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
리처드 루트위치 지음, 윤철희 옮김 / 연암서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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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우리가 많이 먹는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인수공통감염병의 원인이 돼지에게 있다는 글을 읽고 돼지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기대에는 어긋난 책이다. 그냥 돼지의 생태와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돼지가 우리 인류와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다는 것. 또 돼지의 몸과 인간의 몸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 그래서 돼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여기에 돼지가 생각보다는 똑똑하다는 것.

 

개가 할 수 있는 일은 돼지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 서커스 묘기부터, 양치기, 심지어는 애완동물로 키워지기까지 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돼지가 청결한 동물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는 자주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서 그렇지 돼지는 개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이 배설할 공간을 정해 볼일을 본다고 하니.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지를 통해서 우리 인류에게 감염병들이 전파되는가 하는 점들을, 즉 돼지의 질병도 좀 많이 다뤄주었으면 하는 거였는데. 그 점이 많이 아쉽다.

 

돼지는 앓지 않을지 몰라도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걸릴 수도 있는 질병도 꽤 많을 테고, 돼지의 피를 빤 모기가 사람을 물었을 때 감염되는 질병도 있을텐데... 여기에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특히 박쥐의 터전에 인간이 진출하면서 박쥐와 함께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박쥐에게서 인간으로는 질병이 직접 전파가 되기는 힘들어도, 박쥐에게서 돼지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전파되기는 무척 쉽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돼지의 생태와 문화에 대해서 중요한 사항을 잘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를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로만 보지 않게 하고 있고, 또 읽으면서 영화 [옥자]가 생각나기도 했으니... 영화 [옥자]에서 옥자는 살아남아 시골에서 소녀와 함께 잘 살고 있지만, 더불어 새끼 돼지도 한 마리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됐지만... 별 생각 없이 그 장면을 보았는데, 이 책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했다.

 

대부분의 포유동물 및 다른 모든 가축과 달리, 암퇘지는 새끼들을 핥아서 물기를 닦아주지 않는다. 새끼돼지는 털가죽이 없어서 몸이 더 빨리 마르므로 어미돼지가 핥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미가 핥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감이 크게 형성되지 않고, 그래서 암퇘지가 다른 암퇘지가 낳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이 더 흔해지고 암퇘지는 다른 암퇘지가 낳은 새끼들을 기르는 걸 더 쉽게 받아들인다. (94-95쪽)

 

이렇게 돼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그러나 간략하게 잘 알려주고 있다. 그냥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로서의 돼지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동물로서 돼지를 인식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니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돼지도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변에서 돼지를 만나기는 힘들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했다는 이야기로 접하거나, 구제역이나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라는 질병으로 접하거나, 아니면 정육점에서 고기가 된 돼지를 만날 뿐인데...

 

예전에는 쉽게 접하는 것이 돼지였다는 것, 서민들에게는 특히 흔히 키울 수 있는 동물이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돼지 역시 생명체라는 것,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비록 우리가 살기 위해서 죽일 수밖에 없지만 그때까지는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할 만큼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덧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48쪽에... 돼지는 인간과 달리 아래턱을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다. 엄니가 있는 탓에 턱을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돼지는 턱을 수직방향으로만 움직여 식사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로 씹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고, 이런 제약은 지저분하게 먹는 결과로 이어졌다.

54쪽에는... 돼지의 턱은 1차원으로만 움직인다. 그 탓에 돼지는 지저분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 습기가 있는 먹이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돼지는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먹이를 소량씩 즐길 수가 없다. 이게 입을 벌리고 먹는 성향과 결합하면서 볼썽사나운, 가관이라 할 식사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54쪽의 내용 중에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이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는'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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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흉흉하다. 뭐 하나 제대로 정돈이 되지 않는 느낌.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단 느낌.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현실이 된 느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용서를 빌어야 용서를 할 수 있을텐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기만 하면 용서는 물 건너 간다.

