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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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내고, 쳐내고, 압축해 놓은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은 최소한의 형태만 갖추어 놓은 조각 작품을 보는 듯했다. 더 이상 축약할 것이 없다 싶을 만큼 깎아내고 연마해놓아 응시하는 대상을 향해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선을 만들어 준다. 마치 소리 내고 싶은 음을 정확히 한 음씩만 연주하는 것처럼 집중하고, 음미하고, 기대하게 했다..

 

 

 

"난 혼자 있을 필요가 있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내 인생에서, 내 삶의 본질 안에서, 혼자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 " (p28)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주리라. " (p9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의 글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글의 볼륨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금만 작게 말해주세요.., 그래도 다 들리거든요.. '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 말이다. 문장의 밀도가 아니라 문장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의 차이인 것 같은데 카메라를 의식하는 배우의 연기처럼 강요하고 설득하려는 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에게 가장 설득적인 글은 독자가 아닌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글이다. 높이높이 쌓아올리는 방식보단 좀 더 깊고 깊게 파고드는 글.. 파스칼 키냐르의 글엔 적절한 공백과 침묵이 흐르고 있어 생각 속으로 고요히 침잠할 수 있었다. 한 음, 한 음을 내리누르는 듯한 단조의 여운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 (P123)

 

 

 

"길을 잃으려 했고, 길을 잃는 게 좋았고, 마침내 길을 잃었다. " (P134)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길을 잃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선호하는 책들은 문장이 간결하든, 복잡하든 모두 그런 유형이었다. 낯선 장소에 홀로 있을 땐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최대한 보고, 듣고, 기억하게 된다. 낯섦에 반응하는 나를 통해 새삼 나라는 존재를 예민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시선을 지닌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기도, 새로운 가능성이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방향성이 뚜렷해 오직 그 길로만 가야 할 것 같은 글보단 이곳저곳을 방황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좋다. 그 방황조차도 강압이나 강요 없이, 작가 스스로 먼저 탐색하기 시작한 길을 관찰하듯 따라가는 게 좋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게 맞는 길을 찾아보며 말이다. 길을 잃고 나서야 나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발밑에서 도로의 모래가 밟혀 서걱거리는 소리 덕분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던 기억이 나요. " (P273)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 늘 떠나야 하는 사람들. 홀로 있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 정적이 필요한 사람들 말이다. 머무는 동안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시선을 얻어 나의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그 불안의 실체를 직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방향성은 섣부른 확신이 아니라 발끝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 서걱거림을 알아차릴 때 돌연 깨닫게 된다. 떠날 수 있어야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떠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틀 안에 갇혀 늘 같은 시선으로, 같은 생각으로 머무는 것은 공생이 아닌 착취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중간에서 만나려면, 그것도 즉각적으로 만나려면 항상 그 자리에서 숨 막히도록 머물지만 말고 잘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생 관계에서는 각자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대방을 사정없이 착취한다. 만일 하나가, 우연히, 상대방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경우, 그로 인해 파트너는 질식한다. 상대방이 그를 굶주리게 하면, 그 자신도 죽게 된다. 공생 관계를 균형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극도로 불안정한 대립이다. " (P318)

 

 

 

자신의 음을 잘 아는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나는 동시에 나의 음을 연주하게 된다. 자신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동시에, 타인과 나의 세계를 연주하다 보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화음을 만들어 낸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의례적인 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 낯섦은 없었다. 기대감을 안고 멀리 떠날 짐을 꾸렸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안 이덴이 빌라 아말리아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미 익숙한 장소에 다다른 것 같았다. 혼란스러움 대신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더 깎아내리다 보니 마침내 골조만 남겨 놓은 텅 빈 건물이 된 듯 말이다. 하지만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삶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떠남'은 잘 견디는 힘을 만들어 준다. 모든 장식을 제거한 나라는 구조물을 발견하게 해주고, 나에 대한 환상이 없어질수록 타인에게도 관대해지게 된다. 작가들은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어떤 느낌일까.. 후련한 기분일까, 아니면 공허할까.. 어쩌면 키냐르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다. 파스칼 키냐르빌라 아말리아는 음악가이기도 한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키냐르의 다른 책들은 어떤 느낌일지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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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4-2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음계를 아우르는 서평. 좋네요 ^^ 왜 책을 안내시는지 의아합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바다에 풍덩 몸을 던져버리고 싶네요^^

물고기자리 2016-04-21 20:07   좋아요 0 | URL
이 소설엔 유난히 수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바다에서요!) 키냐르의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으시다니 엄청난 투시력이 있으신 듯합니다^^

왜 그런 의아함을 가지시는지 저는 그게 더 의아합니다!!^^ (그래도 감사해요ㅎ) 사실 요즘은 책을 읽어도 감상을 쓰는 게 심드렁한 상태라 바쁘다는 핑계를 위로 삼아 자꾸 미루고 있거든요ㅜㅜ 쓰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 같아 허전하긴 하면서도 말이죠. 그래도 키냐르의 소설은 어떤 말이든 하지 않고 지나가면 섭섭할 것 같아서 끄적여 보았는데 저는 시이소오 님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ㅎ

한수철 2016-04-2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좋은 글 올려 주셨으면 좋겠어연.

