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



1591년 이스탄불 외곽의 버려진 우물 속 시체의 혼잣말로 시작되는 「내 이름은 빨강」은 이처럼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집중시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화원 소속 화공들이 그리는 세밀화와 관련된 살인 사건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림뿐만 아니라 삶, 예술, 사랑, 역사 또는 현실 등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 글로 쓰는 세밀화를 보는 듯했다.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유럽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한때 화가가 되길 꿈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공들이나 그림에 대한 관찰력과 묘사가 탁월하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동안 테두리에 금박 장식을 한 화려한 색감의 세밀화들을 여러 번 검색해서 찾아봤다. 책의 상당 부분이 그림에 관한 묘사여서 저절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었을 다양한 국적의 많은 사람들이 터키의 세밀화에 대한 구체적 인상과 호기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에서 '나'라고 칭하는 화자는 장마다 번갈아 바뀌어간다. 첫 문장처럼 이미 죽은 시체이거나, 살인자이기도 하며 살인자를 찾는 누구이거나 사랑과 행복을 찾으려는 누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림 속 개나 말 또는 '빨강'이라는 색깔이 스스로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소설의 장들은 마치 세밀화의 한 부분인 듯싶었고,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는 하나의 정묘한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건의 추이만을 따르자면 추리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세밀화를 통해 철학 하게 하는, 사색적이며 지적인 소설이었다.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평면적인 그림인 세밀화는 그림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 중심의 그림, 자신만의 스타일과 서명을 가질 수 있는 그림에 대한 욕망과 전통을 지키려는 신념 사이에서 번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 세 명의 화공에게 말을 그려보라는 주문을 한다. 화풍으로 살인자를 색출하려는 것인데 세 사람이 제각각 말을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의 정교함은 작가 스스로 화가가 되길 꿈꾸었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올리브, 나비, 황새라는 애칭을 가진 세 화공들이 말을 그리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다.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바로 그 말이 된다. ˝ - 올리브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옛 대가가 된다. ˝ - 나비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에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 - 황새



화공들이 각자 말을 그리는 과정을 읽을 때 누가 살인자였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살인자가 누구였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소설의 일부이자 세밀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미를 찾고자 욕망한다. 하물며 그림 속의 나무 한 그루도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아주 외로운 한 그루 나무입니다.
(...) 제가 외로운 진짜 이유는 제가 어떤 그림의 일부인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솔직히 말하면 저는 세상에서 도망쳐 바다를 건너다가 새와 과일이 풍성한 섬에서 안식처를 찾은 연인의 행복한 풍경의 일부였으면 했습니다! 인도 정복 길에서 일사병으로 며칠 동안 코피를 흘리다 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최후의 순간에 그늘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 제가 어떤 이야기에 의미와 우아함을 더해 주었을까요? (...)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 속의 '빨강'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 나는 숨기지 않는다. (...)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며 들었던 나의 주관적 감상은 세밀화에 대한 지적인 탐구에 앞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화공들의 번뇌에 앞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그림이기보단 어떤 색깔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말이다. 화풍은 시대마다 변한다. 개개인의 화풍 역시 변화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림이기보단 색, 그 자체로 행복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사실 행복의 그림에 있는 미소가 아니라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요. 세밀화가들은 그걸 알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리지 못한 것도 그거예요. 이 때문에 그들은 삶의 행복을 바라보는 행복으로 대체한 겁니다. ˝ - 《나는, 셰큐레》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르한 파묵은 글을 쓸 때 때때로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쓰는 동안 셰큐레가 되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한 폭의 세밀화와 같았던 이야기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그림이 되길 바랐던 주인공은 셰큐레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이라는 셰큐레는 살인자를 추적하는 카라와 시동생 하산의 끈질긴 사랑을 받는다.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지만 책의 이야기꾼들 중에서 가장 선명한 색깔의 음성을 지녔던 주인공 역시 셰큐레였다.



