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에 이런 말이 있다. 김선우라는 시인에 대해, 그의 시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늘 다채로운 감각과 사유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을 낸다. 생명에 대한 예민한 관찰, 시민성에 대한 적극적 발언, 기후위기와 생태적 환경의 파괴에 대한 직설적 반성, 자본을 향한 씩씩한 비판, 차별 없는 사랑과 연대에 관한 섬세한 이미지 등등.' (122쪽)


딱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김선우의 작품은 그랬다. 시만이 아니라 소설도. 그렇지만 이렇게 총평으로 이 시집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김선우 시 전반에 관한 이야기지, 이 시집에 관한 정리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이 총평이 이 시집에도 적용이 되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집에는 그 전의 시집에서 주던 느낌과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이 시집의 시들은 의미가 더 쉽게 전달되도록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 시로 서로 얽히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어쩌면 시인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집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과의 대화'란 시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몇 구절.


'본래 쓸쓸한 세상인걸요. 사람에게는 사이가 있으니. ... 시가 없으면 반드시 시가 태어나죠. 인간(人間) - 사람 사이는 채워야 하기에. ... 시인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 사람에게서 사이를 보았다면 당신은 시인이에요. ... - 사이가 더 커지지 않는 세상. / 우리 모두 시인인 세상을 엿보며 / 시인은 이렇게 무사태평이다.'('시인과의 대화' 중에서. 30-31쪽)


그렇다. 시인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시집이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조카가 짖는 모습을 보고도 '네가 짖는 대신 개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면 되잖아, 이런 따위 말만큼은 하지 않는 걸로 시인 이모의 소임을 다하는 시간.'('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중에서. 36쪽)이라고 표현한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는 모습. 그런 모습은 '야생 사과나무 앞에서 열매 하나를 얻기 위해 / 나무에게 말을 걸던 만년 전 사람을 떠올린다/.../사슴 한마리 앞에 인간 한마리로 온전히 대결하던 조상을 떠올린다'('마스크에 쓴 시 2'에서. 62쪽)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사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울 때는 자신의 관점에서 채우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나를 둘 다 존중하고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 사이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동물들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동물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상대가 되어보는 일, 그것이 바로 사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는 듯하다.


이렇게 사이를 채우지 않고 자신 쪽으로만 끌어당기려고 하는 존재가 있으니, 시인은 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존재는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성장, 성장 하면서 상대를 자신에게 속하게 만들려고 한다. 어느 것이든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계속되는 잠식. 이런 잠식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멈추어야 한다고 외친다. 이 시집 곳곳에서 이렇게 멈추라는 말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멈추지 않으면 온갖 감염병으로 시달리게 되는데, 이 시집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모습이 제3부에 '마스크에 쓴 시 1~14' 연작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연작시에는 '멈춰야 해'라는 말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런 감염병은 결국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서 빌린 것이 아니라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라고, 그래서'존재의 벼랑 앞에/한줄의 시로 부끄럽게 엎드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을 우리 모두가 지닌다면 '내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마스크에 쓴 시 13'에서 인용. 80-81쪽)


이렇게 시인은 인간들만의 관계에만 사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는 사이가 있고, 이런 사이들을 채우되 한쪽으로 끌어들이는 채움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사이에서 함께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그런 마음이 이 시집 전체에 나타나 있으니, 해설에서 말하고 있는 정리가 이 시집에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시가 많은데, 이 시, 기억해두고 싶다. 어쩌면 사이를 채우는 일을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얼룩이 남는다

    강아지 고양이 무당벌레 햇빛 몇점

    모든 존재는 있던 자리에 얼룩을 남긴다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몇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얼룩들은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서로를 안기 위해

    안고 멀리 가면서 생을 완주할 힘이 되기 위해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년.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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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색깔의 표지가 있는 시집이다. 북펀드에 응모했더니, 내게는 초록색 바탕의 시집이 왔다.


  표지에 있는 네 가지 색깔, 팔레스타인 국기에 있는 색깔이다. 내가 알고 있는 국가의 깃발이 몇 개 되지 않지만, 왜 세 표지 중에서 랜덤으로 보내줄까 했더니, 이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에서 따온 것. 그렇게 시집은 표지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응답하고 있다. 시집 제목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향한/위한) 응답의 시' 아니던가.


