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4 3 2 1 1~2 세트 (양장) - 전2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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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민스크 출신의 19세 청년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뉴욕항에 도착한다. 레즈니코프는 이민자 티가 나는 러시아 식의 긴 본명 대신 당대 최고의 부호인 록펠러의 성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민국 직원이 이름을 물었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잊었는데요"라는 뜻의 이디시어 "Ikh hob fargessen(이크 호브 파게센)"이 입에서 나왔고, 이민국 직원은 그의 이름을 "이커보드 퍼거슨(Ichabod Ferguson)"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이커보드가 된 그는 어찌저찌 미국 사회에 정착해 아들 셋을 얻고 그중 하나가 스탠리다.


스탠리는 로즈라는 여자와 결혼해 아치라는 아들을 얻는다. 스탠리는 가구 및 가전제품 판매점을 운영하고, 로즈는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사진을 배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소설이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가족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다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전에 읽은 챕터에서는 스탠리의 판매점에 불이 났는데 지금 읽는 챕터에서는 무사하다든지, 이전 챕터에서 사진관을 그만뒀던 로즈가 다음 챕터에서는 계속 사진관에서 일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챕터 간의 내용이 직렬로 연결되지 않고 일종의 '평행우주'처럼 병렬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 소설의 전체 구조가 눈에 들어 왔다. 이 소설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의 1은 1부의 2가 아니라 2부의 1, 3부의 1, 4부의 1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1부의 2는 2부의 2, 3부의 2, 4부의 2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주인공 아치 퍼거슨이라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치 퍼거슨이 될 수도 있었던 네 사람(퍼거슨 1,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두 가지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다.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퍼거슨 1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네 가지 버전의 이야기에서 아치 퍼거슨은 각각 다른 삶을 산다.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와 반목하고 절연한다.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사진 작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만,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데 만족한다. 어떤 삶에서는 에이미가 아치의 연인이 되지만, 어떤 삶에서는 배 다른 남매가 된다. 유년기에는 대부분 부모와 친척들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그들이 한 선택에 의해 아치의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치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청년이 된 후에는 아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아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변화가 대부분이다.


가령 어떤 삶에서 아치는 소설을 쓰고, 어떤 삶에서는 소설 대신 신문 기사를 쓴다. 어떤 삶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삶에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떠난다. 어떤 삶에서 여성만 사랑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남성을 사랑하고, 또 어떤 삶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사랑한다. 어떤 삶에서는 성 구매자이고, 어떤 삶에서는 성 판매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삶이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일종의 가능성 또는 선택지로 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는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자 장점이다. 구성 자체가 특이하고 특별하지만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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