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철학사 1 - 권력과 욕망 : 조토에서 클림트까지 미술 철학사 1
이광래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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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출판사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책이라고 하는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한 권이 다른 책 세 권 분량을 지닐 정도로 엄청난 양을 지니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술가들도 많고,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그렇다고 미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그 사회를 구속하거나, 또는 사회에 규정당한 철학들과의 관련성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미술과 철학, 또 미술과 사회, 미술과 문학, 미술과 음악 등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들이 융합되어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다보면 중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사상들이 있어왔는지, 그 사상들과 그림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알고 있는 시기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즉,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접어드는 그 시기부터, 미술이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그런 표현을 하는 미술을 시작한 작가는 누구인지, 왜 그가 그런 평가를 받는지에서 시작한다.

 

그전까지의 미술은 인간의 세계에 있다기보다는 신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 책 제목이 '미술철학사'임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전 시대는 철학의 시대가 아니라 신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인간의 모든 것을 맡긴 시대에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 때문이다. 그냥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신의 뜻에 의해 규정된 세상일 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갈수록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해 갈수록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시대,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점을 르네상스 언저리에서 잡고 있으며, 이 책은 조토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들을 가능하게 한 선구적인 미술철학가들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런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미술의 정점에 미켈란젤로가 있다. 우리가 르네상스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지만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주변의 인물일 뿐이다.

 

인간의 시대를 이끈 것이 이탈리아의 '피렌체'라면 이런 피렌체의 이데올로기 중심에 미켈란젤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고흐에 대한 평가에서는 기존의 평가를 뒤집어놓고 있는데...

 

르네상스기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의 화가들(벨라스케스, 고야 등등)과 영국의 화가들, 그리고 프랑스의 화가들까지 나아가는데...

 

화가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정신과 사회정신을 구현하는 화가들을 다루고 있다.

 

하여 이 1권은 클림트에서 끝난다. 인간의 시대로 넘어와서 낭만주의를 거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이르고 이들에 대한 반동으로 상징주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미술과 철학의 과정.

 

미술이 공시성을 띠기도 하지만 통시성을 띠기도 한다는 점, 공시적 통시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관철해 나가는 미술의 철학을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통하여, 그 시대의 철학을 통하여, 또 그 시대의 사회사상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 문학가, 예술가들을 통하여 이 책은 그 도도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근대 초기 클림트에서 이 책은 끝난다. 이제 2권은 표현주의에서 시작한다.

 

덧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오타일 듯 싶은데...

 

398쪽에 '결국 다비드도 산악파의 냉혹한 독재와 공포 정치를 증오하는 지롱드당의 여성 당원인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의해 자신의 집 욕조에서 척살당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코르에의 칼에 죽은 것은 '마라'니, 그리고 이 문장의 바로 앞 부분에서 '마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피살된 마라'를 그린 것이 다비드이니, 이 문장의 '다비드'를 '마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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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민음의 시 195
박판식 지음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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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다 똑같은 것들만 있으면 그것을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까? 다 다른 것들만 있으면 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까?

 

고 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 동(同)과 화(和)를 비교하는 글이 있었는데, 동은 같음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화는 어울리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어울림이란 바로 이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하는 것이 아니는가 한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제목인 시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를 보자.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모자와 박쥐우산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완용 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이 있다면

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는 딸이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다

 

하지만 내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딸과 늘 동행하고 있다

웅덩이가 모자처럼 떨어져 있다 인생은

그 위를 지나가는 멀리서 온 구름이다

옷을 입은 개가 맨발일 때

이 경이로운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얼굴이 세 개나 네 개로 늘어날 때

모자 대신 접시를 머리에 얹고 걸어도 이상할 게 없다

 

개업식 경품 행사로 1등 자전거에 당첨된 일이 있다

빵집 주인이 내 이름을 세 번 연속 불렀는데

끝내 나가지 않았다. 빵집은 반년 만에 폐업했고

이 시장 골목에선 흔한 일이다. 처녀 시절 아내가 키우던 개가 죽었다

개는 죽기 직전 젖은 걸레 위로 올라갔고

자신의 똥 위로 올라갔고 이부자리 위로 올라갔고 나의 배 위로

올라갔다.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 개가 죽고 문득

아들이 태어났다

 

박판식,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민음사. 2013년. 1판. 20-21쪽

 

나는 나일뿐인데, '나'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를 읽어보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대상으로 '모자, 개, 딸' 이 나올 뿐이다. 여기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나'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들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의 존재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 무엇하고도 어울릴 수가 없다. 따라서 모자는 나와 어울려야 보기 좋은데, 아니라고 한다.

 

이 시의 1연에 나오는 대상들이 2연에서는 모두 뒤집어 진다. 내게 없는 딸은 늘 나와 동행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 있어야 할 모자가 웅덩이로 발 밑으로 내려오고, 애완용 개는 옷을 입었지만 맨발이다.

 

무언가 부조화다. 이런 일은 3연에서도 반복된다. 경품에 당첨되었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 가게는 망했다. 그리고 개 역시 죽는다. 그 개가 죽고 딸이 아닌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딸과 모자와 개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죽음으로 삶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시가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 결국은 나와 어울리는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반드시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나와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으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극복해 냈을 때 나는 나와 어울리는 대상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데...

 

다름을 통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 시의 전반부에 나타난 것과 같이 어울리지 않는 대상들을 더 잘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것을 기를 쓰고 밀어내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와 어울리는 존재들하고만 함깨 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랬을 경우 진정 삶에서 어울림을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시 읽으면서 진정한 어울림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 '개가 죽고 문득'이라는 말, 이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제 역할을 마칠 때까지 그것과 함께 했다는 의미 아니던가.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전에 함께 하는 대상과 지내는 일, 그런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자신과 어울리는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제했다가는 진정으로 어울리는 존재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굳이 시에서 아들과 딸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딸과 아들을 바꾸어도 이 시의 의미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 한 편을 놓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이런 억측, 오독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즐거운 오독(誤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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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나들이 5

   - 자전거와 자동차


오래된 도시.