 

  하지만 작은 잘못은 어떻게 할까? 물론 작은 잘못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한다. 그런데 뉘우침이 윽박지른다고 일어날까?

 

뉘우침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발장을 보라. 그가 잘못한 것이라곤 빵을 훔친 것, 그것도 조카들을 위해서지만, 그에게 가해진 법의 핍박 속에 그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발견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다. 용서를 통해 장발장은 거듭났다.

 

무작정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으니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줄 수 있는 잘못은 감싸줄 수 있는 것,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반성의 역설]이란 책이 있다. 반성문을 쓰게 하면, 반성을 강요하면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반성의 역설. 그렇다. 네가 잘못했어. 그러니 반성해. 반성하는 글을 써. 그러면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반성, 남에게 읽히기 위한 반성문을 쓴다. 그 시간을 모면할 반성만 할 뿐이다.

 

다음에 또 그렇게 반성을 하고 또 반성을 하고, 점점 잘못은 강화되고, 심해진다. 이게 반성의 역설이다. 재판을 앞둔 피의자들이 반성문을 쓰면 형을 경감해주기도 한다는데, 이것 역시 반성의 역설이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 단지 반성을 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반성. 이건 반성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반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 마음 속 반성이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된 반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반성.

 

그래서 용서는 참 힘들다. 상대를 온전히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변할 수 있게 품어주는 것. 작은 잘못을 품어주어 더 큰 잘못을 하지 않게 하는 것. 참 힘든 일인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봉환의 시집을 읽다가 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교사이기도 한 시인이 학교 생활을 시로 쓴 것이 있는데, 웃음이 머금어지는 시도 있고, 예전에 교실붕괴, 학교붕괴가 생각나는 시도 있지만, 이런 학생이 있어서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용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도 있다. 그 시를 보자.

 

은닉

 

  언젠가 박진화의 돈을 훔친 사람으로 주연이를 의심한 적이 있는데 진화가 그날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뭐 훔쳐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친한 친구의 지갑을 뒤지시진 않으셨죠? 주연이랑 저랑 많이 친하거든요. 주연이가 범인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 아무도 안 믿어요. 그리고 그 범인이 밝혀지면 선생님이 쉬쉬하신다고 해도 저희는 누군지 다 알게 되겠죠.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애들도 금방 알게 되겠죠. 그 한 번의 실수가 알려지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은 그냥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 후 박진화의 돈을 훔친 범인을 우리는 영영 잊어버렸다.

 

이봉환,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2013년. 60쪽.

 

제목이 은닉이지만, 이건 은닉이 아니다. 감싸줌, 포용, 용서다. 훔친 아이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 그 아이가 수치심을 지니고 반항심을 지니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품어줌이다.

 

은닉이라고 하여 감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이들의 마음을,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이 시집의 첫시인 '밀물결 오시듯'처럼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마음에 닿아 그 아이를 품어준다.

 

그래서 이 시는 따스하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내 것을 앗아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실수한 사람일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감싸주려는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

 

이런 모습이 필요하다. 작은 실수들에 얼굴 붉히며 잡아먹으려는 듯이 달려드는 사회가 아니라...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감싸줄 수 있는 용서와 단호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용서. 이것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마음은 바로 상대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도 법, 법 하면서 학교에서부터 너 잘못했으니 처벌 받아라고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더니, 반성을 하기보단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졌는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의 역설]이 자꾸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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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의 배신 - 편리함은 어떻게 인류를 망가뜨리는가
바이바 크레건리드 지음, 고현석 옮김, 박한선 해제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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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티 응우옌 킴이 쓴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에 나오는 구절 때문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다. 그 책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제2의 흡연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 제목은 '의자의 배신'이다.