물고기자리 님은 예민하신 분인데,

아니 그래서 좋게 여겨졌어연.

음......

물고기자리 2016-04-27 10:15   좋아요 0 | URL
고마워연ㅎ

좋은 글이라고 말할 건 없지만 독자층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어느 한 부분이었음 싶어요^^ 근데 저는 쓰는 것보단 읽는 걸 더 즐기는 성향인 것 같아요ㅎ

˝음..... ˝으로 끝나는 막줄은 뭔가 한수철 님 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한수철 님의 표현 방식이라는 생각이요ㅎ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등대로」를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서 읽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소설들이 그렇듯, 다 읽고 난 후에도 읽었다는 포만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소설은 무언가 꽉 차오르는 듯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잘 아는 감정의 파도들이 수시로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인생이라는 화폭 위에 사람과 삶, 예술을 섬세한 터치로 그려 넣은 듯한 이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프루스트의 소설이 시각적인 감각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며 화사하게 만개한 꽃과도 같이 의식을 개방하게 만든다면 울프의 소설은 심연 속으로 깊이 잠기는 기분이었다. 마치 걸어간 자리들마다 깊은 웅덩이가 생기는, 인생이라는 습기 많은 길을 점점 더 묵직해지는 발걸음으로 내딛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사람들의 온갖 감정으로 가득 적셔진 해면처럼 느껴졌다. " (p46)

 

 

 

이것이야말로 내가 너무 잘 아는 감정이 아니던가..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였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감정 배출소가 되어왔던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인의 감정을 잘 듣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듣는다는 건 공감하고, 수용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원치 않아도 그 사람의 앙금을 고스란히 흡수해야만 하는 심리적인 노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의 감정과 분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노동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온몸으로 거부해 보지만 말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 역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마치 말라버린 우물에 돌멩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에게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한결같이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 그 일은 정말이지 힘만 많이 들고 얻는 건 적은 작업이었다. " -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들 중엔 이런 심리적인 노동에 소모되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그의 성정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하루키 역시 듣는 사람이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정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정작 자신의 감정은 상실해 버렸거나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것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 상실감의 근원을, 심연의 우물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하루키의 작법은 비교적 건조한 편이다. 번잡한 앙금들은 가라앉히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무심한 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하루키의 문장을 걷는 것에 비유하자면 뽀송뽀송하게 마른 길을 산책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나의 무게나 타인의 무게를 거두고 부유하는 느낌,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글로 편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울프의 「등대로」가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무게에 타인의 무게까지 겹쳐진 느낌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울프의 자전적 이야길 체험하는 수준에서 가볍게 읽어갈 수 있는 소설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인간관계에, 생각하는 방식에, 감정의 무게에 쉽게 휩쓸릴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 숨 막히는 느낌이 힘겨워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책은 읽히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 같다. 30대의 나는 '싯다르타'와 같은 글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또 그때의 내겐 그런 글들이 꼭 필요했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때였고, 특정 분야의 전문서적이나 논문들을 읽어야 했던 30대의 나는 문학과는 잠시 결별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척 힘들었기에 요가 수련과 더불어 명상이나 마음공부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읽는 '싯다르타'는 그저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런 종류의 책으로 해소할 수 없다면 다시 「등대로」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물론 봄날의 햇살과 꽃망울을 돋우는 자연의 신비를 책보다 더 열심히 읽었지만 말이다. (이젠 새로운 계절이 주는 가르침이 여느 책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창문들은 열고 문들은 닫아야 하는데 ― 그 단순한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 (p40)

 

 

 

「등대로」는 울프 스스로 '소설' 대신 '엘레지'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부모님의 섬세한 초상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며, '내 영혼에 열린 어떤 열매에도 이제 손이 닿을 것 같다'고 했을 만큼 부모로부터의 고착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던 작품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어서 의식의 흐름을 나열하는 모든 문장들이 지극히 섬세하며 사색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울프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램지 부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며 그들의 순간들을 마치 예술 작품처럼 한 곳에 모으고 정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창문은 열고 문은 닫아야 한다는', 램지 부인이 늘 되뇌는 저 말은 무심한 세월이 그런 순간들을 침범하고 흐트러 놓지 못하게끔 막으려는 주술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적셔진 해면 같았던 램지 부인이 소진되고 기진하여 세상을 떠나자 거침없는 세월의 바람이 문틈으로 침범하고 만다.

