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5
찰스 디킨스 지음, 김세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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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무도 유명한 소설이다. 꼭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권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구두쇠의 대명사 스크루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이 소설은 엄청 성공한 소설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많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이 소설만큼 많이 읽힌 작품이 있을까 싶다. 어제 크리스마스. 아마도 역대 성탄절 중에서 가장 조용하게 보낸 날이지 싶다. 나가기도 그렇고, 세상이 흉흉한데 뭘 하나 싶기도 하고.


집에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그래, 어렸을 때 읽었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다시 읽어야지. 스크루지가 어떻게 개과천선 했는지 다시 살펴야지. 여전히 재미 있다. 유령이 나오고, 과거-현재-미래를 보고... 사람이 변하고.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데, 변하려면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읽게 되었는데, 구두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빼면 우리는 어제 성탄절을 스크루지가 평소에 보내던 성탄절처럼 홀로 보내지 않았나 싶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니... 즐거운 날도 함께 하지 못하고, 비대면이라는,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고 그렇게 보내야만 했으니, 본의 아니게 스크루지처럼 성탄절을 보내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유령이 와야 하지 않나, 우리 생활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고치려고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상초유의 코로나19 사태가 유령이라면, 그 유령은 우리에게 과거를 보고,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예측하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 유령... 꼰대에서 탈출하는 길


스크루지에게 과거는 자신을 반성하는 길이다. 나때는 말이야 라는 소위 꼰대들의 말이 아니라, 그때는 나도 그랬었지, 그런 일들을 힘들어 했었지 하면서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갖추게 되는 것.


과거에 잘나가던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 했던 자신을 찾고, 그 힘듦을 현재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반복하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 유령이 하는 일 아니겠는가.


이미 과거 유령을 통해 스크루지는 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 과거를 본다는 것은 현재를 성찰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꼰대에서 탈출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과거는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이다. 우리가 초심을 유지하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유령...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길


내 세계에 갇혀 있는 스크루지에게 다른 사람을 살필 수 있는 눈은 없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본다. 창문이 없는 완결된 단자다. 소통하지 않는, 그 자체로 막혀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에게 다른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에 힘입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존재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닫힌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현재 유령은 스크루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자, 스크루지는 이미 변할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행동으로 나아가려면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미래 유령... 수정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길


예측이다. 막연한 짐작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면, 그 길로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길로 가면 반드시 파멸할 텐데,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정확한 예측은 행동을 변화시킨다.


누구에게도 뻔히 보이는 길을 제시하는 것. 지금처럼 살면 당신이 맞이할 미래는 이렇다라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 


스크루지는 제게 예정된 미래를 본다.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그렇게 그는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 그리고 그의 미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도 바꾸게 된다.


나만의 변화가 아니라 내 변화로 다른 사람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스크루지는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지내왔던 칙칙한 삶에서 밝고 명랑한 삶으로 나아간다.


자, 코로나19라는 유령은 과거-현재-미래 유령의 결합체다. 이 유령은 현재 우리들 삶에 나타나 과거 우리 삶을, 우리가 진정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렇게 살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게 한다. 


혹 우리 삶이 지구에게는 스크루지처럼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는지, 코로나19라는 유령이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한다고 그렇게 이 소설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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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고, 속이구, 계속 속이는

                         - 6․29 선언과 그 이후


6․29!

6․29?

속이구!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고,

기업가는 노동자를 속이고,

선생은 학생을 속이고,

학생은 선생을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뱀이 

제 꼬리를 물려고

결사적으로 덤비듯

우리는 

서로 서로

속이고, 속이고, 속이구.


87년 6․29

결국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 속이구.


다시 

모든 것을 속이고,

또, 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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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 우리가 오해한 ‘과학적 상상력’에 관한 아주 특별한 강의
이상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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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상상력이라고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이나 아주 기발한 발상을 떠올린다. 그래서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상력이란 과연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엄밀한 체계를 추구하는 과학에서는 상상력이 필요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들 삶에도 필수적임을, 그리고 과학이나 예술에서 모두 상상력이 작동됨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은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적과 외재적이라는 말로 단순화시켜 설명할 수도 있는데, 기존의 지식에 정통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과학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틀을 가져야 기존의 틀을 대체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앞부분의 예로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든다. 우리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어놓은 사람, 또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사람인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그는 프톨레마우스의 천문학에 정통한, 그것도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였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가 기존의 천동설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기존 천문학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정통했기에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틀 내에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상상력은 갑자기 외부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고민, 공부를 거듭한 결과에 이어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결부되었을 때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상력은 집요함, 정교함과 더불어 새로움이 합쳐져야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뒷부분은 상대성 이론을 들 수 있다. 뉴턴 역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 이렇게 이 책은 상상력을 한정짓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적용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 칙센트미하이의 이론을 빌려 상상력이 발휘되는 네 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새겨들을 만하다.