 

의자, 우리가 앉아 있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런데 의자가 배신을 한다는 것은 편리함보다는 위험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물론 이 책 영어 제목인 'Primate Change'는 의자의 배신이 아니다. '영장류의 변화 또는 지극한 변화(455쪽)'라고 해석이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우리들 몸을 변화시켰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의자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 제목을 '의자의 배신'으로 한 것은 '영장류의 변화'나 '지극한 변화'보다는 훨씬 더 잘 이 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의자의 배신 그러면 왠지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편하라고 있는 의자가 배신을 한다니, 그렇다면 결국 현대인의 편리한 생활이 우리 몸에 위해를 가한다는 뜻인데, 이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현대만을 다루지 않는다. 인간 역사 전반을 다룬다. 인간 역사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 몸에 어떤 건강상의 위험이 닥쳤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이런 학문을 '진화 의학'이라고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구석기 시대, 수렵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인간들은 몸의 활동량이 적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시대에 맞게 인간 몸이 진화되었다고 한다. 진화란 몇백, 몇천, 몇만 년에 걸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우리 유전자 또는 우리 몸을 변화시킨다. 그러니 문명 생활을 하던 인간들이 겨우 몇만 년의 변화로 몸을 그에 맞게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 몸의 진화가 불일치하는 현상. 그래서 결국 우리 몸은 앓게 된다.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움직임이라고 한다. 움직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발을 움직여 돌아다니는 것. 걷기의 부족. 전체적인 활동량의 감소.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걷기라고 할 수 있다.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의도적으로 걷지 않으면 그나마 걸을 수 있는 시간도 없다.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고, 이동을 할 때는 차로 움직이고, 건물 내에서는 최소한의 이동 거리만이 존재할 뿐더러, 층을 옮길 때에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로 움직이니 활동량이 너무도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런 활동량을 채우기 위해 헬스클럽에 다니거나 요가와 같은 다른 운동을 돈을 들여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바로 걷기라고 한다. 그것도 조금 빠르게 걷는다면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점을 발부터 턱, 허리, 손까지 인류의 역사와 우리 몸이 지닌 구조, 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겪게 되는 질병을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여기에 친절하게도 어떻게 하면 우리 건강을 지킬 수 있는지, 아주 간단한 방법도 제시해주고 있으니, 여러모로 참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항들을 몇 개 옮겨 적어 본다.

 

볼프의 법칙은 '뼈의 밀도는 이용하지 않으면 잃게 된다'는 것이며, 데이비스의 법칙은 연조직에서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현대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이두박근 위축 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해 준다. 이 법칙은 관절 가동 범위나 인대와 힘줄의 에너지 저장 능력도 사용하지 않으면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87쪽)

 

한편 돼지나 닭에서는 새로운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이 아주 작다. 하지만 이 작은 가능성도 수십억 번 겹치면 '어쩌면'이 '언젠가'로 바뀌어서 실제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동물은 이렇게 집중적으로 키워지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보면 하나의 돌연변이인 독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자유롭게 퍼져 나가는 유행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14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래, 이렇게 우리는 언젠가 대유행이 될 감염병의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고도 나왔다. 그럼에도 우리들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지금 팬데믹이 일어난 코로나19를 보라.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들 생활방식이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 점을 알고, 이에 대한 백신, 치료제도 중요하지만,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우리들 생활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몸에 나쁘다. 오랜 시간 가만히 있으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이는 대사 폐기물이 근육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일반적인 생각은 고관절 굴근이라는 근육을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287쪽)

 

앉아서 일하는 45-64세 사람들이 은퇴 후 요양원에 들어갈 확률이 40퍼센트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러닝 머신에서 걸으면서 아이패드를 보기 시작했다. (299쪽)

 

아이들을 더 자유롭게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교사들은 창의적이거나 혁신적이라고, 또는 순진하거나 관대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299쪽)

 