 

 

 

"그녀가 그렇게 뒤뚱거리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는 모습은 삶이 그저 기나긴 슬픔이요 고생임을,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눕는 삶, 물건들을 꺼내고 치우고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는 듯했다. 일흔이 다 되도록 그녀가 아는 세상은 수월하지도 아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쳐서 굽어졌다. (...) 그러나 뒤뚱대며 다시 일어나 자신을 추스르고는 여전히 곁눈질로, 자신의 얼굴, 자신의 슬픔조차 비스듬히 건너다보는 눈길로, 거울 앞에 서서 입을 헤 벌린 채 망연히 미소 지었다. " (p175) 

 

 

 

이 소설은 생각할만한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문장들을 옮겨와 감상을 적고 싶어졌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 소설의 매력이란 문장 속을 기꺼이 헤매고, 음미하게 만드는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소설의 2부는 추상적인 묘사만으로 10년이란 세월의 경과를 보여주는데 읽을 때마다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던 램지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빈집이 세월에 스러지는 과정은 우리의 내면이 황폐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힘이 있었으니, 간간이 찾아와 빈집을 청소하는 맥냅 부인의 움직임이었다. 풍랑에 몸을 맡기는 배처럼 뒤뚱거리며, 세상의 냉소와 분노를 무시하듯 흘금거리며, 세월의 웅덩이와 망각으로부터 부패와 부식을 막아내었고, 삶의 위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죽었노라, 제각기 홀로 / 그러나 나는 더 거친 바다 밑에서 /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잠기었노라 " - 윌리엄 쿠퍼의 시, 「익사자」의 마지막 구절

 

 

 

램지 부인이 살아 있던 시절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등대의 불빛이 아름다웠다. 문을 닫아 세월이 흩트리지 못하게 막아주던, 혼돈의 와중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해주던 동안엔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드러난 등대의 실체는 그저 헐벗은 바위 위의 삭막한 탑일뿐이었다. 그런 등대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끊임없이 아내에게 동정을 구함으로 위안을 얻으려 했던 램지 씨는 결국 그녀를 소진시키고 기진하게 만드는 감정의 폭군이었지만 인간의 삶이나 지식을 대면하는 시선만큼은 거짓 없이 초연했다. 그가 늘 읊조리던 쿠퍼의 시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에서 '등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역자 해설에선 '등대는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이자 세월이며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고 말한다. 내가 느끼는 등대는 사람과 삶과 추구하는 지향과 예술, 그 모든 것들을 관조하는 내면의 시선인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보이는 정경이란, 어떤 것이든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거리감이 있을 땐 무언가 있을 것만 같은, 상상과 동경으로 그 대상이 아름답게 포장되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폐허가 드러나며 공허함을 가져오는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 역시 바로 그 거리에 있는 것 같다. 램지 부인이 했던 역할은 사람들 사이에 아름다움과 친밀감을 선사해주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의 유지가 아니었을까.. 그 마법과 같은 균형을 위해 그녀 자신은 소모되고 탕진되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순간이, 새벽이 몸을 떨고 밤이 정지하는 주저의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깃털 하나만 저울에 내려앉아도 무게가 기울어 버리는, 그런 순간이. 깃털 하나에도, 집은 주저앉고 무너져서 어둠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것이었다. " (p185)

 

 

 

그 균형이 깨어지고 나자 각자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고, 상대에게 더 가까워진다. 폐허가 드러나고 불편해졌다. 하지만 가까움이란 연민을 만들어준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사람들 저마다는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존재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곁눈질로 흘금거리며 버티어 내든, 직시하고 파고들며 심연으로 빠져들든, 우리에겐 삶을 관조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깃털 하나의 무게를 알아차릴 수 있는, 나와 밖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말이다. 비록 깨달아지는 순간이 지극히 찰나적이며 짧게 반짝거린다 하더라도 나의 삶을 비추어주는 등대는 내 안에 있는 그 시선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멀리, 때로는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그 시선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게 다였다 ― 단순한 질문이지만, 해가 갈수록 죄어드는 것이었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 (p211)

 

 

 

예술이란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을 작품으로 남겨 영원히 고정시켜 놓은 결과물인 것 같다. 등대의 불빛은 어두운 가운데에서, 인생의 풍랑 속에서 그 가치가 드러난다. 위대한 작가들이 자신의 어둠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강렬한 빛은 우리의 삶을 여전히 비추어준다. 하지만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불빛일지라도 나의 순간들 역시 빛으로 고정시켜 놓을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 놓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나를 가장 적확하게 위로해주었던 것은, 나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버릴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그런 찰나들을 기록해 두었던 나의 글들이었다. 에둘러 표현해도, 많은 생략이 있었어도 나 스스로는 그것들을 알아보며 그 순간들을 복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터널에 들어섰을 때 예전의 지표를 확인하며 다시 빠져나올 수 있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울프는 「등대로」를 씀으로 그녀가 표현했던 대로 어머니에 대한 고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에겐 벗어난 순간과 다시 되돌아가는 순간들이 여전히 반복 중일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거나 단련시켜 주는 것 역시 그런 반복에 있다. 제자리걸음 같으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완전함이란 없지만 매 순간 최선은 있다는 걸 믿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등대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약간은 자조적인 의문을 담은 눈길로, 왜냐하면 현실로 돌아올 때면 사물과의 관계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 한결같은 불빛을, 냉혹하고 사정없는, 그토록 그녀 자신이면서 또 자신이 아닌, 그토록 자신을 사로잡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혹되어 꼼짝할 수 없는 채로 불빛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것이 그 은빛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밀봉되어 있는 어떤 것을 쓰다듬기나 하는 듯한, 그 어떤 것이 터지기만 하면 기쁨으로 넘쳐흐를 듯한 기분으로, 자신은 행복을, 절묘한 행복, 강렬한 행복을 맛보았었다고 생각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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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4-0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 전에 읽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물고기자리님 글 읽으니 살짝 떠오르는 것들이 있네요. 조만간 다시 붙잡아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4-05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오래 읽은 책 같아요. 최대한 밀어내기도,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면서요^^ 단번에 써 내려간 것 같은, 버릴 것 하나 없는 문장들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야나 님은 (잘 모르는 제가 언뜻 보기에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시고, 가꾸시는 분 같아서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시이소오 2016-04-0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고 고품격의 리뷰란 이런것이군요. `등대`와도 같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울프의 책이 저는 잘 안 읽혀요.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4-05 18:28   좋아요 0 | URL
칭찬이 지나치게 후하신 것 같긴 하지만 봄꽃 향기처럼 감미롭긴 합니다 ㅎ

