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 새파랗게 젊은 것과 고집불통 노인네가 모두 당하는 차별
애슈턴 애플화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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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은 많이 이야기된다. 이들을 차별이라고 우리는 명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이들 차별에 반대하는 역사는 오래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차별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연령차별 반대는 인종이나 성차별 반대처럼 오래 된 운동은 아니지만, 우리들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권선언에 나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을 것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연령차별은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학생이기 때문에 어리다고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은 많이 듣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이가 먹은 사람들에게 그 나이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았다.

 

경로우대 사상이 워낙 투철한 나라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잘 모르는 사람끼리 갈등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너, 나이가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넌, 애비 에미도 없냐?' 이렇게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을 누르는 말로 이런 말들을 잘 사용한다. 어린 사람이 주로 차별을 받아온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나이든 사람에 대한 연령차별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일자리에서. 구조조정의 여파로 가장 피해를 보는 집단은 여전히 하위계층과 여성이 많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같다면 그 다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구조조정 일순위에 고령자들이 올라가고, 고령자들은 나이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직장에 취업하기도 힘들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굼떠서 일을 배우는 데도 오래 걸리고, 동작도 느려 생산성도 떨어질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연령차별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 중에서도 이런 사람은 있다. 그것은 나이 탓이 아니라 사람의 특성이다. 개인의 특성을 나이든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특성으로 바꾸어 놓고 그 집단에 나이든 사람을 모두 집어넣고 차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연령차별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에이지즘(ageism)'이다.

 

이  책 6장은 나이든 사람들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또 일을 배우는데 늦다는 편견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다. (6장, 더 유능한 일꾼이다)

 

그리고 나이든 사람이 일을 하면 젊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것도 얼마나 허구적인지, 오히려 나이든 사람이 일을 하면 할수록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잘못된 생각으로 연령차별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연령차별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고이다. 소비자본주의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광고에서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무슨 질병으로 치환하고 있다.

 

늙는다는 것, 그것은 병든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러니 '에이징'은 나쁜 것이다. '안티-에이징'을 해야 한다. 여기에 관한 수많은 약들과 수술들과 음식들이 광고에 넘쳐난다. 이들은 연령차별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물건을 판다. 돈을 번다.

 

여기에 현혹되어 따라가다보면 삶에서 자연스레 연령차별을 익히게 된다. 몸에 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어머, 나이보다 젊어보이시네요!'라는 말을 칭찬으로 한다. 이 말이 대표적인 연령차별 말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말은, 나이들어 보인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나는 연령차별에 관한 말들, 행위들을 이 책에서는 하나하나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연령차별인지,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를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예를 주로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그리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인 문제라고 하는 것 역시 연령 차별일 것이다.

 

노인 문제가 아니라, 빈곤 문제, 복지 문제, 노동 문제, 교육 문제 등등이라고 불러야 하고, 이는 모든 세대에 아울러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특정한 나이 대에 속한 사람들의 문제라고 꼭 집어서 표현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연령차별의 순간인 것이다.

 

나이는 누구나 드는 것이고, 그 나이를 어떤 특정한 기준으로 나눠서 집단에 사람들을 가둘 수는 없다. 100세가 된 사람이라면 그들이 똑같은 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 하나하나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00세들끼리의 공통점도 있겠지만, 10세들과 100세들의 공통점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연령차별을 벗어나는 관점이 된다고 한다.

 

뇌, 건강, 성, 일자리, 공동체 등등 삶과 관계된 많은 분야에 걸쳐 잘못 퍼지고 있는 연령에 관한 차별을 고찰하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책이다.

 

마찬가지로 나이든 사람이 모두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연령차별이다.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나이를 떠나 사람의 특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를 앞에 놓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앞에 놓는 표현을 해야 한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연령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다. 나도 모르게 했던 말들이 연령차별에 속하는 경우를 이 책에서 발견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인권이란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 정말로 불편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당연히 불편해야 하는 일임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이 책은 주로 나이든 사람들에 대한 연령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꼭 나이든 사람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연령차별은 나이 적은 사람도 많이 당하니까 말이다. 경험이 없다고, 지혜가 부족하다고, 너무 혈기왕성하다고... 이게 꼭 나이 적은 사람만의 특성일까?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의 특성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렇게 누구나 읽고 연령차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글이다. 예전 어떤 정치인이 노인들은 투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전형적인 연령차별이다. 이는 청소년은 판단력이 없으므로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청소년 모두가 판단력이 없는가? 아니다. 이와 같이 연령차별은 나이가 적든, 많든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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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16-12-25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조직생활을 해보면 말씀하신대로 나이많고 유능한 사람, 젊고 무능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젊지만 통찰력있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많지만 그냥 나이만 먹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같은 나이에 노안이지만 동안보다 유능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보다는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다만 연령차별은 그 뿌리가 깊고 많은 사람들이 성차별이나 인종차별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있는듯 합니다. 오히려 나이먹은 사람의 경우 젊은사람들의 자리를 뺏는다는 생각에 더 소극적으로 되는것 같구요. 이문제 역시도 세대간에 싸울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해소할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kinye91 2016-12-25 17:38   좋아요 2 | URL
세대간에 싸울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해소할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연령차별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더 문제가 되는데요, 이 책에 나와 있듯이 나이 있는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지 않는다는 것, 그런 정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 시급한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자리 나누기는 일하는 시간 조정 등을 통해서 가능할 것 같은데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시Wish

 

 

 

 

 

 

200810월 출간 이후 17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신작 소설!

