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은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장 그르니에의 「섬」과 함께 프랑스 3대 미문(美文)으로 불린다고 한다. 난 사실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다. 결과로서 아름다워진 문장은 좋지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문장을 읽는 건 단맛 나는 케이크를 혼자서 전부 먹어치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문장보단 글을 읽는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 좋다. 슬픈 노래일수록 담담하게 불러야 그 노랫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온통 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담담함이 익숙지 않은 정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감각이 먼저 깨어나는 곳에서, 화려한 향기로 유혹당하는 곳에서, 모든 색소들이 제각각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곳에서 어떻게 건조한 글을 쓸 수 있을는지 말이다. 사방이 아름답게 일렁이는 곳에서 매일 눈을 뜨게 된다면 오히려 또 다른 세계로, 생각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을 꿈꾼다. 아름다운 생각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도피처로 삼고 싶다. 아름다움을 읽기보단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사색하기보단 그 감각에 취하고 싶다. 선 그어진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진다. 조금씩 나아가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경계 안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 같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

 

 

 

"비틀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론의 난간에 꼭 매달린다. 이론은 이론이고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는 것이다. (비논리도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과도한 논리는 나를 지치게 한다.)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는 대로 가만 놓아두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내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내 이성이 주장한다 해도 나는 내 심장이 옳다고 손을 들어준다.) (...) 이론의 결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 (p220)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포기한다. 개인은 자기를 망각할 때 비로소 자기를 긍정한다. 자기 생각에 빠진 자는 자신의 방해물이 된다. 미인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내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은 없다. 가장 감동적인 선(線)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신이 되는 것은 스스로 신성을 포기함으로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버림으로써 신은 창조된다. " (p224)

 

 

 

"그들의 지혜? ..... 아! 그들의 지혜라면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대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만사를 경계하고 위험을 피한 채 최소한으로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충고에는 항상 굳어지고 괴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귀찮은 잔소리를 늘어놓아 자녀들을 오히려 바보로 만드는 어떤 가정의 어머니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 " (p276)

 

 

 

"아무리 형편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열광적인 신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은 죽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알려는 욕망은 의혹에서 생겨난다. 믿는 것을 그치고 앎을 얻도록 하라. 사람은 증거가 없을 때에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지 말라. 강요당하지 말라. " (p287)

 

 

 

"너무 오랫동안 똑같은 식물들을 기르다 보면 토지가 지력을 잃고 중독되어 새로운 세대는 처음 세대와 똑같은 장소에서 자양분을 얻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조상들이 먹고 소화한 것을 다시 먹으려 들지 말라. 아비의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퇴화와 위축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듯이 플라타너스나 단풍나무의 날개 달린 씨앗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라. " (p291)

 

 

 

"그리스 우화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아킬레스어머니의 손가락이 닿았던 기억 때문에 살이 여리어진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불사신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 (p292)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랑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 (p293)

 

 

 

이 책의 202쪽 까지는 1897년에 출간된 <지상의 양식>이고 이후부턴 1935년에 출간된 <새로운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옮겨 적은 글들은 모두 <새로운 양식>에서 발췌한 것들이 되었다. <지상의 양식>은 보다 더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들이지만 그에 도취되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꼼꼼하고 친절한 각주들이 도움이 됨과 동시에 읽는 것에 방해가 되었을 뿐, 소설을 먼저 접하고 난 후에 이어 읽은 산문은 지드를 이해할 수 있는 연장선이 되었다. 그가 지향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될수록 그 반대편에서 무겁게 서성이던 지드의 그림자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지쳐있거나 스스로가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다시 그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나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닌, 수동적으로 주입된 생각들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는 과정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것들은 쉽게 힘을 잃는 반면에 나에게 주입된 생각들은 아무리 밀어내고 거부해도 쉽게 떠나질 않는다. 감정은 다른 것을 좇더라도 생각이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버리고 싶어지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하지 않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잠시 도피하거나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글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보다 먼저 겪었고, 더 많이 고민했던 분들의 글을 읽으며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지상의 양식」 1927년판에 붙이는 서문에 의하면 그는 이미 이 글을 쓰던 때의 자신을 이내 떠나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바랐던 그대로 어느 상태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변화하며 살아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본문 말미에는 "내 책은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고 적혀있다. 모든 책은 그 당시 누군가의 일기이자 바람이고, 또 다른 이의 추억이자 희망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들 역시 당시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는 일기와 같다. 감상에 다 끄적이지 못 했던 좀 더 묵직한 이야기들도 책과 함께 흘러간다. 지드는 추억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추억을 저버리지 못한다. 지난 일기도 가끔씩 들여다본다. 그래야만 지금의 나를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도약할 수 없는 정신을 가졌다면 조금씩 걸으면서라도 삶의 모든 면면을 관찰해가며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늘 아름다운 도피처를, 낯선 공간을 꿈꾸지만 정작 그런 곳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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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6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9-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4대 미문으로 해서 에밀 시오랑 추가요/ 절판되어서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빌려읽으며 번역이 형편없다는 와중에도 저는 저절로 필사를 하게 되더라는.... 최근 새번역 책들을 그래서 다시 샀죠. 우울할 때 읽으면 압생트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9-16 23:03   좋아요 1 | URL
필사를 하게 될 정도라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담으려고요~ 가을이라 그런지 수직으로 파고드는 느낌의 책들이 끌리네요^^
 

