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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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p280)

 

 

 

조지 오웰1984」를 읽는 동안 이해할 수 없어 막막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이해되어 막막했다. 오웰이 이 책을 완성한 때는 1948년이었지만 어쩌면 그도 좀 더 깊이 통찰했을 뿐,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닌 현실의 이야길 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본능이 어느 때고 달랐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 말이다. 소설 속 오웰의 말처럼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며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들은 소설보다 훨씬 지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 (p53)

 

 

 

실제로 우리가 목격한 바가 있으니 이에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할까 싶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란 소설 속 문장처럼 과거는 단순히 변경된 게 아니라 사실상 파괴되어 버린다. 현실에 맞추어 과거를 변경시키고, 그에 대한 기록마저도 남지 않으며, 언젠간 우리의 기억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때가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란 말처럼 우린 이미 그런 삶의 토대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만 그 순간을 목격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과거에서 말한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늘 현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 (p100)

 

 

 

이에 대한 답을 소설에선 이렇게 말한다. 불만이 있어도 일반적인 사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달리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이 느끼는 분노는 대상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방향 감각이 없는 감정이라고 묘사한다. 더불어 남자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증오하는데 이는 성적인 욕망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사람들은 여러 수단을 통해 늘 감시당하고, 비밀리에 사상경찰이 활동한다. 그나마도 이런 상황들을 직시하며 고민하는 세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다. 왜냐면 이런 묘사들은 주인공 윈스턴이 그저 회피하기만 하는 젊은 세대들을 관찰하며 생각했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공포와 증오와 고통만이 있을 뿐, 감정의 존엄성이나 깊고 미묘한 슬픔 따위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 (p47)

 

 

 

이런 문장에 공감할 수 없었으면 좋겠지만 공감이란 단어에서 이해와 소통이 아닌 되려 씁쓸함을 발견하곤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우리가 쓰는 단어의 의미는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변질되어 갈지도 모른다. 소설에선 기존의 낱말들을 없애고 최소한으로 의미를 축소시킨 '신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말을 뼈만 남도록 잘라내고 있는 셈'이라고 묘사한다. 사용하는 낱말 수가 줄어들면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진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와 그 미묘한 뜻의 차이만큼 우리의 생각도 다양하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어를 만드는 목적은 사고의 폭을 좁히기 위한 것이며 대중이 단순해질수록 정권을 잡은 이들은 더 과감해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 (p222)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원인이 아닌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엔 읽는 것이 발각되면 안 되는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적인 여유와 경제적 안정을 똑같이 누리게 되면 빈곤에 허덕인 나머지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중이 마침내 눈을 뜨게 되고, 소수의 특권층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화는 생산되어야 하지만 분배되어서는 안되고, 결국 실제적으로 이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전쟁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목적이라기보단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규모는 국민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그 잉여 물자를 완전히 소모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계획된다. 이는 국민을 만성적인 궁핍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한 것인데 전반적으로 궁핍한 상태여야만 특권층의 지위가 한층 높아지고 집단 간의 차이도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층 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 (p283)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은 다국적 기업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있다. 부를 취하는 사람들은 권력도 취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이는 어느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의 흐름이며 어떻게 보면 늘 그래왔던 돌림노래인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대중들이 자신의 힘에 의지할 수 있도록 평화를 거부한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실제의 내란이나 국지전 등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질수록 생존을 위해 권력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 (p299)

 

 

 

소설엔 '이중사고'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필요에 따라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거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는 것,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것 등을 지칭하는데 현재 당이 선택한 상황에 맞게 모든 과거의 발언이나 기록을 끊임없이 번복하는 것이다. 이 개념이 낯설지 않은 게 이런 이중사고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머리가 아니라 그의 목구멍이다. 그가 내뱉는 것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말은 아니다. 그저 오리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소음일 뿐이다. " (p78)

 

 

 

오리의 입장에선 다분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소리만 있을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해석할 수 없어 번역기가 필요한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진정성을 담고 있다면 말하는 사람의 눈에 영혼의 빛이 반짝거린다. 하지만 이중사고를 하는 사람에겐 영혼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소음을 내는 사람들의 눈은 빛나지 않는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모를 눈빛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간의 유대를 끊어버렸네. " (p374)

 

 

 

