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경의선책거리에서 열린 세계 책의 날 행사에 다녀온 지 오늘로서 일주일이 지났다. 작년 세계 책의 날 행사는 우천으로 취소되었기에 올해 행사가 무척 기대되었다. 다행히 올해는 날씨도 좋고(행사 후반에는 비가 내린 듯하지만) 참가한 출판사나 관람객도 많아서 성황리에 잘 마친 듯하다.
주최측으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와 책 한 권도 선물받았는데, 선물받은 책이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니 어떤 분이(아마도 행사요원이었던 듯하다) 책을 2만원 상당의 책 교환권으로 바꿔주시고 계셨다. 냉큼 달려가 가지고 있던 책을 반납하고 교환권을 받아서 읽고 싶었던 책 두 권을 샀다.
그 중 하나가 북유튜버 '겨울서점' 김겨울 님의 책 <독서의 기쁨>이다. 책 읽는 장소, 책 읽는 자세, 책 읽을 때 사용하는 도구, 책에 밑줄을 긋는지 안 긋는지, 필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등등 책과 관련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책 중반에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독서 역사를 회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공부 외에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 독서였고, 그게 취미이자 습관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고백에 깊이 공감. 중고등학생 때는 참고서 사고 남는 돈을 모아서 책 사고, 대학생 때는 알바해서 번 돈으로 책 사고, 현재는 버는 족족이 책을 산다는 고백에도 '이건 내가 쓴 글인가' 싶었다.
저자는 전자책 어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TTS 기능을 이용해 책을 '듣기'도 한다는데, 눈으로 읽을 때 쉬이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면 귀로 들어보라는 조언에 솔깃했다. 줄간격이 좁아서 오랫동안 멀리했던,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을 전자책으로 구입해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겨울서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GPfjyMkN7uAmzfRpXL-AxQ)
어젯밤엔 Y 인터넷서점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통해 알게 된 웹툰 작가 의외의사실 님의 책 <퇴근길엔 카프카를>을 읽었다. 만화라서 금방 읽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정말 금방 읽었다. 근데 만화라서 금방 읽었다기보다는, 만화에 나오는 책들을 대부분 읽었기 때문에 금방 읽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민음사 블로그에 연재한 <의외의사실의 세계문학 읽기>를 엮은 것이다. 연재 기간 동안 저자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한 권씩 읽고 해당 문학 작품에 관한 만화를 그렸다. <체호프 단편선>, <등대로>, <오셀로>, <죄와 벌>, <위대한 개츠비>, <픽션들>, <순수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페스트>, <오이디푸스 왕>, <보이지 않는 도시들>, <변신, 시골의사>, <나를 보내지마>까지 모두 열세 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필사적으로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저자가 고른 열세 권 중 두 권빼고 다 읽었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 다 알고 읽으니 아무래도 책장이 술술 넘어갈 수밖에.
당연하게도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만화는 상대적으로 찬찬히,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으로는 <이방인>밖에 읽지 못했는데,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저자가 소개하는 작가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이런 인용문이 나온다.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264쪽)
요즘 한창 A형 간염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 - 잘못된 전통이나 관행, 조직의 적폐 등등 - 은 병균이고 부자연스러운 것 - 건강, 청렴, 순결성-은 일정 정도의 의지와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경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았다. 소설 자체의 줄거리나 내용을 보면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뭔가 주제 사라마구 느낌?), 대체 이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궁금해서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은 강추 도서이므로 큰 사이즈로 첨부한다.
<퇴근길엔 카프카를>을 다 읽고도 잠이 오지 않아서 읽은 책이 <박완서의 말>이다. 이 책도 Y 인터넷서점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김하나 작가님이 입이 닳도록 찬사를 보내셔서 구입했는데 정말이지 너무너무너무 X 100000 좋다. 필독서로 지정해야 함.
이 책에는 박완서 작가님이 1990년대에 했던 일곱 번의 인터뷰 혹은 대담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여러 지점이 흥미로운데, 첫째는 '작가의 탄생' 면이다.