프루스트를 읽기 시작한 후론 만연체 글의 매력에 빠져든 것 같아요. 근데 이런 책들은 이젠 다 읽은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시점이 어지간해선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무한 루프로 계속 읽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시이소오 님의 꼼꼼한 리뷰를 읽으면 책을 대신 읽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한 맘이 들어요ㅎ 리뷰도 어느 방향으로든 치우치지 않게 잘 쓰시고요^^

시이소오 2016-04-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는 한쪽으로 치우쳐있고 편파적이고 편향적인데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ㅋ ^^

물고기자리 2016-04-05 18:34   좋아요 1 | URL
헐!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그 치우친 쪽을 제가 좋아하나 보죠 ㅎ
 
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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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예컨대, 우리의 오타와 집 정원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느낌 같은 것. 제 말은 어머니의 인생이 충분한 것이었느냐는 거예요. 어머닌 준비가 되셨나요? 아니면 겁이 나시나요? 제가 뭘 해드리면 좋죠? " (p432)

 

 

 

캐럴 실즈의 대표작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스톤 다이어리」는 데이지 굿윌 플렛이란 여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여정을 다룬 소설이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스토너」를 연상시키는 책이었지만 감상은 조금 달랐다. 스토너의 삶이 슬픔과 위안을 동시에 주었다면 데이지의 삶을 통해선 공허와 쓸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1905년에 태어나 구십여 해의 짧지 않은 생을 살았던 데이지는 탄생의 순간을 비롯해 비극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어떤 면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 공허한 느낌은 무엇일까.. 불행이든 행복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긴 생애를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들로 채워진 소설이었지만,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던 현실성 때문인지 마음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불편한 여운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았다. 리뷰를 쓰기엔 내 마음의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았고, 쓰지 않고 넘어가기엔 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소설이어서 며칠 동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데이지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장마다 대략 십 년 정도의 삶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을 이루는 형식들이 다채롭다.

 

 

 

"인생이란 끝없는 증언의 연속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간에, 우리의 상태는 목격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관심받기를 원한다. 우리 자신의 추억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 다른 설명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식들, 탄생과 사랑, 죽음 같은 의식들은 누구에게든 그리고 소용이 있든 없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인가? " (p64)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데이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목소리들이 필요했다. 한 사람의 삶이란 어느 날 갑자기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삶으로부터 연결될 뿐만 아니라 생의 순간들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돌조각을 하나씩 쌓아 올려 탑을 만들어 가듯 저마다의 위치에서 볼 수 있었던 면면들이 모이고 모여 입체적인 구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전체의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숨겨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에겐 선명한 페이지로 기록되지만 그것 역시 어느 한 면일 뿐이며, 대개는 읽다만 페이지가 되거나, 뜯겨져나간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겐 해독 불가한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 봉인해 놓은 페이지들도 있다.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 (p159)

 

 

 

소설 속 데이지의 삶은 곧은 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해서 마치 우리들의 실제 기억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데이지의 내면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부가 가려져 있거나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일생을 그린 소설임에도 타인에 의해서만 묘사되는 손님처럼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실제로 한 사람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것들이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언가로 늘 분주했던 삶이지만 정작 그 안에 자신은 없었던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 또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저 주변의 필요에 의해 그에 맞는 조각처럼 살았던, 그래서 몸이든 마음이든 쉼 없이 움직여야 했던, 공허를 마주하기 싫어서 더 분주했지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공허를 찾아내어 갈수록 텅 비워지고, 결국엔 공백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들처럼 말이다.

