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유럽 최고의 아말피 상 수상작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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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책이다. 홀로코스트 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량학살, 절멸 등으로 쓰이는 이 용어는 우리 현대사이 암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는 과연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홀로코스트가 머물렀다면 읽으면서 그렇게 맘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과거의 것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기능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라. 과연 홀로코스트는 끝났는가?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지뢰가 단지 발목만을 날리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끝장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코스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지 않은가. 아니면 현대라는 벌판에 숨어 있는 지뢰이지 않은가. 언제든지 밟으면 터질 수 있는. 늘 우리 주변에는 있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그런 존재.

 

바우만이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분석한 책이다. 그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사회학적 의미를 추구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이고, 그렇다면 바우만이 하고자 한 일은 홀로코스트가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면적으로 폭력성을 지닌 사람이 그 폭력성을 표출한 것이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현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홀로코스트는 현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홀로코스트는 현대와 떨어져서는 얘기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뜻인데...

 

현대의 관료제는 홀로코스트의 기반

 

체계적이고도 대규모의 살상이 가능한 기반은 바로 관료제라고 한다. 관료제는 다른 말로 하면 합리성과 체계성에 기반한 조직이다. 여기서는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합리성만이 추구된다.

 

즉,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도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문제없이 처리할 것인가를 관료들이 고민하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관료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로 일이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이 일의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현대의 분업이 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 관료제가 확립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철저한 분업화에 기인한 것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분업화는 사람들에게도 일의 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았으며, 덕분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되지, 일의 전체 과정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이는 법대로,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어차피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진다.

 

이게 홀로코스트가 가능해지게 되는 이유다. 이런 관료제 사회에서는 서로가 대면할 기회가 사라진다. 대면할 기회가 사라짐. 이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는 얘기다.

 

즉 구체적인 개인을 만나지 못하고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사람들만 만난다는 얘기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획해버린다. 이런 구획을 통해 개인이 지니는 책임은 사라진다.

 

개별적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나치 당원들이 그렇게 잔학한 행위들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성이 그렇게 구조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다. 우리도 가장 고도화된 관료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엄정한 법 집행. 참 많이도 들은 말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러한 법 집행을 위해 많은 공권력이 동원되고, 공권력은 자신들의 힘을 정당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오히려 공권력을 막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고, 이들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불온세력이기 때문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권력의 행사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 아니, 책임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였다.

 

디지털 시대, 일명 스마트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잃어 왔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진짜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도 멀어서 그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나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일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세계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홀로코스트는 반복된다. 나치가 자행한 만큼의 대량 학살은 아닐지라도,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목숨은 하나든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다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니...

 

하여 세계 곳곳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지뢰가 터지고 있는데... 이 지뢰를 우리는 우리 곁에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일이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우만이 우려한 일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이 사회학자의 책에는 여전히 대안은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답답하다. 그래도 제대로 안다면... 그 다음엔... 어떤 고민이... 어떤 행동이... 따르지 않을까...이게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게 만들고 있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한다면, 홀로코스트가 가능한 정원사의 세계, 원예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원성을 회복하는 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일이라고... 그러면 홀로코스트를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런 다원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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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시집이라. 참 뜬금없는 제목이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다가 정치인이 떠올랐으니, 그리 뜬금없는 제목도 아니다.

 

시집과 정치인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시집과 정치인은 처음에 잘 모른다. 이들과 친숙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집을 사기 위해서는 제목을 먼저 본다. 제목이 마음에 들면 시집을 산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공약을 먼저 본다. 그 공약이 마음에 들면 정치인은 뽑는다.

 

정치인의 공약과 시집의 제목은 이렇듯 비슷한데...

 

가끔 공약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정치인이 있다. 제목이 시의 제목으로 나와 있지 않아 시집을 모두 읽게 만드는 시집처럼, 공약이 선명하지 않은 정치인은 그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치 인생 전반을 살펴야 한다. 참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역시 시의 제목이 아니다. 시의 한 구절이 제목이 되었다. 이 구절은 이 시집의  '마장동 참새'(96-97쪽)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처음이 '나는 조국으로 가기 위하여'로 시작하여 끝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이다.

