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사람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란 것을 잘 알지. 그런데 나중에는 바보들만 행복해져.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 (1권 p175)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농밀하고 집요한 문장을 지녔다. 촘촘히 짜인 그물 같은 구조의 치밀함은 산소가 희박한 밀실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불러일으킨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생략 없이 있는 그대로 서술해 놓은 듯한 집요함 때문에 실제로 어떤 장을 읽을 땐 흔들리는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다. 사색할 여백을 남기지 않는 그의 조밀한 문장은 정서적인 공감보다는 관찰자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염탐하는 기분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파묵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매력이자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정이 아닌 머리로 읽게 만드는 것, 섬세하진 않지만 세밀하다는 것이 내가 파묵의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시각적인 성향을 지닌, 다분히 '정신적인' 유형의 사람인 것 같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 생각을 투영할 대상, 즉 사물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이라 느껴진다. 정서적인 감각을 동원해 심연을 기웃거리며 사고하는 성향인 나에겐 파묵의 시각적인 성향이 주는 새로운 시선이란 게 있다. 평소에 사용하던 감정의 스위치를 끄고 오직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항상 똑같이 똑딱이는 시계는, 그 똑딱거리는 소리를 매 순간 인식하지 않아도 집이, 물건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우리가 변하지 않았고 항상 같다고 느끼게 해주어, 우리를 평온하게 했다. " (2권 p30)
나는 새로운 공간, 새것으로 꾸며진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 역시 자연 그 자체로만 아름다운 곳보단 사람과 문화와 장소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 곳이 좋다. 그래서 박물관을 좋아하는데 무엇을 보고자 하는 목적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한데 섞여 하나의 사연으로 남겨진 물건들을 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하자면 명화나 조각상보단 사람이 실제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는 것이 더 좋고, 미술관보단 박물관이 더 취향인 편이다.
"네가 옆에 있기 때문에 이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 (2권 p53)
이런 취향은 환경으로부터 물려받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의 아버지는 역사와 미술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다양한 책들과 소중하게 간직하시던 명화 전집들을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으신 세대의 맏이로서 책과 음악, 영화와 미술은 아버지의 유일한 정신적인 사치이자 취미이셨고, 곁에서 같이 책을 읽던 막내딸인 내게 고백하듯 이런저런 이야길 들려주곤 하셨다. 하지만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건 그 내용이 아닌 아버지의 행복한 목소리와 눈빛이다. 일상의 무게를 덜어 준 아버지의 바람이자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그것 자체로 행복이었기에 내게도 아버지의 물건들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은 진심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들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가는 것임을, 이즈음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 (2권 p17)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은 강박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선택하는 방식대로 흘러갈 것 같지만 사실은 시대의 상황이 사랑의 방향성을 결정하기도 한다. 더구나 다소 억압적인 사회라면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건 사랑이 아닌 그 무엇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완벽히 홀로 존재하는 개인이란 없듯이 오직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통념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주인공 케말의 사랑은 더더욱 집착적일 수밖에 없었고 퓌순과의 모든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들을 모으는 과정 자체가 그의 존재방식이 되었다. 어느덧 케말에게 사랑은 집착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함으로 오히려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때로는 이 거리에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퓌순에게 가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두리 마을에서, 공터에서, 네모난 돌이 깔린 진흙탕 길에서, 자동차와 쓰레기통과 인도 사이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반벌거숭이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에게서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 지금 이 뒷골목에서 내 삶의 잃어버린 중심부를 찾은 것 같았다. " (1권 p344)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히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케말과 퓌순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작가 파묵이 헌정하는, 이스탄불과 터키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소설에서 케말의 사랑이 시작되는 1975년부터 그가 수집하는 모든 것들이야말로 오르한 파묵의 강박적이고도 집요한 사랑의 진짜 대상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때 그림을 그렸던 파묵이 세밀화를 그리듯 집요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들은 당시 이스탄불의 생활과 문화, 정신들이다. 감추고 싶은 수치라 느껴지는 것들조차도 세밀화의 일부로서 소설 속에 그려 넣고 있다. 폐허의 모습이나 거리의 냄새까지도 그들의 생활과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위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본능으로 만들어지고 정렬된 시적인 박물관에서 사랑하는 옛날 물건들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위안을 얻는 겁니다. " (2권 p385)
불안과 우울함 때문에, 또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의미가 없어도 두서없이 물건들을 모으는 '저장 강박증'은 병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이 깃든 물건들을 보관함으로 상실감을 보상받거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수집이라면 나름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것도 성향마다 다를 것이다. 비울수록 편한 사람이 있고, 남기고 보존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물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겐 변화되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도 자신의 고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하기에 수집에 대한 욕구는 늘 존재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낡아진 벽걸이 시계가 시간으로서의 의미보단 시간을 지워주는 의미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 삶 속에서 수치심을 주는 것들을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그건 즉시 자부심을 느낄 것들로 변합니다. " (2권 p383)
"터키 사람들은 자신의 박물관에서, 형편없는 서양 그림 모작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람해야 합니다. 우리의 박물관은 부자들이 자신을 서양인인 양 느끼게 해 주는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 줘야 합니다. " (2권 p392)
오르한 파묵의 글은 마지막으로 흘러 갈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걸 느낀다. 멀미가 날 정도로 집요하고 강박적이었던 문장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의 첫 단어부터 암시적이지 않은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세밀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한 귀퉁이를 충실히 채우고 있다는걸, 모든 사물과 정경이 이야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케말과 퓌순이 희생절날 함께 목격했던 교통사고와 이후에 목격한 또 다른 교통사고는 이 소설에 큰 의미가 되고, 이는 파묵의 다른 소설인 「새로운 인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파묵이 수집해온 이스탄불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소재가 되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박물관은 '시간'이 '공간'으로 변하는 곳이다. " (2권 p372)
감정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공간에 전시함으로 추억과 현실 사이의 시간을 잊게 해주는 것은 때로 커다란 위안이 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물뿐만 아니라 내면의 전시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부정적인 것들일수록 어두운 저편에서 스스로 성장하게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곧게 응시할 때 수치와 기만에서 벗어난 건강한 자아를 지닐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파묵이 말하는 자부심 역시 그런 종류일 거라 생각한다. 그의 소설을 읽어 갈수록 오르한 파묵의 글은 이스탄불의 박물관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새삼 장소와 사람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 (2권 p403)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인생의 박물관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벗어나 그들의 인생과 책이라는 장소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이 서재는 나의 박물관일 것이다. 나의 내면을 수집해 공간으로 드러내는 곳,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곳, 왜 읽고 쓰는지를 생각해보며 나를 바라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완벽히 행복해서 책을 읽을 겨를이 없거나, 너무나 불행해 책을 읽을 여력이 없는 것이 아닌,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의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