소설을 읽듯 작가를 읽고 싶어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본 오르한 파묵은 다분히 시각적 성향의 사고력을 지닌 사람인 듯싶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있는 그의 친필 원고를 보면 빼곡한 글 옆과 사이사이에 그의 스케치가 곁들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시각화하고 구체화시킨 내용을 세밀히 전개시키는 그의 서술 방식은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전체를 보든,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보든 '본'는 행위에 집중해야만 읽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스로 보기를 원할 때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스스로의 톤과 음성을 지닌 개별적인 인물들이 그들만의 질감을 지닌 채 살아 움직여서 읽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글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다. 일종의 리듬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라 객관적인 무엇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작가들은 평소 관찰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작가들은 이야기의 흐름과 결말에 대해 자신도 알지 못 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이야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작가들의 글은 비교적 강한 심상을 남긴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나 시각적 성향의 소유자답게 처음부터 책 전체의 윤곽을 잡아 놓고,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놓는다고 말한다. 세밀하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차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지만 글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세밀하지만 섬세하진 않았다. 이런 점이 오르한 파묵의 글을 읽게 만드는 개성이기도 한 것 같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읽는 것 자체는 수월했지만 감상을 남기는 건 쉽지가 않았다. 생각들이 저절로 연결 되질 않고 조각조각 끊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르한 파묵의 글은 계속 읽고 싶어진다. 파묵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읽고 싶고, 자전적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파묵의 「이스탄불」˝어느 날 나는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 ˝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인생」에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터키가 두 가지 정신을 갖는 것,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는 것, 그리고 두 가지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분열은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줍니다. (...) 당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죽이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을 많이 하면 하나의 영혼만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분열되어서 아픈 것보다 더 문제이지요. 터키의 정치가들, 즉 나라가 하나의 일관된 영혼을 가져야 하고 동양이나 서양 어느 한쪽에 속하거나 민족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에게 제 생각을 알리고 싶답니다. 저는 일원론적인 관점에서는 비판적이지요.˝ - 「작가란 무엇인가」

 

 

 

터키의 동양적인 충동과 서양적인 충동 사이의 끝없는 대립이 평화롭게 해결되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이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상상력이 작동하게 하려면 외로움과 고통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했다는 자기 파괴적인 그의 방식은 슬프지만 스스로 위로받기를 거부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낯선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병적일 만큼 좋아했다. (...) 그들은 마치 말라버린 우물에 돌멩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에게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한결같이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번째 소설인 1973년의 핀볼의 첫 문장인데 마치 나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그와 나는 기질적으로 닮았다는 기분이 든다. 담고 있는 내용은 달라도 색인 구역이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1Q84」를 시작으로 꽤 많이 읽어왔는데 특히 일본의 군조 신인상을 수상한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몇 년 전 처음 읽은 뒤로 지금까지 세 번을 읽었다. 소설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들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하루키의 불완전한 첫 소설이 좋았다.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내 성향 탓도 있겠지만 완전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넘치는 것보단 다소 부족한 걸 나는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좀 더 구체화시켜 진행시킨다. '핀볼'이 그렇고 '나'와 '쥐'도 그렇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나오코'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초기의 두 소설 모두 부엌 테이블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20대에 재즈 카페를 운영했던 하루키는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밤중에 부엌 테이블에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특히 「1973년의 핀볼」은 쓸 때 힘들었다는 기억이 없었다는데 쓰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때와는 달리 술술 써나갔다고 한다. 그의 첫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직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기면서도 하루키는 「1973년의 핀볼에 적잖은 애착을 갖고 있단다. 소설 자체의 힘이 딱딱한 껍질을 깨고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읽은 후 나의 감상 역시 같았다.