 

그래서 제목을 찾기 위해서는 시집을 모두 읽어야 한다. 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잘 모를 때는 추천하는 사람을 본다. 추천하는 사람이 평소에 괜찮다고 여겨졌던 사람이면 그 사람이 추천한 정치인도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게 사람의 심리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시집도 마찬가지다. 뒤에 해설을 한 사람을 본다. 시 해설을 한 사람이 평소에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면 그 시집을 망설이지 않고 산다. 왜냐 이미 검증되었다고 믿으니까. 적어도 이 시집에 해설을 쓴 정과리라면 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이 시집은 시로써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믿을 만하다.

 

이도저도 아니면 정치인은 당을 본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 시집도 그렇다. 출판사를 본다. 평소에 좋아하던 출판사에서 낸 시집이면 어느 정도는 믿음이 간다.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시집을 골라들게 된다.

 

'문학과지성사'. 한 때 '창작과비평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학계를 양분했던 문학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판사 아니던가.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시집을 편찬할테니... 믿을 조건은 갖춘 셈이다. '창비시선'이나 '문지시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갖고 있다. 믿음을 주고 있으니.

 

그 다음에 이러한 믿음들이 별로였을 때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정치인의 다음 공약을 기대하고 그가 새롭게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시집은 신작시집을 기대한다. 그런데... 신작시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정치인이 기대에 또 어긋났을 때 이 때는 영영 이별이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고 싶지 않다. 정치인은 믿음 속에서 사라져 표를 얻을 수가 없고, 시인은 더이상 시집을 팔 수 없게 된다.  

 

백학기의 신작시집은 사지 못했다. 그동안 시에서 멀어져 온 삶도 있겠고, 그의 시집을 억지로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음을 그리 움직이지도 않으니...

 

공통점이라는 것이 이렇듯 많이도 있는데... 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별로 편하지는 않았다. 우선 제목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에서부터...

 

조국으로 간다는 말은 내가 조국을 떠나 있단 말인데... 이 시집의 내용은 모두 조국에서 살고 있는 화자들이 전개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다짐은 내가 원하는 조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내가 원하는 조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조국은 상처받은 조국,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조국이다. 이미 30년 전 시집인데... 그 때는 그래도 되었겠지... 해방이 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고(해방이 된 지 30-40년 뒤를 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조국은 막 건설되기 시작했을 때일테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는 이 시가 쓰여지고 난 시점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공약(空約-공수표들)들에 휩싸여 살았음을 이 시집을 읽으며 계속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하고 당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집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힘들게 정치인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고...하여 시인은 '시란 언제나 가난한 아버지 곁에 함께 하며/고스란히 물려받은 귀한 아버지의 무명옷처럼/질기고 확실한 유산이어야 함을/... /아버지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 잠만큼이나/달콤해야 함을/(백학기 '불꺼진 용서의 간이역에서 떨고 있는 나의 시는'의 부분: 101쪽)'이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와야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는 조국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조국으로 나도 가고 싶다.

 

짧은시... 오늘 한겨레 신문에서 본 어느 주장이 떠오르는 시.

 

밥을 위하여

 

내 밥에 눈물꽃 피네

목에 걸려 또한 타흐르는 밥알들이여

정든 산하 정든 이들이 기운 밥덩어리

 

백학기,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문학과지성사. 1989년 초판 2쇄. 108쪽

 

그 주장은 "농민들에게 월급을 주자"였다. 밥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 그 밥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는 생계를 빚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생계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본소득과 연계하여,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월급"을 주는 방안. 이 시를 보자. 그들이 생산한 밥에는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는데... 그 밥이 그냥 편하게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시집. 정치인. 그리고 아직도 진행형인 "조국". 그러한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시인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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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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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하면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사실 어렸을 때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에는 그 정도가 다이기 때문이다. 설리번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인하여 글을 알게 되고, 그 때부터 자신의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성공이야기.

