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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상황을 가정하자. 독재국가인데 이에 반대하여 혁명을 꿈꾸는 단체의 조직원이 검거된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고문에도 다른 조직원을 불지 않는다.
교도소에서는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한다. 감방에 스파이를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정보를 빼내게 하자. 그런데, 누구를 스파이로 하지, 혁명당원이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동성애자, 게이인 사람을 감방 동료로 넣어준다. 게이, 그는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사람이다. 생물학적로는 남성이지만 성향이나 감정, 행동 등은 모두 여성이다. 또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이다.
혁명당원 역시 동성애자를 경멸한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혁명당원에게는 동성애란 죄악일 수 있다. 이성적으로 만인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혁명당원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둘이 가까워져야 한다.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 교도소는 음식에 약을 타서 혁명당원이 병들게 한다. 병듦, 신체적인 허약함은 정신의 나약함을 유발하고, 이때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교도소측의 전략은 거의 성공한다. 혁명당원은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교도소측이 생각 못한 한 가지... 여성성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돌보다 보면 자연스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스파이로 들어간 게이는 점차 혁명당원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에겐 교도소측의 제안보다도 혁명당원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게이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차별과 무시를 당했을 뿐,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동안 느낀 가장 좋은 감정은 엄마의 애정뿐이었어. 엄마는 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또 그런 나를 사랑했어. 엄마의 사랑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어. 난 그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거야.' (269쪽)
이 책에 나오는 게이의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게이들의 삶이다. 과거는 그래왔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별과 무시는 여전하다.
이런 게이에게 혁명당원은 사랑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를 온전한 인간, 남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당당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그는 또 다른 자신이 된다.
남성과 남성이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 관계가 전환된다. 이는 단순한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관계는 사랑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게이가 원하는 것은 삽입만을 위한 성관계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키스를 원한다. 그것은 그를 편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다.
'키스' 이것이 그들을 감옥에서 온전한 사랑과 사랑으로 만나게 한다.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344쪽)
혁명당원은 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표범여인, 그는 사람을 해치는 여인이라면 이 거미여인은 자신에게 스스로 다가오게 하는, 키스를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냉철한 이성을 지닌 혁명당원이 게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키스를 하게 되는 이런 관계에서 게이는 온전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가석방으로 출옥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다 죽게 되고, 혁명당원 역시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한 정부당국에 의해 고문으로 죽어간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우정은 끝이 나는데... 이 상황이 바로 '거미여인의 키스'에 나온 상황이다.
암울한 라틴아메리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게이의 이름은 '몰리나', 혁명당원, 여기서는 좌익게릴라라고 나오는데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은 혁명당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혁명당원이라고 하자, 그는 '발렌틴.'
같은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영화이야기를 몇 편 해주는데, 그 영화의 내용들이 소설의 내용전개와 연계가 된다.
서로 사랑을 하지만 결국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혁명은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자신의 말을 따라 행동하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혁명을 위해서는 즉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몰리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거미줄로 옭아매는 거미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거미줄에 걸려든 존재이다.
발렌틴이라는 사람에게 걸려든 존재, 그래서 거미여인을 몰리나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을 위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는 몰리나이고 오히려 그를 옭아맨 거미여인은 발렌틴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거미여인... 그럼에도 몰리나는 죽을 때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가서 늘 바라보던 곳은 감옥이었고, 그 속에는 발렌틴이 있었을테니 그에게 행동은 곧 사랑이었고, 어머니에 이어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준 발렌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과 사랑이 어떻게 양립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고민을 해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이 여운으로 남는데...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그런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