로 데려다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사실 두 작가의 글이 아니라도 모든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야기의 서사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지루한 묘사들이나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문장도 나름으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체만큼은 두 작가의 글이 좋다. 목소리의 톤은 달라도 스스로의 감정에 취하거나 성마르지 않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글을 좋아한다.

 

 

 

글에도 표정과 목소리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글에는 특유의 음색이 묻어있고 표정까지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화가 나 있거나, 불안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슬퍼 보이기도 하고, 낮은 저음으로 조용조용 속삭이기도, 얇고 높은 톤으로 빠르게 내뱉기도 한다. 번역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떤 표정이나 목소리가 없는 글을 읽을 땐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도 그럴 경우엔 겨우 생각만 조금 반응하게 된다. 심장이 제 위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소설의 경우엔 작가 나름의 음색이 묻어있는, 담담한 표정과 일정한 톤의 리듬이 있는 글이 좋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일수록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짓듯이 어조의 기복이 큰 글은 산만해서 집중하기가 어렵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큰 근육보단 잔근육을 적절히 잘 사용한다. 아니, 사용한다기보단 감정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반응시킨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배우더라도 미리 계산된 몸짓을 하는 배우의 연기엔 마음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표정에 의지하지 않고 눈빛으로 이야길 하는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때론 대사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더 감정이입이 된다. 이를테면 싫다는 말을 하면서도 눈빛으론 정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이유와도 비슷한 것 같다. 표정을 읽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눈빛을 읽듯 문장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연기일수록 요란하지 않다. 좋은 글일수록 치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에게 필요하고, 맞는 글이라면 얼핏 보았을 뿐이더라도 내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성장하는 것 같다. 게다가 카버가 인용한 체호프의 글처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언제나 삶으로 향할 수 있게 해준다. 글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글들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표현이 간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단순해서가 아니다. 쌓여있는 많은 말들 중에서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히고 그 위로 떠올려진 투명한 말들만을 건져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심장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했던 글들은 바로 그런 글들이었다. 참 신기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의 글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말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문장 속의 인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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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0-0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의 글에 대한 가치관이 드러나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물고기자리 2015-10-10 00:16   좋아요 0 | URL
그냥 읽는 것에 대한 취향 정도지요^^ 근데 아무래도 쉽게 변하진 않더라고요ㅎ

AgalmA 2015-10-1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와 카버에 대한 나이론 저와 비슷하시네요.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나이 14세로, 레이먼드 카버는 39세로 저는 생각하죠...

p186, p171 격하게 공감요/


물고기자리 2015-10-13 11:13   좋아요 0 | URL
불안정한 주변의 세계를 하루키의 소년이 저항 없이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느낌이라면 카버의 남자는 그 남자로 인해 주변까지 불안해지는 느낌도 들어요..

저도 저 인용문들을 격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카버가 인식하던 세상은 결국 그의 단편소설이 되었고, 단어가 음표인 듯 자신의 음을 연주하는 느낌이 무엇인지도 너무너무 알 것 같거든요. 실제로 단어를 연주하는 작가들이 있으니까요ㅎ

2015-10-13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3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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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작고, 귀엽고, 심지어 산뜻하고 예뻐 보이는 책이다.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론 커피잔을 쥘 수 있을 정도의 부피감이어서 맘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불현듯 꺼내어 읽기에 좋을 책이다. 다 읽었더라도 가방 한켠에 넣고 다니다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지겹지 않을 책이다.