 

장애는 극복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다라는 살아 있는 예. 그게 다였다.

 

사실 설리번 선생에 대해서도 그냥 어렸을 때 헬렌에게 글을 가르쳐준 선생님 정도로밖에는 알지 못했다. 헬렌에 대한 지식은 여기에서 멈춰 있었던 듯하다. 짐승같던 헬렌이 사람이 되는 순간. 딱 거기까지.

 

커가면서 헬렌이 사회참여를 했다는 얘기까지는 알았다. 그가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사실도. 이것도 딱 여기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헬렌이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랬겠지가 끝이었다.

 

그만큼 헬렌의 삶은 내게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 읽게 된 이 책. 헬렌의 전 생애를 다룬 이 책은 헬렌에 대해서, 장애에 대해서, 그리고 교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헬렌의 평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한 명은 헬렌 켈러. 또 한 명은 앤 설리번 메이시. 그리고 마지막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 폴리 톰슨.

 

헬렌을 중심으로 둘을 좌우에 놓을 수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들은 헬렌의 삶에 좌우로 있지 않고 헬렌의 삶에 함께 있었던, 헬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앤 설리번으로만 알려져 있던 설리번 선생은 뒤에 메이시라는 성이 붙는다. 그가 유일하게 결혼하여 만든('얻은'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늘 헬렌 켈러의 삶에서 뒤에만 존재했던 이 사람이 헬렌의 삶 내내 함께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평생을 헬렌과 함께 살고 죽으면서도 헬렌의 삶을 걱정했던 사람. 그는 강인한 정신과 냉철한 지성으로 헬렌의 삶을 지배했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헬렌의 삶을 이끌었다고 해야 한다.

 

헬렌이 평생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남들에게 인정받게 해주었던 사람. 그러나 자신은 헬렌의 뒤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헬렌과 떨어진 삶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헬렌과 함께 한 평생이 행복했을까? 때로는 그에게도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테고, 헬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텐데...

 

헬렌의 내면까지도 다루어서 헬렌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주겠다는 이 평전에서도 설리번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욕구 등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헬렌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하나로 묶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다른 말로 하면 헬렌이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 힘들 거라는 점을 알고) 헬렌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했으니...

 

이 점은 폴리 톰슨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앤 설리번이 죽은 뒤 폴리가 죽을 때까지 헬렌에게 앤 설리번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바로 폴리 톰슨이다. 죽어서도 헬렌과 앤과 함께 나란히 있는 그는 대부분의 헬렌 전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헬렌의 말년에 앤 설리번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 당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헬렌의 성공에는 헬렌과 함께 한 사람들의 희생(?아마도 사랑이라고 해야 하겠지)이 있었다는 사실.

 

헬렌도 우리가 성녀로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사람의 욕구가 충만했다는 사실. 그런 욕구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남에게 의존해서 많이 억눌러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장애 문제를 시혜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욕구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 우리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합교육. 함께 하는 삶. 요즘 장애 운동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 아니던가. 이를 헬렌 켈러의 삶에서 찾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헬렌의 삶에서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있는 이 책은 오히려 그래서 헬렌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 노력이. 그 시대에 남에게 의존해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헬렌의 삶이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헬렌의 자신의 처지에서 힘든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사회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남들은 헬렌에게서 그런 모습을 지우려고 했지만 말이다.

 

헬렌이 믿었다는 스베덴보리의 영성. 그것은 아마도 헬렌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게 했을 것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영성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믿음을 가진다면 막 살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인간 헬렌 켈러를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고, 지금은 많이 나아진 듯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장애 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다.