우리의 현실은 사랑과 정의가 아닌, 혐오와 증오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 같다. 모든 방향으로 뻗어가는 이런 감정의 원인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런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멸종한다면 우리는 어떤 토대 위에서 살아가게 될지 두렵기만 하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읽는 동안 소설을 읽는 만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내용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직 현실을 반추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믿고 싶다.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생의 만년에서야 '진보는 추의 운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바우만의 통찰 대로 지금은 다만 잠시 밀려나고 있는 중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한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의 고민들까지도 진실하게 기록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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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5-12-02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상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의 소설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대적인 갭을 그닥 느낄 수 없죠-, 저 역시 읽는 내내 놀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고전은 시간을 반추하기도 선견하기도 하나 봅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2 09:58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이 소설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는 건 너무 속상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이었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덕분에 지금의 현실을 반추할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는 작가의 능력이 새삼 중요하단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cyrus 2015-12-02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한 소설 100쪽 문장.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서면 기어다니는 기레기들이 많아진 세상을 예언하는 것 같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3 08: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참 씁쓸해요..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뿔뿔이 흩어진 느낌이 들어요. 팍팍한 현실이니 각자 살아남기에 집중하느라 그럴 테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들 무력해진 느낌이에요. 소설 속 사람들처럼 길들여져 가는 건 아닌지 답답하기도 하고요. 실망이 반복되면 무관심해진다는 말처럼 그래도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들 같거든요. 홀로 제 갈 길을 가는 정부와 국민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답답함에 모두들 엉뚱한 곳에 화를 풀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ㅜㅜ

AgalmA 2015-12-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을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내 말은 내가 모르는 어떤 허점이 있을까 입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말하는 것은, 말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알아채고 수정할 수 있는 숙고의 과정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이 상황은 자기 합리화와 도취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도 있죠. 그리고 말에는, 내 말에 대한 신념보다 내 생각의 모자람과 다른 시각을 알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 공간, 시간이 모두 완벽하게 세팅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늘 동반됩니다.
난독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글, 아우성, 화풀이 같은 글이 아닌 적재적소의 말과 행동은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너무도 어렵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12-06 22: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ㅜㅜ 배설일 뿐인 말과 행동을 접하는 것에도 지쳐가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제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도 고민이 많아져요. 제대로 뜻을 전달한 건지 아니면 제대로 들은 건지에 대한 확신도 줄어가는 것 같고, 세월이 흐를수록 단어의 의미들이 무겁게만 느껴지네요.. 게다가 그 단어들이 정말 나의 뜻일까란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어떤 말이냐를 떠나 진정성이 느껴질 때 용기를 내어 소통을 한다면 서로의 거울이 되어줄 수는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통해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고, 저 역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땐 모호했던 단어의 의미들이 제게로 안착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런 거울이 깨지지 않도록, 나 역시 탁한 거울이 되지 않도록 잘 보듬어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무엇이든 깨지기 쉬운 요즘 같은 세상에선 특히요. 하지만 적어도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는 축복인 것 같아요. 구체적인 단어로 제 자신을 관조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아마도 아갈마님이 제게 좋은 거울이기 때문이겠죠..ㅎ) 적재적소엔 못 미칠지라도 제가 쓰는 단어엔 진정성이 묻어나길 바라요..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 - 노발리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왜 읽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책장에 읽지 않은 파묵의 책이 꽂혀 있으면 나의 시선이 자꾸 그곳을 향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책들이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파묵의 책들은 읽힐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터키 이스탄불 태생이며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한 그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처음 접했었는데 그땐 그저 인상적이란 느낌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자전적 회고록인 「이스탄불」이었고, 지적이며 집요한 작가로서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이었는데 책의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했던 그의 수상 연설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나는 어느덧 이렇게 오르한 파묵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p9)

 

 

 

오르한 파묵「새로운 인생」 역시 이처럼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굉장한 흡인력을 지녔다. 이 감상이 보편적인 감상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파묵의 문장은 늘 뜨겁고 진지하다. 꾸밈에 치중하지 않는, 지적이며 진정성 있는 그의 표현들을 접하고 있으면 글자 하나하나와 일일이 눈을 맞추는 느낌으로 읽게 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정독했는데 두 번째 읽을 땐 처음 보다 훨씬 좋았고 좀 더 강렬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읽더라도 책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며 큰 노력 없이 저절로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오르한 파묵은 명쾌한 감상이나 유희, 또는 일종의 도피로서의 독서가 아닌 매 순간 모든 문장에 집중하게끔 만든다. 파묵의 글엔 어떤 절실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심히 또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마치 문장 속에 통증이 동반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든다.

