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가 2014년에 발표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다. 평론가가 쓴 책은 어렵다는 편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내 독력(讀力)이 지금만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하여간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끝까지 못 읽고 중간에 관뒀다. 다행히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었다. 읽다가 못 읽겠으면 전처럼 중간에 관둬야지, 라고 생각한 게 오히려 끝까지 읽는 힘이 된 것 같다(글 한 편의 길이가 짧기도 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저자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 중에 짧은 글들을 모으고 손봐서 엮은 책이다. 90편 조금 못 되는 글들을 슬픔(1부), 소설(2부), 사회(3부), 시(4부), 문화(5부)로 나눠 배치했다. 지난 7,8년의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것들이 많아서 제목에 '슬픔'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고 한다. 슬픔에 대한 글을 유독 많이 쓴 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문이기도 하고 2017년 1월 23일 저자의 아내가 수술을 받은 일 때문이기도 하단다. 


저자는 슬픔에 관해 쓴 글을 모은 제1부에서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 연민한다는 식의 표현을 쓴다. 하지만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백 퍼센트 공감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어렵거나 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부모를 잃은 사람의 슬픔은 부모를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자식을 잃은 사람의 고통은 자식을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똑같이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해도 각자의 관계와 경험은 저마다 다르기에 쉽게 공감하거나 연민하기 어렵다(이를테면 부모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부모를 여읜 경우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부모를 여읜 경우).


그렇다고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위한 노력을 영원히 포기해야 하는가. 그건 절대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고 직접 창작하고 공유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의 슬픔을 공부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슬픔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두운 영혼에 잠식되고 만다.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 앞에서 피자며 짜장면 따위를 폭식했던 인간들과 다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죄없는 국민 수만 명을 학살하고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칭하는 몰인격한 존재가 되고 만다.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중략)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중략)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5쪽)


케어란 누구에게 시간을 주는 일 (6쪽)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 우리는 병실에서 껴안고 울면서도 나는 아내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으로부터도 아내보다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8쪽)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38쪽)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57쪽)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76쪽)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115쪽)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4쪽)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거나 그것을 칭찬하는 평론가를 볼 때 화가 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거기서 '지갑을 열어. 그리고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겨. 넌 원래 그렇잖아.'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3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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