괄호가 마음을 울렸다. 괄호,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멀리서나마 마음으로나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들에게 응답하는 존재들이 세계 곳곳에 있고, 멀디 먼 한국에도 있다고 하는 듯한, 괄호. 그리고 응답.


이 시집을 읽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금은 나라 이름이지만 사람 이름이기도 했는데, 누구였더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검색했더니, 야곱이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었다더라.


성경 (대한성서공회가 번역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1995년-) '창세기 32장 28절에 보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나온다.


이 야곱이 누구냐?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인 사람 아니던가. 여기에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겠다.


선민의식, 그것을 지니게 된 것이 이 야곱,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간 서양의 역사에서는 '예수'를 팔아넘긴 민족이라고 해서 온갖 억압과 탄압을 받았다지만 그들이 지닌 이 선민의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현대에 들어 남들이 살고 있던 땅을 점령하고, 공존하기보다는 또다시 이기려고 점점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땅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으니... 단순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을 동반한 정착이니...


또 이기려는 것인가? 누구를? 강한 자가 아니라 약자를,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을 물과 식량부족으로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지, 저항하려는 사람을 군인, 민간인,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폭격으로 죽게 만들고 있으니...


그럼에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원죄의식이 있어서인지, 나서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을 학살하고 있는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아니, 침묵하지 않는데, 많은 언론들이, 더욱 강한 자들이 다뤄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입을 막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귀를 막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못한 시인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직접 행동을 할 수 없더라도 조그마한 목소리라도 보태려 한다. 아니, 보태야 한다. 그래야 이 참상이 멈출 수 있으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응답, 그것이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할지라도 팔레스타인이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겐 할 수 있다. 또 더 큰 비극을, 참상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하다. 응답이... 시인들이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미약한 목소리나마 내려고 하는 것. 이런 시인들의 응답이 저 멀리 가 닿기를... 직접적이 아니더라도 그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시인들이 이런 응답을 할 때 나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응답은 무엇일까?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런 시인들의 응답에 나 역시 응답하는 것. 시집이 널리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 팔레스타인의 진실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배제가 아니라 포용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


현대에 과학기술은 인류를 불멸로까지 이끌려고 하는데, 그러한 불멸로 가기 전에 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최첨단 무기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를 향한 외침. 그것이 우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집을 읽으며 팔레스타인에 응답한 시인들에게 고맙단 마음이 들었다. 이젠 시인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응답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고.


이 시집에서 '못 묻는다'는 송정원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다녀올게만 있고 다녀왔어는 없는 무수한 하루가'(145쪽)... 이런 현실이 지금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에, 이 땅에는 '안녕'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 '안녕하세요'를 하기 힘든 상황. 그러니 시인들이 나설 수밖에. 팔레스타인에 응답할 수밖에.


이 시집이 응답하는 시라면,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많겠지만, 내가 읽은 책으로는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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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에티켓 -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당신의 마지막에 관하여, 개정판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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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 


알지 못하기에, 더더욱 두려운 것.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아직까지는. 언젠가는 피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지구가, 우주가 견디지 못하겠지. 포화상태가 될 테니까.


이렇게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 남에게 일어날 수는 있지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 또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그러나 살면서 점점 죽음을 만나게 되는 횟수가 늘고, 언젠가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올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누가 죽음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 앞에 담담할 수는 있겠다. 담담함. 그것이 겉으로 꾸미는 일일지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충격을, 슬픔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유언장 쓰기'가 유행했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어떤 말을 남길까 생각해 쓰는 활동.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 죽음으로 인해 삶을 더 잘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활동이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가면서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와 비슷한 활동이 '관 속에 누워보기'란 활동이 있었다. 죽은 다음 들어가는 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죽음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보라는 것. 다 삶을 잘살기 위한 방편의 활동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의미 있게 보내는 방편으로 활용을 한다. 역시 죽음은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에 이런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내 삶은 소중해! 하면서.


