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슈퍼 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도대체 무얼 잃어버렸다고 할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결국 그들은 그들의 부를 잃어버렸다고, 그들의 권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들이 잃어버린 부와 권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로, 평등으로 다가온 것들이었는데, 이 잃어버린 10년이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그들은 다시 되찾으려 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거의 되찾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가고 있으며, 부자들은 감세 효과로 인해서 덜 내고, 더 많이 가져가고 있으며, 정치권은 금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게 우리나라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몇 년 전에 1%에 반대하는 99%의 시위가 있었는데, 그 시위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지금, 무엇이 변했는가 하고 따져보면 변화는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1%는 잘 살고 있으며, 99%는 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 생각해볼 만한 제목을 단 책이 나왔다.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제목은 이렇지만 읽어보면 평등에 관한 정치학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부자들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역사보다는 정치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의 주요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그 당내에서도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이들 중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세금 정책이 어떻게 변해갔는가, 세금 정책의 변화에 따라 중산층이 어떤 변화를 보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책인데...

 

미국에서 한 때 최고위 소득자들에게 91%의 세율을 적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런 세율을 적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지, 세금을 피해가는 편법들을 얼마나 많이 자행했는지, 그리고 또 고율의 세금이 투자를 막는다고 얼마나 방해 선전들을 했는지...

 

그럼에도 그런 세율이 적용될 때 미국의 중산층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생활수준이 평준화되어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했으며, 생산성도 더욱 높아졌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객관적인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서 나온 책이고, 미국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에 고율의 세금이 결코 민주주의에 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부자들은 세율이 높아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

 

여기에 그들이 들고 있는 투자의욕 상실, 생산성 저하라는 논리는 세금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사회를 더 평등하게 만들어 투자의욕이 늘고,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는 하고 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경제, 정치 현실과 겹쳐지지 않는가. 또한 여기에 노조에 관한 문제도 나오는데,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를 연상시킨다. 강한 노조가 있었을 때 사회는 더욱 평등해지며, 중산층은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 노조가 약화될수록 빈부격차는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에서 중산층이 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강한 노조이고, 또 하나는 고소득자에 매기는 높은 세금이다.

 

우리나라 정치권들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망설이고 있는 지금, 증세를 통한 복지를 구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지금, 이 책은 부의 독점이 무너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이라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할지 이 책을 펼쳐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어떤 정치인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지니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국민들이 이 책을 읽고 깨어있으면, 즉 깨어있는 99%가 되면 1%도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서 기꺼이 부를 양보할테니 말이다.

 

한 때의 미국처럼 91%의 세율을 지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율은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가 없다면 자본가도 없다. 중산층이 계속 붕괴된다면 부자들도 존속하기 힘들다. 무엇이 서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인지... 그 길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 현실을 생각하고 현실에서 우세한 논리들을 반박할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미국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우리가 건질 것이 많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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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캠프를 하게 됐다.

 

별다른 프로그램으로 빡빡하게 운영하는 것이 아닌 그냥 자연스럽게 하루를 책과 함께 즐기는.

 

그래도 명칭이 밤샘 독서라 하루 밤을 새우며 책과 지내야 하는데...

 

자정이 되기 까지야 이런 저런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해도, 자정 이후부터는 오로지 책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밖에는 비도 오고 하는데, 공기가 무거운데, 눈꺼풀은 더 무거워지는데.. 뇌는 점점 하얗게 비어가고 있고, 그래도 한 쪽에서는 밤샘을 하면서 책과 지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고 있고.

 

책이 꼭 어려운 책만은 아니지 않은가. 책이면 모두 되지 않은가.

 

책에도 우열이 있는가? 우열이 있다고 하는 기준 자체가 성립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더 무거워지는 머리를 주체할 수가 없어 읽던 책을 잠시 덮어둔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밖을 보다가, 어떤 책을 보면 내가 밤을 자연스레 샐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그러다 최근에 읽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글을 떠올렸고, 그의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생각해냈고, 그 작품이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으로 다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애니메이션으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많이 보았는데, 만화책은 대충 가볍게 한 번 슥 읽고 지나간 사실이 떠오르고.

 

운이 좋게도 만화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7" 있었고, 그래 잘 됐다 이 책을 보자.