 

 

샐린저의 단편소설을 읽는 건 어떤 이들의 마음의 방으로 느닷없는 초대를 받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은 내 주변을 '음소거' 시키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샐린저의 소설에 그런 매력이 있다. 담담한 풍미를 지녀 안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술을 몇 모금 넘긴 후의 느낌처럼 적당히 이완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알려고 하기보단 그저 듣고 싶어서, 좀 더 이야기해보라고 조르게 되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들에게 집중한다. 읽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지루하질 않지만 그렇다고 읽은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들엔 전과 후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불현듯 시작해서 불현듯 끝나버리는 이야기들이다.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들의 특정 시간과 만나게 되고,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저 그 이야길 듣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다른 삶 속에서 문득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같고, 「프래니와 주이」의 남매들 역시 주인공이나 배경이 되어 소리 없이 등장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 버린다. 마치 내가 알고 있던 누구, 또는 누구의 누구를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걸린 흑백사진 속에서 발견하곤 아릿한 그리움에 빠져드는 것 같다. 좀 더 알고 싶었지만 서로 다른 시공간이라는 차원 앞에서 속절없이 이별하게 된 기분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 상실감을 느낀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그에 맞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뜻 모를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단편소설의 장점은 느닷없는 시작과 느닷없는 끝에 있는 것 같다. 짧음 속에 충분한 기승전결이 있는 단편도 있지만 오직 전개만 있는 단편은 당황스러운 가운데 묘한 매력이 있다.



「아홉 가지 이야기」 중 특별히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웃는 남자>,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테디>였다. 그리고 샐린저의 문학적 매력이 돋보였던 소설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이었다. 평온한 듯 불안하고, 담담한 듯 슬픈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주인공 시모어는 「프래니와 주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이 확실했던 일곱 남매의 맏이다. 또 다른 홀든이 연상되기도 했던 시모어를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미련 같은 건 두지 말라는 듯 소설은 끝이 났다.



살다 보면 전과 후를 설명할 순 없지만 고요한 가운데 삶을 전환시키는 어떤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란 생각은 오류라고 말한다. - ˝소리 없는 우아함.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고 말이다. 경험을 할 당시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 그의 한 부분은 짧은 단편소설과 같지 않을까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결정적 순간이 바로 지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완과 집중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올 전환의 순간엔 다음 이야길 선택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극적인 순간엔 늘 곁에 책이 있었다. 읽든 안 읽든 가까이 있어야 안심이 됐다. 아마도 주변의 여러 목소리들은 꺼둔 채 나의 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책이란 이완과 집중, 선택을 위해 숨처럼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책들은 특별했고, J. D. 샐린저의 단편 역시 그렇게 지나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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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스메를 위하여>가 좋았어요. 오랜만에 이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군요. ^^

물고기자리 2015-09-08 21:22   좋아요 0 | URL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과 더불어 제일 맘에 들었던 소설이에요^^ 주인공과 대화하는 소녀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홀든에게도 그랬듯이 삶의 전환이나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소녀가 등장하는 것이 샐린저 문학의 매력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바나나피시>의 시모어에게도 노란색 비키니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장하고, 그 소녀와 이야길 나누는 부분이 유난히 기억에 남거든요 ㅎ

지금행복하자 2015-09-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밖에 보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게 하는데요~~

