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어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다. 어떤 생각에 집중하려면 먼저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는데 완성된 생각을 써 내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끄집어 내고, 그 모양들을 확인해보아야 비로소 생각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글자를 좋아하지만 어릴 때부터도 그림보단 활자들이 많은 책을 더 좋아했었다. 순정만화를 읽더라도 그림에 주목하는 순간보단 말풍선 속의 글에 집중하는 순간이 더 길었으며, 읽는 순간과 빨리 이별해야 하는 것이 아쉬워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 전집류처럼 최대한 길게 이어나가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꿈속에서조차도 어느 순간의 이미지에서 급작스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클로징 멘트처럼, 독백 형식의 문장으로 꿈의 종결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새로운 형태의 문장들을 만나면 반가워진다. 단어들이 흩뿌려진 위치나 모양들을 살피다 보면 나의 생각들도 새로운 문장으로 재편성되며 의식이 풍부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섬세한 인간 관찰을 담은, 프루스트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만연체 역시 나에겐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게다가 어떤 문장 들은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감동 못지않은 환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작가들이란 모호했던 감정이나 생각에 형태를 만들어 주는 조각가이고, 단어의 연주가이거나 화가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민한 정신을 지닌 종합 예술가였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 (2권 p4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을 읽을 땐 생상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었다. 음악이란 듣는 것 자체로도 큰 기쁨이지만 음악이 글로 표현되는 걸 읽는 건 또 다른 감동인 것 같다. 표현하는 사람의 단어들로 다시 한 번 연주되기 때문이다. 빛과 형태와 질감이 부여된 음악은 소리가 아닌 단어의 물결로도 나를 찰랑거리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을 특별하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생각하는 방식에 있지 않을까 싶다. 스쳐 지나가는 상황들에 의미가 생기는 건 그 순간을 빚어내어 형태를 만들어준 '생각' 덕분이니 말이다.

 

 

 

"단순히 양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삶의 나날들은 다르다. 그 나날들을 횡단하기 위해 나같이 다소 신경 예민한 사람들은 자동차의 '기어'를 다양하게 조절한다. 올라가는 데 한없이 시간이 걸리는 험하고 힘겨운 나날도 있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속력으로 내려가는 비탈길 같은 날도 있다. " (2권 p34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스노비즘'(속물근성)이라고 1권의 각주에서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2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스완'의 사랑이나, 지문이 풍부한 연극의 대본 같기도 했던 인물들의 묘사 역시 소설의 주제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식의 흐름을 촘촘히 서술해가는 만연체의 글에선 특별히 무엇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제를 인식하는데 집중하기보단 프루스트의 생각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감각, 감정들을 채집하는 프루스트적 기억법에 말이다.

 

 

 

"삶에서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 (1권 p42)

 

 

 

우리는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나의 내면을 투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방한 것일 뿐일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황을 해석하고 있는 나에 대한 관찰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판단하는 근거는 밖이 아닌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루스트처럼 자신을 향한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글이 좋다. 어떤 주제에 닿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인생이 하나의 주제로 정의될 수 있는 건 아니듯이) 모든 사소한 것들을 관찰함으로 나의 반응점들을 늘려가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문장, 새로운 단어들로 나라는 관점을 풍부하게 하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바이올린이 고음으로 올라가 마치 무엇을 기다리듯 머물러 있었다. 기다림은 오래 지속되었고, 바이올린은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아보고, 대상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흥분 속에서, 자기 곁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숨지기 전에 그 대상을 맞이하려는 듯, 또는 놓으면 금세 닫히는 문을 간신히 지탱하듯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대상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잠시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으로 고음을 이어 갔다. " (2권 p269)

 

 

 

우리의 한순간은 때로 이 음악처럼 간절하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 대상을 발견하려는 기다림으로, 알아차리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애틋함으로 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의미는 과거의 시간들보단 현재 잃어가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에게 깨어있기만 한다면 드문드문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기어'로 완급을 조절하며, 음악처럼 연이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감상을 남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진정한 감상이란 읽고 싶은 부분들을 다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여러 부분들을 몇 번씩 반복해 읽었는데 우리의 생각을 가장 닮아있는 만연체 글의 특징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흘러가는 생각들을 요약해 낼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듯 프루스트의 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은 마음을 그린 풍경화이고, 섬세한 초상화이며, 영혼을 품은 음악이고, 온갖 색소로 아름답게 피어오른 감각의 꽃다발이었다. 그러니 좋은 그림이나 음악에 반응을 하듯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으며 우리의 삶에 무수한 반응점들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촘촘히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들은 당시엔 큰 의미를 찾기 어렵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으로, 음악으로 완성되어 간다. 우린 그 순간들에 깨어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채집하며 우리의 삶을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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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2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예뻐서...ㅎㅎㄹ

물고기자리 2016-01-12 14:35   좋아요 1 | URL
헐.. 오타가 없는지 확인하는 중에 벌써 댓글을^^ 책이 예뻐서 표지에 긁힘이 생길까 조심스럽더라고요ㅎ

[그장소] 2016-01-12 14:36   좋아요 1 | URL
양장에 그 커버를 하라는건지 ㅡ이게 껍질인지 뭔지 애매할때가 있죠.
ㅎㅎㅎ

초딩 2016-01-12 15: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양은 동사에 서양은 단어에 집중한다고 들었어요 :-)
브레송이 사진은 `단어` 이고 잡지는 그것을 쓰는 `문장`이라고 한 말도 생각 나네요.
:-) 저도 완전 읽을 만반의 태세 중입니다.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6-01-12 15:27   좋아요 1 | URL
인용해 주신 부분들 멋져요!^^
프루스트가 신기한 게 2권을 읽다 보면 어느새 다시 1권을 또 읽고, 그러다 다시 2권을 읽고^^ 무한 루프인 것 같아요ㅎ

blanca 2016-01-12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갈한 글 잘 읽었어요. 저는 나올 때마다 읽으니 이게 자꾸 전체 연결이 안 되고 앞 내용, 지명, 사람 성격 묘사 같은 것들을 잊으니 일관성 있게 연결이 안 되네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전부 다 번역되어 나오면 한꺼번에 읽어버리겠다, 하신 이야기가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어떤 흐름이 자꾸 끊기니까요. 물고기자리님처럼 반복해서 읽어야 할 텐데 또 그건 그렇게 안 되고. 그런데 정말 책이 너무 예뻐서 좋아요. 겉지 벗겨도 너무 예뻐요.

