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새에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7
민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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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 시인의 시는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와 '수유리1'을 알고 있었다. 시인이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서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삶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삶에는 현실에서 극복해나가야 하는 문제들과 역사를 통해 우리가 꼭 알고 가야할 것들이 있는데 이를 시를 통해서 표현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집에 지니고 있는 민영 시인의 시집이 겨우 "엉겅퀴꽃" 하나.

 

이번에 헌책방에서 또 한 권을 구입했다. 바로 이 시집 "방울새에게"

 

전체적으로 시들이 짧다. 지나치게 길어지는 요즘 시들의 추세와는 달리 짧게 시상을 정리해서 우선 좋았다. 시란 자고로 짧아야 한다는 생각을 아직도 지니고 있기에.

 

시집의 앞부분에서는 원숙한 노년의 경지가 느껴지는데, 이제는 한참을 달려와 달려온 자리를 돌아보고도 있으며, 그럼에도 얼마 남지 않은 앞길을 바라보고 바로 지금-여기를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다.

 

삶을 생각하는 노년의 경지라고 해야 할까.

 

뒷부분으로 가면 현실에서 시인이 떠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동에서,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들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이 시로 살아나고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일, 다시 반복이 되면 안되는 일들이 시 속에 나타남으로써 우리에게 역사란 과거의 것이 아닌 지금-여기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역사, 4.19. 시인은 예전에 '수유리'라는 시를 통해서도 이 역사적인 일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 시집에서도 또다시 다루고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4.19가 진행형이라는 듯이.

 

    落花

-수유리에서

 

하룻밤 휘몰아친

 

미친 바람에

 

활짝 핀 아까운 꽃들

 

다 떨어졌네.

 

민영, 방울새에게, 실천문학사, 2007년. 91쪽.

 

여기에 내 마음을 울리는 시.

 

   流星

-남주 생각

 

저녁 하늘에 반짝이다

 

새벽 하늘에 스러지는

 

별처럼, 덧없이!

 

민영, 방울새에게, 실천문학사, 2007년. 59쪽

 

짧은 시행 속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그래서 깊은 울림을 준다. 이것이 바로 시의 장점이리라.

 

그렇다고 이 시집의 시들이 다 짧지는 않다. 무언가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때 시인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예전에 논의가 되었던 '단편서사시' 또는 '이야기시'가 된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병든 서울'이다.

 

병든 서울

 

내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때 / 그는 남에서 북으로 가고 없었다.

양담배와 초콜릿과 추잉껌, / 지프차와 GI와 양갈보가 우글거리는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나는 / 그가 남기고 간 [병든 서울]을 읊조렸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 내게는 곧이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곡조-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모리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전쟁이 났을 때 인민군을 따라 / 북에서 내려온 오장환의 오줌 빛깔이

피처럼 붉었다는 소문은 / 그 후 누군가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우리는 그가 왜 이런 몸을 이끌고 /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는지를 안타까워했다.

1951년 가을 북으로 돌아간 그는 신장병을 앓다가 죽었으며,

영웅적인 시인의 역사는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 그가 없는 서울을 슬퍼하고 있다.

  한 집 건너 술집, / 두 집 건너 러브호텔, / 세 집 건너 바다이야기,  / 네 집 건너 정신과병원.

자본주의 정글 속에 / 독버섯처럼 만발한 병든 서울.

그 병든 서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 오장환이노래한 인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새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살펴보았다.

 

(병든 서울은 오장환의 시 제목. ""의 인용구도 이 시에서 인용)

민영, 방울새에게, 실천문학사, 2007년. 105-107쪽

 

우리의 서울은, 우리의 대한민국은 지금 안녕한가.

오장환이, 그리고 민영이 읊은 병든 서울은 이제 치유를 했는가?

우리나라는 치유가 됐는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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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국 주방장 보름달문고 38
정연철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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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다. 순식간에 읽게 된다.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임에도 이야기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또 경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무거운 내용에 빠져들어 허우적대지 않고, 그럴 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그 웃음 뒤에는 물론 쓰디쓴 현실이 자리잡고 있고,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결코 밝지만은 않음을 생각하게 하지만.

 

총 여섯 편의 소설(동화)이 실려 있다.

 

주병국 주방장, 외계인 친구 1호, 독립 만세, 쑥대밭, 껌, 쿵쿵

 

아이의 꿈과 부모의 희망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때, 물질만능주의-허영에 들뜬 삶을 살아갈 때, 도시개발로 인해 삶터가 파괴될 때, 아이들의 그 아련한 설렘-사랑, 그리고 요즘 문제가 되는 아파트 층간 소음.