물고기자리 2015-09-09 00:29   좋아요 0 | URL
인물의 심상을 문학적인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작가들과는 달리 샐린저의 문장은 등장인물의 예민한 의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적나라함이 매력인 것 같아요. 닦고 칠하고 조여진 문장도 아니고, 직유나 은유도 거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든요^^

샐린저는 개개인의 사람들에 대한 예리한 시선이 있어요. 부분부분을 흘려보내지 않고 예민하게 표현해서 전체보단 순간을, 큰 길보단 골목길을 먼저 보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세밀한 재료들을 보여주고 큰 그림은 알아서 그려보라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예민할수록 샐린저의 문장에 이끌리는 것 같은데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예민함이 좋더라고요 ㅎ 홀든을 좋아하셨으면 재밌으실 것 같아요^^

지금행복하자 2015-09-10 09:39   좋아요 0 | URL
샐린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어요.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아주 오래전에 읽어놔서요~~
읽을 책은 많은데.. 에궁.. 그래도 자꾸 늘어나네요~~ ^^
 

˝어떤 문제를 잘 제시하는 것과 그 문제가 사전에 해결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믿는다. 마지못해 나는 여기에 '문제'라는 말을 쓴다. 솔직히 말한다면, 예술에는 문제 같은 것은 없다. 예술 작품이 그 문제의 충분한 해결인 것이다. ˝ - 앙드레 지드

 

 

 

오늘날의 독자들은 작가가 어떤 행위를 그리면 거기에 대한 작가의 찬성이나 반대를 분명히 밝히기를 요구한다며 앙드레 지드가 「배덕자」의 머리말에서 했던 말이다. 이 '문제'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작품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며 작가는 승리도 패배도, 기정사실로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나는 아무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잘 묘사하고 나의 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노력했다.˝ - 앙드레 지드

 

 

 

배덕자 좁은 문과 서로 대극을 이루는 작품으로 지드가 오래전부터 2부작으로 구상했었다고 한다. 배덕자 악덕을 중심으로 기성 종교로부터 해방된 과도한 개인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면, 「좁은 문」은 미덕을 중심으로 지나친 신비주의적 신앙의 위험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지드의 정신 속에선 두 주제가 경쟁적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하며 둘 다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일기를 통해 고백했다고 한다.



주인공 미셸이 지난 3년간 겪은 일을 세 명의 친구에게 고백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배덕자앙드레 지드와 아내 마들렌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지드 최초의 비극적 소설이자 심리소설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출간 당시엔 엄청난 스캔들을 야기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죽음의 날개가 스친 뒤에는, 중요하게 보이던 일도 이미 그렇지 않게 된다. 중요하게 보이지 않던 것, 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우리 머릿속에 쌓여 있던 온갖 지식이 분칠처럼 벗어져 곳곳에서 맨살이, 숨어 있던 진정한 존재가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때부터 내가 발견하려고 마음먹은 '인간'이었다. ˝ (p369)

 

 

 

온통 학문 연구에만 심취했던 병약한 미셸은 책 외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스물다섯살이 되었고,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별 애정도 없는 마르슬린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떠난 여행 중 폐결핵이 발병된 미셸은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알제리의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마르슬린의 극진한 간호로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아랍 소년들의 모습을 보며 '건강'에 반하게 된 미셸은 살고 싶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된다. 그동안 많았던 생각에 비해 느끼는 일이 너무 적었던 그는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감각이 깨어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팔랭프세스트에 비유했다. 나는 학자가, 같은 종이에서 최근에 쓰인 글자 밑에 있는 그보다도 훨씬 귀중하고 매우 오래된 원문을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 숨겨져 있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최근에 쓴 글자를 지우는 게 급선무 아니었을까? ˝ (p370)

 

 

 

지워진 글씨가 다시 나타나게 하기 위해 미셸은 과거의 교육과 최초의 윤리관에서 얻어졌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멸시하거나 일소시켰다. 마르슬린은 미셸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겐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숨겼고, 그는 자신의 기만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드의 「좁은 문」과 마찬가지로 「배덕자」 역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지금은 네가 스스로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 - 요한복음 21장 18절

 

 

 

각주에 의하면 젊을 때 자유롭게 살던 베드로가 늙어서 때가 되면 손이 묶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당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한다.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는 「배덕자」에선 예수를 세 번 거부한 베드로 대신 미셸이 마르슬린을 세 번 거부한다. 1부에선 그녀를 거의 하루 종일, 매일, 혼자 내버려 두는 정도였지만 2부, 3부에선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 그녀를 거부하게 된다. 이미 미셸에겐 마르슬린과의 일상이 몸에 맞지 않게 된 옷과 같은 행복이었다. 이런 미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배덕자」인 것이다.