이 부분, 아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리 속에서 떠오른 작품은 김기택의 [사무원]이란 시집이다. 이 시집은 현대인의 생활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종일, 아니 평생을 일만 하는 사람을 '사무원(김기택. 사무원. 창비. 2010년 초판 10쇄.19-21쪽)'이라고 하는데 김기택 시를 보면 그 점이 너무도 슬프게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무원은 결국 '화석(같은 시집. 58-59쪽)'이 된다. 왜 그들은 새들보다도 땅을 적게 밟기 때문이다. 그만큼 걷지 않는다.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같은 시집. 75쪽)'

 

와! 역시 시인은 시인이다! 이렇게 진화 의학에서 각종 사례를 들어 말하는 것을 시인의 직관으로 표현하고 있다니...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은 [의자의 배신]과 함께 꼭 읽어야 할 시집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무원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강요하지 않는가?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수업 시간에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주는 벌이 교실 뒤에 서 있거나, 또는 복도에 나가게 하는 것이었겠는가.

 

앉아 있는 것은 모범생, 서 있는 것은 문제 학생이라는 이분법이 우리나라 교육에 너무도 오래동안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결국 우리들을 사무원처럼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현대인의 표상인 것처럼 여기게 하지 않았던가. 섬뜩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걷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기적의 치료제이다. 걷기는 수백만 년 전 초원에서 살던 종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일종의 고리이며, 인간의 모든 면에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걷기는 전만으로 인해 허리에 부하가 걸리는 현상을 줄여 주며 디스크 건강을 증진시킨다. 이는 큰 의미를 지닌다. 디스크가 크고 건강할수록 골연관절을 더 잘 보호하기 때문이다. (399쪽)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병원 몇 개를 짓는 것보다 우리들 건강에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어디 그런가? 우리나라 도시에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그런 직장을 얻기가 어디 쉬운가? 직장에 가기 위해서 걸어서 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걸을 테니, 가까운 학교조차도 버스 정류장으로 한 정거장만 넘으면 버스를 타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이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성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부분에서 지리산 자락에 있는 간디 학교가 생각났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 그런데 이 학교를 설립한 양희규에 의하면 기숙사는 학교에서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이 등교하면서 지리산 자락이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했는데, 이것과 더불어 건강 측면에서도 이는 너무도 훌륭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양희규,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가야넷)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시대 이전의 두 배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지구가 받을 영향을 논하기는 너무 이르지만, 이미 그로 인해 단백질과 미네랄 농도가 떨어지고 있으며 탄수화물 범벅인 먹거리에 당과 녹말이 더 첨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인류세에 높아지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먹이사슬 밖으로 축출되고 있는 미량 영양소와 이를 갈망하는 인간의 식욕이 앞으로 비만을 얼마나 널리 퍼뜨릴지 궁금하다. (356쪽)

 

이산화탄소의 증가를 단순히 온실가스의 증가, 그래서 기후 위기를 초래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기후위기가 심각한 만큼 우리들 먹을거리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우리에게 주지만,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그 많아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다른 영양소들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겉으로는 더 크고 색깔도 좋은 식물들, 열매들이 맺어지지만, 내용물은 점점 없어지는, 영양소가 훨씬 줄어들어 우리들로 하여금 더 많이 먹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니, 이거야 원.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기후위기와 더불어 식량을 통한 우리들의 건강까지도 위협하는 것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다. 경각심을 지녀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들 삶이 지속될 수가 없다.

 

과학기술, 의학기술의 힘으로 지속되더라도 건강하지 않은, 병원의 삶, 요양원의 삶, 즉 연명하는 삶밖에는 안 될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 생활방식을 다시 검토하자. 아니, 나부터 내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바꾸려고 노력해야겠다.