물고기자리 2016-01-12 16:05   좋아요 0 | URL
연달아 읽으니 좋기는 한데 에너지 소모가 참 커요. 평소보다 꿈도 많아지더라고요ㅎ 아직 완결되지 않아서 어떤 호흡으로 읽어야 하나 걱정도 되는데 아마 부분적으로 재독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ㅎ

저도 겉지 벗겨봤는데 예쁘더라고요^^

살리미 2016-01-12 16: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끔 글을 읽다가 아! 너무 좋다! 했는데 옆에서 뭐가? 라고 물어요. 그럼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요약하면 그 좋음이 사라져버려서 그냥 그런게 있어... 하고 말거든요. 그런 느낌일까요? 그림을 보듯 음악을 듣듯 반응하며 읽는 책이라니... 문학이란 이렇게 읽어야 하는구나 싶네요.
새해라고 이것 저것 나름 독서계획들을 세우고 집에 있는 책들 모조리 읽어버리겠다고 덤비고 있는데.... 아무래도 소설을 읽을때가 가장 즐겁네요. 좋아하는걸 읽으면 되지 무슨 강박을 갖고 그러나... 싶기도 하고 ㅋㅋ
그나저나 책은 또 왜이리 이쁜지.... 안읽을거라고 다짐하면서도 자꾸 사고 싶어져요^^

물고기자리 2016-01-12 17:28   좋아요 1 | URL
네^^ 개인적인 발견으로서의 즐거움인 것 같아요. 그리고 문학은 스스로 생각할 거릴 찾을 수 있게 해주어서 참 좋아요. 학교 다닐 땐 무엇을 생각할지, 감상해야 할지를 정답처럼 외워야 하는 게 별로였거든요..

오로라 님의 소설 읽기도 기대돼요ᄒ 책이야말로 읽고 싶은 걸 읽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또 본능적으로 필요한 걸 고르게도 되는 것 같고요. 이왕이면 책이 예쁜 것도 좋더라고요^^

cyrus 2016-01-12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1권을 읽었을 때 쇼팽의 `녹턴`이랑 드뷔시의 `달빛`이 듣고 싶어지더라고요. ^^

물고기자리 2016-01-12 20:18   좋아요 0 | URL
오! 멋진 선택 같아요. 어쩐지 마르셀이 엄마를 기다릴 때의 마음 같기도 하고.. 저는 달빛이 더 좋아요^^

서니데이 2016-01-1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1-12 21:3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ㅎ 서니데이 님도 좋은 밤 되세요^^

서니데이 2016-01-14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프로필사진 바꾸셨네요. 새 이미지도 예뻐요.^^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1-14 20:46   좋아요 1 | URL
넹~ 지루해서 슬쩍 바꿔봤어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ㅎ

서니데이 2016-01-20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 많이 추웠어요.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드세요.^^

물고기자리 2016-01-21 14:05   좋아요 1 | URL
헐..! 왜 이제야 댓글을 봤을까요ㅎ 늦었지만 어제 따뜻한 저녁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서니데이님 덕분이었나 봐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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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여 집중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되는 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로 확실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통해 심상을 스케치하듯 묘사하는 작가에겐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그 목소리가 가장 선명했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J. D. 샐린저였는데 이미지가 아닌 단어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작가의 글이 가장 쉽게 읽히는 것 같다. 귓가에 바로 속삭여주는 것 같은 캐릭터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심상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이런 소설을 떠올려보면 전체 스토리는 흐릿하더라도 특정한 성정을 지닌 인물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또 다른 경우는 '그림'이나 '영상'처럼 경험하게 되는 작가인데 최근의 기억으론 오르한 파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 폭의 세밀화를 감상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촘촘히 촬영한 기록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내면의 목소리보단 시각적으로 집중시키는 묘사들에 충실해서 소설 전체의 내용을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하게 해준다. 그런데 듣는 것이나 보는 것, 어느 한 쪽으로도 집중시켜 주지 않아 난해했던 작가도 있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인데 목소리로 치자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고, 보이는 시야마저도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듯 지극히 한정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감각을 통제당한 느낌 때문에 되려 더 집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언제나 슬픈 마음으로 올라가는 이 가증스러운 계단에서는 바니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내가 매일 저녁마다 느끼는 그 특별한 슬픔을 흡수하고 고정해, 이런 후각적인 것에 대해 별 볼일 없는 내 지성보다는 내 감성에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p58)

 

 

 

"뭔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음에는 위쪽 창문에서 모래 알갱이를 뿌리듯 가볍고 넓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 소리가 퍼지고 고르게 되고 리듬을 타고 액체가 되고 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보편적인 음악이 되었다. 비였다. " (p182)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은 온 감각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매 문장이 온갖 감각으로 채색된 한 폭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단어로 그 뜻을 곧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그림을 그려 놓는 듯한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이미지들이 흩어지기 전에 나의 온 감각을 열고 그림 속 정경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프루스트를 쉽게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지겹거나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짧은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도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그림이 펼쳐지던 공간에서 나의 상념과 프루스트의 정경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는 한다. 몇 페이지에 걸친 문장을 읽을 땐 시간을 거스른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억지로 읽으려 애쓸 필요도, 밀려드는 상념을 떠밀어 낼 필요도 없이 프루스트와 나를 동시에 개방하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가며, 음미해 가며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비본 냇가에 물병을 담그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물병은 냇물로 채워지면서도 냇물로 둘러싸여, 한편으로는 단단해진 물처럼 허리가 투명한 '그릇'인 동시에, 흐르는 액체 수정이라는 큰 그릇에 잠긴 '내용물'이기도 해서, 물병 형태 그대로 식탁에 나왔을 때보다 더 감미롭고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청량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청량감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단단하지 않은 물과, 혀로는 음미할 수 없는 액체성 없는 유리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분배되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p29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엔 익히 잘 알려진 문장들이 등장한다. 아름답기만 한 문장이 아니라 소설 속 화자의 심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이 묘사하는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위의 이 문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해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듯, 내가 기억하는 나의 시간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의 빛과 냄새, 소리, 공기의 무게감들이 떠올랐고, 슬픔의 시간들 마저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다.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담고 있던 물병이 프루스트의 물결을 만나 투명한 수정처럼 개방되어 청량감 있게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영감으로 의식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1권의 역할은 긴 여정을 위한 의식의 개방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의 독창적인 착상은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 " (p154)

 

 

 