풋풋하고 상큼해 보이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아마도 둘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상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지금 막 호감이 가는 사람을 발견한 듯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거나 말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유형이라면 골똘히 사색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고, 문장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성향이라면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장소로 떠나있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의 어딘가로, 아니면 그만이 아는 어느 시절의 공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책의 외적인 특징인 '작고, 귀엽고, 예쁘고, 산뜻한'이란 단어들의 느낌은 읽기 시작한 순간 곧 잊힌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쓴 62편의 단편들을 읽는 느낌은 이미지로 가득한 짧은 영상을 이어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문장들은 나의 생각을 앞질러 도착했다가 이내 바로 떠나가 버린다. 군더더기 없는 시적 메시지들은 어떤 이미지로 은유되어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또 빠르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일부러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도 보았지만 이 책은 머물기보단 계속해서 읽는 것이 더 좋았다. 하나의 단편을 깊게 사유하기보단 전체를 관망할 때,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시적 메시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건 미국의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전의 노래였다. 노래는 하도 오랫동안 돌아다녀서 미국의 먼지에 녹음되었고, 모든 것에 내려앉아서, 의자와 자동차와 장난감과 램프와 창문을 수천만 개의 축음기로 만들어 우리의 찢어진 가슴에 노래를 들려주었다.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설명하는 느낌, 열심인 느낌, 애쓰는 느낌 없이 힘들이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인데 구차함이 없으니 오히려 말하고픈 이미지만 선명히 떠오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처음부터 그렇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져 삭막한 금속성의 세계에 서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

 

 

 

"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인지력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상상력과 인지력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이미지와 메타포의 시적 테크닉은 그렇게 해서 쓰인 작품을 다분히 서정적으로 만들어준다. " - 리처드 브라우티건

 

 

 

브라우티건은 발전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상실감을 논리적인 설명이나 비평 대신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정'이란 정서의 공유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론 감정의 소통이 더 빨리, 많은 것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주어진 단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서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 그림, 사진들처럼 함축되어 있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정서라고 말이다.

 

 

 

"친구의 눈은 마치 물에 젖은, 찢어진 양탄자 같았다. 일종의 이상한 진공청소기처럼 나는 그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이고 장황한 말로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또 다른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다. "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하지만 브라우티건이 살았던 시간과 지금은 또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상실감이란 그것을 온전히 가져본 연후에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이, 머물러본 적 없이, 더 빨리, 더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에선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필요를 앞서는 편리한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요즈음이다. 표면을 얇게 스치듯 살아가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잃어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서정성'이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캘리포니아는 다른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서는 예전의 삶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곳의 에너지 자체가, 혹은 금속을 먹는 꽃의 그림자가 우리를 다른 삶으로부터 불러와 길거리 주차 미터기가 타지마할처럼 늘어선 캘리포니아의 주민으로 만든다. " - 「캘리포니아로 모여드는 사람」

 

 

 

지금 여기는 또 다른 캘리포니아라는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가 아닌 다른 장소의 이름이어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서정성이란 순간을 사색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자 정서라고 생각한다. 서정이란 애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삶에 대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애착을 가질 때 잃어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것들을 기대하게 된다. 서정을 잃은 세대들은 공허한 것 같다. 공허함으로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깨우고, 열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음 안에 있는 너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 같다.

 

 

 

"내 타자기는 막 마취에서 도망친 말처럼 빠르며, 침묵 속에 빠져 있으며, 밖에서 해가 비치는 동안 내 단어들은 질서 있게 달리고 있다. 아마도 그 단어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 「내가 선택한 깃발」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 (...) 봄이 되면 젊은 남자는 환상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 남자의 환상에 커피 한 잔의 공간은 있을 것이다. " - 「커피」

 

 

 

"겨울폭풍이 집을 뒤흔드는 동안, 새 라디오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나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밤을 맞고 있었다. 매 프로그램이 갓 잘라낸 다이아몬드 같았다. " - 「토크쇼」

 

 

 

그런 순간들을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린 어디에 있든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얻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 상실이 쌓여가는 것 또한 삶의 다른 모습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변화하는 속에서도 나와 너의 목소리를 켜고 들으며 삶으로 향해 있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머물고 싶다. 브라우티건의 단편들에선 실제로 '''라디오'라는 단어가 종종 언급되고 있다. 그 밖에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들린 단어의 목소리는 그 두 가지였다.