 

 

 

"그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 (p474)

 

 

 

그래서 또다시 몰두할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데이지는 우울했던 시기를 힘겹게 넘기고 맞이하게 된 노년의 평온했던 어느 때에도 자신이 아니라 두 분의 아버지(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 생존 여부를 모르는 시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많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었고, 손자와 손녀들도 여덟이나 있었지만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즈음엔 미래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과거에 매달려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있던 연결고리들을 찾아내고, 그 연결 속에서 또 다른 공허를 찾아냄으로 가슴 아픈 퇴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고독일지도 몰랐다. 인생 그 자체의 불행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고독감 말이다. " (p41)

 

 

 

"데이지 굿윌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영상들에서 이상한 점은 그녀가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람 그림자라든가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용기 있는 순간이든 부끄러운 순간이든 적어도 한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플렛 부인은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 일을 견딜 수 없었다. 여든 살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 (p451)

 

 

 

한 사람의 생이란 홀로 존재하는 순간을 증언할 수 없다. 글이나 영상으로 남긴다 해도 그것을 읽고, 봐줄 사람이 없다면 그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소설 속 데이지의 시아버지처럼 무려 백십 세가 넘은 장수의 삶을 누렸던 사람일지라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톨이로 살아가던 사람의 생은 목격한 사람도, 증언해줄 목소리도 없기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공허하다. 그분의 존재는 데이지가 자신의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의 누군가들 역시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감이란 더없이 무력하다. 어쩌면 나 역시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되새김질하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나로서는 단 한 번도 소멸된 시간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것과, 우리 인생의 태반이 낭비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53)

 

 

 

우리 모두에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모든 생은 그 최후의 어둠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매일매일은 비슷한 듯 달랐으며 비통했거나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다만 언제 태어났고, 누구누구의 누구였으며, 언제 사망했다는 몇 줄로 요약되고 만다. 데이지의 삶만을 보더라도 그녀 혼자서 페이지를 모두 채우는 경우는 없었다. 구십여 년을 살았음에도 데이지의 것이라곤 서랍 하나에 담긴 흐트러진 몇 가지의 물건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 시간들은 어느 곳으로 소멸되는 것일까..

 

 

 

"돌이 만들어내는 기적은, 단단하고 무감각한 물체를 땅속에서 꺼내어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 (p163)

 

 

 

책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나는 '머시 스톤 굿윌'을 생각했다. 주인공 데이지의 어머니였던, 스톤월의 고아원 출신이었기에 '스톤'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으며 무지로 인해 데이지를 낳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임신한 줄조차 몰랐던 그녀를 말이다. 평생 동안 이방인이었던 머시 스톤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데이지를 세상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데이지의 탄생은 곧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상실을 경험했던 데이지는 자신에겐 어떤 '결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은 바로 확실성의 핵이며, 내면의 값진 보석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삶에 밀착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인생에 달라붙으려면 상상력의 활동으로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스톤 다이어리」라는 책의 제목처럼 데이지가 펼쳐가는 삶은 어머니의 안쓰러운 삶을 연장시키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데이지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테고, 실제로 데이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머니를 낳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는 그 대상이 나였을 때를 포함해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서야 증명되는 것 같다.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서로의 무게를 전달해 줌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밋밋한 돌에 광채를 만들어 영원성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바람이 빠지듯 소멸되어 버리고 말 인생일지라도 나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주세요. " (p434)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며 쓸쓸했던 이유는 한 사람의 전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며, 언제고 닥칠 이별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미풍에도 흔들리기 쉬운 우리들의 삶을 알고 있기에, 가장 힘든 순간엔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들이기에, 그래서 데이지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했던 마지막 말 역시 나의 것이란 걸 알기에..,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고민하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읽자마자 별 네 개를 클릭했지만 묵직한 돌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은 긴 여운 때문에 다시 다섯 개를 눌러 본다..)

 

 

 

"난 평온하지가 못해.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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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 2016-03-1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

물고기자리 2016-03-14 09: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한수철 2016-03-1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문득(핀트에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이승우의 소설 `부재증명`이 생각나네요. (제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나 자신이, 나의 부재(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데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 상황 같은 거요.

수많은 혀끝이 나 자신을 손쉽게 죽여가도, 나를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그런, 어떤.

아무튼 소개해 주신 책을 읽어봐야겠구먼요.^^

물고기자리 2016-03-14 09:34   좋아요 0 | URL
존재의 증명도 그렇지만 부재증명이라니 어쩐지 더 서글픈 것 같아요..

사람이란 자신의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직접 실감하지도 못하며 사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눈길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소한 중요한 순간만큼은 목격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요. 서로를 위해서 말이죠.. 어쩌면 서로의 뒷모습을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요.ㅎ

저도 이 소설은 작년쯤엔가 아이리시스 님의 페이퍼에서 보고 읽어야지.. 마음먹고 있던 건데 이제야 읽은 거예요.ㅎ

저는 한수철 님이 어떤 책을 언급하시면 되게 궁금해져요^^

서니데이 2016-04-04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4-05 12:14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다정한 서니데이 님이 다녀가셨군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점심 맛있게 드세요~ㅎ
 

 

 