 

 

 

"모든 단어, 모든 비유가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문장이 비범하거나 단어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3)

 

 

 

몰두하게 되는 책들에선 대개 이런 느낌을 받게 된다. 문장들이 몸으로 흡수되는 것 같달까, 서로 낯설지 않아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새로운 인생」의 내용이 나에게 완벽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터키의 역사와 현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정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묵의 날카롭고 예민한 글은 어쩐지 나도 그 거리에 가 본 것 같은, 살아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만들어 준다. 마치 언젠가의 생에서 겪어본 적 있는 경험을 글로 다시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에서도 보편적인 정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가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로 말하면 기억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불행하고 바보 같은 주인공이다. " (p362)

 

 

 

이 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일들이 완벽히 짜인 구조 안에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양한 해석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더없이 매력적이다. 터키의 역사와 현실로도, 개개인의 정신으로도, 두 영혼으로 분리된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말에 대한 생각과 등장인물들의 의미 역시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다 읽은 후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눈으로 읽었지만 어쩐지 손에 열기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p37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난해함을 지닌 파묵의 소설은 꼼꼼히 읽어나가야 한다. 글이 알아서 나를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다간 그가 소설을 위해 설계한 내용들의 기초를 놓치고 지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파묵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에 완벽히 집중하길 바라고, 또 그렇게 쓰는 작가인 것 같다. 그냥 이유 없이 여백을 메우기 위해 쓰인 문장도, 독자를 위한 친절하고 섬세한 묘사 같은 것도 없다. 오직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듯 채워진 문장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통증과도 비슷한 만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완벽히 닫힌 생각으로의 만족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으로서의 만족을 말이다.

 

 

 

"때로, 계속해서 여러 권을 읽으면 그 책들끼리 속삭이는 게 들렸고, 이렇게 해서 내 머릿속이, 모든 구석에서 각각의 다른 악기가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속의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인생을 견디며 산다고 인식했다. " (p323)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오르한 파묵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파묵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에겐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는데 상상력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묵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은 이런 고통과, 고통에 뒤따르는 희열의 잔상인 것 같았다. 파묵의 매력은 담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맨 얼굴의 정신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실려있는 파묵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의 일부를 다시 옮겨보고 싶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글을 읽노라면 모든 작가와 독자들이 더더욱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니 말이다..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제가 쓴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싶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오로지 현실을 바꾸었을 때에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씁니다. 저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이스탄불에서, 터키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이 제게 가져다준 명성과 관심이 좋기 때문에 씁니다. 홀로 있기 위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씁니다. 제 작품이 읽히는 것이 좋아서 씁니다. 한번 시작한 이 소설을, 이 글을, 이 페이지를 이제 끝마쳐야지 하는 생각에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서 이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씁니다.



도서관들이 영원할 것이며, 저의 책들이 그 서가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기 때문에 씁니다. 삶, 세계,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롭기 때문에 씁니다.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씁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씁니다. 항상 갈 곳이 있는 것 같지만 마치 꿈속에서처럼 도저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씁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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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11-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쳐 거쳐 내이름은 빨강이랑 새로운 인생 담았어요 :-)

물고기자리 2015-11-10 15:25   좋아요 1 | URL
닉이 바뀌셨나 봐요^^ 제게 파묵은 정말 인상적인 작가예요. 계속 읽게 될 것 같고, 파묵이 무척 좋아졌어요~

살리미 2015-11-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설이 너무 멋지네요!! 저도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내 이름은 빨강>만 읽었는데, 물고기자리님 글을 읽고나니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싶어지네요.