 

 

 

˝오늘날 왜 시가, 특히 철학이 죽은 글자가 되었는지 자네는 아나? 시와 철학이 삶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야. 그리스는 삶을 그대로 이상화했어.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시의 실현이었거든. 철학자의 삶은 자기 철학의 실천이었어.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은 이미 행동하지 않고, 행동은 이미 아름다워지려고 애쓰지 않아. 그리고 지혜는 그것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네. ˝ (p433)

 

 

 

종교, 철학, 예술, 사랑, 개인의 이상 등 추구하는 것과 실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한편으론 그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성장기의 결핍 또는 과잉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크기만큼 다른 쪽의 과잉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의 과잉은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든다. 극단적인 과잉의 원인은 극단적인 결핍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미 잃었기에 좀 더 잃는 것이라고 말이다. 치우침은 자유가 아니다. 그 자체로 속박이라 여겨진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영웅적인 금욕주의 모두의 결말은 쌍둥이처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실하면서 동시에 성실한 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 (p410)

 

 

 

우리가 어떤 기만으로 자신을 속이든,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개의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자신과 완벽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기만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그를 증오하며 자신의 기만에 화를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그것이 없으면 타인의 그것도 정확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좁은 문」, 「전원교향곡」, 「배덕자」는 지드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타인을 비판하거나 계도하며, 자신의 지성과 양심을 상대적 우위에 놓으려 했다면 지드 역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문학이란 도구를 통해 다만 묘사함으로 자기기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기만에서 스스로 놓여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둘 모두를 회피하지 않아야 하는 것 같다. 내면의 결핍을 모른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의 삶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좀 더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모든 이에게 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스스로 찾게 하니 말이다..

 

 

 

˝나는 공감이 무섭다. 온갖 전염병이 모두 그 속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단지 강자들하고만 공감하게 되어 있다. ˝ (p467)

 

 

 

˝자신을 자유롭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려운 건 바로,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줄 아는 거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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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은 앙드레 지드 전작독서를 열심히 하시는군요. 저는 <좁은 문>만 읽어봤어요.

물고기자리 2015-09-06 23:29   좋아요 0 | URL
전작까진 아니어도 몇 권 더 읽으려고 해요. 읽고 싶었던 다른 책들도 있어서 순서를 정해야 하는 게 행복한 고민이에요^^

AgalmA 2015-09-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지드 내용은 다 가물가물하지만 읽을 때 옥죄어오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어려워서가 아니라 묘사나 위에 인용하신 대사가 날카로우면서 무거운 경고성 철학으로 다가와 굉장히 심적 부담감을 줬던...
한 템포 쉬어가는 뜻에서 브라우티건을 꼭 보셔야 할 듯 :)

물고기자리 2015-09-07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다른 쪽의 과잉으로 치닫고 싶을 때가 있어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습니다ㅎ
 

 

 

앙드레 지드전원교향곡 제목의 느낌으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상은 어느 목사의 도덕적인 위선과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지드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라는데 그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16년 이래, 앙드레 지드는 집안과 절친한 목사의 아들이자 삼십 년 연하인 당시 16세 소년과 동성애를 시작하는데 1918년 지드의 아내 마들렌은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분노와 충격으로 그가 보낸 모든 편지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지드는 이 사실을 알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중적인 성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믿고 싶었던 자신의 자기기만적 환상이 무참히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전원교향곡」은 바로 이 시기인 1918년 상반기에 집필됐다고 한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작중 화자인 목사의 순수한 신앙을 믿게 된다. 보호자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가르치고 돌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머리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자신을 속이고, 아내의 슬픔을 무시하며, 이후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아들의 마음 역시 교묘히 짓밟는, 더없이 천진한 듯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묘사하고 합리화 시키지만 목사의 가증스러운 기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늘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 자신의 사랑을 포장하고 스스로를 속인다.



