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일본에 갔을 때 한창 화제를 모으던 애니메이션이 두 편 있었다. 하나는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한 <너의 이름은>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개봉한 <목소리의 형태>였다. <목소리의 형태>는 일본 방송에서 신작 영화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즉시 흥미를 가졌다. 아무도 모르게 자살을 준비하고 있는 고등학생 이시다 쇼야.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니시미야 쇼코라는 아이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따돌림을 당하며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 하나 없이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쇼야와 쇼코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쇼코에게는 청각장애가 있었다. 쇼코가 전학온 날, 쇼야네 반 아이들은 청각장애가 있는 쇼코를 따뜻하게 맞았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점점 쇼코를 불편하게 여기고 따돌리기 시작했다. 가장 짓궂은 아이가 쇼야였다. 쇼야는 쇼코를 밀치거나 보청기를 억지로 떼내어 던지는 등 크고 작은 '장난'을 일삼았지만 당하는 쇼코에겐 '괴롭힘'이었을 터. 그러나 쇼코는 울거나 화내는 대신 미소로 화답하거나 도리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때마다 쇼야는 당황했고 쇼코를 더욱 짓궂게 괴롭혔다. 결국 쇼코가 전학가기로 결정하자 학교측은 가해자를 찾아 나섰고 담임 교사와 반 아이들은 일제히 쇼야를 지목했다.
담임 교사가 쇼코를 괴롭힌 가해자로 쇼야를 지목한 것은 반 아이들에게 쇼야를 괴롭혀도 좋다는 허가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날부터 쇼야가 새로운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 아이들 누구도 쇼야 곁으로 오거나 쇼야에게 말 걸지 않았다. 어제까지 쇼야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누구보다 가혹하게 쇼야를 괴롭혔다. 작은 동네이다 보니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쇼야가 초등학교 시절 장애가 있는 아이를 괴롭힌 가해자라는 소문이 금방 퍼져서 쇼야는 새로운 친구를 한 명도 사귈 수 없었다. 쇼야로선 이대로라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쇼야는 자살하기로 마음 먹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쇼야는 다시 한번 쇼코를 만나 사과하기로 한다. 쇼코에게 사과하기 위해 수화까지 배운 쇼야는 긴 망설임 끝에 쇼코를 만나러 간다. 쇼야는 쇼코가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쇼코의 동생에게 위선자라는 말까지 듣지만, 정작 쇼코는 쇼야가 자신을 위해 수화를 배운 것에 감탄하며 헤어질 때에는 "또 보자"라는 수화까지 한다. 과연 쇼코는 쇼야를 용서한 것일까? 쇼코와 쇼야는 이대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가 다시 만나도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우선 쇼코의 가족인 쇼코의 어머니와 쇼코의 여동생 유즈루는 쇼야를 용서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시절 쇼야와 함께 쇼코를 괴롭힌 우에노 나오키와 카와이 미키는 쇼야에 비하면 자신들이 쇼코를 괴롭힌 죄는 가볍다고 변명하지만, 쇼야에게 있어 이들은 같이 쇼코를 괴롭혔고 나중에는 자신까지 괴롭힌 이중 가해자이다.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지만 끝까지 쇼코를 지켜주지 못하고 도망친 사하라 미요코의 심정도 편하지 않다. 쇼야와 쇼코는 그들의 재회가 오랫동안 덮여 있었던 문제를 들춘 것 같아 또 다시 괴롭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라는 소재 탓에 이 영화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 지점은 청각장애인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 아니라 어느 사회나 집단마다 존재하는 배척과 무시, 불통의 기억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교실 풍경은 내게도 익숙했다. 조금 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정 없이 공격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꾸짖기는커녕 방관하는 교사. 어릴 때도, 어른이 되어서도 어느 집단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리더가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직접적으로 배척하지도, 배척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도 않고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배척당하는 사람에게 과연 나의 태도가 '수수방관'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그에겐 배척하는 것이나 나처럼 수수방관하는 것이나 자신의 고통을 몰라준다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배척 당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 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배척당하고 무시받는 일을 몇 번인가 겪고나서야 그들이 느꼈을 고통을 짐작했다. 쇼야는 보다 빠르게, 분명하게 쇼코의 고통을 느꼈다. 쇼코의 자리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 따돌림을 당하는 입장이 되자 그동안 쇼코가 느꼈을 고통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쇼코가 언젠가 자신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이제는 자신이 쇼코에게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어야 할 차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쇼코를 찾아가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쇼야는 쇼코의 언어인 수화를 배우기로 한다. 마침내 고등학생이 되어 쇼코를 찾아갔을 때, 쇼코가 의외로 너무 쉽게 쇼야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은 쇼야가 쇼야의 언어가 아닌 쇼코의 언어로 사과했기 때문이다. 가족 이외의 사람과는 제대로 소통해본 적이 없는 쇼코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자신에게 말 걸어주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친구. 바로 그 사람이 쇼야라는 사실에 어쩌면 쇼코는 두려움보다 고마움을 더 느끼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제서야 배척 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보다 힘든 사람에게 손내밀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나를 찔렀다.
이 영화에는 쇼야와 쇼코 외에도 제대로 소통해본 적이 없거나 소통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쇼야처럼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다가 쇼야와 친구가 되는 나가츠카 토모히로, 청각장애가 있는 언니를 챙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쇼코의 여동생 유즈루, 초등학교 시절 쇼코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던 사하라 미요코 같은 인물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른 인물들은 영화를 보다가 '이런 XX'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싫은 구석이 없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그렇다고 용서할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쇼야와 쇼코의 5학년 때 담임 교사는 보는 내내 욕이 나왔다. 원작에선 더 심하다는데 과연 눈 뜨고 볼 수 있을지).
나는 그동안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케이온>, <빙과>, <타마코 마켓>, <FREE!>, <울려라! 유포니엄> 등 다수의 쿄애니 작품들을 봐왔고, 재작년에는 교토에 있는 쿄애니 본사에도 가보았을 만큼(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외부만 자체 견학 ^^) 쿄애니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다. 쿄애니 팬으로서 <목소리의 형태>는 이제까지 본 쿄애니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작화나 연출, 내용 면에서 훌륭했다. 영화도 좋았는데 원작 만화는 더 좋았다고 하니 어서 구입해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