알베르 카뮈「최초의 인간」을 읽는 동안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1960년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당시 강한 충격으로 튕겨져나간 작은 검정 가방 안에서 '쓰다 만 초고'의 상태로 발견된 육필 원고를 편집한 이 소설은 아직 소설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느닷없이 바뀌기도 하고, 판독 불가능한 글자는 빈칸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쓰고 삭제해야 할 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도, 중복된 장도 있는가 하면, 원고 사이사이에 끼여 있던 낱장들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카뮈의 맨 얼굴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소설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다. 다듬어지기 전의 이야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을, 그의 문학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경험이었지만 어쩐지 훔쳐 읽는 것 같은 수치스러운 마음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개방하기 전의 비포장도로를 남몰래 달리듯, 덜컥거리는 생생한 감각으로 한 사람의 삶 속을 허락 없이 침범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감동이 어우러져 있는 이 복잡한 심경 덕분에 카뮈와 이 책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자크 코르므리'는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무엇이든 혼자 알아가야 할 '최초의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역사와 전통이 없는, 장애와 가난마저 짊어지고 있는 그의 가족에겐 그나마의 얄팍한 과거마저도 무의미해진다. 가난한 고아였던 자크의 아버지 역시 '최초의 인간'이었지만, 현재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사망한 후론 가족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곱씹을만한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은 없을뿐더러 오직 현재에 집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크에겐 아무리 가지고 누려도 모자람이 없는 태양이 있고, 미친 듯이 사랑하며, 전심전력으로 사랑받기를 열망하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떨리고 부드럽고 뜨거운 시선이 어찌나 깊은 뜻을 담고 그를 향하고 있었는지 아이는 뒷걸음치며 머뭇거리다가 그만 밖으로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니까> 하고 그는 층계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 (p102) 

 

 

 

어릴 때 병을 앓아 미미한 청력을 지닌 어머니는 문맹인 데다가 아주 적은 어휘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말 없는 체념을 강요받아 혼자 격리된 채,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정복된 적 없이, 모습은 아름답지만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채로, 항상 웃음 짓고 있기에, 그의 마음이 어머니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기에 더욱더 접근이 불가능한 채로,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쉬는 날도 없이 고달픈 노동을 반복하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아무런 원한도 없어져 버린, 남의 것이건 내 것이건 일체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듯 한 어머니의 무심한 시선은 늘 발코니 너머의 거리로 향해져 있다. 어머니의 주변엔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자크 역시 그 침묵 앞에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가, 가슴 아픈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어서..... " (p45)

 

 

 

옳고 그름을 알려줄 정신적인 유산도, 따라야 할 권위도 없다 보니 매일매일 새로운 태양처럼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그러니 그 나날들은 첫날의 기쁨이자 채워지지 않는 공허였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아버지가 목격했던 단두대에 대한 이미지는 그가 유일하게 물려받은 유산이자 고통이었다. 하지만 자크에겐, 아니 카뮈에겐 어머니의 침묵이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해주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공허를 이겨낼 수 있을만한, 무한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어머니의 침묵은 오히려 그를 삶으로 치닫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 어머니의 저 탄복할 만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혹은 사랑을 찾으려는 한 사나이의 노력을 다시 한 번 더 그 작품의 중심으로 삼아보겠노라고..... " - 「안과 겉」에 부친 서문, 카뮈

 

 

 

사실 카뮈의 시선엔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에겐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카뮈에게 그토록 예민한 시선을 만들어 준 것은, 삶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준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순수한 침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그 침묵을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더 사랑했고, 그만큼 마음 아파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거리로 향해져 있는 어머니의 무심한 시선은 어디에서든 여전히 카뮈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카뮈에겐 태양이 있었고, 바다가 있었다. 세상이 주는 가장 호화로운 것을 무상으로 받아 온몸으로 누리는 놀이가 있었고, (그 한편으론 현실감각이 뛰어난 할머니의 무정한 채찍질도 있었지만) 내면의 굶주림을 채워 줄 학교와 책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엔 어린 카뮈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다. 카뮈가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분, 알제의 옛 초등학교 스승이신 루이 제르맹이다. 이 소설에도 실명으로 등장하며 따뜻한 일화를 채워가는 그분의 이야기는 장 그르니에와의 연결점만 생각하게 했던 카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았던 카뮈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전문은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수록되어 있는데 카뮈는 그 연설을 루이 제르맹에게 바친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그 당시 가난한 어린 학생이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리고 손수 보여 주신 모범이 없었더라면 그런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 카뮈의 편지, 1957년 11월 19일

 

 

 

