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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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주욱 읽었는데, 카프카가 우리나라의 이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작품의 난해성이라든지, 죽은 다음에야 더 유명해지고,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 논문들이 나온다는 사실들이 말이다.

 

또한 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이상이 조금 뒤에 태어나고 활동하지만, 이들은 활동했던 시기는 근대성이 꽃 피우던 때이고, 이런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대이기도 하다.

 

포스트 포던이라는 말이 90년대에 유행했었는데, 이 때 이미 카프카나 이상은 포스트 모던한 작가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이상, 이상, 정말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하다못해 그의 전집만 해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집이란 원본이 확정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학자들마다 이상 전집을 펴내려 하는 것을 보면 그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유효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은 작가임에도 틀림이 없고.

 

이 책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건축과 미술의 관점에서 이상의 작품을 판단한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에 이상에 대한 접근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져 이상 문학의 단면만을 파악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이상 문학이 열린텍스트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다 타당하다고 하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건축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입장에서, 또는 미술의 입장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이상은 서구의 최신 건축이론을 습득했으며, 일본을 통한 짝퉁 근대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근대화가 짝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낸 작가라는 것이다.

 

하여 주장에 설득력을 얻기 위하여 문학적인 접근이 아니라(그런 접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즉 미술적인, 건축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상의 삶 자체가 건축학도였으며, 그는 근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의 표지 디자인에 당선될 정도로 디자인 쪽에서도 이미 앞서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과 문학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이미 당대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한계넘어섬을 자신의 시로 표현해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겪게 되는 몰이해, 비난을 그는 견디지 못하고 소설, 수필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나온 해석을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데, 현대물리학, 천문학, 건축학, 디자인학 등이 종합적으로 이상을 해석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이 정도로 이상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어정쩡한 상태의 작품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다다이즘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100년을 앞선 작가를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선이라는 한 주변부 국가에만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이상을 '민족주의'틀로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지금 우리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상이 바랐던 포스트모던 시대가 아니던가? 이미 이상이나 다른 서구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작품 경향들이 해석되어 넘쳐나고 있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문학을 배웠다는 사람에게도 이상은 아직도 어렵다.

 

몸으로 디지털세계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이상은 어렵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암호의 세계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른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미술에 대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얄팍해서인가?

 

문학은 지식과도 어느 정도 상관은 있지만, 대부분 좋은 문학작품은 지식을 떠나서 마음에 와닿는, 그래서 해석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상 문학에 들어가면 과연 이상 문학은 좋은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또 하나 의문이 있는데, 이상이 완벽하게 시대를 앞서 갔을까?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심은 문명이 짝퉁 근대화란 사실을 넘어서 일본의 문명 자체도 짝퉁이라는 걸, 동경에 가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그는 동경에 가길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중심이라는 뉴욕으로 가길 갈망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든다. 동경 갔더니 일본이 짝퉁이고, 우리는 짝퉁의 짝퉁이더라란 인식을 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이상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김기림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오그려.

... 그들(삼사문학 동인)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권영민, 이상문학의 비밀 13, 민음사 276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저자는 이상 문학에 대해서 이제는 정통해석을 내놓았다고 자부하는데, 글쎄? 이렇게 하나로 해석이 완벽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로서 이상의 문학은 저급한 문학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완벽한 해석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참신한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이상 문학에 접근하는. 그래서 읽는 내내 재미도 있고 즐거웠다.

 

덧글

 

읽으면서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이상을 자꾸 李霜으로 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상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어김없이 李霜으로 나오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상이 발표한 작품을 사진으로 실어논 부분에도 이상은 李箱으로 나온다. 왜 李箱을 자꾸 李霜으로 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왜 제목이 이상 평전이 모르겠다. 이 책은 이상의 삶에 대한 평가보다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냥 이상 문학 연구로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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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청준이 쓴 짧은 소설.

 

오히려 이창동 감독이 만들고 전도연이 주연으로 출현한 영화 "밀양"이라고 해야 더 잘 알까? 이청준이 쓴 "벌레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든 영화인데.

 

용서의 문제를 다룬 소설과 영화.

 

범죄자가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자신을 용서해 버리는 상황.

 

이 때 피해자는 어떤 심정일까?

 

당한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용서를 해야 할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고 있는데, 누군가가 용서를 해버리는 상황.

 

그런 기막힌 상황.

 

그 때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용서를 해야 할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지니게 될까?

 

대통령이란 자리가 이렇게 쉽게 용서를 할 수 있는 자리인가?

 

대통령에게 사면권을 주었다고 사면을 할 수 있을까?

 

정작 사면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받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있고, 또한 사면이라는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이런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용서라는 형식의 사면을 받아야 할까?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용서라는 건 피해자가 먼저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자신의 행위를 처절하게 성찰한 다음에야 그제서야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길 뿐이고, 자기가 자기를 용서한다는 이야기는 이 다음에, 정말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치열한 반성과 성찰과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 다음에야 비로소 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일텐데...