하지만 이 책은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죽은 다음의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아파서, 나이들어서 또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의 사람을 예로 든다. 그들 죽음의 원인은 다를지라도, 또 죽음의 원인에 따라서 다음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죽음 직전에 신호가 오고(사고는 물론 다르다), 고통이 함께하며, 그 다음에 숨이 멎는다. 숨이 멎으면 신체에 변화가 오고, 의사가 와 죽음을 확인하고 증명서를 내준다. 다음 장례 절차가 진행이 되고, 매장 혹은 화장이 된다. 그 다음에 기일을 맞이하여 주변 사람들이 추모를 하고,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


이런 과정을 자세하게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 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이 책은 전체적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표를 보라.


삶과 죽음의 곡선이 위아래가 반대인데, 이상하게 두 곡선이 만나서 연결되지 않는다. 이 말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기법 중에 OL(오버랩) 기능처럼 겹치는 시간.


이렇게 삶 속에서 죽음이 시작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을 자신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죽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전 우리나라 어른들이 죽음을 준비하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하고 (선산이 있는 경우 말고도, 근대에 들어서도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두는 어른들이 많았다), 죽어서 입을 수의를 맞추어 놓았으며, 또한 죽은 후에는 어떻게 하라는 말까지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하니.


그런 전통들이 사라져가고, 이젠 죽음마저도 의사의 손에 맡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준비하는 것이 죽음의 에티켓이라고 하는 듯하고... 죽은 다음에야 이제는 장례 절차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례를 끝내는지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 예전의 '유언장 쓰기, 관 속에 누워보기'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 적어도 갈 때 올 때보다 좋은 모습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만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여전히 죽음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으니, 저자의 말대로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준비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만큼 죽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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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9-19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프가 ‘만나지지 않는 연장선상‘ 이란 느낌이 드는군요.
 
독일. 어느 겨울동화 / 공산당 선언 - 시와 사상의 만남
하인리히 하이네 &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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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의 시와 한때 우리나라에서 읽으면 안 되었던 '공산당 선언'이 묶여 있다.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하이네지만 참여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을 썼다는 점. 그리고 그와 마르크스가 교류를 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시와 사상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네가 쓴 '독일, 어느 겨울 동화' 제1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우리는 여기 지상에서 벌써 /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우린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려 하며 / 더 이상 궁핍을 원하지 않는다 / 부지런한 손이 번 것을 / 게으른 위가 탕진해서는 안 된다.


이 지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 충분한 빵이 자라고 있어 / 장미와 도금양도, 미와 즐거움도 / 또 완두콩도 적지 않아.' (47-48쪽)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라던 혁명 아니던가.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에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런 그들의 주장을 선언으로 만든 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


너무도 유명한 구절들이 들어 있는, '유령 하나가 유럽에 돌아다니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240쪽)로 시작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295쪽)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


우리나라야 지금도 좌파라고 하면 못 잡아 먹어서 난리인 나라지만, 좌파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도 있는 나라지만, 이제 이런 '공산당 선언'은 읽어도 되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것,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이런 것도 있지만 공산주의가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기에 그런 여유가 생긴 것 아닐지... 그러면 이 공산당 선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문헌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많은 부분에서는 실현이 될 수 없는 선언이다. 그럼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무언가 아직도 받아들일 것이 있어서일 텐데...


가령 이 선언에 이런 대책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들이 많다.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세를 적용,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제거, 공립학교엣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 등등'


이것이 바로 역사다.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는, 그래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하이네와 공산당 선언을 묶고, 비슷한 점을 해설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하이네의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 역사를 알아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시라서 그런지, 그의 풍자가 확 와닿지 않았는데, 공산당 선언도 역사 속에서 다시 평가해야 할 선언이니... 


지금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이 이 선언을 작성할 당시의 의도에 맞게 우리 현실을 파악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는 것이 이 선언에 충실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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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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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만 보면 50명의 사람이 나와야 한다. 제목이 이러면 꼭 나오는 사람을 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차례를 보면서 한 명, 두 명 세어본다. 어? 51명인데... 뭐야? 잘못 세었나? 다시 세어본다. 외국인이 두 명, 한 번에 세 명이 동시에 나오는 장이 있고, 마지막 장은 '그리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세어도 51명이다. 이런... 제목에 맞춰 합리화해본다.