「최초의 인간」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그분의 교실에서 어린 자크(어쩌면 카뮈)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느낀다. 또한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삶이 안으로 닫혀 버린 것 같았던 그에게, 세상으로의 출구를 열어 준 것은 기분 좋은 잉크 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책들이었다. 일상의 굶주림보다 더 강렬했던 내면의 굶주림을 책들이 채워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인간'이었기에 알고자 하는 열망은 더더욱 강렬했고,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진부함 역시 쉽게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려받은 정신이 없었기에 자유로운 정신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오랑 지방의 이런 해변에서는 여름 아침이 날마다 세계의 첫 아침 같아 보인다. 황혼은 날마다 이 세상 마지막 황혼인 양, 해질 무렵 온갖 빛깔을 짙게 물들이는 마지막 광선이 장엄한 임종을 알린다. (...) 이곳이야말로 때 묻지 않은 순수의 땅이다. " - 「결혼·여름」, 카뮈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다 보니 그동안 읽었던 그의 다른 책들 역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다녀온 「이방인」의 뫼르소가 하염없이 바라보던 거리의 풍경이, 그 장면의 묘사가 왜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카뮈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쓰지 않았고, 바꾸어 말하면 그가 알고 있는 것만을 꾸밈없이 정직하게 썼던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기에 공허와 침묵을 이해했고, 이 세상의 무심함을 깨달았으며, 그럼에도 매일 다시 태어나 임종을 맞이하는 오랑의 저 해변처럼 새로운 정신을 갈망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을 말이다.

 

 

 

어떤 면에선, 서른 살쯤 이후부터의 나 역시 '최초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전에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매일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태양이자 바다이며, 나의 제르맹 선생님이었던 책들 덕분인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며 오늘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책들 말이다.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카뮈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살아있었다면 명작으로 남게 될 소설이었을 테지만 나는 이 미완의 소설이 고마웠다. 훔쳐 읽는 듯한 미안했던 마음은 이렇게라도 읽은 흔적을 남겨보는 것으로 조금은 덜어보고자 한다..

 

 

 

"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카뮈의 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창작을 택했다.> " - 「카뮈를 추억하며」, 장 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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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1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12 18:25   좋아요 1 | URL
벌써 금요일이네요^^ 서니데이 님도 근사한 저녁 보내세요ㅎ

프레이야 2016-02-1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소중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 2016-02-12 18: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늘 프레이야 님의 소중한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ㅎ

서니데이 2016-02-1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14 20:4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도 초콜릿 같은 저녁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02-17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18 09:09   좋아요 1 | URL
저녁 인사를 받았는데 오전이 되었네요ㅎ 서니데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02-1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좋은하루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19 13:28   좋아요 1 | URL
네, 낮에 만나니 더 반갑네요^^
 

 

 

알베르 카뮈「이방인」은 햇빛으로 가득한 한낮의 정적을 닮은 글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의 작은 소음들만으로 채워진, 배경음악이 없는 영화를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 기묘한 정적감은 이 소설의 핵심 요소인 듯 여겨지는데 행간의 침묵 덕분에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화영은 '2015년 새 번역에 부치는 말'에서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한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미 독자들에게 익숙한 고전이므로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 역시 가능한 한 피했다 하니 겁이 덜컥 나기도 했지만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아무런 잡념 없이 글의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p97)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긴장감이 흐르던 글의 침묵에 어느덧 균열이 생기고 만다. 인공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즉흥적으로 이 일을 벌이고 마는데 소설 속 뫼르소의 감정은 태양을 묘사하는 문장들로 대변되고 있다. 이를테면 "대낮의 빛이 마치 내 따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거나 "머릿속에서 태양이 꽝꽝 울렸고", 또는 "쏟아붓는 불비를 맞으며", "빛의 칼날이 솟아날 때마다", "이마 위에서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 같은 표현들이다. 뫼르소는 오직 현재만을 감각하며 빛을 즐기지만 그날의 태양은 엄마의 장례식 날과 같은 태양이었다. 통증을 유발하는 그 뜨거움을 견딜 수 없어 대낮의 침묵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지중해 지방의 사람들에게 태양이란 존재는 어떤 느낌일지 막연히 상상해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타국에서 경험했던 가장 강렬한 태양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리게 만드는, 그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생명의 빛이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빛으로 채워지는 것 같은 나른한 포만감을 느꼈고, 주변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식물처럼 빛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내 상황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인생이 반전될만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었다. 게다가 무척 겁을 먹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 내 피부에 닿는 빛의 감각이나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고 있다. 타국의 낯선 냄새들까지도 선명히 떠오른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나의 온 존재를 비추어주던 태양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갈팡질팡 오가던 나의 마음에 일종의 균형을 만들어 주었던 것은 바로 그 태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을 느끼게 해주었던 강렬했던 빛은 지금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 빛을 그리워한다. 카뮈가 고향의 빛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 「안과 겉」, 알베르 카뮈

 

 

 

카뮈는 그의 산문집 「안과 겉」에서 안정적인 균형이 아닌, '그 자체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균형'을 언급한다. 그것은 몸짓 하나 잘못하기만 해도 금이 가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그의 모든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손에서 빠져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 없는 정열,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에 있다고 말이다. 우리의 질문들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는 허무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허무'는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타국의 태양 아래서 내가 느꼈던 그 감정 역시 허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고 싶게 만드는 찬란한 허무였다. 오직 빛을 따라가는 식물처럼, 꽃피우다 소멸되고 말지언정 한껏 피어오르고 싶은 허무였기 때문이다. 빛의 결핍으로, 오히려 자의식의 과잉 속에 살아가던 내게 태양이 가르쳐준 진실이란 오직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의 과잉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기에 오직 빛을 감각하며 살아가다가 막다른 허무를 만난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살펴보는 습관 같은 건 없었던, 육체적 욕구에 감정이 방해받는 일이 많았던 뫼르소는 부조리를 경험하며 타인들의 유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은 사실주의도 아니고 환상적 장르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육화된 신화, 그것도 삶의 살과 열기 속에 깊이 뿌리박은 신화라고 봅니다. " - 알베르 카뮈