 

소설인든 영화든 가해자가 자기보다 높은 존재를 등에 업고(좀 과격한 표현인가?) 자신을 용서해버리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용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과 그리고 또다른 피해만이 남을 뿐이다.

 

사면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용서의 문제, 생각이 난다. 이 놈의 사면 때문에...

 

정작 용서를 받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사면이라는 허위 속에 함께 포함되어 용서를 희석시키고 있고, 사면이라는 이름으로, 더 높은 존재에 의한 사면(용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지도 않고 용서받은 양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남의 죄까지도 알아서 용서를 해주는 상황. 전능한 용서?

 

하여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느낌. 아무런 힘도 없는, 위에서 조종당하는 느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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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교사 양성과정
홍세화.이상대.이계삼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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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범생이 집단이 모인 공간이 교사 집단일텐데... 이들을 대상으로 불온하라고 연수를 하다니...이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렇지 않으면 우리 교육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불온한 교사 양성이라는 강좌에 교사들이 들으러 왔다는 사실 자체도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경험한 교사들은 범생이 중에서도 범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학창시절에 범생이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교사들과 부딪히지 않고 학교 생활을 했으며, 또한 성적도 좋아서 교사들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대학에서도 다른 방면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공부를 했으며, 그런 결과로 임용고시라는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을 하였을 터다.

 

이런 과정을 거친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가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요즘은 교사들의 경제적 지위도 높아졌으며(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정규직에다가 평생이 보장되어 있는 직장에, 월급이 밀릴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에, 월급도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고, 방학이 보장되어 있다), 또한 경제적 지위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교사가 되는 경향이 많다.

 

예전에는 돈이 없는 머리 좋은 학생이 사대나 교대를 가서 교사를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면(그래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어려운 가정형편의 학생들은 교사도 되기 힘든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교사들, 지금의 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리라. 그러니 교육이 안된다는 둥,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둥 이런 하소연들을 학생이 아닌 교사들이 하고 있는 실정이리라.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학생과 교사가 겉돌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것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라는 강좌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하리라.

 

불온하다는 얘기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을 그 곳의 시선이 아니라 밖의 시선에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즉,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밖을 볼 수 있는 능력,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그래서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태도를 지닌다는 얘기다.

 

이 강좌에서도 나오지만 기대란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는 순응적인, 무비판적인 태도라면, 희망이란 내가 하겠다는, 내가 해야만 한다는 그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리고 비판적인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교사들, 적어도 학생 앞에서 삶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라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강고한 교육의 틀에 얽매여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로 하여금 이 체제에 빠져들어가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하여 교사들은 불온해야 한다. 불온하지 않으면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교육제도, 교육현상을 고착화시키는데 앞장서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규교사들, 한 때는 벌떡 교사, 비판의식이 있는 교사였으나 지금은 한걸음 떨어져 있는 교사들이 들으면 좋은 강좌라고 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들었겠지 하고는 있지만, 제목에서 주는 불온이라는 말을 듣고도 강좌를 듣겠다고 온 사람이라면 이미 볼온한 교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라는 조직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많지만, 학교를 벗어났다고 해도 교육을 그만둔 것은 아니라는, 교육은 단지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꼭 교사들이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교사들은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주된 내용이 교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때 공부는 수업방법론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 또 교육과 관련된 폭넓은, 그리고 깊이 있는 공부를 의미한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몇몇 교사들끼리라도 모여 이야기한다면 교육은 조금씩이라도 변해갈 희망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라는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안 돼. 이미 틀렸어. 이런 얘기는 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세 아닌가 반성하라고 한다.

 

학교라는, 교육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그냥 내맡기지 말고 그 흐름을 밖에서 볼 수 있는 자세, 이것이 불온한 자세이고, 밖에서 본 것을 가지고 내부에서 흐름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 불온한 교사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교사들이여, 제발 불온해져라. 불온한 교사들이여, 그대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라.

 

그런 교사가 많아져야 한다.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사들 자신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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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론 현대의 문학 이론 26
질 들뢰즈 외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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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란 작가 자체가 우리나라 이상이 받는 대접을 받고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을 구사하는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 대해 쓴 책은 읽기 전부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할까?

