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흉흉하다. 뭐 하나 제대로 정돈이 되지 않는 느낌.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단 느낌.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현실이 된 느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용서를 빌어야 용서를 할 수 있을텐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기만 하면 용서는 물 건너 간다.

 

  하지만 작은 잘못은 어떻게 할까? 물론 작은 잘못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한다. 그런데 뉘우침이 윽박지른다고 일어날까?

 

뉘우침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발장을 보라. 그가 잘못한 것이라곤 빵을 훔친 것, 그것도 조카들을 위해서지만, 그에게 가해진 법의 핍박 속에 그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발견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다. 용서를 통해 장발장은 거듭났다.

 

무작정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으니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줄 수 있는 잘못은 감싸줄 수 있는 것,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반성의 역설]이란 책이 있다. 반성문을 쓰게 하면, 반성을 강요하면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반성의 역설. 그렇다. 네가 잘못했어. 그러니 반성해. 반성하는 글을 써. 그러면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반성, 남에게 읽히기 위한 반성문을 쓴다. 그 시간을 모면할 반성만 할 뿐이다.

 

다음에 또 그렇게 반성을 하고 또 반성을 하고, 점점 잘못은 강화되고, 심해진다. 이게 반성의 역설이다. 재판을 앞둔 피의자들이 반성문을 쓰면 형을 경감해주기도 한다는데, 이것 역시 반성의 역설이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 단지 반성을 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반성. 이건 반성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반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 마음 속 반성이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된 반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반성.

 

그래서 용서는 참 힘들다. 상대를 온전히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변할 수 있게 품어주는 것. 작은 잘못을 품어주어 더 큰 잘못을 하지 않게 하는 것. 참 힘든 일인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봉환의 시집을 읽다가 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교사이기도 한 시인이 학교 생활을 시로 쓴 것이 있는데, 웃음이 머금어지는 시도 있고, 예전에 교실붕괴, 학교붕괴가 생각나는 시도 있지만, 이런 학생이 있어서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용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도 있다. 그 시를 보자.

 

은닉

 

  언젠가 박진화의 돈을 훔친 사람으로 주연이를 의심한 적이 있는데 진화가 그날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뭐 훔쳐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친한 친구의 지갑을 뒤지시진 않으셨죠? 주연이랑 저랑 많이 친하거든요. 주연이가 범인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 아무도 안 믿어요. 그리고 그 범인이 밝혀지면 선생님이 쉬쉬하신다고 해도 저희는 누군지 다 알게 되겠죠.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애들도 금방 알게 되겠죠. 그 한 번의 실수가 알려지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은 그냥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 후 박진화의 돈을 훔친 범인을 우리는 영영 잊어버렸다.

 

이봉환,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2013년. 60쪽.

 

제목이 은닉이지만, 이건 은닉이 아니다. 감싸줌, 포용, 용서다. 훔친 아이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 그 아이가 수치심을 지니고 반항심을 지니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품어줌이다.

 

은닉이라고 하여 감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이들의 마음을,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이 시집의 첫시인 '밀물결 오시듯'처럼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마음에 닿아 그 아이를 품어준다.

 

그래서 이 시는 따스하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내 것을 앗아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실수한 사람일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감싸주려는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

 

이런 모습이 필요하다. 작은 실수들에 얼굴 붉히며 잡아먹으려는 듯이 달려드는 사회가 아니라...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감싸줄 수 있는 용서와 단호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용서. 이것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마음은 바로 상대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도 법, 법 하면서 학교에서부터 너 잘못했으니 처벌 받아라고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더니, 반성을 하기보단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졌는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의 역설]이 자꾸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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