물고기자리 2015-11-10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빨강으로 시작했다가 계속 읽게 되었어요^^ 쉽고 편안한 글은 아니지만 자꾸 읽고 싶게끔 만드는 흡인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연설은 읽을 때마다 뭉클해져요. 꾸밈없이 파고드는 글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AgalmA 2015-11-14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로운 인생>으로 오르한 파묵을 읽었는데요. 한 작가를 만나는 첫 책으로 너무도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제 얘기 같았거든요. 영화처럼 장면들이 눈에 선했죠. 파묵의 다른 책을 봐도 그 이미지들이 참 선명하다 했는데, 역시나 오르한 파묵이 그림을 그렸던 영향이!
위의 댓글은 지워주세요. 갑자기 강제탈퇴가;;

물고기자리 2015-11-15 09:14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속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눈에 선하더라고요. 거리의 냄새나 공기의 무게감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어요.. 저는 파묵의 절실함이 참 좋아요. 글에서 느껴지는 집중력과 집요함도 좋고요. 존경심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작가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왜 아갈마님을 튕겨 낼까요^^
 
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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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에서는 보통 전화를 걸 때 들어본 적이 없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먼 곳,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 (p33)

 

 

 

프란츠 카프카 「성」을 읽는 나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주파수를 잘 못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집중해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점점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초반 5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엔 두 번이나 깊은 잠이 들었다. 내용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낯섦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책 때문이 아닌 나의 컨디션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만 읽자는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느껴지는 무력감이 나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카프카의 위력인지 알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기의 성분조차 고향의 것과는 아주 다른 그런 타향, 너무 낯설어 숨 막혀 죽을 지경이면서 그곳의 어처구니없는 유혹에 빠져서 계속 가다가 계속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타향에 온 기분이었다. " (p63)

 

 

 

카프카는 나의 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러 작가들이 카프카의 「성」을 왜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는질 알 것 같았다. 이에 비하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벌레가 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변신」은 카프카의 가벼운 농담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카프카는 마치 미로를 설계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고, 그 길로 오차 없이 이끌고 있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소설을 읽듯, 일상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찾으려는 마음을 접어두고 주인공 K를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섰고, 이후엔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 사정에 대해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지해요. " (p82)

 

 

 

카프카의 인물들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이 해야 할 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저 자기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정해진 루틴대로 늘 같은 상황, 같은 일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다. 책 속의 이야길 내 의지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K를 통해 먼 곳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전달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물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나의 세상은 서로 다른 성처럼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는 행위에 내 자유를 박탈당한 기분이라고 할까, 나의 주관적 판단이나 인상을 배제 받은 것 같은 소외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의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어요. " (p126)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상념들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두가 착각인 것 같고, 인물들에 대한 신뢰감도 들지 않았다. 어떤 것이 왜곡이고 어떤 것이 진실일지 막막함을 느꼈다. 대개의 소설은 읽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읽을 때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야기의 흐름을 떠올리면 연결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글은 깊은 안갯속으로 다시 들어설 때처럼 잠시의 주춤거림이 필요했다. 나의 주파수를 카프카의 주파수에 맞추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카프카의 문장에선 시선을 멀리 둘 수가 없다. 바로 지금 내디딘 발 앞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걸어온 자리에 발자국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꿈길을 걷듯이, 나는 다시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것 또한 무력감의 이유였고, 잠이 들진 않았지만 피로가 쌓여갔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피곤해하니까. " (p367)

 

 

 

「성」은 카프카의 대표작이자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언급된다고 한다. 지극히 폐쇄적이면서 한편으론 무한히 개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화, 종교, 실존주의, 사회적, 정신분석적, 전기적 등등 많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에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설의 경우 책을 다 읽기 전까진 작품 해설을 읽지 않는 개인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론의 관점이라는 틀이 아닌, 사소한 나의 감상을 먼저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앞서 내가 느낀 감정은 무력감과 피로감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였지만 주인공 K의 심리에 이미 초반부터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무익한 성으로의 여행, 아무리 봐도 헛수고인 하루, 아무리 봐도 허망한 희망인 거죠. " (p253)

 

 

 

읽는 내내 잠이 부족한 것 같았고, 마음이 어수선했다. 성의 토지 측량사로 초빙되었지만 성에는 닿을 수 없던 주인공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런 일이 있기는 했던 걸까, K가 토지 측량사이긴 한 걸까, 성이란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등등의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을 한 개인이 얼마만큼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진실의 진실성을 과연 왜곡 없이 파악해 낼 수 있기나 한 건지를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앎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지, 그러므로 삶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일들이 사람을 기죽이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장애물들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죠. " (p369)