 

좋은 책이다. 이런 평전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약점만 나열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신을 처지를 둘러 보라.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생각해 보라. 이 책은 그 점에서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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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겨울에 맞는 시, 뭐가 있을까 하다가 오래 전에 읽었던 정대구의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참으로 가물가물한 시집이다. 분명히 읽었을텐데... 시란 이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분명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또는 내 몸 어딘가에 살아있을테니.

 

이 시집을 꺼낸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겨울기도" 지금은 겨울.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역시 겨울.

 

겨울임에도 황사가, 미세먼지가... 우리를 습격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난리고...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보내고... 시민단체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남과 북은 여전히 경색국면이고...

 

이럴 때 경건하게 기도를 하지 않겠는가. 겨울에는 이 겨울을 잘 보내게 해달라고. 이 겨울을 이겨내고 움트는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이 시집의 제목이 된 '겨울 기도'처럼 힘듦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힘듦이 비켜가기를...

 

힘든 계절, 힘든 시대...기도를 통해... 행동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추위가 봄을 더욱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분으로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오래된 시집이다. 오래된 시들이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들이다.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 있다. 시란, 시대가 흘러가도 언제나 시대와 함께 하는,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발견한 시. '워키토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제는 사라진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이것을 지니고 멀리 있는 사람과 무전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그런 물건.

 

이 워키토키에서 소통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이 그리운 시대...

 

이렇게 소통이 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야말로 봄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많이들 꿈꾸어 왔으니... 

 

워키토키

 

이쪽은 자유의 마을, 그쪽 나와라 - 오버

이쪽은 평화의 마을, 왜 그러냐 - 오버

 

지금 말잠자리 한 마리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지금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역시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이쪽 하늘엔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이쪽 하늘에도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휴전선 일대의 하늘엔

우리말 워키토키의 전파가 무성하고

땅 속의 풀뿌리들도

저희끼리 왕성하게 뒤엉키는구나.

 

남남북녀 이쪽에 미끈한 총각 있다 - 오버

남남북녀 이쪽엔 어여쁜 처녀 있다 - 오버

 

새 소리 바람 소리 이쪽저쪽 넘나들며 짝을 맺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똑같은 우리 말

우리들의 자유만, 우리들의 평화만

철조망에 얽혀서 찢어지는가.

 

이쪽을 겨눈 그쪽의 총부리

그쪽을 겨눈 이쪽의 총부리.

 

정대구, 겨울기도. 문학과지성사. 1987년 초판 4쇄. 14-15쪽.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이 시를 보는 순간 신동엽의 시가 생각이 났다. 신동엽은 꿈을 꾸었다고 했지. 또 그는 "봄은"이라는 시에서 봄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내부에서 우리들이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가 꾼 꿈은 이렇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 신동엽

 

술을 믾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을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이런 꿈을 꾸고 싶다. 아니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평화가 바로 우리들의 봄일텐데...

남과 북에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에서 이렇게 껍데기들이 사라진 세상, 서로가 서로 소통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곧 봄이다.

 

지금은 겨울. 이런 봄을 꿈꾸는 기도를 해본다.

 

봄은 온다. 겨울은 간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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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시민의 최악의 적은 개인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고 있다. 비슷한 내용도 있지만, 아무래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줘서 자꾸 읽게 된다. 이번 책의 제목은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다. 사회가 사람들을 개인으로 파현화시켰다. 그래서 파편화된 개인들은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 삶을 살게 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이 개개인으로 흩어진 삶을 살게 되니 자연스레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개인으로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시민은 형성되기 힘들다. 우리나라만 봐도 1980년대까지 형성되었던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지금은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개인적으로 파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범람으로 공동체라는 이름보다는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더 많아졌으며, 책임을 개인이 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개인들은 사회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게 되고, 함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은 내 책임이겠거니,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겠거니 하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러한 개인들이 많아지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레 공동체의 문제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 우선적으로 노조가 힘이 없어지고... 이제는 노조의 조직율이 30%정도도 안 되는 사회가 되었고, 노조의 파업은 그들만의 파업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한 일이 되어 버렸을 정도가 되었다.

