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작은 달과 큰 달, 그것이 나란히 하늘에 떠 있다. 큰 쪽이 평소에 늘 보던 달이다. 보름달에 가깝고 노랗다. 하지만 그 곁에 또 하나, 다른 달이 있다. 눈에 익지 않은 모양의 달이다. 약간 일그러졌고 색깔도 엷은 이끼가 낀 것처럼 초록빛을 띠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시선이 포착한 것이었다. " - 아오마메 (1권 p418)
달의 존재감은 깊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달은 소리 없이 읊조리는 침묵의 기도를 들으며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특유의 과묵함으로 조용한 위로를 준다. 고독한 외톨이 위성을 닮았던 두 사람, 덴고와 아오마메는 1Q84의 세계에 떠있는 두 개의 달을 본다. 여전히 과묵하지만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은 두 개의 달처럼 덴고와 아오마메는 하나가 되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니 당신은 그 마음을 기구(氣球)에 닻을 매달듯이 단단히 지상에 잡아둘 필요가 있어요. " - 세이프 하우스의 노부인 (1권 p395)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조용하고 단단한 달빛을 닮았다. 하루키는 불안한 세상의 정경을 가장 안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타고난 관찰자이자 친절한 묘사가라는 생각이 든다. 낯설고 불안정한 세상을 다룸에도 하루키의 글을 읽을 때 나의 뇌파는 막 잠이 들려는 때처럼 편안한 상태가 됨을 느낀다. 작가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보폭으로 동행하며 내 깊은 심층의 면면들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달을 올려다볼 때의 고즈넉한 마음처럼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닌 내 깊은 심연인 것이다. 그 심연을 정화시켜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단단한 닻을 지닌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환영하고 있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따스함은 아픔과 짝을 이루어 찾아온 것이니까. 아픔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따스함도 찾아오지 않는다. " - 우시카와 (3권 p465)
나는 특정 장르의 소설을 제외하곤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기보단 문장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쓰는 작가인지가 아니라 어떤 내면의 목소리를 지닌 작가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재미있다, 없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듣고 싶은 목소리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 셈이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어떤 책을 떠올리면 이야기의 과정이나 결말보단 특정 캐릭터의 심상을 기억하게 된다. 돌아볼 때 이야기만 뎅그러니 남는 소설보단 어떤 식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적확하게 묘사해내는 소설에서 타자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길랴크 인은 왜 넓은 도로를 걸어가지 않고 숲 속의 진흙탕을 걸어가지? " - 후카에리 (1권 p633)
그런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하루키는 적절한 음악과 책을 인용하기도 한다. 「1Q84」에서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책들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 조지 오웰의 「198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자크 디네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등이 있고 그 밖에도 '카를 융'에 대한 이야기나 「맥베스」의 구절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몇 년 전 이미 읽었던 「1Q84」의 전권을 기꺼이 다시 정독하게 된 건 최근에 읽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 때문이었다. 내겐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에서 언급하는 책들에 대해 따로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체홉이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 현지 실태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1Q84」에서 진지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걸 메모를 통해 떠올리게 되었다. 그 부분을 찾아 읽으려다가 다시 완독을 하게 된 것인데 「1Q84」엔 작가로서의 체홉에 대한 사색도 등장하지만 사할린 섬의 토착민 '길랴크'인에 대한 서술 중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법정 따위는 없고, 재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도로의 쓰임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례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도로를 이미 깔아놓은 곳에서조차 길랴크 인은 여전히 밀림을 헤집고 다닌다. 그들이 온 가족과 개까지 모두 함께 줄지어 도로 바로 옆 진흙탕을 온갖 고생을 하며 지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나는 길랴크 인처럼은 살 수 없어요. 남자들에게 항상 얻어맞는 것도 싫어. 구더기가 많은 불결한 생활도 싫어요. 하지만 나도 넓은 도로로 걸어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 - 후카에리 (1권 p634)
이 말을 한 캐릭터는 열일곱 살 소녀인 후카에리로 덴고와 함께 「1Q84」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소설 <공기 번데기>를 쓴 인물이다. 사실 알고 보면 후카에리뿐만 아니라 덴고와 아오마메 역시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를 걸어가는 인물들은 아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넓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의 이야길 만들어 가는 사람들,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독하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달이 하나이든 둘이든 세계는 그들 자신이 있음으로 존재한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 - 덴고 (2권 p585)
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포인트는 읽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야기만을 따라 읽는 건 소설을 충분히 읽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친절한 묘사 안쪽에 가려져 있는, 묘사되지 않는 진짜 이야기를 통해 나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겉으로 흐르는 이야기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의 심연을 두드린다. 이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삶을 응시하는 하루키의 시선이 나의 기질과 많이 닮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실제로 하루키를 처음 읽을 때부터 나는 늘 모종의 위로를 받아왔다.