자전거가 많다.

관광객을 위해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도 있으니

이들은 자가용으로도 다니지만

잘 정비된 버스로 인해 버스를 많이 타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을 하나 보다.

머리가 허연 노인들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도처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되어 있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도시샤 대학에서도 자전거가 우선이다.

차는 들어오지 못한다.

공부를 하는 곳

환경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일본은

자동차 왕국 아니던가.

그런데 큰차가 별로 없다.

국민차라 불릴 만한

자그마한 차들을 타고

왼쪽 통행을 한다.

우리와 다른 방향에

자꾸 반대방향을 보게 되지만,

이들은 보기의 화려함보다는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생각에

화려함, 남 눈에 띠기에 더 열중하는

우리나라가 생각나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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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중에 농민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나라,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면서도 농민을 천하의 근본이 아닌, 천하의 종으로 아는 나라,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 농사를 지면 지을수록 이상하게 빚만 늘어나는 나라.

 

그런 나라를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까짓거, 세계 20위 안에 드는 무역 대국인 우리나라니, 식량 수입하면 그뿐이라고?

 

식량 자급율이 30%가 채 안되는 나라에서 수입으로 농산물을 충당한다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식량의 가격이 오른다면? 그냥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에 석유 파동이 일듯이 급격하게 가격이 오른다면?

 

우리는 엄청난 식량 파동을 겪게 될 것이다. 석유 파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난이 될텐데... 과연 그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는가? 식량은 자급되어야 할 기본요소이고, 우리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데...

 

우리나라 농민들 노령화는 차치하더라도 점점 농사짓는 사람이 없어져 가고 있다. 농토도 줄고 있는데... 특히 논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에 보조금을 주는 이상한 제도 탓도 있겠지만, 쌀값이 몇십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물가는 엄청 상승했는데, 쌀값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면 실질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많이 떨어진 것이다. 즉, 똑같은 양을 생산해도 농민들에게 가는 돈은 계속 줄고 있는 셈이다.

 

생활이 아닌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된 농업 현실. 그러니 누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겠는가?

 

녹색평론 147호는 이런 농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를 살리는 농업을 이제는 우리가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협운동이든 한살림 운동이든 참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상태. 특히 농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지경인데... 농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이 지구에서 계속 생존해 가기 위해서도 농사는 필수적이니, 사양 직업이라는 생각 말고, 어떻게 해야 농업을 살릴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농업에 대한 화두를 이번 녹색평론 147호가 던져주고 있다. 한 달 뒤 다가올 총선,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을 펼 수 있는 정당, 그런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이제는 농민이 존중받고 우대받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농민에게 월급을 (기본소득)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필요도 있고.

 

농민이 살아야 농업이 살고, 농업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그러니 우리 이제 농민을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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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3-1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수산물의 유통체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의 악순환은 계속 되리라 생각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효율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못하는 농협과 수협 결국 농민들과 소비자사이의
수많은 유통단계에서 그들만 배를 불려주는 구조적인 한계가 문제입니다. 농협이 과연 농민을 위한 기관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해진 기득권 권력층에 의해 다수의 국민들이 착취당하는 구조는 아닌지 말입니다.

kinye91 2016-03-13 13:10   좋아요 0 | URL
농업에 대한 전체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해요.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가 긴밀히 연결될 수 있는 농업개혁이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협에 관한 문제의식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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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이야기했다고 '감옥'에 갇혀야 했던 시인. '희망버스'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감옥이라는 곳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그 감옥은 절망이 아니고 또다른 희망이었다.

 

이 시집,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없었던 국적, 한국인. 그러나 이 국적은 성인이 되면 스스로 버릴 수도 있다. 망명을 통해, 또는 또다른 국적을 취득해,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포기하면 되니까.

 

이 시집에 실린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는 한 편의 서사시다. 부끄러운 한국의 자화상. 아니 한국의 자화상이 아니라 권력과 결탁한 한국 자본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는 자본의 비인간성, 그 비인간성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노동자들. 노동자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은 국적이 없는데, 유독 노동자에게만은 국적을 강요하는 자본과 권력.

 

그런 자본과 권력에게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고, 그들의 지배를 거부하는 시인. 그런 시들.

 

이건 국적 포기가 아니다.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나라,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렇게 노동자를 착취하고 탄압하는 한국인이 아닌, 힘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한국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한 편의 서사시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으면 없던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자본은, 한국 자본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음을 직시하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런 시들이 이 시집에 너무나 많다. 시인은 절망의 시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절망스러운지, 얼마나 캄캄한 어둠, 그리고 무덤들이 많은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 '저녁 운동장'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캄캄함을, 무덤과 같음을,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152쪽)

 

이런 어둠 속에서 그냥 주저앉아야 할까? 아니다. 주저앉을 수 없기에 시인은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자.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라는 시. 다른 시들에 실존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실제 사건이 나온다면, 이 시는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희망'은 우리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것임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몇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송경동,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년. 초판 2쇄. 79쪽.  

 

그렇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이 생각났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우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이 되라는.

 

시인은 비를 함께 맞아주는 사람이다. 그의 시들을 통해 우리는 비를 함께 맞아줄 수 있다. 어설프게 우산을 씌워주거나, 우산을 주겠다는 거짓부렁이를 나불거리는 사람이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을 통해서 우산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의 허상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함께 비를 맞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안전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 너희에게 우산을 주겠다고 호언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한 편 한 편이 마음 속에, 결코 머리 속이 아니다, 아프게 콕콕 박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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