 

기적은 1111분처럼 매일 우리를 찾아온다!

     

다른 듯 닮은 듯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잇는 가족 소설!

 

 

 

이벤트 참여하기 

1. 기간 : 2016년 12월 23일 ~2017년 12월 27일

2. 당첨자 발표 : 2016년 12월 28일 

3. 모집인원 : 10명

4. 참여방법

- 본 도서는 가제본(비매품)으로 발송됩니다.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필수)

-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5. 당첨되신 분은 도서 수령 후, 10일 이내에 '알라딘'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미서평시 추후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이벤트 기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나한테 왜 이래!

 

교도소에 있는 아빠,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엄마. 소녀 찰리는 사회복지사에 의해 이모댁으로 보내지게 된다. 맙소사! 촌닭들이 우글거리는 시골, 꾀죄죄한 학교, 더구나 책가방 짝꿍이 된 빨간머리 소년 하워드는 다리를 절뚝이는 은따 소년이다.
찰리는 매일 매순간 단 한가지 소원을 빌며 소원이 이뤄지기만을 기도한다. 그런 찰리를 보며 하워드 역시 소원을 빈다. 찰리와 하워드의 소원은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데, 과연 누구의 소원이 이뤄지게 될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녀 빨간머리 앤의 귀환!

어, 근데 남자라고?

 

19세기의 사랑스러운 소녀 빨간머리 앤이 21세기에 소설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빨간머리에 절름발이 소년 하워드가 아닐까? 무한 긍정과 배려, 찰리를 위한 헌신적인 기다림으로 우리 모두 사랑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빨간머리 소년 하워드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츤데레 길버트는 <위시>의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소녀 찰리와 닮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소원이 이뤄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 <위시>는 올겨울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것이다. 

 

 

작가소개

바바라 오코너 Barbara O'connor

UCLA에서 아동문학을 공부한 후 청소년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권의 주목할 만한 성장소설을 펴냈다. 그녀의 작품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가족소설’이라는 타이틀로 패런츠 초이스 어워드, ALA 노터블 어워드 등 열네 개에 해당하는 문학상, 협회 선정작, 각종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영미권에서 새로운 성장소설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그녀는, ‘가난과 부서진 가족’ 혹은 ‘외롭고 소외된 청춘’이라는 지극히 무거운 주제를 풀어내면서도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어조로 소설을 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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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중심 삶창시선 47
정세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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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명징하다. 시에 쓰인 낱말들도 그렇고, 시를 이루고 있는 주제도 그렇다.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니  마음으로 에둘러 오지 않고 직접 마음에 꽂힌다. 그렇게 시가 쓰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가 바로 시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시로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하다? 그 삶이 바로 노동의 삶이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는 노동의 삶.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노동하며 살아온 사람의 삶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드러나 있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소외되어 온 노동을, 노동자들을 시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잊혀진 것 같지만 노동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순간에도 노동은 이루어지지고 있고, 이 노동현장에는 아직도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것으로 포장해도 감춰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들을 시인은 다시 시를 통해 불러내고 있다.

 

그래서 명징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직도 이런 일이? 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아프기도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잊으려고 애써 눈 감고 지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아프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노동현장일텐데... 아직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차별을 받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시인이 눈 감아서는 안되지.

 

이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몸의 중심'이라는 시, 중심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해서 그런지, 국정 농단으로 언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의 중심일텐데... 우리는 너무도 이 중심을 잊고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시를 보자.

 

몸의 중심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정세훈, 몸의 중심, 삶창. 2016년. 26-27쪽

 

얼마나 진실한 표현인가. 얼마나 명징한 표현인가. 마음 속으로 곧장 날아와 꽂히는 말이지 않은가.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 안 되는 / 상처난 곳'이 몸의 중심이라니. 그렇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다. 아픈 곳, 상처난 곳, 그래서 우리가 늘 어루만져 주어야 할 곳.

 

몸의 중심이 이럴진대 사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정치권의 꼭대기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인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사적으로 써버리는 경제권력들인가. 기타 힘있는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중심은 바로 어루만져 주어야 할 사람들,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 드러나지 않으나 사회를 지탱해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중심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소외받는 곳에서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우리 인간들의 생명을 유지해나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사회의 중심'이다.

 

우리의 관심도 이제는 국정농단을 넘어 이렇게 '사회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들이 아프지 않도록. 더는 아프지 않도록 말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특히 이 시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너무도 잘 읽었기에 고맙고 기쁘다.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해낸 기분을 느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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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정치,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사실 청소년들에게 지금은 살아있는 정치 수업의 장을 제공하는 시기이리라.