 

특히 이 책이 환경에 관해서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책이고, 기상이변이라는 환경 재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 때 이 책은 더욱 생각할거리들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오무로 대표되는 곤충들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만큼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망가뜨린 환경을 지키려는 존재라는 사실, 그들의 겉모습이 아닌 그들 존재의 본질을 느끼는 나우시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공멸을 향하야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있다.

 

물론 만화책은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들을 생각하면 한 편의 철학책이 나오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지금 일어나는 환경재앙들은 결국 우리 인간이 초래한 것이고, 그 해결책도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전쟁을 통해서는(그 전쟁이 인간끼리이든,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벌이든)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한 결국 미래 인간의 운명은, 또는 인간사회의 발전은 여성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여성성이 단순히 여자라는 뜻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 없는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줄 줄 알며,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며, 겉모습이 아닌 존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생각하게 해준다.

 

주인공인 "나우시카"야 말할 것도 없고,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크샤나" 역시 여자로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이 남성성을 대표한다면 평화는, 사랑은 여성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을, 자연을 감싸안는 나우시카와 같은 존재가 인간을 인간답게,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나우시카가 있는가?

 

4대강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고, 문건에 대한 공개 여부, 개인정보에 대한 사찰 문제, 그리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환경 문제 등등...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우리에게 나우시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밤샘 독서... 다시 읽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청소년용이 아니라 이는 어른용이다. 정말로 어른들이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전철 안에서든, 또는 다른 공간에서든 조그만 전자기계만 들여다보는 모습에서 탈피해서 이런 만화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지...

 

그러면서 우리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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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이다" 제목이 참...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공간이자,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문으로 인해 안과 밖이 나뉘고, 안과 밖이 연결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문이다'라는 말은 나는 경계에 서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쪽도 아니고, 저 쪽도 아닌, 그러나 양 쪽을 다 아우르고 있는 그런 상태.

 

이 말은 바로 시인에게 해당한다. 시인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해주는 경계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또한 시인은 현실 세계에서 이상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현실에 발디디고 있으면서도 이상을 추구하기에 어느 한 쪽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이다" 라는 제목은 참 도발적이다. 이 쪽과 저 쪽을 연결하겠다는 의지로 들리기도 하기에...

 

한데, 가만 생각해 보면 경계에 있다는 얘기는 이 쪽도 저 쪽도 모두 상관 안 하겠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언제든지 닫을 수 있는 상태.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쾅 닫아버리면 되는 그런 상태. 이게 바로 문이다. 하여 문은 자신을 자신만의 세계에 가두는 역할도 한다.

 

내 의지에 따라 세상과 소통도 하고, 또 단절도 할 수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바로 "나는 문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상태다.

 

문정희 시인 정도 되면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으리라. 그런 경지에서 이 시집에서는 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런 시에 대한 이야기 속에 은연중에 현실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나는 문이다"라고 할 수 있겠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그런 경계의 삶, 문의 삶을 살고 있다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시를 쓸 수 없다고 절필한 시인도 있다고 하는데, 이 시인은 문을 닫아걸었다. 그 닫아걸음으로써 문을 열고 있다. 왜 문 닫음이 일어났는가를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으로서 이제는 노년의 경지에 든 문정희 시인은 어느 한 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문이라고 한다. 이 쪽과 저 쪽을 다 들여다볼 수도 있고, 다 볼 수도 없는.

 

또 한 편 제목에서 문정희 시인의 성이 생각난다. "나는 문이다" 이 말이 "나는 문정희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문정희 시인의 성에 있다.  

 

한자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제목. 나는 나다. 그러므로 나에게 어느 한 쪽을, 어떤 경향을 강요하지 말아라.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래서 이 시집에서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소위 말하는 순수시라는 것도 나온다.  모두가 읽을 만한 시다. 시인의 경지가 느껴진다.

 

이 중에 내 맘에 드는 두 시.

 

"응"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문정희, 나는 문이다, 뿔, 2007. 초판 72-73쪽

 

 

물가

 

세상의 자식들은 모두 물가에 산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그래서 늘 가슴을 태운다

발 하나만 잘못 디디면 절벽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식인 상어가 날뛰고

시퍼런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어

더 말해서 뭐 하나

가시풀 속엔 뱀들이 우글거리고

어떤 꽃들은 독을 퍼뜨리니

어머니들은 자나 깨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의 자식들이

언제나 철부지로 물가에서 살기 때문에

더 말해서 뭐 하나

세상의 어머니들은

물가의 자식들을 걱정하느라

자신이 서 있는 절벽을 까맣게 잊는다

이런 효도가 또 어디 있겠는가

 

문정희, 나는 문이다, 뿔, 2007. 초판.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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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의 전쟁 - 시사인물사전 18
이휘현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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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라는 프레이리의 말이 있다. 프레이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루쉰이 한 말에도 결국 사람이 걸어가야 길이 된다는, 그 길이 바로 희망이라는 말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하고, 그 길은 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들의 눈에 띄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의 눈에 띤다는 얘기는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가 되고,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는, 자신의 삶이 독창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도 되고.