 

 

 

열심인 사람들, 깨어 있으려는 사람들, 측량하려는 사람들일수록 이상할 만큼 중요한 순간엔 잠이 들어 버린다. 힘을 주면 줄수록 튕겨져 나가는 것 같다. 집요하게 예측하고 예감하려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같다. 개방인 동시에 폐쇄의 이유, 앎과 동시에 왜곡인 이유처럼 결정적인 때일수록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때문에 주저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점은 잘 알아두세요. 가끔은 전체 상황과는 무관한 그런 기회도 생겨난다는 것을요. 그러한 기회가 오면, 한마디의 말, 한순간의 눈길, 한 번의 신뢰 표시만으로도 기력을 소진하면서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 더 많은 걸 성취할 수도 있지요. " (p370)

 

 

 

나도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에 속하는 것 같다. 좀 더 살펴볼 것들이 많다며 돌아가길 주저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삶의 방식이 이럴 땐 피로감이 만만치 않다. 늘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선 저절로 힘이 빠지는 걸 경험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나를 개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곡식알에 비유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체를 통과하려면 별나고 특이한 형태의 작고 능숙한 낟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p378)

 

 

 

삶의 경험이 늘어 갈수록 유연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유연함이란 나약함이 아니다. 유연하려면 우선 지탱해줄 근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어에 상당한 힘을 비축하고 모든 근육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유연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도 나를 그 앎 속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벗어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

 

 

 

이 유명한 문장은 카프카가 그의 친구인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의 버림을 받고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썼단다. 카프카의 「성」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다. 카프카의 사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길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길 충분히 한 것 같다. 읽는 동안 내내 피로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몸이 나의 생각보다 더 많은 말들을 들려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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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그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에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깊게 새겨질 것이다. (...)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 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니라. 그리고 체호프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 (p342)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좋은 글이란 심장이나 지성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삶으로 향할 수 있는 작거나 큰 힘을 보태어 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작가라면 읽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하려는 순간, 나의 심장은 조금 빠른 리듬으로 두근거렸고, 기대감이 어린 전율이 등줄기를 살짝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필요하면 전화해는 카버의 미발표 단편들과 에세이, 그가 쓴 서문이나 서평들이 실려있는 책이다. 단편으로만 접했던 카버의 목소리를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의 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결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카버 작품의 일어 번역자이기도 했던 하루키는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가 옆에 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했단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 읽기 전의 기대감과 다 읽어 간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란 흔치 않다. 나에겐 하루키도, 카버도 그런 작가들에 포함되는데 두 작가를 모두 좋아하다 보니 그들의 글이 주는 서로 다른 여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루키의 인물에게선 삶과 타협하거나 농밀하게 밀착시키지 않은 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하루키의 주인공은 (적어도 의식적으론) 자신이 찾는 것도, 가야 할 방향도 확신하지 않고 있다. 저항하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한 걸음씩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찰해 나간다. 이런 여정엔 (의식이 고정되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데 확신 없이 시작된 여정이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의 유연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그의 인물에 동화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나 역시 나의 무의식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나를 관찰하게 된다.

 

 

 

카버의 글에선 고단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현실과 밀착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일상의 피로와 불안이 느껴진다. 삶의 체취가 진하게 풍겨온다. 무슨 일이 당장 일어날 것만 같다. 카버의 인물들에게서 피로와 불안을 덜어내면 오히려 비틀거리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유연하지 않다. 무엇인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곧 잃어버릴 것 같거나 이미 잃어버린 직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은 과장되지 않고 지극히 고요하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긴장하게 되고, 집중하게 된다. 

 

 

 

두 작가의 장점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 같다. 하루키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것들을 섬세하게 나열해가며 조금씩 무의식의 한가운데로 이끌어간다. 피로 없이 그 여정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카버는 직접적으로 불안을 건드린다. 여정을 거치지 않고 그 현장의 중심으로 곧바로 데려간다.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이니 만큼 카버에겐 과정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앙금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말이다.