 

가능하면 걷고, 걸어야겠다. 의자나 소파에 몸을 온종일 맡기는 일을 삼가야겠다. 무엇보다도 내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이런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적어도 교육 현장에서는. 에고, 책을 많이 읽으리고 그렇게 강요하는 교육 관료들, 정작 본인들은 이런 책을 읽는지 모르겠다. 너무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교육 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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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3

           - 인류가 겪은 질병들


욕탕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푸는데

아뿔싸

물이 점점 뜨거워져도

몸은 적응해

끓는지도 모르고

욕탕 안에서

아, 좋다

아, 좋다

결국 익어버린

끓는 물 속

개구리가 되어 버린

미노스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아

죽어버린 미노스


인류세라는 말에

왜 미노스 왕이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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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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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시인을 불렀다. 그리고 그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게 했다. 한 시가 한 시인의 시집을 불러내다니. 시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시들을, 다른 시인들을 불러낸다. 시인들뿐이랴. 시는 우리들 삶을 불러낸다.

 

김남주기념사업회에서 김남주 20주기 추모시집으로 낸 [자유의 나무 한 그루]를 읽다 김태정이란 시인을 발견했다. 아니, 시를 발견했다. 이은봉이 쓴 시다. 그런데 이 시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시인이 있었단 말이지? 한번 그 시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집을 검색하니, 한 권 있다. 그래, 읽어보자. 그 전에 먼저 이은봉이 쓴 시부터 봐야겠다. 왜 이 시가 이렇게 마음에 와 닿았을까? 시인이 이렇게 산 사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햇볕 좋은 날

               - 김태정

 

스님, 이제는 가야겠어요 견디기 너무 힘들어요

언제쯤 가시려고요 지금 가면 안 돼요

가을이 오면 가려고요 햇볕 좋은 날 가려고요

추석 전에 가면 안 돼요 추석 전에는 너무 바빠요

추석만 지나면 한가해져요 스님, 그때는 괜찮아요

그래요 추석이 지나야 가시는 길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냥 화장해 주세요 달마산에 뿌려 주세요

사흘장은 치러야지요 친구들도 좀 부르고요

알았어요 스님 뜻대로 할게요 좀 기다리지요 뭐

 

추석이 지나고 열흘, 어느 햇볕 좋은 날

그녀는 갔다 바짝 마른 몸뚱이만 남겨 놓은 채.

 

김남주기념사업회, 자유의 나무 한 그루. 문학들. 2014년. 110쪽.시 '햇볕 좋은 날' 전문

 

김태정 시인은 2011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가 쓴 시집에 달마산과 미황사, 해남이 많이 나오는데, 말년에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란 시집을 읽다보면 서글퍼진다.무엇인지 모르는 서글픔이 차 오른다. 지나가 버린 과거가 슬픔으로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나가 버린 과거였으면 하는 것이 아직도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여서 그런가?

 

시집을 읽으며 우리가 거쳐왔던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을 생각한다. 이 시집에서 이 시를 보면서 시인은 '눈물의 배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배후는 무엇일지 더 생각하게 된다.

 

  눈물의 배후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덥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

 

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

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

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함도

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

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

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꼿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채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19년 초판 6쇄. 25-27쪽.

 

아, 이 먼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 그렇다. 눈물의 배후가 바로 먼지였나? 아니다. 눈물의 배후는 이미 변해버린 우리들이다. 과거로 남겨버린, 먼지가 쌓여버린 우리들 과거.

 

그 과거를 들추면 먼지가 풀썩 일뿐. 더 이상 찬란한 광채도,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하는 그런 과거. 과거는 찬란했더라. 그뿐이더라. 그냥 그렇게 과거는 과거로만 머물고, 먼지가 쌓인 채 우리들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더라.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금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굴레가 많은데, 이렇게 이것들이 먼지가 쌓인 채로 과거 속에 처박혀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 왔다. 시인 역시 그러했으리라.

 

그래서 시인은 가고 없지만, 다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시인의 시 때문이 아니라 나도 '먼지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데, 시에서 먼지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시에 있는 말들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 뿐이니.

 

하지만 슬픔도 힘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물을 일으키는 먼지라고 해도, 먼지를 일으켰다는 것 자체는 이미 그것을 내 곁으로 꺼내왔다는 얘기가 되니... 그래, 아직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과거.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다'고,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 김태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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