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혁명 하지않으면 또 고통 오리니


스트레스 털어내려다 더 쌓고 오나니

오염물질 털어낸다고 강 완전 죽이고

전쟁상태 끝장내지도 못 하고 오히려

남북한을 긴장상태로 쏙 넣어 버리고

국민경제 살린다더니 힘 없는 사람들

일자리도 구할수없어 발 동동 구르고

사교육비 잡는다더니 별 대책 못세워

방과후다 집중이수다 막 쏟아 놓으니

학생들이 돌아버리고 헉 소리 뱉으니

민주주의 몇십년성과 단 몇해 공염불

국민들아 정신차리자 또 몇년 당할라

버릴것을 잡고있으면 영 발전 못하니

아깝다만 생각지말고 확 마음 다잡고

버릴때다 지금이바로 꼭 실행 해야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삼진강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김용택.

 

   조그만 분교의 선생으로 지내면서 순수함을 잃지 않은, 참으로 해맑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을 읽으며 마음 한 켠이 짠해졌다. 세상에, 그렇게 순수한 농촌의 모습이 지속되었으면 좋으련만, 우리 농촌은 이렇게 사라져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대도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농촌들이 사라져갔는지. 그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이 시집에 나오는 시 '저 강변 위의 고운 햇살 1,2,3'을 읽다보면 새만금으로 파괴되어 버린 갯벌도 생각이 나고, 고전압 송전탑으로 삶이 피폐해져 버린 밀양도 생각이 나고, 해군기지 건설로 파괴되어 버린 제주 강정, 이젠 사드라는 놈으로 또다시 살기 힘들어진 성주도 생각이 나는데.

 

어디 이곳뿐이랴. 지금 농촌에 가 보라. 얼마나 많은 집들이 폐허로 변해가고 있는지. 폐가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농촌 아닌가. 그럼에도 농촌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니.

 

오히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장려금을 주는 나라, 강을 파헤쳐 그 모래로 논을 덮어버린 나라, 이것이 어떻게 제대로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나라인지.

 

김용택의 시집에서 농촌에 관한 시를 읽으면 슬퍼진다. 사라져가는, 파괴되어가는 우리네 농촌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을 무엇을 할 것인가. 도대체 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시집 후기를 보면 김용택 시인은 많이 아팠다고 한다. 물론 믿고 따르던 두 시인 이광웅, 김남주 시인의 죽음에 대한 충격도 있었겠지만, 죽어가는 우리네 농촌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시인'이라는 시를 보자.

 

시인

 

배고플 때 지던 짐 배부르니 못 지겠네.

 

김용택, 강 같은 세월, 창작과비평사. 1999년 7쇄. 33쪽.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시인은 높은 곳 부유한 곳 편안한 곳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낮은 곳 가난한 곳 어려운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읊조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래야 시인이다.

 

특히 어려운 사람들, 그 사람들이 알아들고 흥얼거릴 시를, 손바닥 치며 맞아 그래 라고 할 수 있는 시를 쓰는 사람.

 

그래서 시인은 배부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시를 못 쓴다. 더이상 시라는 짐을 질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에 벌써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외침이지만, 이 시를 별다른 직업도 없이 편하게도 살아왔던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밥줄

 

화이고매

저런 쌔려쥑일 인사들이

시방까지 살아 큰소리치며

이 나라 하루 세 끼

아까운 밥을 쥑이네

저 더러운 손으로

저 더러운 입으로

우리 어매 피땀어린 삼시 세 끼

밥을 쥑이네 하얀 밥을 쥑여

저런 쥑일놈들이

저 밥이 어떤 밥이간디

아깐 밥 편히 묵고 앉아

함부로 남의 밥줄을 끊네.

 

김용택, 강 같은 세월, 창작과비평사. 1999년 7쇄. 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터키'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터키라는 나라가 참으로 방대한 나라이기도 하고, 그 영토가 동양과 서양에 걸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했단다. 소아시아라고 하는 것, 그것은 터키를 동양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터키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지배한 영토 아니었던가. 이슬람을 동양 종교로 볼 수는 없는데도, 유럽인들은 터키를 동양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했나 보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동양에서는 터키와 같은 이슬람은 서양으로 보고 있었으니...