˝여기에는 테제(결과적인 테제)가 풀이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테제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테제가 희박해짐에 따라, 자발적인 스토리가 내 머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소설이 자립하여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나름의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어서 나중에 전집을 묶었을 때 그의 단편들은 다소나마 손질을 가했지만 이 두 작품에 한해서는 전혀 손질을 하지 않았단다. ˝이것이 당시의 나였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도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라는 이유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완벽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지만 나는 자신만의 특별한 색을 갖춘 사람들이 더 좋다. 사람이란 이미 충분히 다양하기에 한 사람 스스로 지극히 다양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보단 자신의 색 안에서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걸 더 선호하는데 이런 삶에는 나름의 철학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루키의 소설을 되짚어 나가며 느끼는 감상은 점진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구체화시키고 있음에도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무얼 말하고 싶은 지는 사실 인생의 초반부에 대부분 정해진다. 이후로의 경험은 그 폭을 넓혀 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하루키뿐만 아니라 모두의 슬픔이자 피할 수 없는 근원이다. 멀리 간 듯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출발점인 것 같은 게 인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처음의 그것과는 다른 지점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우물을 발견하고 구석구석 탐색하다 보면 빠져나오는 길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에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빛줄기를 찾을 수 있는 내면을 키우게 된다. 살아가면서 극적인 변화를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같은 우물에 다시 빠지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렬함을 만나지 못 했다면 적어도 한 발, 한 발 내딛게 해주는 자신만의 빛줄기를 찾아 끊임없이 반복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그것을 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평범을 넘어선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를 쓰고 또 쓰는 하루키를 만났고, 그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나만 끊임없이 우물에 빠지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걸 말이다. 그의 에세이 「슬픈 외국어」에서 하루키는 이런 고백을 한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배운 것은 필사적으로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를 육체노동으로 보낸 20대의 나날이었다고. 그에게 있어서 노동은 가장 좋은 교사였고, '진짜 대학' 이었다고 말이다. 그는 재즈 카페를 운영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의 가게를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단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소수파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 명의 손님 가운데 한두 사람만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 한두 명이 당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가게에 와야겠다고 생각해 준다면, 가게는 그런대로 유지되어 나가게 마련이다. 열 명 중에 여덟이나 아홉 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열 명 중 한두 사람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가게를 운영하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정말이지 뼈를 깎듯이 그것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내가 쓴 글을 형편없고 시시하다고 깎아내려도, 열 명 중 한두 사람에게 내가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굳게, 일종의 생활 감각으로서 믿을 수가 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은 다시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소설가로서 살아가기가 훨씬 힘들었을 테고, 이런저런 면에서 내 본래의 페이스가 깨졌을지도 모른다. ˝ 「슬픈 외국어」

 

 

 

실제로 그는 매일 뛰거나 수영을 하며 자신의 페이스를 이어가는 듯하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말하는 열 명 중 한두 사람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가 자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이나 심오한 철학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들, 그걸 지키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한다. 자신의 색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용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또 다른 열 명 중 한두 명은 하루키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자신의 농도에 맞는 부분과 공명하며 필요한 위로를 얻고 있을 테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5-07-13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한두명에 속합니다^^
오늘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물고기자리 2015-07-13 23:42   좋아요 1 | URL
반갑네요^^ 개정판이 나오면서 <슬픈 외국어>에서 <이윽고 슬픈 외국어>로 제목이 바뀐 걸로 아는데 하루키의 뜻으론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맞는 것 같고 저도 그게 더 맘에 들어요. 리뷰 쓰느라 모처럼 펼친 김에 다시 읽고 있는데 좋더라고요 ㅎ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느낌의 소설이었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불러 본, 어느덧 스스로 노래가 되어 버린 명창의 소리인 듯 읽혔다. 숨 고를 틈 없이 구성진 가락처럼 연결되는 이야기는 느닷없이 시작되어 느닷없이 끝난다. 같은 리듬, 같은 음색으로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음표의 음을 노래하더니 당연한 듯 끝이 났다.



이야기의 배경인 가공의 땅 '마콘도'는 저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태어난 콜롬비아로 해석하거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 삶, 역사로 읽더라도 낯설지 않았다. 무엇을 떠올리든 그렇게 읽히는 잔인하고 고독한 민담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간 이 책을 읽었을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부러웠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마술적 이야기는 그들이 공유하는 리듬으로 읽었을 때 더욱 깊은 음색으로 들릴 테니 말이다. 어느 부분에서 해학적인 미소를 지을지, 탄식을 내뱉을지 온몸으로 반응하는 추임새를 곁들이며 말이다.