 

비판적으로 읽고 이해한다. 이때 비판은 분석적 평가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내용과 연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247쪽)

 

집요하게 문제에 도전한다(249쪽)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정말로 집요하게 고민하고 정리하고 여러 시행착오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의 깊게 관찰한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과 이론에 대한 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측면에 주목할 줄 알았던 것이라고 한다. (252쪽)

 

다양한 자원을 종합한다(254쪽)

 

이 네가지 조건에 대해 읽으면서 세종을 생각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게 되는 과정이 상상력의 이 네가지 조건과 어쩌면 이리도 잘 맞을 수 있는지... 그렇다. 세종이 한글을 어느 순간, 예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야담식으로 전해지던 볼일을 보던 중 문틀을 보고 생각해냈다는 그런 말처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세종은 기존에 쓰인 문자인 한자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과 그를 표현하는 문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분석적 사고를 하고, 삶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면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 과정에서 홀로 하지 않고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 집현전 학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왕세자와 왕자, 공주 그리고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미대사 등등... 또 중국의 학자 등 다양한 자원들을 종합하는 것이다.

 

그러니 세종은 상상력이 넘치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문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이 책은 과학에서 말하는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적용할 수가 있다. 그만큼 상상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몇몇 문장들 속에서 우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다. 그 문장들을 보자.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접근 방식을 검토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자신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적절하게 '변형'해서 가져다 쓰는 연구 태도가 필요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분야는 무시하고 수학이나 과학만 공부시키는 (물론 그것만 하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억지로 다른 분야의 공부를 강요해도 안 되겠지만) 영재교육이 바람직한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200-201쪽)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되지 않는 과학연구가 무가치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과학연구는 '문명의 이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예술의 결과물이 그러하듯 인류의 지적·문화적 성취이기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226쪽)

 

우리가 '탈추격형' 과학기술 개발, 즉 주어진 정답을 쫓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와 답을 동시에 제시하는 방식으로 과학기술을 개발하려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성공적으로 실패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269-270쪽)

 

영재교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글과 과학연구가 꼭 실용적이어야 하나 하는 문제제기와 앞으로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과학기술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다른 존재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과 다른 관점을 익히는 것, 그런 다름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이 꼭 실용적이지 않아도 예술처럼 자신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집요하게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실패를 하더라도 패배자, 낙오자가 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상상력을 살릴 수 있는 사회이지 않을까 싶다. 상상력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것.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함을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일 것 같은 상상력이 사회적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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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
리처드 루트위치 지음, 윤철희 옮김 / 연암서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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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우리가 많이 먹는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인수공통감염병의 원인이 돼지에게 있다는 글을 읽고 돼지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기대에는 어긋난 책이다. 그냥 돼지의 생태와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돼지가 우리 인류와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다는 것. 또 돼지의 몸과 인간의 몸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 그래서 돼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여기에 돼지가 생각보다는 똑똑하다는 것.

 

개가 할 수 있는 일은 돼지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 서커스 묘기부터, 양치기, 심지어는 애완동물로 키워지기까지 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돼지가 청결한 동물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는 자주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서 그렇지 돼지는 개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이 배설할 공간을 정해 볼일을 본다고 하니.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지를 통해서 우리 인류에게 감염병들이 전파되는가 하는 점들을, 즉 돼지의 질병도 좀 많이 다뤄주었으면 하는 거였는데. 그 점이 많이 아쉽다.

 

돼지는 앓지 않을지 몰라도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걸릴 수도 있는 질병도 꽤 많을 테고, 돼지의 피를 빤 모기가 사람을 물었을 때 감염되는 질병도 있을텐데... 여기에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특히 박쥐의 터전에 인간이 진출하면서 박쥐와 함께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박쥐에게서 인간으로는 질병이 직접 전파가 되기는 힘들어도, 박쥐에게서 돼지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전파되기는 무척 쉽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돼지의 생태와 문화에 대해서 중요한 사항을 잘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를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로만 보지 않게 하고 있고, 또 읽으면서 영화 [옥자]가 생각나기도 했으니... 영화 [옥자]에서 옥자는 살아남아 시골에서 소녀와 함께 잘 살고 있지만, 더불어 새끼 돼지도 한 마리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됐지만... 별 생각 없이 그 장면을 보았는데, 이 책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했다.

 

대부분의 포유동물 및 다른 모든 가축과 달리, 암퇘지는 새끼들을 핥아서 물기를 닦아주지 않는다. 새끼돼지는 털가죽이 없어서 몸이 더 빨리 마르므로 어미돼지가 핥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미가 핥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감이 크게 형성되지 않고, 그래서 암퇘지가 다른 암퇘지가 낳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이 더 흔해지고 암퇘지는 다른 암퇘지가 낳은 새끼들을 기르는 걸 더 쉽게 받아들인다. (94-95쪽)

 

이렇게 돼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그러나 간략하게 잘 알려주고 있다. 그냥 음식을 제공하는 동물로서의 돼지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동물로서 돼지를 인식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니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돼지도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변에서 돼지를 만나기는 힘들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했다는 이야기로 접하거나, 구제역이나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라는 질병으로 접하거나, 아니면 정육점에서 고기가 된 돼지를 만날 뿐인데...