 

여전히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이 서양에 속한다고, 월드컵 예선에도 유럽예선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토는 동양 쪽에 더 많이 속해 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소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 그의 소설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나 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글 중에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뉴욕 타임즈>라는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터키는 유럽이다. 같은 동양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동양에 속하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어쩌면 여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이 소설을 동양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탈리아나 터키나 다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점과 유럽인이 느끼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신분을 바꿔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해설을 보면 동서양의 갈등보다는 동서양의 융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일 뿐일 수도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이 터키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다. 그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고 책을 읽고 대학교육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배경인 17세기에는 이 정도의 유럽 지식인은 동양에 가면 우월한 지식인이 된다는 사고가 팽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키에 학문적 호기심이 왕성한 '호자'라는 사람의 노예가 된다. 호자와 그는 서로 공부를 하며 지식을 교류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인 '나'가 터키 사람인 '호자'를 가르치는 쪽으로 소설의 내용이 전개된다.

 

지식의 불균형, 또는 문화를 바라보는 불균등한 관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소설이 끝나서는 안된다. 호자는 터키의 문화,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기네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하얀 성을 앞에 두고 '나'와 신분을 바꾼다.

 

이런 바꿈을 위해서 둘은 외양이 닮았다는 쪽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서술이 되어 있는데도 이 바꿈은 무시된다.

 

이것을 터키 사람들의 무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들은 이런 바꿈을 용인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호자'인 척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그렇게 살게 해준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 된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짧막하게 나올 뿐이다. 그 역사 '나'로 잘 살아간다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무지하다고 바보같다고 이야기되는 동양이 사실은 바보스럽지 않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에선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특성에 맞는 삶의 형태일 뿐이라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문화의 우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터키인 '호자'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겪는 모험소설로 읽어도 되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양의 융합을 그려보이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띤 소설이다. 그냥 17세기 터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병승은 동시대 한국 시의 뇌관이다.' (190쪽)

 

'황병승을 읽는 일은 희극적인 비애, 냉소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뒤죽박죽'의 체험이다. 한국 현대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념과 그 지루한 표준성을 날려버릴 강력한 뇌관, 지금 그 뇌관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212쪽)

 

그냥 그랬다. 한 마디로 말한면 뒤죽박죽이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그렇다. 최소한 시집을 읽고 내용을 알려면 온갖 잡다한 지식을 머리 속에 넣고 있어야 한다.

 

마치, 넌 이건 모르지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것들을 어떤 논리적인 맥락도 없이 그냥 가져다 붙여놓은 듯한 느낌.

 

여러 대상들을 시에 들여오기는 황지우도 했지만, 황지우의 시에서는 맥락이 이해가 되었고, 시에서 어떤 논리성이 읽혀졌기에 황병승의 이 시들보다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의 행진이다. 우리말임에 분명한데, 우리말들이 이렇게 서로 등돌리고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전혀 다른 대상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한데, 전체적으로는 무언가 낮은 것들, 소외된 것들, 억압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느껴지는 시들도 있기는 있다.

 

다만, 그것이 느낌일 뿐이다. 우리나라 현실, 우리나라 정감을 느끼기 보다는 이상하게도 미국 사회 어떤 뒷골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집회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나오기도 하니, 이미 우리는 미국 문화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하위문화가 우리의 하위문화가 되는 것인지, 시집을 읽는 내내 이국적인, 그것도 미국적인, 미국의 뒷골목 소위 할렘가라고 하는 그런 곳의 분위기...

 

그 할렘가도 가보지 못했지만 여러 매체에서 읽거나 본 그런 느낌이 든 시집이다. 그래서 불편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비평가들은 좋겠다고. 이런 시인이 있어서 그들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일반 사람들이 마음으로 쉽게 느끼는 시들을 쓰는 시인이 대다수라면, 앞에 인용한 말처럼 '한국 현대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념과 그 지루한 표준성' 때문에 비평가들이 할 일이 없어질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뭔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면 비평가들은 할 일이 있다. 새로움, 이질적임, 낯섬, 이해되지 않음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만 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난해해졌는가. 그래서 시가 난해한가. 이런 난해한 시가 우리 곁으로 오는 것인가.