 

 

 

때론 잠시 닫아두기도 하겠지만 문의 열쇠만큼은 근처 어딘가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싶다.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들고 나서며, 때론 너의 문 밖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냐며 두드려보고 싶다. 나의 문이 닫혀 있을 때에도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늘 곁에 두고 싶다. 같은 주파수에서 공명하는 소리들을 듣는 것은 완벽한 하루에 닿기 위한 '서정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나는 계속해서 듣고, 말할 것이다. 상실보다 두려운 것은 공허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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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져요.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한 문장이 좋아요. 커피와 관련된 말을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몇 개 본 적 있는데, 저 문장이 최고예요.

AgalmA 2015-09-21 18:14   좋아요 0 | URL
<커피> 상황은 정말 웃겨요. 블랙유머 시트콤ㅎ 그래서 더 인상적이지만~

물고기자리 2015-09-21 1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것은 단편의 첫 문장과 제일 마지막 문장인데 중간에 좀 사연이 있어요..ㅎ 외롭고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런저런 것들을 겪고, 경험하고 사색할 수 있는, 한 잔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인생이라면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느낌이었어요^^ 브라우티건의 진짜 삶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단편에선 상실이 완벽한 공허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AgalmA 2015-09-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죠. 네, 시입니다. 어떻게 만들었지 한참 들여다보고 베껴도 써봤지민 완벽히 브라우티건 거여서 에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 감상자 모드로....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지날 때마다 읽고 싶어진다니까요ㅎ

물고기자리 2015-09-21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중에선 제가 인용한 첫 문장이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가슴에 뭔가가 쿵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글 전체가 시였지요^^ <샌프란시스코 YMCA에 바치는 경의>도 웃음과 날카로움이 있어 재밌었고, 인용하진 않았지만 다른 단편들에도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몇 번씩 읽게 되더라고요ㅎ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은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장 그르니에의 「섬」과 함께 프랑스 3대 미문(美文)으로 불린다고 한다. 난 사실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다. 결과로서 아름다워진 문장은 좋지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문장을 읽는 건 단맛 나는 케이크를 혼자서 전부 먹어치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문장보단 글을 읽는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 좋다. 슬픈 노래일수록 담담하게 불러야 그 노랫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온통 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담담함이 익숙지 않은 정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감각이 먼저 깨어나는 곳에서, 화려한 향기로 유혹당하는 곳에서, 모든 색소들이 제각각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곳에서 어떻게 건조한 글을 쓸 수 있을는지 말이다. 사방이 아름답게 일렁이는 곳에서 매일 눈을 뜨게 된다면 오히려 또 다른 세계로, 생각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을 꿈꾼다. 아름다운 생각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도피처로 삼고 싶다. 아름다움을 읽기보단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사색하기보단 그 감각에 취하고 싶다. 선 그어진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진다. 조금씩 나아가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경계 안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 같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

 

 

 

"비틀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론의 난간에 꼭 매달린다. 이론은 이론이고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는 것이다. (비논리도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과도한 논리는 나를 지치게 한다.)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는 대로 가만 놓아두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내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내 이성이 주장한다 해도 나는 내 심장이 옳다고 손을 들어준다.) (...) 이론의 결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 (p220)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포기한다. 개인은 자기를 망각할 때 비로소 자기를 긍정한다. 자기 생각에 빠진 자는 자신의 방해물이 된다. 미인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내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은 없다. 가장 감동적인 선(線)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신이 되는 것은 스스로 신성을 포기함으로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버림으로써 신은 창조된다. " (p224)

 

 

 

"그들의 지혜? ..... 아! 그들의 지혜라면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대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만사를 경계하고 위험을 피한 채 최소한으로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충고에는 항상 굳어지고 괴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귀찮은 잔소리를 늘어놓아 자녀들을 오히려 바보로 만드는 어떤 가정의 어머니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 " (p276)

 

 

 

"아무리 형편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열광적인 신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은 죽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알려는 욕망은 의혹에서 생겨난다. 믿는 것을 그치고 앎을 얻도록 하라. 사람은 증거가 없을 때에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지 말라. 강요당하지 말라. " (p287)