 

다루고 있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모두 아이들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어린아이인 옥희의 눈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또 결론을 내지 않는다. 이야기를 과감하게 끝는다. 그래서 일종의 해피엔딩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

 

주방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 왕따임에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친구를 만들겠다는 아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개발단지의 건물들이 흉물스러움을 발견하는 아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이 등등.

 

여기서 결말이 좀 다른 것은 '독립 만세'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허영에 들뜬 사람을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을 통해, 아이의 천진해보이는(보이는 이다. 결코 천진하지 않다. 이 아이는 엄마를 그대로 따라하기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아이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행동들을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읽는이로 하여금 알게 한다. 그러니 역시 결말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가게 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바로 층간 소음이다. 층간 소음 문제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곤 했는데, 우리나라 주거 형태의 중심을 차지하는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 문제는 심각하다. 

 

소음을 방지할 수 있도록 법이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아파트라는 건물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 '쿵쿵'이다.

 

먼저 김훈이 했다는 말을 보자.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중략)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김훈의 "자전거 기행"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최우용, 다시, 관계의 집으로, 궁리. 2013년 1판. 157-158쪽에서 재인용)

 

이것을 심각하게 풀어가지 않고, 아래층과 윗층 아이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국 이 두 집은 서로 교류를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상대방이 어떤 처지인지 서로 모르게 된다. 물론 중간에서 아이가 메모지를 없애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상대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냥 불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 또 한 층이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나는데, 역시 소음은 한 집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현명한 방법이 무엇인지 각 층의 다른 방식을 아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잘못하면 얼마나 감정이 상하는지 윗층 아이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얼핏 오정희의 '소음공해'라는 작품과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고 볼 수 있지만, 어른의 관점이 아닌 아이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또 결말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하여 다음에 이 층간 소음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무거운 주제들, 그러나 무겁지 않은 진행. 무리하게 끌지 않은 결말.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을 재미있게, 빠르게,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그리고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 웃음 뒤에 우리의 현실을 깨닫도록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 그 세상이 어떤지, 아이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동화)이다.

 

동화는 아이들만의 문학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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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문학과 미술의 상호작용
김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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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근대 문학에서 어떻게 미술과 만나고, 어떤 점에서 분화가 일어났는지를 연구한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최근에 그림과 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학술적인 측면보다는,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한국 근대에서 문학과 미술의 만남과 분화를 다루는 책을 읽었다. 한국 근대문학이 이식문학이라고 한 임화의 논의가 어쩌면 미술에서 비롯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미술과 문학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어짜피 조선시대에는 시,서,화라고 하여 문인이 그림, 글씨, 시를 다함께 했으니 이때는 예술이 전문화되지 않았을 때라고 하고, 이것이 근대를 통과하면서 서양의 전문화된 예술이 도입되게 된다.

 

이런 도입을 당시에는 이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독자적인 미술 장르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나라에는 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이식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양 또는 일본의 미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양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을 우리것으로 채우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한다.

 

즉, 미술 분야에서 이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만의 미술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그런 성과를 거두게되기까지는 미술에 관련된 화가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소설가로, 시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대의 예술단체였던 카프(KAPF)만 하더라도 미술분과와 문학분과에 걸쳐서 활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태준은 미술평론으로 데뷔를 했다는 점, 자신의 소설을 미술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문학인과 미술인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임화의 이식문학론은 미술 분야에서 이식 문제의 논쟁을 보고 나름대로 문학분야에 적용하여 우리 문학의 본질을 탐구한 것이라고 한다.

 

이식문학론이 우리문학의 사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의 서양성을 넘어서 우리 문학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식문학론 하면 악명 높은 문학론, 우리나라 문학을 외국의 수입품으로 전락시킨 이론 등으로 매도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서양과 조선의 만남에서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라는 얘기다.

 

1930년대에 미술계나 문학계에서 나타난 성과들을 보더라도 문학의 식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민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좀 학술적인 책인데..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 이태준, 이상, 박태원과 같은 구인회 멤버들과 화가들 중에서 그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구본웅(이는 이상의 친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중섭, 박수근 등도 등장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 책이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다.

 

통섭, 통합, 융합이 말해지고 있는 시대, 이 책은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덧글

 

년도의 오류. 이는 별것 아닌데, 별것으로 다가온다.

 

201쪽. 문단 역시 1925년 카프(KAPF)의 해소로 ~ 하는 문장에서 카프 해소는 1935년이다.

239과 240쪽에 나오는 인물 암함광은 혹시 안함광이 아닌지... 문학평론가 안함광은 알겠는데, 암함광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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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은 내게 두 사람을 통해서 다가왔다.

 

한 사람은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시집에서 자신의 스승으로 구상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구상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다음으로 듣게 된 것은 화가 이중섭.

 

이중섭이 구상의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 둘은 모두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더 어려움을 겪었던 이중섭을 구상이 많이 도와주었다는 얘기.