 

 

 

정적이 흐르던 글의 침묵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몇 페이지에선 드디어 폭발해 버린다. 소설 속의 정적이 심지가 되어 뜨거운 불비를 쏟아 버리는 것이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즈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부터 그저 슬펐다. 아마도 글 속에 담긴 불편한 정적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튼 몸짓 하나에도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침묵이었고, 삶의 무게에 입을 다물어버리게 만드는 불편한 침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뫼르소에게 벌어진 일들을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는 이야기로만 읽다 보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p44)

 

 

 

"그때 나는 엄마의 장례식 날, 간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 (p124)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맞이할 죽음도 이렇게 빠져나갈 방법이라곤 없는 것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오랫동안 단두대로 가기 위해선 그것이 설치된 대 위로 올라가야 된다고, 계단을 올라가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며 사실인즉 그 기계는 그냥 땅바닥에 지극히 간단히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두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이란 이렇게 우러르며 향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희망 없는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린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 (p17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오직 태양을 향하는 식물처럼, 그저 존재한다는 진실만으로 과묵하게 살아가던 뫼르소를 통해 이 세계의 무심함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세 가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온통 태양과 죽음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삶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폭발시켜 행복을 이야기하는 뫼르소처럼 말이다.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찬미가 아닐까 싶다. 죽음의 신화를 벗기고, 삶에서 신화를 찾는 소설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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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01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따뜻한 저녁시간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1 19:40   좋아요 1 | URL
네, 덕분에 따뜻한 저녁시간이 됐어요^^

cyrus 2016-02-0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세상의 의지. 전집판, 전집판 양장본, 일러스트판. 이번에 또 나왔네요.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6-02-01 20:10   좋아요 1 | URL
김화영 님에 의하면 원문에 가장 밀착되도록 노력했다고 하는데 2015년 새 번역이라 그런지 간결한 문체라 집중하기 좋았어요ㅎ

지금행복하자 2016-02-0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이라는 말에 혹~ 합니다. 벌써 두권이 있는데도 말이죠~

물고기자리 2016-02-01 21:13   좋아요 0 | URL
옛 번역을 가지고 있지 않아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오래된 소설을 읽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설명하는 투의 문장이 없어서 저는 좋더라고요ㅎ

비로그인 2016-02-0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뮈의 이방인은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인 것으로 압니다. 님은 소설을 꽤 심층적으로 읽는 것 같군요. 서평도 아주 잘 쓰시네요. ^^

물고기자리 2016-02-01 21:42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서평은 아니고요^^ 그저 느껴지는 대로 끄적여 놓은 평범한 감상문입니다ㅎ

짜라투스트라 2016-02-01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아~~ 글이 너무 좋아요^^

물고기자리 2016-02-01 21:15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2-02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물고기자리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ㅎ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는 머가 먼지 전혀 몰랐었는데 실존주의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소설도 조금 알 것 같더군요ㅎ

물고기자리 2016-02-02 07:53   좋아요 1 | URL
저는 읽을 때 비평적인 어떤 이론보다는 태양을 비롯한, 뫼르소가 느끼는 여타의 감각들에 집중해서 읽었었어요ㅎ

주인공의 심리를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질 않으니까 오히려 소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감상에 정답은 없으니 읽는 사람들마다 여러 다른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뫼르소의 입장이 되어본 것만으로도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후련했어요^^

시간이 좀 흘러 다른 느낌으로 집중해보면 또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다시 읽고 싶어요ㅎ

고양이라디오 2016-02-02 08:0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주인공과 소설에 몰입하는게 가장 좋은 감상법인 것 같아요. 번역도 중요한 것 같고요.
저도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는 익숙해서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을 안하게 되는데 말입니다ㅎ

저도 다시 읽어볼 땐 땡볕에 몸을 좀 드러내봐야겠네요^^

물고기자리 2016-02-02 08:26   좋아요 0 | URL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저는 친절하지 않은 소설 속에서 헤매는 걸 참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판단하려 하기보단 관찰자이자 체험자가 되려고 하는 편이라 비평적 읽기와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요ㅎ

땡볕^^, 저는 소설을 읽는 동안 강렬한 태양이 그리웠어요ㅎㅎ

서니데이 2016-02-02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따뜻하고 좋은 저녁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2 19: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ㅎ

서니데이 2016-02-04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편안한 저녁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2-04 18:48   좋아요 1 | URL
매번 서니데이 님의 안부 글로 저녁시간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