 

 

 

"너무 오랫동안 똑같은 식물들을 기르다 보면 토지가 지력을 잃고 중독되어 새로운 세대는 처음 세대와 똑같은 장소에서 자양분을 얻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조상들이 먹고 소화한 것을 다시 먹으려 들지 말라. 아비의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퇴화와 위축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듯이 플라타너스나 단풍나무의 날개 달린 씨앗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라. " (p291)

 

 

 

"그리스 우화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아킬레스어머니의 손가락이 닿았던 기억 때문에 살이 여리어진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불사신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 (p292)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랑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 (p293)

 

 

 

이 책의 202쪽 까지는 1897년에 출간된 <지상의 양식>이고 이후부턴 1935년에 출간된 <새로운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옮겨 적은 글들은 모두 <새로운 양식>에서 발췌한 것들이 되었다. <지상의 양식>은 보다 더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들이지만 그에 도취되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꼼꼼하고 친절한 각주들이 도움이 됨과 동시에 읽는 것에 방해가 되었을 뿐, 소설을 먼저 접하고 난 후에 이어 읽은 산문은 지드를 이해할 수 있는 연장선이 되었다. 그가 지향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될수록 그 반대편에서 무겁게 서성이던 지드의 그림자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지쳐있거나 스스로가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다시 그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나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닌, 수동적으로 주입된 생각들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는 과정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것들은 쉽게 힘을 잃는 반면에 나에게 주입된 생각들은 아무리 밀어내고 거부해도 쉽게 떠나질 않는다. 감정은 다른 것을 좇더라도 생각이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버리고 싶어지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하지 않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잠시 도피하거나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글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보다 먼저 겪었고, 더 많이 고민했던 분들의 글을 읽으며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지상의 양식」 1927년판에 붙이는 서문에 의하면 그는 이미 이 글을 쓰던 때의 자신을 이내 떠나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바랐던 그대로 어느 상태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변화하며 살아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본문 말미에는 "내 책은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고 적혀있다. 모든 책은 그 당시 누군가의 일기이자 바람이고, 또 다른 이의 추억이자 희망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들 역시 당시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는 일기와 같다. 감상에 다 끄적이지 못 했던 좀 더 묵직한 이야기들도 책과 함께 흘러간다. 지드는 추억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추억을 저버리지 못한다. 지난 일기도 가끔씩 들여다본다. 그래야만 지금의 나를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도약할 수 없는 정신을 가졌다면 조금씩 걸으면서라도 삶의 모든 면면을 관찰해가며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늘 아름다운 도피처를, 낯선 공간을 꿈꾸지만 정작 그런 곳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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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6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9-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4대 미문으로 해서 에밀 시오랑 추가요/ 절판되어서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빌려읽으며 번역이 형편없다는 와중에도 저는 저절로 필사를 하게 되더라는.... 최근 새번역 책들을 그래서 다시 샀죠. 우울할 때 읽으면 압생트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9-16 23:03   좋아요 1 | URL
필사를 하게 될 정도라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담으려고요~ 가을이라 그런지 수직으로 파고드는 느낌의 책들이 끌리네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몇 가지의 이유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일종의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 오는 날의 묵직한 공기는 나를 차분히 눌러주어 고요히 침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습기 어린 장막이 드리운 듯 나에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빗소리에 주변의 다른 소음들이 묻히는 것도 좋다. 사춘기 시절엔 특히 비 오는 날의 모든 것들이 좋았다. 머리카락과 옷이 젖는 것도, 찰박거리는 발걸음도 좋았다. 친한 친구와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어느 버스에 올라탄 적도 있었다. 종착지를 경유해 돌아오는 동안 오직 비에 젖어드는 거리를 보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햇볕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갈망하게 된 것 같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릴 때와는 달리 결핍이나 상실감을 알게 될 즈음부턴 강렬한 빛에 이끌리게 되었다. 볕이 좋은 날엔 나른한 고양이처럼, 읽던 책도 잠시 덮어 두고 오직 빛을 느끼며 조용히 호흡을 해본다. '비'는 새삼 나를 각인시켜 주었지만 '햇볕'은 빛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빛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점점 옅어지다가 이윽고 투명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해야 하고 극복하려 애쓸 필요 없이, 나 자신이 빛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그 느낌을 좋아한다. 내 몸의 경계가 없어지고, 추구해야 할 것도, 도달해야 할 곳도 없이 내가 온 세상과 일치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요가를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몸을 경계 없이 움직이게 될 때 어느새 동작은 서서히 줄어들고 나의 호흡 외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어떠한 나로 경계 짓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 때 나는 더없이 가벼워진다.