이 소설은 지극히 관념적인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이다. 생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워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 같다. 감각들의 묘사는 마치 마법처럼 아름답고 관념적인 묘사들은 더없이 예리하다. 처음엔 너무 많은 감각들이 동시에 밀려와 저항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 같이 흘러가기로 마음먹으니 편안히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내면을 향한 단단한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는 시선을 약간 돌려보면 늘 나를 볼 수 있었다. 오직 타인을 향한 눈금자를 지니고 있는 듯이 나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고, 우리가 좋아하는 화가에게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볼 때, 또는 지금까지 연필로 스케치한 데생만을 보다가 완성된 그림 앞에 설 때, 또는 피아노 곡만을 듣다가 나중에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입혀서 들었을 때와 같은 기쁨을 주시면서, 손가락으로 탕송빌의 울타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넌 산사 꽃을 좋아하지 않느냐. 이 분홍색 산사 꽃을 좀 보려무나. 정말 예쁘지 않으냐. " " (p245)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싶다. 발견할 수 있는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좋은 소설은 이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정신을 다룬 여정은 나의 정신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실제 삶을 이해하는 덴 많은 시간이 걸리며,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삶을 바라보다 보면 나의 삶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인 단어와 이미지, 감각들로 말이다.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건 나의 시간들이기에 우선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자신의 불편한 고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권은 더없이 좋았고, 위의 인용문처럼 새로운 기쁨이었다. 문장마다 멈추어 감상을 쓰고 싶을 만큼 많은 영감들이 깨어났다. 무엇보다도 경험해봐야 할 소설이었다. 때론 한 권의 소설이 보다 더 많은 걸 압축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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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05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은 `수학의 정석`과 같은 작품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호기롭게 <수학의 정석>을 펴보지만, 1장 집합 내용만 계속 보다가 작심삼일로 `수포자`가 됩니다. 프루스트의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1권 완독은 성공하지만, 나머지는 다 읽지 못하고 포기하는 독자들이 많아요. 제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

물고기자리 2016-01-05 18:48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1권은 재밌었어요. 이렇게 인물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고들며 묘사하는 책들을 좋아하거든요. 꼭 완독해야겠다는 건 아니지만 궁금증이 지속되는 한은 계속 읽어보려고 해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른 책들도 읽어가면서요ㅎ

AgalmA 2016-01-05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에서 수영을 하고 계세요....책 속에서 안 돌아올 사람처럼...그게 되면 좋은 걸까, 슬픈 걸까...그래도 우린 바랍니다. 그쵸?

물고기자리 2016-01-05 18:52   좋아요 1 | URL
넹~? 저 수영 안 하는데요?ㅋ 책 속을 헤매는 건 읽는 동안이고요^^, 되려 일상이 좀 바빠서 읽을 시간이 많이 부족해요. 하루 종일 책만 읽을 수 있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ㅎ

AgalmA 2016-01-05 18:55   좋아요 1 | URL
물고기자리님 글은 항상 물흐르듯 흘러 사실 제가 수영하는 기분ㅎㅎ 이런, 투사쟁이 같으니라고))
저도 바빠서 책 볼 시간이 없어 울상. 북플도 웬수~

물고기자리 2016-01-05 19:05   좋아요 1 | URL
투사쟁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ㅋ 제가 성향이 좀 그래요ㅎ

맞아요, 읽고 싶은 책들도 많은데 북플도 웬수죠. 올해는 카뮈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갈마 님 때문에 옆길로 샜으니 책임지세욧!ㅋ

AgalmA 2016-01-05 19:16   좋아요 1 | URL
ㅋㅋ 제가 작년에 양철나무꾼님 덕?탓?에 <작가란 무엇인가>에 빠진 격ㅋ 양철나무꾼님 유혹에 무사히 피했어도 물고기자리님 만났겠지만ㅎ 결국 돌아돌아도 만난다니까요. 역시 무서운 책 지옥;
그러나 후회는 없다! ㅎㅎ

물고기자리 2016-01-05 19:11   좋아요 1 | URL
저도 노! 후회입니다^^ 덕분에 좋은 책을 경험했어요. 문장이 너무 길어 옮길 순 없었지만 긴 호흡으로 묘사한 부분들에서 눈을 뗄 수 없더라고요ㅎ 실제로 매 문장마다 감상문 쓰고 싶었어요^^

서니데이 2016-01-06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1-06 18:52   좋아요 1 | URL
네~ 고맙습니다ㅎ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01-07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1-07 22:1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ㅎ 서니데이 님도 감기 중이시라면서 이웃들 챙기시느라 쉬지도 못 하시네요^^ 빨리 회복되셨음 좋겠습니다:)

초딩 2016-01-08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게 이책이죠? 담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1-08 18:27   좋아요 1 | URL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꾸 초딩 님 장바구니를 무겁게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저도 Agalma 님께 영업당했어요!!ㅋ

초딩 2016-01-08 18:34   좋아요 1 | URL
언제 당해도 좋은 영업이에요 :)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이 소설 쓰기와 독서의 전통이 빈약한 1970년대 터키에서 독학으로 소설 쓰는 법을 배운, 반은 서양인, 반은 동양인인 작가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소년은 소설가가 되리라 결심하고 아버지의 불 꺼진 서재를 더듬어 빼낸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지요. " (p182)

 

 

 

「소설과 소설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이다. 파묵은 2006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쳤으며, 보르헤스, 칼비노, 에코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턴' 강의를 맡은 후 2010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2015년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는 오르한 파묵이었다. 안톤 체호프, 앙드레 지드와 더불어 올해 집중했던 작가인 파묵은 체홉의 초연함이나 지드의 의연함은 없지만 기어코 읽게 만드는 강박적인 집요함이 있었다. 파묵의 회고록인 「이스탄불」에 의하면 그의 어린 시절,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셨던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형과 경쟁해야 했는데, 형과의 다툼은 늘 피와 눈물로 끝나곤 했다고 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승부욕과,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방의 작가라는 점이 그에게 집요한 근성을 주었던 건 아닐까 싶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 (p31)

 

 

 

이 책은 소설가로서의 경험이나 관점을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소설가 이전에 독자였던 파묵의 생각을 담고 있기도 하다. 파묵의 글을 읽을 때 왜 나는 섣불리 판단하기보단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파묵 자신이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파묵에게 중심부란 이를테면 삶의 본질 또는 삶의 의미이고, 그밖에 우리가 무어라 명명하든, 그곳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그 존재를 낙관하는 곳을 말한다.

