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교육이 유행이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진로교육이지...

 

학교에 진로교사를 파견했다고, 그들이 교육을 한다고 진로교육이라고 할 수 있나?

 

도대체 진로교육이 뭐지?

 

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무작정 진로 교과서를 만들어놓고, 진로교사로 연수를 시키고, 학교에서 진로교육을 하란다.

 

진로교육이란 쉬운 말로 하면 학생들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교육을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따로 진로교과목이 있을 필요가 없는데...

 

이게 진로교육의 정의라면 이미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을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아닌가.

 

이번 호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직업을 알려주고, 지금 적성을 파악하게 해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게 하는 것, 이것은 진로교육의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지금 현재 있는 직업을 가지고, 학생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면 이미 사라져버린 직업이 많을텐데도, 교육을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을 하면서 진로라는 앞으로 나아가는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니던가.

 

여기에 진로교육이란 결국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가를 강조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벌어서 잘 먹고 살 수 있나를 가르치는 교육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 진로교과에서 거창고등학교 식의 "직업 십계명"을 강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 삶에 대한 태도,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인문학적 관점, 철학적 성찰... 이런 것들은 빠져 있는 진로교육은 '소가 없는 만두'와 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로! 진로! 하는 이 때, 민들레 이번 호는 시의적절하게 주제를 잡았단 생각이 든다.

 

정말로 필요한 진로가 무엇인지, 이번호에도 나오지만 그것이 단순한 진로(進路)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살아야 할 길, 진로(眞路)를 찾을 수 있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진로는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이미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서 무언가를 더 만들어가는 것이다. 즉, 진로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교육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무언가를 자신이 스스로 구성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금 진로교육이 놓치고 있는 면을 잘 짚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 진로란 무엇인가?

 

이것은 진정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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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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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상처로 남는다. 그냥 놓아두면. 그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상처는 자신의 내부에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제는 상처가 자기 자신이 된다. 상처가 옹이가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옹이가 되는 순간을 겪지 않으면 상처는 영원히 상처로만 남을 뿐이다. 그것을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다. 상처는 언젠가는 덧나고 마니까.

 

옹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옹이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무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 옹이들이 나를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옹이는 아프다. 딱딱하게 굳어있기에 그 굳음을 견디기까지 너무도 많은 아픔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상처가 꽃이 되게 하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것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처를 옹이로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그래서 그 옹이가 자신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무늬라고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상처를 꽃으로 만들라는 말은 어쩌면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오만함일 수도 있다.

 

말로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마도 이 책에 나오는 건우 엄마 같은 사람이리라. 자신은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있지만, 실제로 자신은 또 자신의 가족은 그런 상처있는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상처에서 무늬를 보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무늬는 없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존재하기에 인정하기는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그 무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책에 나오는 건우 엄마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한 생각은 바로 그것이다.

 

건우 엄마처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처를 정말로 무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그것대로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

 

그 마음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큰 유진이의 부모는 이러한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딸이 그 상처를 상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이가 받을 상처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사회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쪽에 더한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렇다고 감춘다고 일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터지기 때문이다. 상처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기 때문에, 계속 곪고 있기 때문에 그 상처는 언제간 터진다. 그 때는 더 큰 상처가 되고, 그것은 옹이가 아니라 흉터로만 남게 된다. 삶의 무늬가 아닌 삶의 짐이 된다.

 

그 과정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가족이 바로 작은 유진이의 가족이다. 할아버지부터 부모까지.. 그들은 감추려고만 했지 그 상처를 바로 바라보거나 치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치유는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들처럼 감추려고만 하면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은 유진이 지니고 있었던 감추어졌던 상처가 큰 유진을 만나면서 드러나게 되고, 결국 그것이 터지게 되는 과정, 터져서 그것이 흉터가 되느냐 무늬가 되느냐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

 

결국 큰 유진이나 작은 유진이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상처와 맞닥뜨리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듬어주려는 쪽과 애써 감추려고 하는 쪽. 결국 상처는 드러내고 치유해서 옹이로 만들어야 삶의 무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폭력.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에게서 더 잘 일어나고 있는 이 폭력은 당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데, 가해자가 주는 상처도 상처지만 주변 사람이 주는 상처도 더욱 크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소설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하고, 그 간접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나는 작은 유진이의 가족처럼 상처를 묻어두려고만 하는가, 아니면 큰 유진이의 가족처럼 상처를 드러내되 치유할 수 있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다 이해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척일 뿐인 건우의 엄마처럼 하고 있는가.

 

소설, 단순히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 영화가 장애인 성폭력 문제를 드러내게 했다면, 이 소설은 어린이의 성폭력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이들이 이 상처를 삶의 무늬로 만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큰 유진과 작은 유진의 시점에서 교대로 소설이 전개되고 있어서 읽는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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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감각 기르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거침없는 대화 지식여행자 1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옥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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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

 

이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발명 마니아"였다.

 

그냥 창의적인 생각을 다룬 책이겠거니 하고 샀는데, 읽다보니 이거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발명한 것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발명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발명하고 싶은 것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이 깔려 있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옳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속담 인류학"이라는 책에서도 요네하라의 방대한 지식에 놀라고 말았고.

 

그럼에도 요네하라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녀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저에 깔고 있었는지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프라하에서 러시아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은 특이한 경력.

 

일본과 프라하에서 상반된 교육을 받고서 자신의 성격을 형성한 요네하라.

 

일본의 교육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프라하의 교육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덕분에 그녀는(아버지 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버지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동시통역사가 되었다.

 

러시아 학교를 다녔으므로 러시아어는 잘했음으로.

