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보면 50명의 사람이 나와야 한다. 제목이 이러면 꼭 나오는 사람을 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차례를 보면서 한 명, 두 명 세어본다. 어? 51명인데... 뭐야? 잘못 세었나? 다시 세어본다. 외국인이 두 명, 한 번에 세 명이 동시에 나오는 장이 있고, 마지막 장은 '그리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세어도 51명이다. 이런... 제목에 맞춰 합리화해본다.


그래 세 명이 나온 장을 한 사람으로 치고, 마지막 장을 또 한 사람으로 보면 50명이네, 딱 맞네 하면서. 그러다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읽으니 이런 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


'어쩌다보니 51명입니다. 혹 세어보시다가 한명이 더 있어 놀라실까 말씀드립니다. 제가 넘치게 썼는데 제목을 '피프티 원 피플'이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보다 자기 장(章)을 가지지 않으면서 드나드는 인물도 있어서 사실은 52명, 53명 ..... 세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393)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사람을 세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구나.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란 꼭 제목에 맞게 사람 수를 세어보게 하니... 참.


각자의 인물이 짧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 삶들 중에 저런, 저런 나쁜 놈이 하는 삶은 여기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구나의 삶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나쁜 놈들은 나온다. 자기만 아는 놈, 다른 사람을 해치는 놈. 세상은 좋은 사람만 살지 않으니까. 별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살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움을 아예 겪지 않았을 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 '김시철'이란 인물의 아내인 혜린에게서 그 점을 발견한다.


자신들이 내지도 않는 층간 소음이라고 아랫집이 따질 때 아내인 혜린이 많이 힘들어하는데, 이때 시철은 이렇게 생각한다.


'혜린의 낙천성과 둥근 성격은 타인의 공격성을 적게 겪으며 자라는 동안 형성된 것이어서, 막상 공격적인 상대를 마주하니 면역성이 쉽게 무너졌다.'(304쪽)


하, 타인의 공격성에 면역이 생기기 힘들지만,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 장면에서 '학교'를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말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장소.


이 장소에서 온갖 갈등을 겪으며 그것을 해결하면서 때로는 묻어두면서 지내온 기간들이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낯선 타인을, 타인의 낯선 방식을 견디게 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을까? 따라서 학교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다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꼭 학교가 아니어도 된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들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쪽으로 오게 하면 되니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소설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싶다.


소설에는 온갖 인간들이 다 나오니까. 그들의 삶이 나오고, 정말 나하고는 하나도 같지 않은 삶들도 소설 속에서는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들 삶에도 나름대로 애환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까.


이 소설에 나오는 무려 51명, 아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구나, 그들이 서로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일을 겪고 기억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가가 마지막 장에서 많은 이들을 영화관에 모아놓는데, 이 건물에 불이 나고 대피하는 경험을 모두 하겠지만, 그 경험은 각자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바로 이 마지막 장이 소설이 하는 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장 말고도 꼭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소현재'라는 인물이 '직업환경의학과(예전에는 산업의학과라고 했다고)'를 선택하고 여전히 많은 산업재해에 마음 아파하면서 도대체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은 병원의 원로 교수인 '이호(이 인물 역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가 해주는 말.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중략...)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은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380-381쪽)


이것이 바로 삶 아닐까. 우리 삶이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길게 보면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기껏 내가 던질 수 있는 거리 만큼만 돌을 던지면 된다는 것을. 그 다음 돌을 다른 사람이 던질 수 있게끔 조금이라도 앞으로 돌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족된 것이라고.


그럼 나는 돌을 어디서 주울까? 내가 돌을 던질 자리는 어디일까? 소설에 나오는 각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돌을 던진다. 어떤 이는 이호의 말처럼 뒤로 던지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앞으로 돌을 던진다. 그 돌이 얼마나 멀리 나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돌을 던진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 역시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레 돌이 원하는 곳까지 가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던질 수 있는 만큼 힘껏 던지면 된다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거리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 이야기. 좋았다. 그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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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26-09-18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람 수를 세어보았었습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가 봅니다. 어쨋든 책은 제가 읽어본 책 중 손에 꼽힐만큼 재미있었습니다.

kinye91 2026-09-18 16:50   좋아요 0 | URL
하하, 저만 그런 것이 아니군요. 저도 이 소설 참 좋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