 

 

 

"소설의 중심부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숲 전체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 (p153)

 

 

 

소설을 읽을 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가 아닌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길 쓰고 싶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찾는 중심부는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에도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편인데 어떤 인물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대신 보여주는, 카메라의 앵글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야기에만 매료되기 힘든 성향이지만 나름으로는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의 좁은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느라 분주하다. 그 일이 즐거운 이유는 중심부를 찾게끔 해주는 빛 때문인 것 같다.

 

 

 

"소설 읽기란 전체 풍경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풍경을 구석구석 샅샅이 보고, 모든 사람을, 모든 색과 모든 음영을 느끼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 텍스트를 판단하거나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동원하기보다는 우리 상상 속에서 세세하고 뚜렷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그 그림들 속에 들어가 사방에 지각을 열어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 (p166)

 

 

 

난해하다면 난해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파묵의 소설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 느낌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음표이자 마침표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들, 확고한 단어로 확실한 말들을 전하는 소설에선 정리된 하나의 답을 얻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늘 나를 헤매게 만들었었다. 파묵 역시 어느 한 사람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파묵 자신이 '찾는' 사람이고, 심지어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을 그렇게 개방하고 있다.

 

 

 

"우리는 다 읽은 소설을 중심부가 어디인지 찾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낙관적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다시 읽고 싶어 합니다. " (p167)

 

 

 

"왜냐하면 결국 어떤 소설에서 중심부의 힘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독자들이 찾아 나서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p169)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착할 수 있을 거란 낙관 때문에 읽는 사람들에겐 그런 똑같은 마음으로 쓰는 사람의 글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런 소설엔  중심부에 다다르게 해주려는 빛이 강렬하다. 도착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중간에 그 빛을 꺼트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능력은 그 빛을 다루는 기술과 진정성에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가 아닌 스타일이나 플롯의 모방에서 온 영혼 없는 글에선 그 빛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성 있는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그 인물의 시선으로 보이는 세상이 궁금하지 않다면 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한 중심부는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p166)

 

 

 

"소설의 중심부와 의미 역시 독자에 따라 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심부에(보르헤스는 주제라고 부르는) 대해 다른 사람과 논하는 것은 인생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됩니다. " (p169)

 

 

 

각자의 시선에서 보는 빛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린 같은 소설 속에서도 다른 길들을 헤매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집과 집 사이를 방황한다면 누군가는 숲길을 서성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찾다가 만나서 나누는 이야긴 서로 다른 세상의, 서로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그 프레임을 연결해보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읽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오르한 파묵이 말하는 중심부란 도착하게 될 장소의 의미보단 '낙관' 그 자체였다. 그 빛을 느끼는 한 우리는 계속 길을 갈 수 있고, 여정에서 보는 것들은 도착지보다 더 큰 의미일 듯싶다. 올여름부터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책들을 돌아보며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해본다. 나를 기꺼이 방황하게 해주었던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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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2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착의 수수께끼> 소설 제목이 너무 멋져서 호시탐탐 중인데, 이 글 보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하지만 언제가 될 지...(은근히 지금 누군가에게 떠넘기려는 건지도 모른다)...솜방망이 날아올라ㅎ;;

물고기자리 2015-12-28 23:56   좋아요 1 | URL
수수께끼 같은 책들은 떠넘기지 맙시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검색해보니 관심이 가긴 가네요ㅎ

서니데이 2015-12-29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오르한 파묵이네요^^
물고기자리님,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5-12-29 00:25   좋아요 2 | URL
저도 파묵처럼 좀 집요한가 봐요^^ 서니데이 님도 좋은 밤 되세요ㅎ

살리미 2015-12-29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김영하작가가 <읽다>에서 인용했던 그 `중심부 찾기`군요. 물고기자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소설 속에서 노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그동안 저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았네요 ㅎㅎ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분명하지 않은 소설은 싫어했거든요.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 밖에 경험을 못했지만 그래도 그건 나름 재미있었는데, 사데크 헤다야크의 <눈먼 부엉이>같은 책은 신비롭긴 한데 당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서 전혀 좋아할 수가 없더라고요 ㅎㅎ 지금 생각해보니 오르한 파묵이 말한대로 이해한다면 훌륭한 소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년에는 저도 문학적 감성을 좀 더 장착해보아야겠어요 ㅋ 소설 속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니고 마음에 드는 길에서 쉬어 갈 수도 있는 여유를 누리면서요.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고기자리 2015-12-29 09:08   좋아요 1 | URL
저도 오로라 님과 거의 동시에 <읽다>를 읽었는데 희한하게도 그다음으로 읽을 책이 김영하 님이 인용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여서 신기했어요ㅎ 근데 파묵의 중심부는 책의 말미로 갈수록 그 의미가 드러나는데 김영하 님이 인용하신 부분은 이제 막 중심부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 부분이거든요. 김영하 님의 책만 읽는 사람들은 파묵의 중심부를 마치 찾아야 할 정답처럼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김영하 님이 플로베르를 인용하며, 찾는 과정을 즐긴다는 의미에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겸사겸사 파묵이 중심부에 대해 언급한 부분만을 골라 감상을 남겨봤어요^^

저는 문학 감성의 오로라 님보단 지금의 오로라 님이 좋아요ㅎ 오로라 님의 시선을 제가 공유할 수 있으니 더더욱 좋고요^^

초딩 2015-12-29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2-29 15:01   좋아요 1 | URL
초딩 님 장바구니가 파묵 파묵 하겠네요^^

초딩 2015-12-29 15:04   좋아요 1 | URL
네 파묵 파묻해요~ ㅎㅎㅎ

서니데이 2015-12-30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5-12-31 10:06   좋아요 1 | URL
요즘 북플 알람이 오질 않아 이제야 봤네요ㅎ 늘 이웃들을 챙기시는 서니데이 님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5-12-31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금방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좋은 페이퍼를 올해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잘 몰랐던 책에 대한 소개도 즐겁게 읽었고, 읽은 지 조금 되어 책장에 꽂아둔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올해가 조금 남았는데, 내년엔 더 좋은 일들과 기쁜 시간으로 한 해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물고기자리 2016-01-01 10:30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두루두루 평안하시길 바랄게요ㅎ
 

 

 

