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은 내게 두 사람을 통해서 다가왔다.

 

한 사람은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시집에서 자신의 스승으로 구상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구상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다음으로 듣게 된 것은 화가 이중섭.

 

이중섭이 구상의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 둘은 모두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더 어려움을 겪었던 이중섭을 구상이 많이 도와주었다는 얘기.

 

이 시집에 나온 이들의 관계.

 

  향우 이중섭이 이승을 달랑달랑 다할 무렵이었다.

  나는 그래도 검은 장미빛 피를 몇 양푼이나 토하고 시신처럼 가만히 누워 지내야만 했다.

  하루는 그가 불쑥 나타나서 애들 도화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애호박만큼 큰 복숭아 한 개가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 싸 대신 조그만 머슴애가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그런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으며

  <이건 또 자네의 바보짓인가? 도깨비 놀음인가>

하고 픽 웃었더니 그도 따라서 씩 웃으며

  <복숭아, 천도 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흥얼거리더니 휙 돌쳐서 나갔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97쪽. '비의' 중에서

 

말이 필요없는 친구 관계.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해방직후에 북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응향"지 사건에 구상도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이 "응향" 사건은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니, 뭐.

 

구상이 시인이라고 알고 있고, 교과서와 비슷한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 시는 '초토의 시'인데, 해방과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시이다.

 

작자에게 있어서도 시 속에 사상적 요소를 보다 많이 담는 이와 감각적 경험이 요소를 보다 많이 담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나는 앞쪽이라 하겠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자서'에서

 

헌책방에 들러서 구하게 된 책인데, 이 책을 이제는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된 시집이고, 오래 된 시지만, 이 시집에서는 오늘날 물신주의에 물든 우리들을 꼬집고 있는 시가 실려 있다.

 

어쩌면 물신주의는 인간이 함께 산 이래 계속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이루고 있는 내용 역시 성경에 나오는 모세 때 이야기니까.

 

수천년 동안 이 물신주의에 벗어나지 못한 인간사회의 모습. 지금. 우리.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로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과연 이런 사회가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것이다가 아니라 아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이런 물신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도 없는 사람들보다는 있는 사람들이 더 물신에 물들어 있다. 물들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편적인 양 말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그 옛날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니 모세의 말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외침.

 

사람을 사람으로 우선 생각하는, 그런 우리들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말하노니

새해 너희가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너희가 지금 우러러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를

먼저 몰아내야 한다.

 

너희가 너희 식탁에서 유해식품을 사라지게 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고장에서 매연을 없애려먼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집안에서 단란을 누리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형제나 이웃과 화목을 이루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어린 것들을 력사(轢死)에서 구해내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지아비와 아내의 정조를 지키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백주에 살인강도를 만나지 않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물에서 바다에서 떼죽음을 면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학원에서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병원에서 인술로 병을 고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법의 공정한 보호를 받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을 메우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서로 비정과 소외 속에서 벗어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저 6.25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그리고 너희가 영원이나 믿음이나 사랑과 같은

보이지 않는 힘과 삶의 보람들을 되받들어

마음의 평정 속에서 꿈과 일을 일치시키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한다.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말하노니

새해 너희가 밝고 떳떳한 삶을 이룩하려면

너희가 지금 우러러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를

먼저 몰아내야 한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69쪽-71쪽

 

역시 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이 시는 지금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시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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