 

 

 

하루키가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엔 함부로 결론짓지 않으려는 거리두기식 관찰법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없었다는 것도 포함될 것 같다.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카버에겐 하루하루를 벌어 돌보아야 할 자녀가 있었기에 글을 쓰면서도 어느 정도의 불안이 늘 따라다니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내 삶과 글을 만들고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이다. 알겠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비록 이제는 앞날이 상대적으로 더 명확하고 주위도 조용하지만 말이다. " (p194)

 

 

 

카버가 말하는 어느 빨래방에서의 일화를 읽을 땐 마음이 아팠다. 그의 당혹스러움과 무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걸리는 일엔 집중할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잡고 악착같이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의 환경에선 단편소설이나 시를 써야만 했다. "짬을 내 자리에 앉아, 운이 좋다면 재빨리 써서 완성할 수 있는 글들이어야만 했다. "고 말한다. 카버는 자신을 위해 하루에 한두 시간만 짜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 자체가 천국 같았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적어도 한동안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세상 말이다. 이와 더불어,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 하지만 내가 알고 살아가던 세상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살던 세상은 날마다 법칙과 방향과 속력이 바뀌는 듯했다. " (p186)

 

 

 

그의 삶은 달라졌지만 어느 순간부턴 자신이 원해서 단편소설과 시를 쓴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으며, 갑자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왜 아직 저녁식사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아이가 따지며 물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카버는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웠다고 한다.

 

 

 

"단편소설은 쉼표와 마침표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르는 결과물이었다. " (p192)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모두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문장의 간결함에 있다. 간결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표현함에 있어 스스로 혼란스럽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다른 경험을 했든, 두 사람 모두 결과적으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기질과 능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카버가 말하길 한 작가와 다른 작가를 구별지어주는 기준은 재능이 아니라고 한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차고 넘친다며,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작가,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트릭을 싫어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트릭이나 술책이 필요 없으며, 심지어 주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작가라면,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끔은 그냥 멍하니 서서 이런저런 대상을 바라보며 푹 빠져 입을 헤벌리고 감탄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은 석양일 수도 있고 낡은 신발 한 짝일 수도 있다. " (p164)

 

 

 

그리고 그는 신중하게 검토하는 자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결국 작가에게 있는 건 단어뿐이니, 기왕이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적절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말이다. 과장되었거나, 정확하지 않거나, 애매하다면 독자의 눈은 그 단어들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버리고 작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불운한 글을 "빈약한 열거"라 불렀단다.

 

 

 

"만약 제대로 쓴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음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 (p171)

 

 

 

레이먼드 카버는 그의 글이 간결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미니멀리스트' 수준으로 모든 걸 없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문학작품은 단지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작가와 독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한다. 독자에게 이해받는 걸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능력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알 수 있게 다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소소해서 놓치기 쉬운, 무시하기 쉬운 우리의 사소한 감정들을 새삼 건드려주고, 다시 보살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도 이런 말을 했었다. 쉬운 언어와 훌륭한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아주 친절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독자들도 알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오만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실린 작가의 말엔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좀 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그 후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나와 같은 시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

 

 

 

이것이 바로, 내가 카버와 하루키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복합한 현실을 그리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한편으론 나의 현실을 잊고, 또 다른 한편으론 현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여정을 같이 해주고, 카버는 단번에 그곳으로 데려다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사실 두 작가의 글이 아니라도 모든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야기의 서사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지루한 묘사들이나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문장도 나름으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체만큼은 두 작가의 글이 좋다. 목소리의 톤은 달라도 스스로의 감정에 취하거나 성마르지 않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글을 좋아한다.

 

 

 

