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유럽 최고의 아말피 상 수상작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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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책이다. 홀로코스트 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량학살, 절멸 등으로 쓰이는 이 용어는 우리 현대사이 암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는 과연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홀로코스트가 머물렀다면 읽으면서 그렇게 맘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과거의 것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기능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라. 과연 홀로코스트는 끝났는가?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지뢰가 단지 발목만을 날리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끝장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코스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지 않은가. 아니면 현대라는 벌판에 숨어 있는 지뢰이지 않은가. 언제든지 밟으면 터질 수 있는. 늘 우리 주변에는 있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그런 존재.

 

바우만이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분석한 책이다. 그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사회학적 의미를 추구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이고, 그렇다면 바우만이 하고자 한 일은 홀로코스트가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면적으로 폭력성을 지닌 사람이 그 폭력성을 표출한 것이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현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홀로코스트는 현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홀로코스트는 현대와 떨어져서는 얘기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뜻인데...

 

현대의 관료제는 홀로코스트의 기반

 

체계적이고도 대규모의 살상이 가능한 기반은 바로 관료제라고 한다. 관료제는 다른 말로 하면 합리성과 체계성에 기반한 조직이다. 여기서는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합리성만이 추구된다.

 

즉,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도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문제없이 처리할 것인가를 관료들이 고민하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관료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로 일이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이 일의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현대의 분업이 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 관료제가 확립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철저한 분업화에 기인한 것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분업화는 사람들에게도 일의 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았으며, 덕분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되지, 일의 전체 과정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이는 법대로,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어차피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진다.

 

이게 홀로코스트가 가능해지게 되는 이유다. 이런 관료제 사회에서는 서로가 대면할 기회가 사라진다. 대면할 기회가 사라짐. 이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는 얘기다.

 

즉 구체적인 개인을 만나지 못하고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사람들만 만난다는 얘기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획해버린다. 이런 구획을 통해 개인이 지니는 책임은 사라진다.

 

개별적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나치 당원들이 그렇게 잔학한 행위들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성이 그렇게 구조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다. 우리도 가장 고도화된 관료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엄정한 법 집행. 참 많이도 들은 말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러한 법 집행을 위해 많은 공권력이 동원되고, 공권력은 자신들의 힘을 정당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오히려 공권력을 막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고, 이들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불온세력이기 때문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권력의 행사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 아니, 책임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였다.

 

디지털 시대, 일명 스마트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잃어 왔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진짜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도 멀어서 그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나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일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세계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홀로코스트는 반복된다. 나치가 자행한 만큼의 대량 학살은 아닐지라도,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목숨은 하나든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다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니...

 

하여 세계 곳곳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지뢰가 터지고 있는데... 이 지뢰를 우리는 우리 곁에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일이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우만이 우려한 일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이 사회학자의 책에는 여전히 대안은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답답하다. 그래도 제대로 안다면... 그 다음엔... 어떤 고민이... 어떤 행동이... 따르지 않을까...이게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게 만들고 있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한다면, 홀로코스트가 가능한 정원사의 세계, 원예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원성을 회복하는 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일이라고... 그러면 홀로코스트를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런 다원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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