 

  정치에는 신경 끄고 공부에만 신경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정치의 농단으로 나타났으며 수많은 죽음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민들레 이번 호의 거리의 정치,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살아 있는 배움의 장이 펼쳐지는데, 여기서 각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목소리들이 서로의 말들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생각할 만한 사례가 있다. 이 책에 실린 하승우의 글이다. 브라질과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간 사람의 모습. 지금 우리도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논쟁하고 토론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이 정치를 변화시킨다. 그것이 광장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에 대해서 이번 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정치와 교육이 따로 떨어져 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여기에 민들레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지니고 있는 대안교육, 또 대안적인 삶에 대해서도 많은 글들이 있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그런 사례들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말, 역사의 한복판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인해 역사는 진보하게 되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민들레 108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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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오해 알베르 카뮈 전집 1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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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가고 있는 카뮈의 작품들 중에서 이번엔 희곡이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방인'이나 '페스트'라는 학교에서 들었던 작품 이외에 내가 처음으로 읽은 카뮈의 작품이 아마 그 작품일 듯하고, 그래서 카뮈의 소설 말고도 희곡도 읽을 만하다는 생각을 계속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읽은 두 편의 희곡 중에서 '칼리굴라'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았고, '오해'는 엇나가는 운명에 대해서, 인간들의 삶이 이토록 엇나가고 있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서 괜찮은 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가 폭군이었다는 것, 그래서 쫓겨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 다다. 이 희곡에서 그가 폭군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폭군이 되었나 하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희곡이 아닐까 한다.

 

로마의 황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단 하나만 빼고. 그것은 바로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그 진리 앞에서는 황제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절대권력의 소유자에게도 자유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인가?

 

여기서 '달을 따다 달라'고 하는 말은 결국 소유할 수 없는 진리를 개인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 이 욕망은 바로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는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죽음마저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막지 못할 죽음을 자신의 뜻대로 해보려 하는 것. 이때부터 궁정에는 피바람이 분다. 그는 죽음의 본질은 어쩌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즉 다른 개체의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 한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서도 한 발 물러나 있기도 하다. 암살 기도를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 죽음을 조종하려는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부처가 생각났다. 부처 역시 절대권력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깨우치려고 한다. 그는 절대로 진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깨우치려 할 뿐이다. 여기서 칼리굴라와 부처의 길이 달라진다.

 

부처의 깨달음, 그 깨달음 뒤의 자유, 그것은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자유다. 그러니 부처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도달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람들에게로 그 진리의 세계를 가지고 온다.

 

'옛다, 여깄다' 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도록. 스스로 깨우침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님으로. 그 깨우침으로 죽음을 넘어서도록 안내자가 된다. 칼리굴라는 죽음으로 이끄는 안내자라면 부처는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안내자다. 이렇게 다르다.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읽긴 읽었는데...

 

그렇다면 '오해' 역시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립 아리에스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이다. 오해로 아들과 오빠를 죽인 여인숙 주인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운명 앞에서 서로의 말이 빗나가는 데서 나온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말의 비틀림.

 

말은 진실에 한 발 다가서기도 하나 자꾸만 그 자리에서 어긋난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가 알아주길 바라는 말들일 뿐이다.

 

즉, 내 감정의 진실을 담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진실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미끄러지는 말을 하고 만다. 이 미끄러지는 말들 속에 사람들의 관계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이렇듯 말들이 미끄러지고 만다면 진실한 관계에 이를 수가 없다.

 

좀더 크게 보면 죽음 앞에서 인간들은 진실한 말들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도 자꾸만 말을 비트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진실을 담지 않고서도 남들이 진실을 알아주기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은 기필코 오해를 부른다. 그리고 오해의 끝은 죽음이다.

 

이런 파멸적인 관계로 치닫는 말들... 마지막 장면이 계속 마음에 울린다. 마음을 받아주는 말들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마리아에게 하인이 하는 말, '아뇨.'

 

소통하지 못하는 말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걸 희곡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카뮈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희곡 '오해'였다. 

 

희곡이라는 글의 특성 상 무대에서 상연될 것을 전제로 쓰여졌기에, 대사가 많으니 그 대사를 중심으로 읽어가면 빨리 읽게 된다. 그러나 빨리 읽으면서도 지시문에 있는 내용들을 머리 속에서 상상해내야 하기 때문에, 읽어가면서 연극의 장면처럼 머리 속에 내용을 떠올리며 읽게 된다. 그것이 희곡을 읽는 매력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 직접 연극으로 보면 또다른 감흥을 맛볼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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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2-22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희곡 중에 칼리큘라는 많이 들어본 거 같아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서평을 읽는 동안 한번쯤 꼭 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해도 마찬가지구요. 좋은 서평 잘 읽고 갑니다.

kinye91 2016-12-22 09:41   좋아요 1 | URL
저한테 그렇다는 얘기니까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