 

노조의 약화와 더불어 각종 시민단체들의 활동도 줄어들게 되었다. 사회 곳곳에서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통합하는 시민 운동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서 그들만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시민이 형성이 되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환멸이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IMF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개인주의화되어 시민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이 바우만이 직면한 문제가 아닐까.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 광장을 찾는 일.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래서 치열하게도 바우만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말하듯이 현실을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도 지배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 권력은 시민을 해체해서 개인을 형성하려고 하는 현실. 그래서 노조의 파업에는 구속도 구속이지만 소송을 통해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개인주의를 권력은 조장하고, 책임을 개인에게 물음으로써 자연스레 사람들은 불안감을 지니게 되고, 이런 불안감은 시민으로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길을 막게 된다.

 

우리는 소비자가 된다

 

이런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규정하게 된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 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게 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가장 쉽게 찾아지는 것이 바로 소비자로서의 삶이다. 소비자로서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으로 바우만은 '야영지'에서의 모습을 예로 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하에 야영지에 온다. 여기서는 공동체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야영을 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의 능력과 책임만큼 머물다 간다. 혹 야영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힘써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치는 데에까지 자신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오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불편해하는 사항만 고치면 된다. 나머지는 다른 개인들에게 맡기면 된다. 여기서는 함께 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의 행동만이, 개인의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소비자의 삶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야영지로 만들고 있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아니,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 만드는 것인데... 권력은 이렇듯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인으로 만들어 개인으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들여야 할 비용을 줄인다. 소비자 사회에서 소비자로만 살아가는 개인들이 겪게 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내 형제는 내 책임

 

이런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나오는 카인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내 형제는 바로 내 책임이라는 생각. 이것은 바우만이 주장하듯이 기본적인 윤리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주의화된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 형제를 꼭 말에 집착하여 가족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내 형제는 나와 같은 형체를 지닌 인간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인류의 형제애. 그것이 바로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예전에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시도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복지국가, 즉 사회복지를 근로복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근로복지는 일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복지로 일하지 않는 내 형제에게는 내 책임이 없다는 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들의 사회이고, 시민이 실종된 사회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인정할 때 개인들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열린다. 적어도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대해서 불안해 하지 않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생활로 나갈 수가 있으며,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나갈 수 있는 동인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복지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런 방법 중에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바우만은 지나가는 말로 제시하고 있지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국가가 또는 사회가 보장해주면 사람들은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사멸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은 공적인 공간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공적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말들을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혹자는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는 함께 가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는 사회복지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복지와 민주주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복지 예산을 두고 포퓰리즘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바우만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이제 사회의 불확실성 속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그러한 불안이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이러한 개인주의가 시민을 사라지게 하고 있으며, 시민의 사라짐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우선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복지부터 확립하여 내 형제는 내 책임이라는 윤리성을 회복하는 일부터. 그 다음에는 사적인 공간으로 후퇴했던 개인들을 공적인 공간으로 불러내어 시민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사회를 적실하게 분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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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 2016-04-2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요약이네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오늘 처음 보네요
오늘 우리 사회를 잘 진단한 것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요. 지그문트 바우만 선생의 진단대로라면
우리 사회를 개선할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오늘 개인주의 사회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세계적으로 생긴 문제 같네요
정말 너무 개인주의사회도 문제는 문제네요
개인화 시대가 되면 더 좋아질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많네요
아뭏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필요하면 사고 싶네요
제 블로그에 님의 리뷰를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허락 없이 올려서 미안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karamos@naver.com으로 연락주시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kinye91 2016-04-25 08:22   좋아요 0 | URL
바우만의 책이 한 때 우리나라에 유행을 했지요. 물론 지금도 그의 책은 유용하지만요. 분석도 훌륭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에서 바우만 책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리뷰는 자유롭게 올리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