"영리한 사람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란 것을 잘 알지. 그런데 나중에는 바보들만 행복해져.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 (1권 p175)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농밀하고 집요한 문장을 지녔다. 촘촘히 짜인 그물 같은 구조의 치밀함은 산소가 희박한 밀실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불러일으킨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생략 없이 있는 그대로 서술해 놓은 듯한 집요함 때문에 실제로 어떤 장을 읽을 땐 흔들리는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다. 사색할 여백을 남기지 않는 그의 조밀한 문장은 정서적인 공감보다는 관찰자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염탐하는 기분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파묵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매력이자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정이 아닌 머리로 읽게 만드는 것, 섬세하진 않지만 세밀하다는 것이 내가 파묵의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시각적인 성향을 지닌, 다분히 '정신적인' 유형의 사람인 것 같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 생각을 투영할 대상, 즉 사물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이라 느껴진다. 정서적인 감각을 동원해 심연을 기웃거리며 사고하는 성향인 나에겐 파묵의 시각적인 성향이 주는 새로운 시선이란 게 있다. 평소에 사용하던 감정의 스위치를 끄고 오직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항상 똑같이 똑딱이는 시계는, 그 똑딱거리는 소리를 매 순간 인식하지 않아도 집이, 물건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우리가 변하지 않았고 항상 같다고 느끼게 해주어, 우리를 평온하게 했다. " (2권 p30)

 

 

 

나는 새로운 공간, 새것으로 꾸며진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 역시 자연 그 자체로만 아름다운 곳보단 사람과 문화와 장소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 곳이 좋다. 그래서 박물관을 좋아하는데 무엇을 보고자 하는 목적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한데 섞여 하나의 사연으로 남겨진 물건들을 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하자면 명화나 조각상보단 사람이 실제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는 것이 더 좋고, 미술관보단 박물관이 더 취향인 편이다.

 

 

 

"네가 옆에 있기 때문에 이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 (2권 p53)

 

 

 

이런 취향은 환경으로부터 물려받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의 아버지는 역사와 미술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다양한 책들과 소중하게 간직하시던 명화 전집들을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으신 세대의 맏이로서 책과 음악, 영화와 미술은 아버지의 유일한 정신적인 사치이자 취미이셨고, 곁에서 같이 책을 읽던 막내딸인 내게 고백하듯 이런저런 이야길 들려주곤 하셨다. 하지만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닌 아버지의 행복한 목소리와 눈빛이다. 일상의 무게를 덜어 준 아버지의 바람이자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그것 자체로 행복이었기에 내게도 아버지의 물건들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은 진심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들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가는 것임을, 이즈음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 (2권 p17)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은 강박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선택하는 방식대로 흘러갈 것 같지만 사실은 시대의 상황이 사랑의 방향성을 결정하기도 한다. 더구나 다소 억압적인 사회라면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건 사랑이 아닌 그 무엇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완벽히 홀로 존재하는 개인이란 없듯이 오직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통념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주인공 케말의 사랑은 더더욱 집착적일 수밖에 없었고 퓌순과의 모든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들을 모으는 과정 자체가 그의 존재방식이 되었다. 어느덧 케말에게 사랑은 집착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함으로 오히려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때로는 이 거리에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퓌순에게 가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두리 마을에서, 공터에서, 네모난 돌이 깔린 진흙탕 길에서, 자동차와 쓰레기통과 인도 사이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반벌거숭이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에게서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 지금 이 뒷골목에서 내 삶의 잃어버린 중심부를 찾은 것 같았다. " (1권 p344)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히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케말과 퓌순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작가 파묵이 헌정하는, 이스탄불과 터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소설에서 케말의 사랑이 시작되는 1975년부터 그가 수집하는 모든 것들이야말로 오르한 파묵의 강박적이고도 집요한 사랑의 진짜 대상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때 그림을 그렸던 파묵이 세밀화를 그리듯 집요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들은 당시 이스탄불의 생활과 문화, 정신들이다. 감추고 싶은 수치라 느껴지는 것들조차도 세밀화의 일부로서 소설 속에 그려 넣고 있다. 폐허의 모습이나 거리의 냄새까지도 그들의 생활과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위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본능으로 만들어지고 정렬된 시적인 박물관에서 사랑하는 옛날 물건들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위안을 얻는 겁니다. " (2권 p385)

 

 

 

불안과 우울함 때문에, 또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의미가 없어도 두서없이 물건들을 모으는 '저장 강박증'은 병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이 깃든 물건들을 보관함으로 상실감을 보상받거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수집이라면 나름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것도 성향마다 다를 것이다. 비울수록 편한 사람이 있고, 남기고 보존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물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겐 변화되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도 자신의 고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하기에 수집에 대한 욕구는 늘 존재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낡아진 벽걸이 시계가 시간으로서의 의미보단 시간을 지워주는 의미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 삶 속에서 수치심을 주는 것들을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그건 즉시 자부심을 느낄 것들로 변합니다. " (2권 p383)

 

 

 

"터키 사람들은 자신의 박물관에서, 형편없는 서양 그림 모작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람해야 합니다. 우리의 박물관은 부자들이 자신을 서양인인 양 느끼게 해 주는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 줘야 합니다. " (2권 p392)

 

 

 

오르한 파묵의 글은 마지막으로 흘러 갈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걸 느낀다. 멀미가 날 정도로 집요하고 강박적이었던 문장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의 첫 단어부터 암시적이지 않은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세밀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한 귀퉁이를 충실히 채우고 있다는걸, 모든 사물과 정경이 이야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케말과 퓌순이 희생절날 함께 목격했던 교통사고와 이후에 목격한 또 다른 교통사고는 이 소설에 큰 의미가 되고, 이는 파묵의 다른 소설인 「새로운 인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파묵이 수집해온 이스탄불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소재가 되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박물관은 '시간'이 '공간'으로 변하는 곳이다. " (2권 p372)

 

 

 

감정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공간에 전시함으로 추억과 현실 사이의 시간을 잊게 해주는 것은 때로 커다란 위안이 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물뿐만 아니라 내면의 전시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부정적인 것들일수록 어두운 저편에서 스스로 성장하게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곧게 응시할 때 수치와 기만에서 벗어난 건강한 자아를 지닐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파묵이 말하는 자부심 역시 그런 종류일 거라 생각한다. 그의 소설을 읽어 갈수록 오르한 파묵의 글은 이스탄불의 박물관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새삼 장소와 사람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 (2권 p403)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인생의 박물관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벗어나 그들의 인생과 책이라는 장소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이 서재는 나의 박물관일 것이다. 나의 내면을 수집해 공간으로 드러내는 곳,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곳, 왜 읽고 쓰는지를 생각해보며 나를 바라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완벽히 행복해서 책을 읽을 겨를이 없거나, 너무나 불행해 책을 읽을 여력이 없는 것이 아닌,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의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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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의식의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from 공 음 미 문 2015-12-22 22:17 
    Depeche Mode "I Feel You" (http://youtu.be/iTKJ_itifQg ) 오프닝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를 BGM으로 들으며 시작저도 오르한 파묵이 자주 쓰는 "교통사고"는 어떤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터키 근대화 시기의 상징처럼도 읽히고(<새로운 인생>에서 그런 걸 잘 말해 주고 있었죠) 오르한 파묵이 세계를 보고 만나는 하나의 기점을 소재화 한 게 아닌가 싶었죠,
 