박완서 작가는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문학 소녀였고,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하기도 했던 박완서 작가가 결혼 후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내다 마흔이 되어서야 <나목>으로 등단해 소설가로 커리어를 쌓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결혼 후에도 한국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남성 작가들이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이런 여자가 어딨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진짜 여자, 현실의 여자, 살아 있는 여자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계기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엄청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알게 된 것이었다. 알려진대로 박완서 작가와 박수근 화백은 젊은 시절 미군 PX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사이다.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백이 얼마나 고생하며 생계를 잇고 그림을 그렸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박수근 화백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거래하며 엄청난 돈을 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박수근 화백에 관한 논픽션을 쓰기로 했고, 쓰다 보니 한계에 부딪쳐 픽션으로 장르를 바꿨는데, 그렇게 탄생한 <나목>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1931년생인 박완서 작가는 페미니즘을 알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다고 말한다. 여자라서 집안에서 차별받은 적도 없고, 아들딸 구분 없이 교육시킨 어머니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몸으로 국내 최고 학부까지 입학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공평한 지가 눈에 더 잘 들어왔고, 나중에는 상대적으로 덜 부당하고 덜 불공평했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에도 엄연한 차별의 요소가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쟁 통에 아버지와 오빠가 죽고 엄마와 딸인 나만 남자, 엄마가 "집안이 바로 되려면 네가 죽고 오빠가 살아남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한 식이다. (이는 사노 요코가 한 경험과도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엄마가 딸을 온전한 딸로서가 아니라 아들 대신, 또는 아들이 되지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경험은 나 역시 한 적이 있고 지금도 하고 있기에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본인은 페미니즘에 관해 잘 모른다고 말하지만, 말씀 하나하나가 페미니즘 개론서에 나올 법한 문장들이고, 어떤 발언은 2019년을 살고 있는 현대 여성들도 미처 가닿지 못하는 생각들이라서 귀감이 되었다.
"사실 기득권을 쥔 쪽은 깨어날 필요가 없는 거구요. 남자가 기득권자인 건 확실하잖습니까? 그 점은 정권의 관계하고도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우 절대로 정권을 쥔 쪽이 그냥 내놓는 법은 없었잖습니까? 결국 빼앗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려면 조금은 더 슬기롭고 표독스럽지 않으면 안 돼요. 달래지 않아도 주는 사람은 없어요." (93쪽)
"말로써 쉽게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여자들, 만만한 남자를 만나서 쉽게 평등을 이루려는 약은 여자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135쪽)
"페미니즘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남자들이 쓴 인기 있는 소설의 여성상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이건 남자가 원하고 바라는 여성이다 생각해서 여성의 실제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죠. 남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환상적으로 처리된 것에서 벗어나 실제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주체적인 소설이 바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145쪽)
"효부는 있어도 효녀는 없거든요.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를 들어보면 시어머니가 방문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해드리고, 친정어머니가 다녀가실 때에는 찬밥 같이 먹고 차비 5000원을 드릴까 말까 고민했다고 해요. 이런 것을 우리 스스로 미덕이라고 느낍니다. 효란 자기를 길러준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효자는 효부 아내만 두면 저절로 되는 거예요. 남자도 여자 부모에게 똑같이 할 수 있나요?" (164쪽)
셋째는 '기분 나쁜 인터뷰어에 대처하는 태도'다. 김하나 작가님도 팟캐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는 아주 기분 나쁜 인터뷰어가 둘 나온다. "남자의 경우에는 군대라는 게 있고 더러는 운동권에 휩쓸리기도 하고 반항도 하게 되는데 여자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거든요.", "아버지와 오빠로 대표되는 남성의 부재라는 것이 선생님에게 뭔가 운명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같은 발언은 인터뷰어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 나아가 인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는데, 박완서 작가는 대놓고 화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주 굽히지는 않는 태도로 인터뷰를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일본어 세대인 작가가 우리말에 대해 느끼는 애정의 깊이다. 얼마 전 다른 책에서 박완서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나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들의 책을 일본어로 읽었다는 글을 읽고 새삼 놀랐다. 생각해보니 박완서 작가는 1931년생이고 일제 강점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던 건 당연하다. 해방 후 작가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우리말로 쓴 글을 배우고 시조나 가사 같은 전통 문학을 공부하며 국문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깊은 만큼 글을 쓸 때에도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는데, 앞으로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게 얼마나 공들여 쓴 단어이고 문장이고 글인가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90년대까지만 해도 얼마나 책이 잘 팔렸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들도 많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세칭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20판에서 30판씩 꾸준하게 팔리고", "<서 있는 여자>는 한 여름에 2,3만 부씩 팔린다.", "지금이야 소설 같은 거 10만 부쯤 팔리는 게 우습지만" 같은 발언을 보며 세상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새삼 느꼈다. 요즘은 1만 부도 안 팔리는 책이 허다한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