같은 이름과 비슷한 운명을 대물림하는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은 억지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모를 때도 반복하고 알면서도 반복한다.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인 타락 역시 되풀이된다. 어쩌면 애초에 고유의 이름을 갖지 못 했다는 것 자체가 다의적인 의미로서 타락과 몰락을 예견하게 하는 것 같다. 저자인 마르케스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있는 그의 인터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제 작품에 대한 가장 큰 찬사가 상상력에 주어진다는 것이 저를 항상 기쁘게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 작품의 단 한 줄도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카리브해의 현실이 가장 터무니없는 상상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실제 사실로부터 개연성을 찾아내는 것은 저널리스트이면서 소설가인 사람의 일입니다. 그리고 예언자의 일이기도 하지요. 사실 저는 매우 사실주의적 작가이며 진짜 사회주의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쓰는데, 사람들이 저를 환상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널리즘이 그의 소설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상호적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은 제 저널리즘을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이 저널리즘에 문학적 가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도 제 소설을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저를 항상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와 상상력을 결합한 《마술적 리얼리즘》기법으로 알려진 그의 글은 저널리즘과 문학의 만남으로 이룬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마침내 글에 딱 맞는 어조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어조는 제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의 어조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으로 들리게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케스는 예전에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그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은 채 이야기하려고 했었단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저 스스로 제가 하는 이야기를 믿고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줄 때 지으셨던 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쓰는 것이었어요. 무표정한 얼굴 말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글을 믿는지, 아닌지는 금세 느껴진다. 스스로 믿지 않으면 설득하려는 어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친 설득은 이야기의 힘을 떨어뜨린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를테면 말투가 빨라지거나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같은 속도와 톤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소설의 마술적 요인들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위대한 소설이 모두 그렇듯 「백 년 동안의 고독」 역시 사람과 삶에 대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다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었다.



몇몇 곳에 밑줄을 그으며 읽기는 했지만 그 문장만을 따로 떼어 놓고 읽어 보면 굳이 꼭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이는 신기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위대함은 몇 개의 문장이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고유의 리듬을 잃지 않는 연속성과 반복에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책날개엔 이런 설명이 있다. ˝개가 꼬리를 무는 듯한 치밀한 구조 ˝, 이 책을 읽으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궁금했던 이유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것보다는 마르케스의 어조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이 더 컸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 때문이었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하며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작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작품 창작은 좋은 건강 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한다는 것과 인생을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지극히 제정신인 상태일 때 그 반대인 상태 역시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 문학이란 삶의 모든 요소들을 묘사함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고,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노력을 하려고 한다.



쓴다는 것은 노동이며 만족이자 고통이다. 정신과 신체의 강인함은 당연한 조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가 아닌 독자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모쪼록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 읽고, 삶의 모든 요소들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읽고, 인생을 사랑하기에 또 읽는다. 나의 인생을 창작하는 내 삶의 작가로서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7-12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 읽는저와 책속 그리고 현실과 허구를 도통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니체의 영워 회귀나 카뮈의 부조리 철학도 느껴졌고, 쿤데라의 무거움과 가벼움 마저 들었습니다.
카뮈, 쿤데라, 마르케스가 거의 같은 시대이기도하네여 :)
마지막즈음엔 우리네 어머님들의 한 많은 삶도 그들에게서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 엿보이더군요 :)
정말 읽는 이의 연륜과 경험, 상황에따라 다양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같아요 :)