아름다운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 주인공이 목사라는 것만으로 처음엔 그의 순수한 신앙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되는데 이 소설이 뛰어난 점은 주인공의 이중성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완벽히 숨기지도 않는 적절한 교묘함에 있는 것 같다. 적나라하지 않는 적나라함이 그의 기만을 오히려 크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화자인 목사는 늘 자신을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래서 더 가증스럽게 느껴지니 말이다.



평론가들에 의하면 목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성경의 문맥과는 동떨어진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선별적인 인용, 또는 누락시킨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적 측면에서 보면 그 역시 작가적 역량으로 보인다. 원래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변형시켜 목사의 욕망이나 진실을 교묘히 은폐하는 역기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드의 소설에는 유난히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된다. 하지만 그 역시 「좁은 문」의 알리사나 「전원교향곡」의 목사처럼 성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합리화를 위해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핵심 구절은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좁은 문」을 읽을 때 알리사를 진정한 신앙인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알리사에게 신앙은 일종의 고결한 도피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롬의 사랑은 알리사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그의 머릿속에서 아름답게 승화시킨 사랑 자체에 대한 사랑인 것 같았다. 알리사는 그런 제롬의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계속해서 드높은 경지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행복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제롬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 뒤로 숨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엔 그들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의 제롬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엄격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두 살 위인 외사촌 누이 마들렌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좁은 문」의 알리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드는 친구들로부터 목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광적인 구도자였지만 다양한 경험을 한 이후엔 동시대인들을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열정적인 삶을 계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카톨릭계 작가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엔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의 비인간적인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 해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들로 그는 '현대의 양심'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무신론적 휴머니즘의 선도자였지만 그럼에도 복음서와 그리스도에 대해 여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삶과 작품 성격을 규정짓는 결정적 요소 하나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성경을 소설이나 시를 읽듯 읽었다고 한다. 마치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는 「좁은 문」의 알리사처럼 인간 스스로 각고의 노력으로 자아를 완성하면 신성과 구원에 도달한다고 믿었단다. 기독교회의 정통 교리와는 별개로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했지만 이를 모태로 한 그만의 문학세계는 여러모로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풍부한 깊이가 있다. 내용이나 인물에 대한 호감을 떠나 한 소설에서 열 개쯤의 감상이 떠올려질 만큼 이런저런 상념들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물마다 개인의 히스토리를 생각해보게 되는 특징적인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보여준다. 그래 봐야 인물 간의 대화나 일기, 편지 등을 통한 묘사가 전부지만 문장을 길게 할애하지 않는데도 어떤 특정한 인간성이 그려지니 말이다. 한 사람의 적나라함을 통해 나의 내면 역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러쿵저러쿵 가르치려 들지 않지만 멈칫하며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문학이 살아남는 이유는 사람들이란 늘 여전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자기완성의 도구이자, 앙드레 지드가 선택한 또 다른 구원의 길은 바로 글쓰기 또는 완벽한 예술 작품의 창조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얻은 구원은 무엇이었을지 모르지만, 문학적 구원과 자기완성은 지드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진행 중인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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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9-0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예리하게 벼른 감각을 잊을래야 잊을수는 없죠.

물고기자리 2015-09-03 20:58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편안하게 이어가는 글인데도 그 깊이가 남달라서 읽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앙드레 지드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서 장바구니가 가득 찼습니다 ㅎ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 마태복음 7장 13절 (p32)

 

 

 

제롬에게 사랑이 시작된 순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년 뒤, 부활절 방학을 맞이해 외삼촌 댁에 갔을 때였다. 외숙모의 불륜으로 상심하고 있는 외사촌 누나 알리사의 눈물을 보며 그 순간 제롬은 사랑과 연민에 도취되었고, 그때부터 인생의 목적은 오직 알리사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급기야 외숙모는 도망쳐 버렸는데 마침 주일 날 교회에선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온갖 고행과 슬픔을 넘어 순수하고 신비롭고 거룩한 기쁨이 될 사랑. 제롬에겐 그 '좁은 문'이 알리사의 '방 문'이 되었던 것이다. 제롬은 스스로를 얽매어 놓는 것이 오히려 즐거울 수 있는, 청교도적 규율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행복과 덕행을 혼동한 채로 말이다.