 
서니데이 2015-12-22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오르한파묵이네요.
이 책은 제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서, 나중에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잘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5-12-22 21:47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 님도 편안한 밤 되세요^^ 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을 열심히 읽어 주시는 참 부지런한 분이세요ㅎ

AgalmA 2015-12-22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먼댓글 내가 처음!!! 앗싸~~ 촐랑촐랑~~~대는 이웃을 두신 걸 제가 또 부끄러워해 드릴께요;;;

물고기자리 2015-12-22 23:46   좋아요 1 | URL
저처럼 지나치게 고즈넉한 이웃에겐 촐랑촐랑 거리는 이웃이 필요하지요^^ㅋ 덕분에 먼댓글을 경험해 봤습니다ㅎ

살리미 2015-12-23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너무 좋아요>.< ㅎㅎ

물고기자리 2015-12-23 01:06   좋아요 0 | URL
늦게까지 안 주무시네요^^ 사실은 이 정도면 행복한 거라 생각한다는 마무리 문장을 쓰고 싶었는데, 글에서 제가 처음으로 인용한 문장의 대답처럼 말이죠.. 근데 요즘은 어쩐지 `행복`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라 지웠습니다ㅜㅜ 그래도 오로라 님이 좋으시다니 저도 좋네요ᄒ

초딩 2015-12-23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엔 꼭 파묵 책 읽어 볼꺼에요 :-)

물고기자리 2015-12-23 11:25   좋아요 0 | URL
파묵이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어요ㅎ 집요하고 강박적이라 느슨하게 사색할 틈을 주진 않는데, 그게 또 허무하게 흩어지진 읺더라고요. 하나하나 전달되고 각인되는 느낌이 들어요. 파묵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작가인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알았기에 이젠 그만 읽어도 되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또 읽고 싶단 생각이 드는 작가에요ㅎ 아무래도 진정성 때문인 것 같아요^^

붉은돼지 2015-12-23 2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 리뷰를 보니 <순수박물관>을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소설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저 문장을 읽다가 저는 그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뚝 흘리고 말았습니다. ㅜㅜ 본인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제가 왜 무엇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케말의 말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 같기도하고 `행복`에 대한 저의 기준에 케말의 행복이 부합하지 않아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케말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산것이 맞습니까? 물고기자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올여름에 이스탄불에 다녀왔는데 당연히 <순수박물관>에도 다녀왔습니다. 제가 이스탄불 여행 사진 등을 제 서재에 올리고 있는데 아직 순수박물관은 올리지 못했어요...조만간에 <순수박물관> 사진을 올릴테니 구경하러 오세요^^

물고기자리 2015-12-24 01:08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너무 궁금했어요!!^^ 퓌순의 귀걸이는 어떤 모양인지, 멜템 사이다 병은 어떻게 생겼는지, 퓌순 네 집 텔레비전 위에 있던 개 인형들은 어떤 모양인지, 퓌순이 피웠던 4213개의 담배꽁초.. 등등 전시된 물건들을 실제로 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어요. 사진 올려주시는 거 기다리고 있을 게요ㅎㅎ

붉은돼지 님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셨다니 다시 또 울컥하네요ㅜㅜ (마음이 참 따뜻하신 분 같아요ㅎ) 저도 같은 부분에서 눈물이 핑 돌았거든요.. 연민과 감동이 동시에 밀려오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케말과 퓌순이 사랑하던 장소인 멜하메트 아파트의 뜻이 `연민`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케말이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행복한 것과 행복하다고 믿는 것, 두 가지의 감정이 섞인 거겠지만 어떻게 보면 케말은 자신을 둘러싼 상류사회의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것 같았거든요. 그 안에서는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퓌순을 만나고 나서 깨달았고, 그래서 더 집착한 것도 같아요. 퓌순과 함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것도 같고요.

어찌 보면 자신에게 굉장히 충실한 사람이라 그런 사랑도 할 수 있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퓌순과 함께 있거나 퓌순 네 집에서 있을 때, 세상과 격리된 것 같은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는데 그런 감정은 박물관을 만들면서도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고요.. 그래서 행복했다고 믿고 싶어요^^ 저도 조만간 다시 읽으며 퓌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케말과 퓌순은 많이 닮은 것 같고, 그래서 케말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초딩 2015-12-2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묵책 내년 북리스트이 넣었어요 ㅎㅎ

물고기자리 2015-12-24 12:45   좋아요 1 | URL
파묵은 초딩 님 취향에도 맞지 않을까 싶어요^^

서니데이 2015-12-2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좋은하루되세요^^

물고기자리 2015-12-25 22:2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인사가 너무 늦었지만 아직은 메리 크리스마스죠ㅎ 늘 자상하고 친절하신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셨길 바라요:)

2015-12-25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5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에는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작은 달과 큰 달, 그것이 나란히 하늘에 떠 있다. 큰 쪽이 평소에 늘 보던 달이다. 보름달에 가깝고 노랗다. 하지만 그 곁에 또 하나, 다른 달이 있다. 눈에 익지 않은 모양의 달이다. 약간 일그러졌고 색깔도 엷은 이끼가 낀 것처럼 초록빛을 띠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시선이 포착한 것이었다. " - 아오마메 (1권 p418)

 

 

 

달의 존재감은 깊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달은 소리 없이 읊조리는 침묵의 기도를 들으며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특유의 과묵함으로 조용한 위로를 준다. 고독한 외톨이 위성을 닮았던 두 사람, 덴고와 아오마메는 1Q84의 세계에 떠있는 두 개의 달을 본다. 여전히 과묵하지만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은 두 개의 달처럼 덴고와 아오마메는 하나가 되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니 당신은 그 마음을 기구(氣球)에 닻을 매달듯이 단단히 지상에 잡아둘 필요가 있어요. " - 세이프 하우스의 노부인 (1권 p395)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조용하고 단단한 달빛을 닮았다. 하루키는 불안한 세상의 정경을 가장 안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타고난 관찰자이자 친절한 묘사가라는 생각이 든다. 낯설고 불안정한 세상을 다룸에도 하루키의 글을 읽을 때 나의 뇌파는 막 잠이 들려는 때처럼 편안한 상태가 됨을 느낀다. 작가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보폭으로 동행하며 내 깊은 심층의 면면들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달을 올려다볼 때의 고즈넉한 마음처럼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닌 내 깊은 심연인 것이다. 그 심연을 정화시켜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단단한 닻을 지닌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환영하고 있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따스함은 아픔과 짝을 이루어 찾아온 것이니까. 아픔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따스함도 찾아오지 않는다. " - 우시카와 (3권 p465)

