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은 이 책이 소설 쓰기와 독서의 전통이 빈약한 1970년대 터키에서 독학으로 소설 쓰는 법을 배운, 반은 서양인, 반은 동양인인 작가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소년은 소설가가 되리라 결심하고 아버지의 불 꺼진 서재를 더듬어 빼낸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지요. " (p182)
「소설과 소설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이다. 파묵은 2006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쳤으며, 보르헤스, 칼비노, 에코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턴' 강의를 맡은 후 2010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2015년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는 오르한 파묵이었다. 안톤 체호프, 앙드레 지드와 더불어 올해 집중했던 작가인 파묵은 체홉의 초연함이나 지드의 의연함은 없지만 기어코 읽게 만드는 강박적인 집요함이 있었다. 파묵의 회고록인 「이스탄불」에 의하면 그의 어린 시절,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셨던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형과 경쟁해야 했는데, 형과의 다툼은 늘 피와 눈물로 끝나곤 했다고 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승부욕과,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방의 작가라는 점이 그에게 집요한 근성을 주었던 건 아닐까 싶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 (p31)
이 책은 소설가로서의 경험이나 관점을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소설가 이전에 독자였던 파묵의 생각을 담고 있기도 하다. 파묵의 글을 읽을 때 왜 나는 섣불리 판단하기보단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파묵 자신이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파묵에게 중심부란 이를테면 삶의 본질 또는 삶의 의미이고, 그밖에 우리가 무어라 명명하든, 그곳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그 존재를 낙관하는 곳을 말한다.
"소설의 중심부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숲 전체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 (p153)
소설을 읽을 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가 아닌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길 쓰고 싶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찾는 중심부는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에도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편인데 어떤 인물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대신 보여주는, 카메라의 앵글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야기에만 매료되기 힘든 성향이지만 나름으로는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의 좁은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느라 분주하다. 그 일이 즐거운 이유는 중심부를 찾게끔 해주는 빛 때문인 것 같다.
"소설 읽기란 전체 풍경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풍경을 구석구석 샅샅이 보고, 모든 사람을, 모든 색과 모든 음영을 느끼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 텍스트를 판단하거나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동원하기보다는 우리 상상 속에서 세세하고 뚜렷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그 그림들 속에 들어가 사방에 지각을 열어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 (p166)
난해하다면 난해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파묵의 소설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 느낌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음표이자 마침표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들, 확고한 단어로 확실한 말들을 전하는 소설에선 정리된 하나의 답을 얻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늘 나를 헤매게 만들었었다. 파묵 역시 어느 한 사람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파묵 자신이 '찾는' 사람이고, 심지어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을 그렇게 개방하고 있다.
"우리는 다 읽은 소설을 중심부가 어디인지 찾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낙관적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다시 읽고 싶어 합니다. " (p167)
"왜냐하면 결국 어떤 소설에서 중심부의 힘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독자들이 찾아 나서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p169)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착할 수 있을 거란 낙관 때문에 읽는 사람들에겐 그런 똑같은 마음으로 쓰는 사람의 글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런 소설엔 중심부에 다다르게 해주려는 빛이 강렬하다. 도착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중간에 그 빛을 꺼트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능력은 그 빛을 다루는 기술과 진정성에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가 아닌 스타일이나 플롯의 모방에서 온 영혼 없는 글에선 그 빛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성 있는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그 인물의 시선으로 보이는 세상이 궁금하지 않다면 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한 중심부는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p166)
"소설의 중심부와 의미 역시 독자에 따라 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심부에(보르헤스는 주제라고 부르는) 대해 다른 사람과 논하는 것은 인생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됩니다. " (p169)
각자의 시선에서 보는 빛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린 같은 소설 속에서도 다른 길들을 헤매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집과 집 사이를 방황한다면 누군가는 숲길을 서성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찾다가 만나서 나누는 이야긴 서로 다른 세상의, 서로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그 프레임을 연결해보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읽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오르한 파묵이 말하는 중심부란 도착하게 될 장소의 의미보단 '낙관' 그 자체였다. 그 빛을 느끼는 한 우리는 계속 길을 갈 수 있고, 여정에서 보는 것들은 도착지보다 더 큰 의미일 듯싶다. 올여름부터 읽었던 오르한 파묵의 책들을 돌아보며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해본다. 나를 기꺼이 방황하게 해주었던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