물고기자리 2015-07-12 01:06   좋아요 1 | URL
네, 슬퍼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기쁠 것도 없는 심정인데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소설이었어요 ㅎ 저널리스트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르케스는 사람과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잘 읽는 것 같더라고요~

cyrus 2015-07-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년의 고독>의 복잡한 서사 구조가 익숙하지 않아서 완독하기가 어려웠어요. 카프카의 장편소설과 더불어서 다시 읽으려면 읽고 싶지 않은 작품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7-12 21:11   좋아요 0 | URL
그러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ㅎ 제가 소설을 읽는 독서 방식은 밖에서 서사를 파악하려는 유형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동선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인물들의 개별적인 지도를 만드는 유형이거든요. 그리고 그 지도들을 연결하여 더 큰 지도를 그려보는 거지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사람, 그 자체라서 인간성을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작가라면 무슨 내용이든 읽는 체질이에요. 제대로 읽든, 아니든 말이죠^^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경우엔 그 작가를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편인데 제가 읽는 건 이야기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제 본질적인 성향 탓이겠죠 ㅎ
 

 

 

˝만약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2권 p470)



마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채색할 수 있는 일종의 물감이라는 상상을 해본다면, 그에 새로운 색감을 더해주거나 농도의 다양함을 주는 것이 바로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스펙트럼을 넓혀 줌으로, 사실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어떤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감상'과 그 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직관'을 키워주는 것 중의 하나가 소설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란 삶이고, 제각각의 색과 농도를 지닌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정보 분야가 아닌,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에 관해서 만큼은 오직 나의 시선으로만 경험하고 싶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엔 줄거리를 나열하는 방식의 상세한 리뷰는 보지 않는 편이다.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 위주로 읽어 본다. 이야기의 구조란 단번에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진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리뷰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에 관해서다.



소설을 읽기 전까진 타인의 감상이 나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읽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읽고 난 후엔 다양한 리뷰들을 읽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감상을 끄적이고 난 후에야 한다. 개개인의 서로 다른 감상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의 리뷰를 대하는 방식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다. 투박한 단 한 줄의 글에서도 나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양식을 얻게 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황금 방울새도 그런 리뷰들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지녔다. 그리고 나에겐 읽을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나의 이야기들이 소설의 이야기와 만났기 때문이다. 구태여 막연한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의 상실감과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그동안 시오가 보여준 것들은 일부였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 뒤로 더 묵직한 앙금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 말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 방울새'어떤 면에서 시오의 운명과 닮아 있다. 작가가 모티브로 삼은 그림이 왜 하필이면 '황금 방울새'였는지 그 정교한 선택에 놀랐다.



˝어떤 물건을 좋아하면 그 물건은 생명을 갖게 돼. 처음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서 평생 쫓아다니게 만드는, 혹은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되찾으려고 애쓰게 만드는 그런 이미지들 말이야.˝ (p460)


˝어떤 그림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면 '아, 난 이 그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좋아'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사람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니야.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건 좁은 통로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지. 쉿, 그래, 너. 얘야. 그래, 너.

 

아주 사사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거야.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독특하고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야.˝ (p461~462)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점에서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책, 건축, 공예품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의 사연과 인물들은 세월에 흐려지더라도 소멸되지 않은 예술 그 자체는 남아서 어떤 개인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서 삶의 이유나 위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것엔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좋기 때문이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으로 인해 덜 유한하고 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그 증거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수단이자 전부였다. 그것은 대성당을 지탱하는 쐐기돌이었다." (p186)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들이 남긴 것들이다. 인간들이 말이다.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은 스러지지만 그 정점이었던 순간이 예술로 남아 또 다른 이를 지켜준다. 누군가가 남긴 그 무엇을 예술로 만드는 것 역시 개개인의 사연이고 마음들이다. 서로에게 필요와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가의 작품이 아닌 사소한 어떤 것에서라도 우리는 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결을 바꾼다호비 아저씨의 말을 생각했다.˝ (p465)



상실, 아픔, 슬픔들은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이 원인이겠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 현실의 결은 변화한다.



˝이 세상의 위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처음으로 흘깃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꽃피우고 꽃피우는 것.˝ (p466)



충분히 괴로워하고 슬퍼하더라도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아픔들조차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예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고통 없는 아름다움은 없으니 말이다. 서로 닮았던 작고 외로운 방울새와 시어도어 데커는 서로를 구원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운명은 승복이 아닌 발견이라 믿고 싶다.