글에도 표정과 목소리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글에는 특유의 음색이 묻어있고 표정까지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화가 나 있거나, 불안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슬퍼 보이기도 하고, 낮은 저음으로 조용조용 속삭이기도, 얇고 높은 톤으로 빠르게 내뱉기도 한다. 번역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떤 표정이나 목소리가 없는 글을 읽을 땐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도 그럴 경우엔 겨우 생각만 조금 반응하게 된다. 심장이 제 위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소설의 경우엔 작가 나름의 음색이 묻어있는, 담담한 표정과 일정한 톤의 리듬이 있는 글이 좋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일수록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짓듯이 어조의 기복이 큰 글은 산만해서 집중하기가 어렵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큰 근육보단 잔근육을 적절히 잘 사용한다. 아니, 사용한다기보단 감정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반응시킨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배우더라도 미리 계산된 몸짓을 하는 배우의 연기엔 마음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표정에 의지하지 않고 눈빛으로 이야길 하는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때론 대사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더 감정이입이 된다. 이를테면 싫다는 말을 하면서도 눈빛으론 정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이유와도 비슷한 것 같다. 표정을 읽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눈빛을 읽듯 문장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연기일수록 요란하지 않다. 좋은 글일수록 치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에게 필요하고, 맞는 글이라면 얼핏 보았을 뿐이더라도 내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성장하는 것 같다. 게다가 카버가 인용한 체호프의 글처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언제나 삶으로 향할 수 있게 해준다. 글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글들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표현이 간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단순해서가 아니다. 쌓여있는 많은 말들 중에서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히고 그 위로 떠올려진 투명한 말들만을 건져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심장의 위치를 살짝 달라지게 했던 글들은 바로 그런 글들이었다. 참 신기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의 글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말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문장 속의 인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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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0-0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의 글에 대한 가치관이 드러나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물고기자리 2015-10-10 00:16   좋아요 0 | URL
그냥 읽는 것에 대한 취향 정도지요^^ 근데 아무래도 쉽게 변하진 않더라고요ㅎ

AgalmA 2015-10-1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와 카버에 대한 나이론 저와 비슷하시네요.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나이 14세로, 레이먼드 카버는 39세로 저는 생각하죠...

p186, p171 격하게 공감요/


물고기자리 2015-10-13 11:13   좋아요 0 | URL
불안정한 주변의 세계를 하루키의 소년이 저항 없이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느낌이라면 카버의 남자는 그 남자로 인해 주변까지 불안해지는 느낌도 들어요..

저도 저 인용문들을 격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카버가 인식하던 세상은 결국 그의 단편소설이 되었고, 단어가 음표인 듯 자신의 음을 연주하는 느낌이 무엇인지도 너무너무 알 것 같거든요. 실제로 단어를 연주하는 작가들이 있으니까요ㅎ

2015-10-13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3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고, 작고, 귀엽고, 심지어 산뜻하고 예뻐 보이는 책이다.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론 커피잔을 쥘 수 있을 정도의 부피감이어서 맘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불현듯 꺼내어 읽기에 좋을 책이다. 다 읽었더라도 가방 한켠에 넣고 다니다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지겹지 않을 책이다.



풋풋하고 상큼해 보이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아마도 둘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상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지금 막 호감이 가는 사람을 발견한 듯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거나 말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유형이라면 골똘히 사색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고, 문장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성향이라면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장소로 떠나있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의 어딘가로, 아니면 그만이 아는 어느 시절의 공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책의 외적인 특징인 '작고, 귀엽고, 예쁘고, 산뜻한'이란 단어들의 느낌은 읽기 시작한 순간 곧 잊힌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쓴 62편의 단편들을 읽는 느낌은 이미지로 가득한 짧은 영상을 이어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문장들은 나의 생각을 앞질러 도착했다가 이내 바로 떠나가 버린다. 군더더기 없는 시적 메시지들은 어떤 이미지로 은유되어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또 빠르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일부러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도 보았지만 이 책은 머물기보단 계속해서 읽는 것이 더 좋았다. 하나의 단편을 깊게 사유하기보단 전체를 관망할 때,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시적 메시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건 미국의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전의 노래였다. 노래는 하도 오랫동안 돌아다녀서 미국의 먼지에 녹음되었고, 모든 것에 내려앉아서, 의자와 자동차와 장난감과 램프와 창문을 수천만 개의 축음기로 만들어 우리의 찢어진 가슴에 노래를 들려주었다.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설명하는 느낌, 열심인 느낌, 애쓰는 느낌 없이 힘들이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인데 구차함이 없으니 오히려 말하고픈 이미지만 선명히 떠오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처음부터 그렇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져 삭막한 금속성의 세계에 서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

 

 

 

"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인지력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상상력과 인지력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이미지와 메타포의 시적 테크닉은 그렇게 해서 쓰인 작품을 다분히 서정적으로 만들어준다. " - 리처드 브라우티건

 

 

 

브라우티건은 발전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상실감을 논리적인 설명이나 비평 대신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정'이란 정서의 공유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론 감정의 소통이 더 빨리, 많은 것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주어진 단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서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 그림, 사진들처럼 함축되어 있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정서라고 말이다.