알리사는 어땠을까? 그녀는 어머니의 불륜으로 상심했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 역시 지켜봐야 했다. 제롬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리면서도 사랑이란 그녀의 아버지가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존경, 신뢰와 뒷받침인 희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녀는 어머니처럼 가족에게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살아야 할 진짜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그 사람의 인생 초반부의 성장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지를 학습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에 반발하는 자신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거나 때론 일정 부분 포기하고 타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매 순간하고 있는 자신의 선택이 주어진 가치관이나 습관이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개인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자아를 인지하려면 자신을 비추어 줄 거울이 필요하니 말이다.

 

 

 

˝정작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부터다. 아마도 상을 당했기 때문에, 비록 나의 슬픔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감수성은 지나치게 자극받아 새로운 감정에 흔들리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나는 조숙했다. ˝ - 제롬 (p19)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는 문턱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 우리, 그리고 타인과 그들의 경계엔 서로 다른 가치관이란 울타리가 생기고 그 턱을 넘나드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타인의 문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나의 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한 걸음이 무겁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서로가 온갖 노력을 다해야만 할 것 같았어. ˝ - 알리사 (p53)

 

 

 

˝나는 죽음이 다시 만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살아서는 갈라서 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줄 거야. ˝ - 제롬 (p53)

 

 

 

제롬과 알리사는 소설의 초반부에 이미 알고 있고, 예견하고 있었듯이 그들 스스로의 문턱이 너무 높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는 제롬과 알리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상대를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형편이니, 편의대로 추측하기를 반복하며 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위안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편지가 하나의 커다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아! 슬프게도,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썼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롬! 제롬! 아! 우리는 언제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 - 알리사 (p131)

 

 

 

˝나는 네 사랑이 무엇보다 머릿속 사랑이고, 애정과 신뢰에 대한 근사한 지적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 - 알리사 (p132)

 

 

 

알리사는 그녀의 어머니와는 달리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와 달라야 한다는 문턱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롬을 좋아했던 여동생 쥘뤼에트에게 희생하려 했지만 자신의 희생이 가치 없다 느껴지자 그녀는 마음 아파하기 때문이다.

 

 

 

˝그 애가 자기 행복을 내 희생 위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았다는 것, 그 애가 내 희생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내 마음속에 되살아난 끔찍한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아차릴 수 있다. ˝ - 알리사 (p175)

 

 

 

˝나는 언제나 그의 앞에서 나의 덕을 과장하는 것일까? 나의 온 마음이 인정하지 않는 이 덕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 - 알리사 (p198)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또 다른 제롬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머니와 알리사가 달아난 방향만이 달랐을 뿐, 머릿속에서 드높여진 이상적인 사랑이 그만 현실과 만나 추락해버린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종교와 상관없는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론  '좁은 문'의 비유 역시 문이 작고 좁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에고가 강하기 때문에 그 문이 좁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된 가치판단의 기준들이 나의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속박의 끈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하려는, 그 미덕에 대한 힘겨운 노력은 얼마나 터무니없고 공상적인 것 같았는지. 조금이라도 자부심이 덜했던들, 우리 사랑은 수월했을 것이다. ˝ - 제롬 (p159)

 

 

 

나의 문도 너의 문도 아닌, 문턱이 없는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려면 때로는 자신이라 규정짓는 모든 것들 속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주어진 환경들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나의 가치관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올 수 있을 때 '좁은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닐지도 모르니 말이다..

 

 

 

˝자!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해..... ˝ - 쥘리에트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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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0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10000km>란 영화가 개봉했던데,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하신 <좁은문>대화들을 보니 앞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화상으로 나누는 무수한 대화들이 생각나요. 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나 정서는 변함없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당연히 인간이라서...
저도 동영상만 봤기 때문에 영화 추천은 아닙니다(정색)

좁은 문, 전원교향곡, 적과 흑....이런 고전 읽던 때가 무려 몇 십년이 흘렀는지!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 하는데...아.

물고기자리 2015-09-01 20:28   좋아요 1 | URL
영화 추천은 아닌 걸로 알겠습니다^^ <좁은 문>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어떤 이미지만 떠오를 뿐 제대로 이해한 것도, 기억나는 것도 없었어요. 확실히 문학이란 경험의 데이터가 많아야 읽히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책 읽는 사람들에겐 나이 들어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게 앞으론 읽는 것이 더 재밌어질 거란 기대감이 들어서인 것도 같고요^^ 학생일 때와는 달리 정답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