시오가 머물던 호비 아저씨의 공간은 나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그의 친구 보리스가 문을 두드리면 어쩐지 내 마음에도 따뜻한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내 마음의 색채를 밝혀 주었다. 그리고 나의 '황금 방울새'는 내가 읽었던, 앞으로 읽을 책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5-07-04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먼 옛날~~ ㅎㅎ
이 작가의 비밀의 계절를 읽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디오니소스학파라는것이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실제 밀교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이 책도 기대가 되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밀리고 쌓인 책들은 어떡하죠? ㅎㅎ

물고기자리 2015-07-04 02:05   좋아요 0 | URL
전작을 읽으셨군요~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절판됐더라고요ㅜㅜ 저도 밀리고 쌓인 책들이 ㅋ
 

 

 

어떤 소설을 읽다가 중반부쯤이 지나면 불현듯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의 낯섦이 사라지고 어느덧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처음의 낯섦을 익숙해진 시선으로 다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도 같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고, 내가 주인공 '시어도어 데커'가 되어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어린 시절 책을 읽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낯섦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했던 적 없는 이야기가 좋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했고, 누군가의 애정으로 낡아진 물건들이나 익숙지 않은 사물들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낯선 나라의 이름을 하나하나 발음해 보는 걸 좋아했고, 동그란 지구본을 돌려가며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게 재밌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길 하면 관심 있게 귀 기울였고, 순하고 얌전한 나를 귀여워해 주시는 어른들의 눈빛 속에서도 나는 그분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예민한 아이였다. 타고나길 그랬고,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해질 수 없는 나의 번잡한 마음이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보단 누군가의 바람에 익숙해진 아이였고, 나의 유일한 도피처는 책이었다.



책 속에서는 나를 위해 쉴 수 있었다. 낯선 이야기일수록 나는 더 대범하게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장소와 인물, 그 안의 내용만 다를 뿐 생각과 감정의 경로가 나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도 그렇다. 시오는 내가 사람들을 봤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 자신인 듯 안타깝고 아팠다.



황금 방울새의 저자인 도나 타트자신의 소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인 장인의 세공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글에서 그런 정성이 느껴지면 나 역시 어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읽게 되질 않는다. 완독률 98.5%의 책답게 술술 읽히지만 술렁술렁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은 어떤 색깔도 없는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며,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은 모든 것들이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으로,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이끌어 가게 만든다.



주인공과 똑같은 사랑과 상실, 아픔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렇게 견뎌온, 견뎌야만 하는 슬픔들이 있다. 대상은 달라도 느끼는 방식들은 비슷하다. 낯선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익숙함을 발견하고 공감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슬픔은 아니다. 아픔을 같이 공유했지만 그것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닦아주고,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음으로 나는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아직 1권만을 읽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라도 나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읽는 내내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가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놀라고 흥분했다. 실수가 나길 기대하고 있다면, 이 책에선 헛수고다. 도나 타트는 '중독적이며 삶의 버거운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예술'이라는 주제를 과감히 돌파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나는 이렇게 멋있는 찬사는 못 하지만 읽는 동안 어떤 잡념도 느끼질 못 했다. 몇 페이지를 지난 다음부턴 단 한 줄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없었다. 라고 1권의 리뷰를 남겨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5-07-0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최고의 찬사를 하신 것 같아요. 저도 읽어볼게요.

물고기자리 2015-07-01 09:2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저는 정말 푹 빠져서 읽었어요. 책이 짧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로요 ㅎ 에이바님께도 좋았으면 좋겠어요~

레삭매냐 2015-07-01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서로만 고이 모셔 두었는데, 번역 판이 나왔다니 번역판으로 읽어야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07-01 11:01   좋아요 0 | URL
원서를 가지고 계시군요, 이 책은 번역도 꽤 공을 들인 것 같아요. 워낙 표현이 촘촘해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ㅎ 저자의 전작도 궁금한데 우리나라에선 절판된 것 같아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