 

 

 

"친구의 눈은 마치 물에 젖은, 찢어진 양탄자 같았다. 일종의 이상한 진공청소기처럼 나는 그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이고 장황한 말로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또 다른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다. "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하지만 브라우티건이 살았던 시간과 지금은 또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상실감이란 그것을 온전히 가져본 연후에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이, 머물러본 적 없이, 더 빨리, 더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에선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필요를 앞서는 편리한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요즈음이다. 표면을 얇게 스치듯 살아가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잃어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서정성'이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캘리포니아는 다른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서는 예전의 삶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곳의 에너지 자체가, 혹은 금속을 먹는 꽃의 그림자가 우리를 다른 삶으로부터 불러와 길거리 주차 미터기가 타지마할처럼 늘어선 캘리포니아의 주민으로 만든다. " - 「캘리포니아로 모여드는 사람」

 

 

 

지금 여기는 또 다른 캘리포니아라는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가 아닌 다른 장소의 이름이어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서정성이란 순간을 사색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자 정서라고 생각한다. 서정이란 애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삶에 대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애착을 가질 때 잃어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것들을 기대하게 된다. 서정을 잃은 세대들은 공허한 것 같다. 공허함으로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깨우고, 열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음 안에 있는 너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 같다.

 

 

 

"내 타자기는 막 마취에서 도망친 말처럼 빠르며, 침묵 속에 빠져 있으며, 밖에서 해가 비치는 동안 내 단어들은 질서 있게 달리고 있다. 아마도 그 단어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 「내가 선택한 깃발」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 (...) 봄이 되면 젊은 남자는 환상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 남자의 환상에 커피 한 잔의 공간은 있을 것이다. " - 「커피」

 

 

 

"겨울폭풍이 집을 뒤흔드는 동안, 새 라디오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나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밤을 맞고 있었다. 매 프로그램이 갓 잘라낸 다이아몬드 같았다. " - 「토크쇼」

 

 

 

그런 순간들을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린 어디에 있든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얻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 상실이 쌓여가는 것 또한 삶의 다른 모습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변화하는 속에서도 나와 너의 목소리를 켜고 들으며 삶으로 향해 있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머물고 싶다. 브라우티건의 단편들에선 실제로 '''라디오'라는 단어가 종종 언급되고 있다. 그 밖에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들린 단어의 목소리는 그 두 가지였다.

 

 

 

때론 잠시 닫아두기도 하겠지만 문의 열쇠만큼은 근처 어딘가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싶다.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들고 나서며, 때론 너의 문 밖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냐며 두드려보고 싶다. 나의 문이 닫혀 있을 때에도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늘 곁에 두고 싶다. 같은 주파수에서 공명하는 소리들을 듣는 것은 완벽한 하루에 닿기 위한 '서정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나는 계속해서 듣고, 말할 것이다. 상실보다 두려운 것은 공허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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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져요.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한 문장이 좋아요. 커피와 관련된 말을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몇 개 본 적 있는데, 저 문장이 최고예요.

AgalmA 2015-09-21 18:14   좋아요 0 | URL
<커피> 상황은 정말 웃겨요. 블랙유머 시트콤ㅎ 그래서 더 인상적이지만~

물고기자리 2015-09-21 1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것은 단편의 첫 문장과 제일 마지막 문장인데 중간에 좀 사연이 있어요..ㅎ 외롭고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런저런 것들을 겪고, 경험하고 사색할 수 있는, 한 잔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인생이라면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느낌이었어요^^ 브라우티건의 진짜 삶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단편에선 상실이 완벽한 공허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AgalmA 2015-09-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죠. 네, 시입니다. 어떻게 만들었지 한참 들여다보고 베껴도 써봤지민 완벽히 브라우티건 거여서 에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 감상자 모드로....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지날 때마다 읽고 싶어진다니까요ㅎ

물고기자리 2015-09-21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중에선 제가 인용한 첫 문장이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가슴에 뭔가가 쿵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글 전체가 시였지요^^ <샌프란시스코 YMCA에 바치는 경의>도 웃음과 날카로움이 있어 재밌었고, 인용하진 않았지만 다른 단편들에도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몇 번씩 읽게 되더라고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