 

이 시집에 나온 이들의 관계.

 

  향우 이중섭이 이승을 달랑달랑 다할 무렵이었다.

  나는 그래도 검은 장미빛 피를 몇 양푼이나 토하고 시신처럼 가만히 누워 지내야만 했다.

  하루는 그가 불쑥 나타나서 애들 도화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애호박만큼 큰 복숭아 한 개가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 싸 대신 조그만 머슴애가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그런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으며

  <이건 또 자네의 바보짓인가? 도깨비 놀음인가>

하고 픽 웃었더니 그도 따라서 씩 웃으며

  <복숭아, 천도 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흥얼거리더니 휙 돌쳐서 나갔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97쪽. '비의' 중에서

 

말이 필요없는 친구 관계.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해방직후에 북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응향"지 사건에 구상도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이 "응향" 사건은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니, 뭐.

 

구상이 시인이라고 알고 있고, 교과서와 비슷한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 시는 '초토의 시'인데, 해방과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시이다.

 

작자에게 있어서도 시 속에 사상적 요소를 보다 많이 담는 이와 감각적 경험이 요소를 보다 많이 담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나는 앞쪽이라 하겠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자서'에서

 

헌책방에 들러서 구하게 된 책인데, 이 책을 이제는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된 시집이고, 오래 된 시지만, 이 시집에서는 오늘날 물신주의에 물든 우리들을 꼬집고 있는 시가 실려 있다.

 

어쩌면 물신주의는 인간이 함께 산 이래 계속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이루고 있는 내용 역시 성경에 나오는 모세 때 이야기니까.

 

수천년 동안 이 물신주의에 벗어나지 못한 인간사회의 모습. 지금. 우리.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로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과연 이런 사회가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것이다가 아니라 아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이런 물신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도 없는 사람들보다는 있는 사람들이 더 물신에 물들어 있다. 물들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편적인 양 말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그 옛날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니 모세의 말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외침.

 

사람을 사람으로 우선 생각하는, 그런 우리들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말하노니

새해 너희가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너희가 지금 우러러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를

먼저 몰아내야 한다.

 

너희가 너희 식탁에서 유해식품을 사라지게 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고장에서 매연을 없애려먼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집안에서 단란을 누리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형제나 이웃과 화목을 이루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어린 것들을 력사(轢死)에서 구해내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지아비와 아내의 정조를 지키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백주에 살인강도를 만나지 않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물에서 바다에서 떼죽음을 면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학원에서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병원에서 인술로 병을 고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법의 공정한 보호를 받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을 메우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서로 비정과 소외 속에서 벗어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저 6.25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그리고 너희가 영원이나 믿음이나 사랑과 같은

보이지 않는 힘과 삶의 보람들을 되받들어

마음의 평정 속에서 꿈과 일을 일치시키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한다.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말하노니

새해 너희가 밝고 떳떳한 삶을 이룩하려면

너희가 지금 우러러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를

먼저 몰아내야 한다.

 

구상 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6년 재판. 69쪽-71쪽

 

역시 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이 시는 지금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시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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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관계의 집으로 - 건축이 세상과 소통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하여
최우용 지음 / 궁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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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세상과 소통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하여'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건축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깝지만 몇 권 읽은 내용으로 생각해보면 건축은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합예술이라고 하기가 그렇다면 건축에는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해도 좋다. 따라서 "건축은 인문학이다"라는 말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건축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보다 '그 건축물을 왜 짓는가' 하는 물음이 먼저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님 자신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다.

 

건축이 예술이기 때문에 미적 취향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나 아닌 다른 대상을 나와 동등한 타자로 놓지 못하고, 단순한 미적 대상으로만 놓았을 때는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 때 건축은 왜 짓는가란 질문을 놓치고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머무르게 된다고 한다.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머물렀을 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한다.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천재적인 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로 인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에 변화를 겪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도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그가 바로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치중했지, "왜" 짓는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와는 반대로 "왜"에 강조점을 둔 디자이너(건축가)로 파파넥을 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축은 파파넥이 주장한 것처럼 사람들의 삶과 관련이 있는, 삶을 좀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건축이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건축물이 혼자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그래서 건축물은 사람들의 삶에 관계를 맺어주는 그런 역할, 단지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그런 관계의 존재기 되어야 한다는 주장.

 

우리가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이 책은 건축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건축에 대해서 느꼈던 점들을 진솔하게 풀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진솔함이 감동을 준다. 하여 이 책은 홀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건축과 자연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해준다.

 

책에서 주장하는 관계의 집이 책을 통해 사람들과 자연을 관계맺게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읽으면서 역시 건축은 인문학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해준 책. 그리고 건축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철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

 

마음이 편안해 졌다.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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