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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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시인을 불렀다. 그리고 그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게 했다. 한 시가 한 시인의 시집을 불러내다니. 시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시들을, 다른 시인들을 불러낸다. 시인들뿐이랴. 시는 우리들 삶을 불러낸다.

 

김남주기념사업회에서 김남주 20주기 추모시집으로 낸 [자유의 나무 한 그루]를 읽다 김태정이란 시인을 발견했다. 아니, 시를 발견했다. 이은봉이 쓴 시다. 그런데 이 시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시인이 있었단 말이지? 한번 그 시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집을 검색하니, 한 권 있다. 그래, 읽어보자. 그 전에 먼저 이은봉이 쓴 시부터 봐야겠다. 왜 이 시가 이렇게 마음에 와 닿았을까? 시인이 이렇게 산 사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햇볕 좋은 날

               - 김태정

 

스님, 이제는 가야겠어요 견디기 너무 힘들어요

언제쯤 가시려고요 지금 가면 안 돼요

가을이 오면 가려고요 햇볕 좋은 날 가려고요

추석 전에 가면 안 돼요 추석 전에는 너무 바빠요

추석만 지나면 한가해져요 스님, 그때는 괜찮아요

그래요 추석이 지나야 가시는 길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냥 화장해 주세요 달마산에 뿌려 주세요

사흘장은 치러야지요 친구들도 좀 부르고요

알았어요 스님 뜻대로 할게요 좀 기다리지요 뭐

 

추석이 지나고 열흘, 어느 햇볕 좋은 날

그녀는 갔다 바짝 마른 몸뚱이만 남겨 놓은 채.

 

김남주기념사업회, 자유의 나무 한 그루. 문학들. 2014년. 110쪽.시 '햇볕 좋은 날' 전문

 

김태정 시인은 2011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가 쓴 시집에 달마산과 미황사, 해남이 많이 나오는데, 말년에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란 시집을 읽다보면 서글퍼진다.무엇인지 모르는 서글픔이 차 오른다. 지나가 버린 과거가 슬픔으로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나가 버린 과거였으면 하는 것이 아직도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여서 그런가?

 

시집을 읽으며 우리가 거쳐왔던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을 생각한다. 이 시집에서 이 시를 보면서 시인은 '눈물의 배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배후는 무엇일지 더 생각하게 된다.

 

  눈물의 배후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덥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

 

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

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

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함도

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

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

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꼿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채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19년 초판 6쇄. 25-27쪽.

 

아, 이 먼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 그렇다. 눈물의 배후가 바로 먼지였나? 아니다. 눈물의 배후는 이미 변해버린 우리들이다. 과거로 남겨버린, 먼지가 쌓여버린 우리들 과거.

 

그 과거를 들추면 먼지가 풀썩 일뿐. 더 이상 찬란한 광채도,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하는 그런 과거. 과거는 찬란했더라. 그뿐이더라. 그냥 그렇게 과거는 과거로만 머물고, 먼지가 쌓인 채 우리들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더라.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금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굴레가 많은데, 이렇게 이것들이 먼지가 쌓인 채로 과거 속에 처박혀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 왔다. 시인 역시 그러했으리라.

 

그래서 시인은 가고 없지만, 다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시인의 시 때문이 아니라 나도 '먼지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데, 시에서 먼지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시에 있는 말들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 뿐이니.

 

하지만 슬픔도 힘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물을 일으키는 먼지라고 해도, 먼지를 일으켰다는 것 자체는 이미 그것을 내 곁으로 꺼내왔다는 얘기가 되니... 그래, 아직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과거.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다'고,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 김태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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