 

 

 

나는 특정 장르의 소설을 제외하곤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기보단 문장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쓰는 작가인지가 아니라 어떤 내면의 목소리를 지닌 작가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재미있다, 없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듣고 싶은 목소리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 셈이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어떤 책을 떠올리면 이야기의 과정이나 결말보단 특정 캐릭터의 심상을 기억하게 된다. 돌아볼 때 이야기만 뎅그러니 남는 소설보단 어떤 식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적확하게 묘사해내는 소설에서 타자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길랴크 인은 왜 넓은 도로를 걸어가지 않고 숲 속의 진흙탕을 걸어가지? " - 후카에리 (1권 p633)

 

 

 

그런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하루키는 적절한 음악과 책을 인용하기도 한다. 1Q84」에서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책들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 조지 오웰의 「198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자크 디네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등이 있고 그 밖에도 '카를 융'에 대한 이야기나 「맥베스」의 구절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몇 년 전 이미 읽었던 「1Q84」의 전권을 기꺼이 다시 정독하게 된 건 최근에 읽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 때문이었다. 내겐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에서 언급하는 책들에 대해 따로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체홉이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 현지 실태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1Q84」에서 진지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걸 메모를 통해 떠올리게 되었다. 그 부분을 찾아 읽으려다가 다시 완독을 하게 된 것인데 「1Q84」엔 작가로서의 체홉에 대한 사색도 등장하지만 사할린 섬의 토착민 '길랴크'인에 대한 서술 중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법정 따위는 없고, 재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도로의 쓰임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례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도로를 이미 깔아놓은 곳에서조차 길랴크 인은 여전히 밀림을 헤집고 다닌다. 그들이 온 가족과 개까지 모두 함께 줄지어 도로 바로 옆 진흙탕을 온갖 고생을 하며 지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나는 길랴크 인처럼은 살 수 없어요. 남자들에게 항상 얻어맞는 것도 싫어. 구더기가 많은 불결한 생활도 싫어요. 하지만 나도 넓은 도로로 걸어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 - 후카에리 (1권 p634)

 

 

 

이 말을 한 캐릭터는 열일곱 살 소녀인 후카에리로 덴고와 함께 「1Q84」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소설 <공기 번데기>를 쓴 인물이다. 사실 알고 보면 후카에리뿐만 아니라 덴고와 아오마메 역시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를 걸어가는 인물들은 아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넓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의 이야길 만들어 가는 사람들,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독하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달이 하나이든 둘이든 세계는 그들 자신이 있음으로 존재한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 - 덴고 (2권 p585)

 

 

 

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포인트는 읽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야기만을 따라 읽는 건 소설을 충분히 읽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친절한 묘사 안쪽에 가려져 있는, 묘사되지 않는 진짜 이야기를 통해 나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겉으로 흐르는 이야기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의 심연을 두드린다. 이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삶을 응시하는 하루키의 시선이 나의 기질과 많이 닮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실제로 하루키를 처음 읽을 때부터 나는 늘 모종의 위로를 받아왔다.

 

 

 

"아마도 내가 길을 너무 멀리 돌아온 거 같아. 그 아오마메라는 이름의 여자애는, 뭐랄까, 오래도록 변함없이 내 의식의 중심에 있었어. 나라는 존재의 중요한 누름돌 역할을 해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게 너무도 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 했던 거 같아. " - 덴고 (2권 p422)

 

 

 

하루키의 글은 어떤 책이든 의식의 중심부를 향한 여행을 하게 해준다. 나의 의식을 보려면 갑옷처럼 입고 있는 의식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야 하는데 하루키는 그에 필요한 정신적인 긴장을 풀어준다. 나의 의식을 누르고 있던 누름돌을 가만히 들어 올려 내면의 목소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준다. 마치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서랍을 열고 그 안의 물건들을 다시금 확인해 보는 느낌이다.

 

 

 

"나는 뭘 생각하는데 항상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어. " - 덴고 (2권 p423)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지만 나는 덴고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겐 아오마메와 같이 힘 있게 손을 잡아줄 사람이, 군더더기 없는 곧은 말로 위로와 영감을 주는 후카에리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의 하루키가 매일 쓰고, 달리며 마치 수련하듯 일상을 채워가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만 하는 기질의 사람인 것이다. 사실 나도 십수 년 간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육체적인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더더욱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하루키의 리듬감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단순히 음악적인 요소의 리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단순화시키고 육체를 단련해가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안정적인 리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 - '선구'의 리더 (2권 p289)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신'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엔 확신이나 단정 대신 여정이 등장한다. 그 자체가 민감한 수신기가 되어 불안정하고 기묘한 세계를 관찰해나가는 것이다. 내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설을 읽지만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오히려 정화된 통로가 만들어진 기분이다. 나 역시 발산하기보단 수렴하고 수신하는 성향의 사람으로서 그 통로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선과 악의 균형을 떠나 우선 나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늘 흐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피로로 정체되어 있을 땐 몸을 움직이듯 하루키를 읽게 된다. 과잉된 나를 비우고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하루키는 여전히 유효했고,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NHK 수금원이었던 덴고의 아버지와 우시카와를 한동안 생각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캐릭터들이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모종의 균형 감각을 일깨워주는 하루키의 시선 덕분이겠지만..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와 병행하여 감상을 남겨보려고 했었다. 이를테면 빅 브라더와 리틀 피플, 어느 날 증발된 윈스턴과 덴고의 어머니, 일기를 쓰는 남자와 소설을 쓰는 남자, 책 속의 책인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와 <공기 번데기>, 쥐를 무서워하는 윈스턴과 고양이 마을을 찾아가는 덴고.. 등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1Q84」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시선은 나 자신에게로 옮겨와 버렸다. 대신 하루키가 덴고의 입을 빌려 말한 「1984」의 이야길 옮기며 '사할린 섬'에서 '1984', 그리고 다시 '1Q84'로의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올바른 역사를 박탈하는 것은 인격의 일부를 빼앗는 것과 똑같은 일이지. 그건 범죄야.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그 두 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 - 덴고 (1권 p544)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힘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설령 어떤 모습의 진실이라 해도. " (2권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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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2-16 13: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리보다 문장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다는 말, 좋네요. 이야기만 남는 소설보다는 어떤 식으로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적확하게 묘사하는 소설에서 사람들을 들여다 보는 것, 그게 소설 읽는 재미겠죠?
1Q84를 한동안 IQ 84로 알았던 저는 ㅎㅎ 사놓고도 아직 못읽고 있어요 ㅠㅠ 올해도 못읽고 지나가려나봅니다.
하루키의 글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생각해보게 된 좋은 리뷰였어요^^ 감사합니다 ㅎㅎ