 

사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동 저작도 많지만, 독자적인 저작도 많은데, 이 책은 둘의 공저다.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가타리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이들이 펼친 내용을 따라가기도 벅차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조건이 있다. 하나는 카프카의 작품을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읽었을 것. 최소한 '변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유형지에서', '개에 대한 연구' '시골 의사'와 같은 단편과 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소송, 실종자"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최소한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개념은 알 것. 이들의 철학 개념이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데 도처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카프카의 작품을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들 철학자들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 이게 뭔 소린가 하면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즉, 책을 읽어가면서 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빛에서 점점 멀어지는 읽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피로에 나가떨어지게 한다. 김현의 말마따나 '책 읽기의 괴로움'이 된다. 그런데, 이들 철학자의 개념에 조금 익숙하다면 '행복한 책읽기'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것도 아니니, 대략 개념에 대한 맥락만 이해하면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우리 자신이 읽은 카프카를 더붙인다면 훌륭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산 책인데... 최근 카프카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책도 사놓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책을 다시 읽다보니, 한 부분만 읽었다. 그 부분에만 표시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읽은 부분이 제3장 '소수집단의 문학이란'이다. 아마도 제목과 관련지어서 이 부분만이라도 이해하자는 생각으로 읽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건 읽기의 실수다. 어리석은 읽기였다. 물론 제3장부터 읽는 것 좋다. 아니, 어쩌면 제3장부터 읽어야 더 좋을 듯하다. 다 읽는다면 말이다. 우선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읽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소수성이란 정통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 통념에 대비되는 존재를 소수집단이라고 보면 되니, 독일인도, 체코인도 되지 못하고, 유대인으로서, 변형된 독일어에 관심을 가진 카프카는 소수집단에 속하는 문학을 한 사람이 된다.

 

이 다음에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여러 모습들을 이야기하는데, 머리에 와닿은 개념은 탈영토화, 재영토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에서 벗어나(탈영토화), 자신의 다른 영토를 구축하는 것(재영토화).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탈영토화, 재영토화하는데 탈주가 이루어지고, 이런 탈주는 변신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되고, 이러한 탈주들은 각자의 욕망을 지니고 집단을 이루며, 연결되고, 배치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는 것.

 

결국 카프카의 문학은 '나무'처럼 중심에서 확고히 연결되어 나아가는 문학이 아니라, '리좀'처럼 각자의 영역이 자신만의 특성을 지니면서 방향없이 나아가는 문학이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리좀'이 잘 이해 안되면 감자를 생각하면 된다. 감자의 뿌리가 땅으로 들어가 감자들이 열리듯이 카프카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이 감자들처럼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는 얘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독립적이지 않은 존재들, 서로 연결이 안되어 있을 것 같으나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존재들, 그래서 결론이 날 수가 없는, 영원히 흩어나가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이란 얘기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를 이 책은 하고 있다.

 

덧말

 

아쉬운 점은,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용어에 대해서 맨 뒤에 부록으로 해설을 달아주었으면 하는 것과, 번역상에서 작품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가령 이 책에서는 "심판"이라고 하는데, 요즘 읽은 솔 출판사에서는 "소송"이라고 하고, 이 책에서는 "아메리카"로 나와 있는데, 지금은 "실종자"라고 하는 것 등. 작품 명에 대해서도 헷갈린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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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편지 -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카프카 전집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외 옮김 / 솔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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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이구나, 이런 사랑은 집착이지 않을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랑을 하는구나,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이런 사랑.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든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어쩌면 광적이지 않을까, 정신병적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그런 편지들이다.

 

사랑한다고? 단 한 번을 만나보고서? 무슨 운명적인 사랑? 작가적 감수성으로, 자신의 인생에 느닷없이 들어와버린 펠리체란 여인에게 카프카는 열정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첫편지 이후, 그는 거의 매일 여러 통의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매일 편지를, 하다못해 그냥 서명이 든 엽서라도 보내 줄 것을 펠리체에게 요구한다. 편지가 오지 않으면 왜 편지를 하지 않았냐고 징징거리는 편지를 보낸 카프카.

 

그의 작품에 나오는 분열적인 모습, 광적인 모습, 자신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그의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이렇듯 열정적으로 펠리체의 사랑을 갈구하던 그는, 어쩌면 펠리체라는 살아있는 육체를 지닌 여인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이상적인 여인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남보다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되는 그런 사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은 멀리 있어야 한다. 인간의 세계에 내려온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는 박해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인간과 함께 했기에 신성을 잃고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화된 신은 카프카에게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 자꾸, 멀어질 수밖에...

 

자신에게 필요한 공간은 지하실이라고 하는 사람, 그런 자신에게 식사를 제공해줄 사람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에게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이 카프카와 펠리체 만남의 비극이다.

 

이년 동안은 격정적으로, 그리고 두 번의 파혼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약혼을 하고 함께 살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편지로 주고받던 이상적인 세계와는 다르게 현실의 세계는 그들을 부딪히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함 부딪힘 속에서도 관계를 이어나가던 그들은 한 번의 파혼, 그 다음 간신히 이어져 나가던 관계를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음을 안 카프카에 의해서 두 번째 파혼이자, 영원한 이별로 이어진다.

 

카프카는 두 번째 이별의 근거로 자신의 폐병을 들고 있지만, 사실 폐병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이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사랑과 현실의 세계는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편지들은 소중하다. 카프카의 내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문학에 목숨을 걸고 있었는가를 편지들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이 그를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작가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몇 년 동안 펠리체는 살아있는 육체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는 문학으로 존재했다고 해야하니까. 펠리체로 인해서 그는 문학을 살 수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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