 

이름없는 사람들, 독창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그들은 남들에 묻혀 있다. 여기에는 어떤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작동할 수가 없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만, 그들의 길은 너무도 작고 짧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삶. '장삼이사'들의 삶.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그저 그렇게 묻혀서만 존재하면 삶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왔으니 이 세상에 자신의 발자국 정도는, 자신이 간 길을 남들이 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길을 내는 일은 '전쟁'보다도 더 힘든 일이라고 해야겠다. 물론 전쟁보다 더 힘들 수는 없겠지만, 대량살생을 하는, 파괴와 죽음을 부르는 그 전쟁보다는 건설과 삶을 부르는 삶이 더욱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할 수고 있다.

 

여기에 그러한 건설과 희망의 길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상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김기영, 미야자키 하야오, 월트 디즈니, 이철수, 이현세, 제임스 카메론, 데이비드 오길비, 양영순, 폴 버호벤, 잉그마르 베리만, 이명세, 리들리 스콧, 심형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이다. 주로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만화가, 판화가,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업종이 상상력과 긴밀한 관련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들 업종에서는 상상력을 자본으로 환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름없이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추구한 사람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자본의 힘으로 전환시킨 사람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 가장 자본의 힘으로 약하게 전환시킨 사람이 이철수인데, 이철수 또한 자신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그의 작품 활동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여 자본의 힘으로 전환시킨 사람들 얘기가 많아서 조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이 사람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상상력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 지금 시기는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그 지식을 다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상상력, 창조력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들의 삶에서 배울 것이 많다.

 

이들이 상상력과의 전쟁을 통해 만들어낸 길을 우리는 볼 수 있기에 그 길을 바탕 삼아 우리들만의 길을 만들 수 있고, 또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에게도 우리들만이 길이 있을테므로.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이 말은 바로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 내 길, 그 길을 만드는데,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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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떠나 헌책방에 숨어 있었다

스스로 떠나지 못했으니 버림 받았다 해야 옳았다

헌책방 서가에 숨어서 또다른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슬픈 시집

제목도 슬픔이 나를 깨운다다

세상이 온통 슬픔으로 차 있다

슬픔으로 차 있는데 누구도 슬픔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러니 한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정치는 바르게 다스린다는 의미를 벗어나 제 이익 찾기 바쁘고

경제는 있는 자들의 잔치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교육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죽이고 있으니

슬픔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슬픔이 나를 깨우지 못한다

나를 잠기게 한다

이 황인숙의 시집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처럼 우울하다

우울함이 가득차 있다

그래서 제목들도 밤, 덤, 슬픔, 가을 등이 많다

하나같이 어두운 측면이다

이런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는 것은 밝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이 나를 깨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깨우지 않는 슬픔, 그것은 슬픔이 아니다

우울, 절망, 좌절

이 속에 웅크리고 웅크리고 침잠해 들어갈 뿐이다

그 침잠 속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슬픔의 힘이다

기쁨을 의식하기에, 기쁨을 향해서 움직이기에

'슬픔이 나를 깨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헌책방에 숨어 있던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오직 하나의 시 때문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세 행짜리 시, '삶'

 

   삶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7년. 재판 2쇄. 34쪽

 

빚지고 있다. 삶이란 아직 빚을 갚지 못했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

빚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그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생각도 없이 살면 그것은 삶에 대한 배신이다

이 짧은 시에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무엇을 갚아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삶은 시인이 이야기한 '덤'에 불과해진다

우리 인생, 결코 덤이어서는 안된다

하여 밤은 아침을 예비하고, 가을은 봄을 예비하며, 슬픔은 기쁨과 함께 존재하고, 덤은 무엇이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시가 우울하다고 시를 읽는 사람까지 우울해지지 않는다

우울한 시를 읽으며 자신의 우울을 치유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

다시 주인을 맞이한 이 시집

슬픔을 통해 나를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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