물고기자리 2015-12-16 14:06   좋아요 4 | URL
단순히 띄어쓰기의 착각인가 싶었는데 lQ였군요 ㅋㅋㅋ 그러고 보니 충분히 오해할만한 것 같아요^^ 하루키는 호불호가 정말 강한 작가 중 한 명인 것 같아요. 무척 싫어하거나 그 반대이거나요ㅎ 전 그 점이 바로 하루키의 장점 같더라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을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시켜주기보단 특정한 사람들을 확실하게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요ㅎㅎ 저도 오로라님 덕분에 다양한 책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AgalmA 2015-12-16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며칠 하루키<태엽감는 새>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시 읽어보려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는데, 물고기자리님 하루키 예찬론? 들으니 마음이 푸근😊
예전에 갔던 휴양지를 다시 찾듯 하루키 특정만족자 여기요^-^/ 한국의 하루키 열풍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시켜주는 작가˝도 해당되는 것 같지만요ㅎ 여기서 하루키 각각의 작품에 대한 기호가 갈리는 듯도^^

물고기자리 2015-12-16 20:27   좋아요 2 | URL
제가 원래 예찬이 취미입니다^^ 그렇죠, 아갈마님도 특정 만족자시죠ㅋ 적당한 만족은 아무래도 하루키의 에세이 덕분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설에 대한 진입장벽을 어느 정도 낮춰준 것 같거든요. 언젠간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성향별로 나누어보는 연구를 해보고도 싶은데ㅋ, 특정 성향의 분들은 신기할 만큼 하루키의 글에 거부감을 갖더라고요. / 푸근하시다니 저도 푸근해지네요^^

AgalmA 2015-12-16 20:31   좋아요 1 | URL
하루키는 단편,에세이, 장편 분류별/시기별 선호도도 확연할 듯 한데요ㅎㅎ;

물고기자리 2015-12-16 20:5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작품 중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죠. 작품의 완성도나 이야기를 중심으로 판단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만큼 하루키가 많은 작품을 썼다는 거네요ㅎ 신기한 건 작품에 대한 기호와는 별개로 하루키 스타일 자체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데 그만큼 개성이 뚜렷한 작가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개성이란 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보다도 확실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확실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도 같고요ㅎ

AgalmA 2015-12-17 03:04   좋아요 1 | URL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소설이 글로벌화되면서 작가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괴테나 톨스토이, 발자크 등 문호 시대 이후로 많이 사라졌다 싶은데, 하루키는 유독ㅎㅎ 노벨상 거론에서도 자주 가십거리가 되는 걸 보며, 전세계적인 하루키의 개성 선호도가 재밌기도 하고 괴이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루키 작품을 관통하는 현대 개인주의성?이 논란의 큰 줄기이지 않나 싶어요. 오래 이어져 온 문학 보편성과 이질적인 데가 있긴 하죠.

물고기자리 2015-12-16 21:17   좋아요 1 | URL
이런저런 말들도 많을 텐데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색을 유지하는 하루키의 단단한 근성이나 성실함이 참 좋더라고요.. (많이 쓰는 것도 좋고요ㅎ) 그런 면에서 늘 응원하고 싶은 작가에요~

고양이라디오 2015-12-1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정말 하루키는 참 호불호가 강한 작가인 것 같아요. 저는 최극단에 서있는 `호`하는 사람이라서 `불호`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잘 이해가 안되요ㅎ

물고기자리 2015-12-16 23:31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도 하루키를 좋아하시죠^^ 사실 전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하루키의 글로 위로받은 경험이 있어서 일종의 빚진 마음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ㅎ 하루키의 소박하고 단단한 글들은 언제든, 어느 곳이든 다시 펼쳐 읽어도 여전히 좋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 2015-12-17 11: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가장 좋아합니다^^
<해변의카프카>로 처음 만났는데, 언제부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버렸어요ㅎ
예전에 책을 많이 안 읽을때는 하루키밖에 몰라서 하루키만 읽었던 것 같아요.

저도 하루키의 글들, 문체, 그리고 하루키 작가자체도 좋고, 무엇보다 하루키의 관점과 생각들 모두 너무 좋아요ㅠㅠ

때문에 하루키좋아하는 사람도 좋더라고요^^ㅎ

물고기자리 2015-12-17 12:29   좋아요 1 | URL
저도 하루키의 관점과 생각들이 좋아요^^ 어쩌면 좋다는 말보단 편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의 성향이 제 기질과 많이 닮았거든요.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저절로 흡수되는 느낌이 들어요. 문학적인 의미를 떠나 사람에 대한 기호인 것도 같은데 하루키 외엔 어떤 작가에게도 이런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소신껏 살아가는 삶의 태도나 균형감각들도 참 좋고요ㅎ 고양이라디오님의 하루키에 대한 격한 애정도 참 좋습니다^^ 삭막한 세상에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ㅎㅎ

저도 편가르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하루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쩐지 편하고 좋더라고요ㅎ

2015-12-17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16-01-01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1984부터 1월에 읽고
이 아이는 ㅠㅠ 너무 두터워서 어케 짬을 낼지 고민 중이에요 ㅎㅎ

물고기자리 2016-01-01 13:13   좋아요 1 | URL
세 권이라도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일단 시작하면 독서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요^^ 이 책도 책이지만 하루키가 다른 책 이야길 틈틈이 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지거든요ㅎ

초딩 2016-01-01 13:57   좋아요 1 | URL
올해는 읽는 책 뒤에 큰 포스트잇을 하나 붙여 놓고 읽고 있어요. 책에서 언급되는 책이나 저자를 따로 정리해두는 곳으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