 

또 통역의 세계는 자격증이 필요없고, 아버지가 누구냐가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데 이런 통역의 세계는 "말"을 다루는 세계다.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그치지 않고, 어떨 때는 사람 자신이 된다.

 

이 대담집을 읽다보면 요네하라는 시각과 청각을 자주 구분한다. 그리고 시각보다는 청각이 논리를 키우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시각은 문자로 이루어지고, 또 기억보다는 기록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나열식이 되어 현학적이 되지만, 상대에게 이해하기 쉽게 다가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

 

반면에 청각은 음성으로 이루어지고, 기록이 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논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어느 책에서 읽었던 상황이었는데...

 

강연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강연을 받아적기에 급급하기만 한 모습을 보고, 받아적기를 금지시키고 그냥 듣게만 했다는 이야기.

 

글에, 기록에 의존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죽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인터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부분 자신의 써온 글을 읽기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질문에 대답이 궁해서 버벅거리기 일쑤지.

 

평생을 직설적으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요네하라의 성격이 왜 그렇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삶을 산 요네하라가 부럽기도 하다.

 

비록 일찍 세상을 떠 더 많은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자유롭게 산 사람, 그러나 남에 대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던 사람.

 

통역은 말을 그대로 옮겨주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해주는 일이라고 말한 사람. 그런 요네하라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이것에 더하여 정말로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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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 애지시선 48
박일환 지음 / 애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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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이기기 위해서 한다.

 

이기지 않고 지기 위해서 싸움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가끔은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싸움을 한다.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다. 이기기 위해서 지는 싸움을 한다. 싸움은 지지만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이기기 위해서 지는 싸움을 하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지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시인은 여기서 약한 존재의 편에 서라고 한다.

 

약한 존재의 편에 서서 약한 존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지는 싸움이다. 이 싸움은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비극적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즐거운 싸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지는 싸움

 

꽃을 던져라

저들은 곤봉과 방패로 중무장했다

 

꽃을 던져라

저들은 돈으로 시장과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니 꽃을 던져라

화염병과 사제폭탄 대신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되도록이면 우아한 격렬함으로

밤이 새도록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백번 싸워 백번 지는 싸움

그러니 싸워 이기려 하지 마라

다만 항복하지도 마라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지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

 

박일환, 지는 싸움, 애지. 2013년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 그러한 자본의 힘이 정보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시대. 개개인의 정보는 물론이고, 공개가 되어서는 안되는 일까지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개를 하는 시대, 정보를 힘있는 자들이 언제든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시에서와 같이 지는 싸움을 하는 일. 꽃을 던지는 일. 절망하지 않고 즐겁게 싸우는 일. 똑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의 공동체로, 약한 존재끼리 서로서로 보듬고 함께 어울리는 일.

 

그것이 바로 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 지는 싸움이 바로 이기는 싸움이 된다. '지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라고 했으니...

 

하여 시인은 강한 존재보다는 약한 존재에 더 시선을 준다. 그들이 바로 이 사회를 이끌어온 기둥이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약한 존재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기대.

 

그런 세상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시인의 눈. 그 눈은 바로 '볼록한 눈'이다.

 

볼록한 눈

 

차로 산길을 돌아가다

꺾어지는 곳에서 만난 볼록거울

 

위험은 항상 사각(死角)에 숨어 있으나

살다보면 돌아 나올 수 없는 길이 있다

굽잇길 저 너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사주 경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럴 때 저 볼록거울

툭 튀어나온 눈처럼 반가운 것들이 있어

또 한 굽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여, 볼록눈을 한 초병이여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행여

눈꺼풀을 내리지는 말아라

 

박일환, 지는 싸움, 애지. 2013년

 

약한 존재들이 위험에 처했어도 그들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야말로 지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때 그들이 그나마 '무릎 꿇지' 않도록 도와주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시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인은 이 사회의 위험에 대해서 약한 존재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시인은 '눈꺼풀을 내려서는' 안된다. 늘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니고 약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환기시켜주어야 한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시인의 역할이 충분히 잘 드러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약한 존재들. 그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이 시집에는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남일당, 두리반, 영도 조선소 크레인, 희망버스, 강정, 새만금, 파업 노동자 등등.

 

결코 어렵지 않은 언어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이 땅의 그림자(이 시집의 해설에서 해설자가 평한 용어)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이 땅의 그림자들이 행복해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시인은 눈을 똑바로 뜨고, 또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의식이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게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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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알고 있다
대니얼 샤모비츠 지음, 이지윤 옮김, 류충민 감수 / 다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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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감정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도 두 가지로 갈린다. 감정이 있다와 감정이 없다로.

 

우리 인간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식물에게도 우리와 같은 감정이 있다고 한다면 식물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그 결론으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까지 나아갔는데, 그래서 동물 실험을 세계적으로 금지하기도 하는데, 식물에게도 동물과 같은 인식을 적용한다면 식물에 대한 실험 역시 동물과 같이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다.

 

시험 뿐만이 아니라 도대체 우리가 식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 있는 생물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책은 식물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보고 냄새 맡고, 기억하는 식물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듣기는 빠져 있다.

 

음악을 들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연구 결과가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았다고 하고, 여러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통해 식물의 듣기는 유보하고 있다.

 

듣기를 유보하더라도, 식물은 빛을 느끼고 있으며,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전기 자극에 반응을 하기도 하며, 스트레스를 기억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간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과 비슷한 작용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아마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식물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지만, 지금 이 정도 연구만 해도 식물에 대해 몰랐던 것, 또 어렴풋이 알았던 것을 객관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 생물,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인간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식물도 우리와 조상이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런 다양성이 우리를 지금 우리답게 존재하게 해주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과학책이라고 하지만 쉽게 쓰여 있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읽으면서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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