 

예전에는 쉽게 접하는 것이 돼지였다는 것, 서민들에게는 특히 흔히 키울 수 있는 동물이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돼지 역시 생명체라는 것,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비록 우리가 살기 위해서 죽일 수밖에 없지만 그때까지는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할 만큼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덧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48쪽에... 돼지는 인간과 달리 아래턱을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다. 엄니가 있는 탓에 턱을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돼지는 턱을 수직방향으로만 움직여 식사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로 씹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고, 이런 제약은 지저분하게 먹는 결과로 이어졌다.

54쪽에는... 돼지의 턱은 1차원으로만 움직인다. 그 탓에 돼지는 지저분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 습기가 있는 먹이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돼지는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먹이를 소량씩 즐길 수가 없다. 이게 입을 벌리고 먹는 성향과 결합하면서 볼썽사나운, 가관이라 할 식사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54쪽의 내용 중에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이 '위아래로만 움직일 수 있는'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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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흉흉하다. 뭐 하나 제대로 정돈이 되지 않는 느낌.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단 느낌.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현실이 된 느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용서를 빌어야 용서를 할 수 있을텐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기만 하면 용서는 물 건너 간다.

 

  하지만 작은 잘못은 어떻게 할까? 물론 작은 잘못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한다. 그런데 뉘우침이 윽박지른다고 일어날까?

 

뉘우침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발장을 보라. 그가 잘못한 것이라곤 빵을 훔친 것, 그것도 조카들을 위해서지만, 그에게 가해진 법의 핍박 속에 그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발견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다. 용서를 통해 장발장은 거듭났다.

 

무작정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으니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줄 수 있는 잘못은 감싸줄 수 있는 것,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반성의 역설]이란 책이 있다. 반성문을 쓰게 하면, 반성을 강요하면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반성의 역설. 그렇다. 네가 잘못했어. 그러니 반성해. 반성하는 글을 써. 그러면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반성, 남에게 읽히기 위한 반성문을 쓴다. 그 시간을 모면할 반성만 할 뿐이다.

 

다음에 또 그렇게 반성을 하고 또 반성을 하고, 점점 잘못은 강화되고, 심해진다. 이게 반성의 역설이다. 재판을 앞둔 피의자들이 반성문을 쓰면 형을 경감해주기도 한다는데, 이것 역시 반성의 역설이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 단지 반성을 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반성. 이건 반성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반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 마음 속 반성이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된 반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반성.

 

그래서 용서는 참 힘들다. 상대를 온전히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변할 수 있게 품어주는 것. 작은 잘못을 품어주어 더 큰 잘못을 하지 않게 하는 것. 참 힘든 일인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봉환의 시집을 읽다가 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교사이기도 한 시인이 학교 생활을 시로 쓴 것이 있는데, 웃음이 머금어지는 시도 있고, 예전에 교실붕괴, 학교붕괴가 생각나는 시도 있지만, 이런 학생이 있어서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용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도 있다. 그 시를 보자.

 

은닉

 

  언젠가 박진화의 돈을 훔친 사람으로 주연이를 의심한 적이 있는데 진화가 그날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뭐 훔쳐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친한 친구의 지갑을 뒤지시진 않으셨죠? 주연이랑 저랑 많이 친하거든요. 주연이가 범인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 아무도 안 믿어요. 그리고 그 범인이 밝혀지면 선생님이 쉬쉬하신다고 해도 저희는 누군지 다 알게 되겠죠.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애들도 금방 알게 되겠죠. 그 한 번의 실수가 알려지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은 그냥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 후 박진화의 돈을 훔친 범인을 우리는 영영 잊어버렸다.

 

이봉환,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2013년. 60쪽.

 

제목이 은닉이지만, 이건 은닉이 아니다. 감싸줌, 포용, 용서다. 훔친 아이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 그 아이가 수치심을 지니고 반항심을 지니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품어줌이다.

 

은닉이라고 하여 감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이들의 마음을,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이 시집의 첫시인 '밀물결 오시듯'처럼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마음에 닿아 그 아이를 품어준다.

 

그래서 이 시는 따스하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내 것을 앗아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실수한 사람일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감싸주려는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

 

이런 모습이 필요하다. 작은 실수들에 얼굴 붉히며 잡아먹으려는 듯이 달려드는 사회가 아니라...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감싸줄 수 있는 용서와 단호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용서. 이것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마음은 바로 상대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도 법, 법 하면서 학교에서부터 너 잘못했으니 처벌 받아라고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더니, 반성을 하기보단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졌는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의 역설]이 자꾸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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