"아마도 내가 길을 너무 멀리 돌아온 거 같아. 그 아오마메라는 이름의 여자애는, 뭐랄까, 오래도록 변함없이 내 의식의 중심에 있었어. 나라는 존재의 중요한 누름돌 역할을 해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게 너무도 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 했던 거 같아. " - 덴고 (2권 p422)
하루키의 글은 어떤 책이든 의식의 중심부를 향한 여행을 하게 해준다. 나의 의식을 보려면 갑옷처럼 입고 있는 의식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야 하는데 하루키는 그에 필요한 정신적인 긴장을 풀어준다. 나의 의식을 누르고 있던 누름돌을 가만히 들어 올려 내면의 목소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준다. 마치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서랍을 열고 그 안의 물건들을 다시금 확인해 보는 느낌이다.
"나는 뭘 생각하는데 항상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어. " - 덴고 (2권 p423)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지만 나는 덴고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겐 아오마메와 같이 힘 있게 손을 잡아줄 사람이, 군더더기 없는 곧은 말로 위로와 영감을 주는 후카에리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의 하루키가 매일 쓰고, 달리며 마치 수련하듯 일상을 채워가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만 하는 기질의 사람인 것이다. 사실 나도 십수 년 간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육체적인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더더욱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하루키의 리듬감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단순히 음악적인 요소의 리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단순화시키고 육체를 단련해가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안정적인 리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 - '선구'의 리더 (2권 p289)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신'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엔 확신이나 단정 대신 여정이 등장한다. 그 자체가 민감한 수신기가 되어 불안정하고 기묘한 세계를 관찰해나가는 것이다. 내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설을 읽지만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오히려 정화된 통로가 만들어진 기분이다. 나 역시 발산하기보단 수렴하고 수신하는 성향의 사람으로서 그 통로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선과 악의 균형을 떠나 우선 나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늘 흐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피로로 정체되어 있을 땐 몸을 움직이듯 하루키를 읽게 된다. 과잉된 나를 비우고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하루키는 여전히 유효했고,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NHK 수금원이었던 덴고의 아버지와 우시카와를 한동안 생각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캐릭터들이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모종의 균형 감각을 일깨워주는 하루키의 시선 덕분이겠지만..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와 병행하여 감상을 남겨보려고 했었다. 이를테면 빅 브라더와 리틀 피플, 어느 날 증발된 윈스턴과 덴고의 어머니, 일기를 쓰는 남자와 소설을 쓰는 남자, 책 속의 책인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와 <공기 번데기>, 쥐를 무서워하는 윈스턴과 고양이 마을을 찾아가는 덴고.. 등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1Q84」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시선은 나 자신에게로 옮겨와 버렸다. 대신 하루키가 덴고의 입을 빌려 말한 「1984」의 이야길 옮기며 '사할린 섬'에서 '1984', 그리고 다시 '1Q84'로의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올바른 역사를 박탈하는 것은 인격의 일부를 빼앗는 것과 똑같은 일이지. 그건 범죄야.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그 두 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 - 덴고 (1권 p544)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힘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설령 어떤 모습의 진실이라 해도. " (2권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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