그래 세 명이 나온 장을 한 사람으로 치고, 마지막 장을 또 한 사람으로 보면 50명이네, 딱 맞네 하면서. 그러다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읽으니 이런 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


'어쩌다보니 51명입니다. 혹 세어보시다가 한명이 더 있어 놀라실까 말씀드립니다. 제가 넘치게 썼는데 제목을 '피프티 원 피플'이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보다 자기 장(章)을 가지지 않으면서 드나드는 인물도 있어서 사실은 52명, 53명 ..... 세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393)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사람을 세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구나.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란 꼭 제목에 맞게 사람 수를 세어보게 하니... 참.


각자의 인물이 짧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 삶들 중에 저런, 저런 나쁜 놈이 하는 삶은 여기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구나의 삶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나쁜 놈들은 나온다. 자기만 아는 놈, 다른 사람을 해치는 놈. 세상은 좋은 사람만 살지 않으니까. 별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살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움을 아예 겪지 않았을 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 '김시철'이란 인물의 아내인 혜린에게서 그 점을 발견한다.


자신들이 내지도 않는 층간 소음이라고 아랫집이 따질 때 아내인 혜린이 많이 힘들어하는데, 이때 시철은 이렇게 생각한다.


'혜린의 낙천성과 둥근 성격은 타인의 공격성을 적게 겪으며 자라는 동안 형성된 것이어서, 막상 공격적인 상대를 마주하니 면역성이 쉽게 무너졌다.'(304쪽)


하, 타인의 공격성에 면역이 생기기 힘들지만,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 장면에서 '학교'를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말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장소.


이 장소에서 온갖 갈등을 겪으며 그것을 해결하면서 때로는 묻어두면서 지내온 기간들이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낯선 타인을, 타인의 낯선 방식을 견디게 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을까? 따라서 학교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다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꼭 학교가 아니어도 된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들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쪽으로 오게 하면 되니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소설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싶다.


소설에는 온갖 인간들이 다 나오니까. 그들의 삶이 나오고, 정말 나하고는 하나도 같지 않은 삶들도 소설 속에서는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들 삶에도 나름대로 애환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까.


이 소설에 나오는 무려 51명, 아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구나, 그들이 서로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일을 겪고 기억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가가 마지막 장에서 많은 이들을 영화관에 모아놓는데, 이 건물에 불이 나고 대피하는 경험을 모두 하겠지만, 그 경험은 각자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바로 이 마지막 장이 소설이 하는 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장 말고도 꼭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소현재'라는 인물이 '직업환경의학과(예전에는 산업의학과라고 했다고)'를 선택하고 여전히 많은 산업재해에 마음 아파하면서 도대체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은 병원의 원로 교수인 '이호(이 인물 역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가 해주는 말.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중략...)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은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380-381쪽)


이것이 바로 삶 아닐까. 우리 삶이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길게 보면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기껏 내가 던질 수 있는 거리 만큼만 돌을 던지면 된다는 것을. 그 다음 돌을 다른 사람이 던질 수 있게끔 조금이라도 앞으로 돌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족된 것이라고.


그럼 나는 돌을 어디서 주울까? 내가 돌을 던질 자리는 어디일까? 소설에 나오는 각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돌을 던진다. 어떤 이는 이호의 말처럼 뒤로 던지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앞으로 돌을 던진다. 그 돌이 얼마나 멀리 나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돌을 던진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 역시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레 돌이 원하는 곳까지 가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던질 수 있는 만큼 힘껏 던지면 된다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거리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 이야기. 좋았다. 그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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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26-09-1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람 수를 세어보았었습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가 봅니다. 어쨋든 책은 제가 읽어본 책 중 손에 꼽힐만큼 재미있었습니다.

kinye91 2026-09-18 16:50   좋아요 0 | URL
하하, 저만 그런 것이 아니군요. 저도 이 소설 참 좋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