 

시집 뒤에 실린 이광호의 해설에서 인용한 말들이 앞에 있는데, 그 말대로 '지금 그 뇌관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고 하면 '시'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내 시읽기 능력을 인식하며... 읽는 내내 불편, 불만이 가득했던 시집. 에라, 우리나라도 좀 간명해졌으면 좋겠다. 카뮈가 말했던가. 진실은 단순하다고.

 

우리나라가 간명하고 단순하다면 이런 난해한 시도 좀더 쉬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황병승, 황병승 해서 읽어 본 시집인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26 0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26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황을 가정하자. 독재국가인데 이에 반대하여 혁명을 꿈꾸는 단체의 조직원이 검거된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고문에도 다른 조직원을 불지 않는다.

 

교도소에서는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한다. 감방에 스파이를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정보를 빼내게 하자. 그런데, 누구를 스파이로 하지, 혁명당원이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동성애자, 게이인 사람을 감방 동료로 넣어준다. 게이, 그는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사람이다. 생물학적로는 남성이지만 성향이나 감정, 행동 등은 모두 여성이다. 또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이다.

 

혁명당원 역시 동성애자를 경멸한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혁명당원에게는 동성애란 죄악일 수 있다. 이성적으로 만인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혁명당원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둘이 가까워져야 한다.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 교도소는 음식에 약을 타서 혁명당원이 병들게 한다. 병듦, 신체적인 허약함은 정신의 나약함을 유발하고, 이때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교도소측의 전략은 거의 성공한다. 혁명당원은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교도소측이 생각 못한 한 가지... 여성성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돌보다 보면 자연스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스파이로 들어간 게이는 점차 혁명당원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에겐 교도소측의 제안보다도 혁명당원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게이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차별과 무시를 당했을 뿐,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동안 느낀 가장 좋은 감정은 엄마의 애정뿐이었어. 엄마는 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또 그런 나를 사랑했어. 엄마의 사랑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어. 난 그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거야.' (269쪽)

 

이 책에 나오는 게이의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게이들의 삶이다. 과거는 그래왔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별과 무시는 여전하다.

 

이런 게이에게 혁명당원은 사랑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를 온전한 인간, 남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당당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그는 또 다른 자신이 된다.

 

남성과 남성이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 관계가 전환된다. 이는 단순한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관계는 사랑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게이가 원하는 것은 삽입만을 위한 성관계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키스를 원한다. 그것은 그를 편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다.

 

'키스'  이것이 그들을 감옥에서 온전한 사랑과 사랑으로 만나게 한다.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344쪽)


혁명당원은 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표범여인, 그는 사람을 해치는 여인이라면 이 거미여인은 자신에게 스스로 다가오게 하는, 키스를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냉철한 이성을 지닌 혁명당원이 게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키스를 하게 되는 이런 관계에서 게이는 온전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가석방으로 출옥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다 죽게 되고, 혁명당원 역시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한 정부당국에 의해 고문으로 죽어간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우정은 끝이 나는데... 이 상황이 바로 '거미여인의 키스'에 나온 상황이다.

 

암울한 라틴아메리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게이의 이름은 '몰리나', 혁명당원, 여기서는 좌익게릴라라고 나오는데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은 혁명당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혁명당원이라고 하자, 그는 '발렌틴.'

 

같은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영화이야기를 몇 편 해주는데, 그 영화의 내용들이 소설의 내용전개와 연계가 된다.

 

서로 사랑을 하지만 결국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혁명은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자신의 말을 따라 행동하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혁명을 위해서는 즉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몰리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거미줄로 옭아매는 거미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거미줄에 걸려든 존재이다.

 

발렌틴이라는 사람에게 걸려든 존재, 그래서 거미여인을 몰리나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을 위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는 몰리나이고 오히려 그를 옭아맨 거미여인은 발렌틴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거미여인... 그럼에도 몰리나는 죽을 때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가서 늘 바라보던 곳은 감옥이었고, 그 속에는 발렌틴이 있었을테니 그에게 행동은 곧 사랑이었고, 어머니에 이어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준 발렌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과 사랑이 어떻게 양립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고민을 해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이 여운으로 남는데...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그런 여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