특히 마음이 늘 활발히 움직이는 나는 그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상념이 많은 나의 기질상 계속해서 정화해나가지 않으면 켜켜이 가라앉은 앙금들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차오르면 비우고, 다시 차오르면 거듭 비우는 것이 나의 균형을 잃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 - 「행복의 충격」

 

 

 

김화영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을 통해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었다. 김화영이 인용한 그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관능적인 풍요로움이 가득한 지중해 연안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과는 달랐다. 김화영에 따르면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행복은 반드시 아이러니컬한 형용사가 동반된 것들이었다. 어두운 행복, 비참한 행복, 눈물겨운 행복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로방스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열린 풍경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 -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는 카뮈의 서문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르니에의 사유는 카뮈의 서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섬」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고,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와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말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몇몇 문장에 마음이 움직였다. 격렬함보단 은은하고 고요한 동의였다. 하지만 그의 사유 자체보단 그의 정신이 더 와 닿았다. 원치 않는 고립의 섬이든, 자발적인 도피의 섬이든, 아니면 섬과 섬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든, 스스로 딛고 있는 땅을 인식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순례를 말이다. 자신의 정신을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는 섬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굳이 순례를 멈추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확신을 피하고 싶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 섬」

 

 

 

그르니에가 사랑했던 그의 고양이 물루는 해야 할 동작만을 정확히 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릴 때도 제가 가진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쏟아가며 옹크린단다. 매 순간 제 행동에 흠뻑 몰두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필연적인 행동을 하는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르니에는 말한다.



하지만 필연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에 열려있어야 할 것 같다. 바라보기만 하는 섬이 아니라 도착할 수 있어야 하고, 다시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섬과 섬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침묵과 도약이 아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대답을 들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도피이든, 고립이든, 나에게 묻고 대답하며 나는 섬 사이를 방황하고 싶다. 때에 따라 비를 맞기도, 햇볕을 쪼이기도 하며 유연하게 살고 싶다. 영원한 정착이란 또 다른 고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카뮈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섬」이 준 충격과 영향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외엔 비길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지드의 감동은 찬양의 감정과 동시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남긴 반면 「섬」이 보여준 감동은 자신들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랄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으로부터 딴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야성적인 행복으로부터 깨어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섬」을 읽으며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느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과잉의 풍요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신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 어떤 이는 부족함을 채워야 하고, 또 다른 이는 과함을 덜어내야 한다. 결핍 투성이는 까닭 모를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지나친 풍부함은 오히려 정신을 삭막하게 만든다. 결핍은 풍족한 미래를 기다리며 채움을 갈망하고, 과한 풍족의 희열 속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에 공(空)에 매혹당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린 저마다 이렇게 다른 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만나는 절묘한 균형의 순간이, 그때의 벅찬 희열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때론 나와 다른 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비슷한 섬을 발견할 땐 다정히 말을 걸어보기도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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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9-11 23:16   좋아요 1 | URL
마음을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성향들은 세심하다, 섬세하단 말을 곧잘 듣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익사할 것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웃픈 말이긴 하지만 가끔은 그런 마음이 저를 단련시켜 준다는 걸 느껴요. 저의 짐이면서 동시에 무게중심이 되어주거든요. 힘들 땐 몇 곱절 더 힘들기도 하지만 기쁠 땐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웃기도 하니까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